섬기는 생각
성경 말씀: 마태복음 20:26-28
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찬송: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유익한 생각>
사람들에게 친근한 <팡세(Pens es)>라는 책은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인 파스칼(1623~1662)이 <그리스도교의 변증론(辨證論)>을 쓰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고, 그 유작을 모아 1670년에 발간한 것입니다. <명상록(瞑想錄)>이라고도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를 변증하는 것이 <팡세>의 주 내용입니다.
그 안에 담긴 말들은 대부분 짧은 단상입니다. 그 중에 인간의 생각에 대한 짧은 구절은 사람들이 자주 인용합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것, 곧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을 으깨기 위하여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인간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우주가 인간을 으깬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으깨는 우주보다 인간은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또한 우주가 자기보다 더한 이점을 지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엄성은 생각에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양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채울 수 없는 시공간에 의하여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잘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도덕의 원리이다.
파스칼은 인간이 연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기에 고귀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생각을 잘하여야 한다는 도덕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파스칼이 보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단지 생각하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특성을 잘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살면서 괄목할 만한 문화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렇게 이루어 온 주력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터득하여야 할 것은 인간이 지금까지 생각하여 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살아 온 역사에서 많은 잘못을 또한 봅니다. 수많은 전쟁과 학살의 상처를 인간의 삶은 지닙니다. 그것 또한 인간의 생각에 의한 것입니다. 생각으로 서로를 해하는 삶을 지금도 삽니다.
그러므로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구별의 기준을 쉽게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런 기준 자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향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이념적으로 대치된 상황에서는 서로가 상반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학살이 일어난 것은 자신들의 생각이 좋거나 옳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이겨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을 구별하여 판단하려고 하기에 생긴 문제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힘을 누림으로 지배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힘으로 이기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곧 좋은 생각은 힘을 주는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생각은 '좋은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생각이 좋은 생각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good idea"하는 것은 이런 점을 잘 반영합니다.
일상적인 "good idea"는 유익한 생각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주어진 상황을 보다 나은 조건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생각을 말하니 그 상황에서 유익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창의적인 생각>
일상적인 상황에서 유익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데서 나아가 창의적인 생각도 말합니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창의적인 생각을 언제나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늘 생각하며 삽니다. 학생이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생각을 훈련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란 단지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도 같이 고려하려야 합니다. 생각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어떠한 문제에 부딪치더라도 문제를 해결하여 갈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생각의 모범이라고 하는 것은 노벨상이 주어지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생각으로 인간의 생각은 진전되어 온 것입니다.
매년 10월에 접어들어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됩니다. 그럴 때면 노벨상 체의 뜻보다 그로 이내 파생되는 영예에 떠 떠들썩합니다. 국가나 개인의 영예와 자존심을 깐 이야기만 나돕니다.
그런 영예나 자존심으로만 노벨상을 이야기하면 노벨상과는 더욱 멀어집니다. 노벨상이 주어지는 생각은 욕망의 표현이 아니라 공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욕망으로 이를 수 없는 의식의 지경을 넓히는 생각에 노벨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르는 생각에는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노벨상을 생각하는 의식의 바탕은 영광이지 봉사가 아닙니다. 영광으로 노벨상을 추구하는 한 노벨상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노벨상의 의식은 영광의 의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의식은 위로 올라가는, 곧 이기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의 지경이 확장되는 것은 창의적인 생각입니다. 창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사람의 의식이 미치지 못한 영역을 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쁜 쪽으로도 의식하지 못한 영역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천재적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쪽으로도 적용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좋은 면으로도 나쁜 면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알지 못하던 영역을 알게 하는 것이 모두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섬김의 생각>
창의적인 생각은 의식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의식의 지경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마치 땅, 바다, 혹은 우주를 탐험하는 것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가기에 사람들은 천재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창의적인 생각이 아닌 섬김의 생각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섬기는 것은 홀로의 의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홀로 지금 끗 생각하지 못한 영역으로 상상할 수 있지만 섬기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함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섬긴다고 하는 것은 함께의 삶에서 이야기됩니다. 예수님은 함께의 삶을 살려면 섬기는 생각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알아 가는 생각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생각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개인적으로 생각하며 사는데는 익숙하지만 함께 삶을 이루며 사는데는 익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홀로 자신의 일에만 열중합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생각이 자기만에 머물면 사는 것도 자기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삶은 문제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냥 그런 것이라고 하며 덤덤하게 지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신에 몰입되는 것을 죄 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죄는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뜻합니다. 죄를 그렇게 생각하면 죄로부터 구속은 고립으로부터 함께하게 되는 거입니다.
구속으로 함께하는 것은 섬김으로 보인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구속과 같이 이야기하신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속하신 것은 믿는 이들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의 삶은 함께의 삶입니다.
창의적인 생각도 하지만 섬기는 생각도 하여야 합니다. 함께의 삶은 섬김의 내용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즉 함께의 삶은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주체는 섬김과 반대입니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사는 한 함께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성공의 삶은 사더라도 구원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으로 구속된 삶은 구원의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남보다 나으려는 생각을 본능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기는 생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섬기는 생각을 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에서 섬기는 생각이 나옵니다.
저희로 아버지를 섬기는 기도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