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관들은 홍등가에 갔을 때 어느나라 외교관이라고 소개합니까?.
지난 85년 9월로 기억이 된다. 내가 요르단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한 후, 주독대사관 참사관으로 다시 전임되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유럽순방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Bonn 에 있는 주독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말이다
, 본의 옛 시청(Altes Rathaus)
그런데 주독대사관에는 지금도 기억나는 것 중에서 다음과 같은 2-3 가지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공무원으로서 이를 꼭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 중의 첫 번째가 과거 대사관 역사 때문에 생겨났는지는 몰라도, 도박의 유혹이 많으니, Roulette 나 Poker를 포함하여 노름에는 전혀 손을 대지 말라는 엄명이었다. 그 이유인 즉, 61년 군사혁명이 나기 전, U 모 서기관께서 영사 업무를 하면서, 영사 수입금(비자 발급 시 징수하던 수수료라든지 여권에 기재된 사항을 변경해주면서 받던 수수료)으로 들어온 돈을 수도 Bonn 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근 온천관광지에 가서 이곳에 있는 Roulette 에다가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금횡령을 한 것이다. 월급에서는 돈을 쓸 수가 없을 만큼 적을 때였다. 군사혁명이 나고 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한참 정치적인 이슈가 되어 시끄러웠다. 이 U 서기관은 독일로 전임되기 전, 한일 협정체결에 큰 기여를 하였고 박 대통령 및 JP와도 각별한 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추후에는 국내 유명작가의 신문연제를 통하여 그 스케일이나 배포 등 때문에 더욱 유명하여 지고 정치인으로서도 어느 정도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자 그 후, 당시 공관 장이던 K 모 대사께서는 이 Roulette 클럽에다가 편지를 내어 「대한민국의 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요청을 하였다고 하여, 대사관 직원들은 물론 우리 국민들도 출입을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마는 그때는 상황이 그랬다. 그래서 이곳에 동양사람이 출입하려고 하면, 입구에서 백발백중 여권을 보자고 하고 “그 이유로서 이와 같은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들어가려던 동양사람이 한국사람이면 절대 들여 보내지 않았다. 독일사람들의 충직함이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멀리 관광 온 분들은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이런 상황에 접하면, 먼저 방방 뛰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U 영사뿐만 아니라 K 대사도 유명한 일화를 당시의 서독에 남겨 놓고 있었을 때였다. 60년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금기는 “한국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일본 사람인체는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K 대사 후임으로서 골프를 매우 좋아하였던 C 대사라는 분이 있었다. 하루는 대사관 직원들과 휴일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은 문세광이가 8.15 경축식장에서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74년8월15일이었다. 극동의 이 작은 나라는 이 사건 때문에 온통 슬픔에 싸여 있었고 한일간에는 긴장이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이런 날은 골프를 쳐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한국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온 전보를 우선 대사관에서 체크해 보았더니, 처음에는 병원으로 실려 가셨지마는 육 여사께서 괜찮으시다는 전보가 해외 공관에 내전되었다. 그래서 대사를 포함하여 대사관 직원들은 천만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퀠른(Koeln) 근교의 골프장으로 운동을 나갔다.
View over downtown Bonn(본 시내 전경)
그런데 이 C 대사의 말 버릇 중에 So What? 이라는 말 버릇이 있었다. 우리 말로는 “그래 어쨌다는 거야?” 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리고 공을 처서 홀에 안 들어 가면, C 대사는 버터로 Green 을 치는 듯한 행동을 잘 하였다. 그런데 이날도 9번 홀에서 공을 쳤는데 공이 홀에 안 들어가자, 안타깝다는 듯 예의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 물론 Golfer로서 Green 을 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보일 뿐인데, 멀리서도 이 행동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18번 홀에서는 이 클럽의 집행위원이던 B씨가 막 골프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하도 들리는 말 소리가 독일 말이 아니고 이상하여, 이를 처다 본 것이다. 골프를 끝낸 B 집행위원은 결국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일본 대사 이십니까? (Are you Japanese Ambassador?)”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와 골프를 치던 사람들로부터 9번 홀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대사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사람들은 골프장에서 잘 안 보였을 때였다. 골프장에서는 “김밥을 싸 가지고 다니며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 대는 동양사람들” (최소한 독일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음)은 일본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C 대사의 답변은 이 집행위원의 마음에는 전혀 들지 않았다. 그것이 So What 이었다.
그리고 이 집행위원은 동양사람들한테는 대단한 우월감을 느끼고 항시 코를 높이 세우고 있었다. 전형적인 당시의 독일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다음주 일요일 이 골프장에 나온 일본대사는 결국 입장이 거절되었고,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일본 대사는 C 대사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모든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지로부터 올라온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를 들고 청와대에 올라온 S 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물론 당시 국모처럼 추앙을 받던 육영수 여사는 결국 서거하셨고, 박 대통령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을 때였다. 그래서 이 C 대사는 “육 여사가 돌아가신 날 골프를 쳤고 일본대사처럼 행동하였다는 이유”로 곧바로 소환되었고, 귀국하자마자 해직되었다.
그러나 또 있다. 이는 일본사람과 오히려 가깝게 지냈던 일인데 물론 보통 외교관들이 하던 일중의 하나였다. 그것을 따져 본다면 금기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같은 금기를 꼭 극복해야 한다. 그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은 60년대보다 20여 년 뒤의 일이다. 내가 참사관으로 Bonn에 다시 갔을 때이니까, 85년으로서 9월로 기억된다. 주독 일본대사관에 N 참사관이란 분이 있었다. 이 사람은 추후에 대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다른 임지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소식을 멀리서나마 듣고, 옷깃을 여민 적이 있는 머리 회전이 빠른 분이었다. 동경 법대를 나온 수재로서 인품도 아주 훌륭한 분이었다. 자신은 조상이 조선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고 하였으나, 자기도 출세해야 하니, 이는 자기와 나만 알자고 하여, 나는 일체를 비밀에 붙어두었던 분이었다.
