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주성지순례예식서
1. 찬미가
○ 원시장 베드로님 일칠구삼년
충청도 홍주에서 첫순교하며
교우들 유명무명 백육십일명
천주교 신앙으로 순교했다네
● 황일광 원베드로 방방지거의
빛나는 순교신앙 주춧돌놓자
교우들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천주교 구원진리 전파했다네
○ 큰칼날 주리곤장 불단근질도
굳건한 천주신앙 끊지못했고
겨울날 알몸에다 찬물퍼대도
베드로 의연하게 순교했다네
● 성부와 천주성자 칠은성령님
순교자 인내고덕 굽어보시고
신자들 순교신앙 깊이받아서
참신앙 실천하고 펴게하소서. ◎ 아멘.
2. 성지안내
1) 1791년 진산사건의 여파로 원시장 베드로가 1793년 1월 충청도 땅에서는 처음으로 홍성에서 순교한 이후 약 80년 동안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이곳 홍주에서 순교하였다. 홍주성지는 기록상 212명의 순교자가 있고, 무명 순교자까지 거의 700여명이 순교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황새바위성지 다음으로 순교자 이름이 많이 알려진 순교성지다. 대표적인 순교자는 빙살(氷殺)로 순교하신 원시장 베드로, 방윤석 신부님의 5대조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이며 이 분들은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절차가 진행 중이다.
2) 홍주성지는 예비자들의 모범 성지이다. 홍주순교 성지는 예비신자들이 모범적으로 열심히 수계하며 순교했다는 특징이 있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3년간 예비자로서 수계하며 복음을 선포한 원시장 베드로는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로 1993년에 순교했다. 그리고 장장 22년간이라는 예비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기 직전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물을 붓고 자신에게 세례를 준 이여삼 바오로도 예비자들의 모범이다.
3) 홍주성지는 한국 천주교 순교사에서 중요한 성지이다. 서울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은 이존창이 예산 여사울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내포고을에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내포의 많은 신자들이 사방으로 피신하자 전국에 복음이 퍼지게 된다. 이렇게 홍주지역 출신 순교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역할을 한다. 그래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는 1861년 전국을 8개 사목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이중 4개 지역이 충청도에 둔다. 그 중 두 사목구가 다블뤼 주교가 관할한 홍주 인근의 상부내포의 ‘성모성탄사목구’와 신리 인근 황무실 중심의 하부내포의 ‘성모왕고(往顧 :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있었다. 이는 홍주 지역에 신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홍주는 한국 천주교 신앙의 중심인 내포의 열개 고을을 관할하던 정3품 관찰사의 주둔지였다. 따라서 내포의 신자들은 체포되어 이곳 홍주목에 압송되어 신앙을 증거하다 대부분 홍주옥에서 순교하게 된다. 홍주옥에서 교수형이나 옥사로 113명이 순교하였다.
3. 홍주 대표 순교자 약전
1)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
원(元)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경, 즉 60세가 가까워졌을 때 사촌 형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원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 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본래 원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시장과 원시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끌려오자마자 원시장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치도곤(곤장 일종) 70대를 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원 베드로는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와중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 베드로는 그 교우로부터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로부터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원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원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갖다 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하였다. 때는 음력으로 섣달 열이렛날이었다.
원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2) 방 프란치스코(?-1799년)
방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나 절도사를 수행하는 막료(幕僚)라고도 하는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방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정산필 베드로 회장과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셋은 동지(同志)라는 하급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교리를 실천하는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방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방 프란치스코도 다음해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 방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두 동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스스로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거룩한 기쁨을 같이 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순교일은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이었다.
3) 박취득 라우렌시오(?-1799년)
충청도 홍주의 면천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님을 중국에서 영입한 지황(사바, ?-1795)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박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주 그들을 옥으로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라고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해미와 홍주 관아로 이송되어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용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므로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다.
박 라우렌시오는 이때부터 원시보 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자, 박 라우렌시오는 천주교 교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화가 난 관장이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후 그는 다시 몇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고는 옥에서 여러 달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새 관장이 부임한 뒤 다시 문초를 받았으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에서도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였고, 갖가지 형벌을 인내로 참아냈다. 그러자 홍주 영장은 화가 나서 “다리를 부러뜨리고, 죽도록 매를 치라.”고 명한 뒤 옥에 가두었다. 이어 영장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그때 감사는 “그놈의 다리를 치되, 열네 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 버리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다.
이후 박 라우렌시오는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영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또 옷이 벗겨진 채로 진흙 구덩이에 갇혀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박 라우렌시오는 모두 1천 4백 대 이상이나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뒤에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가자,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들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제야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였다.