Godesburg Fortress.(고데스베르크 성)
이분이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과거에 일본에 있었다는 미국대사관과 영국대사관의 참사관 들과 함께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처음에는 문화가 다르고 분위기도 서먹서먹하여, 이를 녹이려고 외교관들이 대부분 좋아하는 Y담으로 시작을 하였다.
갑자기 이 N 참사관이 나에게 물었다. “한국 외교관들은「홍 등」가에 갔을 때,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합니까?” 「홍 등」가란 “창고” 라고 불리던 당시 Bonn 근교의 창녀 촌을 일컬었다. 집 입구가 창고와 비슷하다고 하여 창고라는 별명을 붙었고, 이때는 이미 “에이즈”라는 말도 널리 퍼져있을 때였다. 그래서 서울에서부터 오는 손님들도 과거와는 달리 이런 집에는 잘 안 갔고, 간다고 해 봐야 관광목적이 주였다. 과거에는 “태극기를 꽂아야 된다”는 말들을 자주하였고 “태극기를 꽂아야만 백인들과 이야기할 때, 자신감이 붙는다” 라는 이야기들을 자주 하였다. 그러나 ‘에이즈’라는 말이 널리 퍼지자, 이 창고에서도 동양에서 온 관광객들은 소위 실속을 차리러 오는 것이 아니고, 관광여행 차 온다고 했다. 하여 각자 자기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가씨들은 우리가 2-3명씩 짝을 지어 지나가면 Are you sightseeing? (관광여행 오셨군요?) 이라고 놀려 대었다. 그러던 때였다.
나는 N 참사관의 의중을 몰라 되물었다. “일본사람들은 이 때 무어라고 합니까?”
“그야 물론 한국사람들이지요” 해서 나는 N 참사관의 말 뜻을 알아 차리고 바로 답했다.
“아하 그렇군요. 그래서 창고에 있는 아가씨들은 그곳에 그렇게 많이 오는 한국사람들의 물건이 일본사람들의 물건보다 월등히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는군요!” 하고는 나는 껄껄 웃으며 이어 갔다.
“그리고 요즈음엔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들보다 더 잘 살구요. 그곳에 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한국 사람들이 월등히 많으니까요!”
그러자 일본에서 근무한바 있었다는 미국 및 영국참사관은 무슨 뜻 인지를 알아 차리고 배를 잡고 웃었다. 정말이지 우리들은 오래간만에 함께 웃었다.
그러자 일본참사관이 말을 받았다. “그러고요. 그리고 요즈음엔 이런 곳에 오는 일본사람들의 “기마이” 가, 과거 숫자는 많았다고 하지만 째째 하였던 한국사람들보다 훨씬 좋아서 인기는 높아졌답니다.”
해서 우리는 또 한 바탕 웃었다. 그만큼 당시 해외에서는 한일 외교관들이 서로 상대방을 가깝게 느꼈다. 또한 일본 외교관들은 한국사람들보다 남을 즐겁게 해준다는 측면에서는 훨씬 앞서있었다. 다른 나라 외교관들과는 달랐다. 정치적인 것이 제외되니까, 서로 도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눈 빛만 마주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한국은 최소한 유럽에서는 그리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말로 문화가 비슷하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녔다. 그러자 영국참사관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얼마 만에야 낳나요? 물론 10개월이겠죠! 일본에서는 어떤가요?” 그러자 일본참사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와 같습니다. 산모의 생리일로 따지니까요!”
그러자 영국참사관이 이어갔다. “서양에서도 산모의 생리일을 중심으로 따진다는 것은 같은데, 우리들은 9개월이지요! 우리 영국에서는 생리가 끝난 그 다음달부터 처서 만 9개월에 아이를 낳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생리가 끝난 그날부터 치니까 10 개월이 되고요. 동양에서 나이를 따질 때, 만으로 치느냐 동양 나이로 치느냐와 비슷하지요” 영국참사관은 자못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진중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이때 갑자기 미국참사관이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끼어 들었다.
“아하. 임신 기간이 길어야 소형화를 잘 한다 이런 이야기로군요. 우리보다 임신기간이 1개월이나 긴데도, 어떻게 Sony와 같은 축소형 라디오가 잘 나오나요?” 그래서 우리는 또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는 생각하였다. “역시 우리는 이웃사람들이로구나. 같이 잘 살아야 할 것 같다. 자아를 버리고 우리 모두의 앞날을 위해서 말이다. 피부색이 같고 얼굴 모양이 비슷하며, 무엇보다도 문화가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곳 유럽에서 EC가 강화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 세상은 “국경 없는 세상”이 올 날도 있으리라!” 나는 맑아오는 푸른 하늘을 처다 보았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끝.
<권영민/현 순천향 대학 초빙교수/전 한-독 미디어 대학원대학 부총장/주(駐)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대사, 애틀랜타 총영사, 제주평화연구원장 대리 역임/저서: "자네 출세했네" "베를린 맑은 하늘에 그림을 그리자" "Regional Community-Building in East Asia"(英書-동아 협력체)>
PS: 재독 동포 여러분,
이미 예고해 드린대로 안녕히 계세요. 서울 오시면 연락하시구요. 감사하였습니다.
권영민 배상
첫댓글 지금까지 감사했읍니다 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