4) 황일광 시몬(1757-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백정이라는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기 위해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1792년 무렵, 황 시몬은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그곳에 은거하던 여사울 출신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황 시몬의 백정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대우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2월 황 시몬은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용 요한의 형인 동시에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회장이 사는 이웃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정약종에게 세례를 받은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와 충청도 보령 출신 김한빈 베드로((1764-1801)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이제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황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야고보(1752-1801)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일광 시몬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이후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냈을 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를 ‘성스러운 종교’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그 결과 황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조정에서는 이와 동시에 “황일광을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황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었다. 이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본래의 명랑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아내와 아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고 따라오자, 그들로 인해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홍주에 도착하는 즉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4. 사적지(史蹟址)
1)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 한 장소 3곳
조선 후기 홍주에는 목사(牧使)가 진영장(鎭營將)을 겸할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문관인 목사와 함께 무관인 진영장이 별도로 파견되었다. 홍주목사가 일을 보던 동헌은 ‘근민당(近民堂)’이라 하였고, 홍주진영장이 일을 보던 동헌은 ‘경사당’이라 하였다.
천주교 박해 초기와 중기의 순교자들은 현재 홍성군청 뒤뜰에 있는 ①‘근민당(近民堂)’과 현재 조양문 서쪽 한국통신 자리로 추정되는 ②‘경사당’ 앞에서 신앙을 증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박해 후기인 병인박해 때는 박해가 극성을 부리는데 순교자 대부분이 도망친 범죄자들을 추포하던 별포군의 관청인 토포청에서 파견된 포교와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고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홍주 진영장을 겸하던 토포사는 ‘경사당’ 앞에서 악랄하게 교우들에게 숨어 있는 다른 교우들을 댈 것과 신앙을 버리라는 취조와 협박과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교우들은 용감하게 천주교 신앙 증거하였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또 다른 장소는 ③‘관청 뜰 나무 밑’이다.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교우들은 관청 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으면서 취조와 고문을 받다 병신이 되거나 제정신이 아닌 배교자들의 귀가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맞아서, 굶어서, 병들어서, 목 졸려서 생매장 당하여, 칼에 맞아 누구누구가 죽었다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무 밑에 묶여 있던 교우들은 갈등과 유혹에 시달렸을 것이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다면 악랄한 토포사에게 문초와 고문을 받다 죽을 것이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행인들이든 포졸들이든 그 누가 나무 밑에 묶여 있는 교우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였다. 오히려 기도하며 하느님의 평화와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였다.
③‘홍성 저자거리’도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장소이다. 잡혀 온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거나 망신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천주교 신자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홍성 예비군중대본부가 예전에 있던 저자거리에서 조리를 돌렸다. 옷을 벗기거나 찢고 머리를 산발하고 씻지 못해 더럽고 냄새나고 고문을 받아 절룩거리거나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을 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자들은 이 골목 저 골목 뺑뺑이를 돌리며 구경거리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친척도 있었고, 잘 알고 지내던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망신과 창피를 영광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참여 하는 것으로 삼았다.
2) 홍주 순교지3곳
먼저 ①‘홍주옥’이다. 구 검찰지청 및 법원지원 자리로 교수형으로 100명, 옥사로 13명 등 113이 순교한 옥이다. 2009년 도시공원 정비사업으로 현재 공터로 있다. 홍주 첫 순교자인 원시장 베드로는 홍주옥에서 맺를 맞고도 죽지 않자 섣달 엄동설한에 옷 벗김과 찬물 끼얹음을 당하고 성 밖에 버려져 얼어 죽었다. 이후 80여 년간 잡혀 온 수많은 교우들이 홍주옥에서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목 졸려 죽었다.
그리고 ②‘생매장터’다. 병인박해 때 내포지역 신자들을 일거에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이 어려워지자 해미에서처럼 홍주에서도 성 밖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쓰레기 묻듯이 땅속에 쳐 넣고 묻어버렸다.
홍주의 ③‘참수터’는 홍주성 북문 밖 월계천과 소향천이 만나는 북문교 아래 100m지점에 있다. 죄인을 참수할 때는 피가 흐르게 되므로 주로 서울 한강 새남터나 공주 황새바위 곁 제민천, 전주 초록바위에서처럼 강변이나 하천변을 처형지로 삼는다. 효수경중(梟首警衆) 기간이 지나면 시신이 홍수에 떠내려가 가도록 하였다.
5. 성지순례코스
① 홍주목사동헌(군청 뒤뜰 근민당近民堂/安懷堂)
② 홍주옥(군청 앞 주차장 공터)
③ 홍주성역사관(군청 서편)
④ 홍주진영장동헌(경사당/KT자리)
⑤ 저자거리(옛 예비군중대본부인근)
⑥ 참수터(월계천과 소향천이 만나는 북문교 아래 100m지점)
⑦ 생매장터(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근처)
6. 대사를 얻기 위한 기도
1) 대사를 청하는 기도
+ 착하시고 어지신 예수님, 굽어보소서.
◎ 주님의 어전에 부복하여 열심히 기도하며
간구하오니,
신망애 삼덕의 뜨거운 정과
범한 죄를 뉘우치는 참다운 통회와
아울러 행실을 고치려는 굳은 뜻을
저희 마음속에 심어 주소서.
+ 착하신 예수님,
◎ 일찍이 주님을 대신하여,
“그들이 내 손발에 구멍을 내고
내 뼈를 전부 세어 보았도다”한
예언자 다윗의 말을 생각하고,
깊은 감동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다섯 상처를 바라보며 묵상하나이다.
2)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3) 사도신경
+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머리를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7. 강복
+ 주님,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 아멘.
+ 주님을 찬미합시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