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승하선교사를 파송한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1901년 건축. 현 내리교회)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해외 선교사로 파송 받고, 교회를 설립한 것은 1903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교회“였다. 이는 물론 한인교포로 시작되었지만 해외로 전도인 목회자를 파송하고 교회를 설립하며 현지교회와 협력한 복음을 전도한 최초의 역사적 사실이다. 하와이에 첫 목회자를 파송한 것은 공식적으로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첫 이민 사업에서 기인한다.
1. 굶주림과 헐벗은 고난의 때 첫 집단이민단, 낙원으로?
한국인의 첫 집단이민사업은 1902년에 시작되었다. 국내적인 요인으로는 1901년 극심한 흉년으로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고난을 격던 때였다. 이때 주한 미국공사알렌(H.N. Allen)은 1901년 휴가 차 하와이를 방문하는 동안 농장경영주들과 만났고 노동자 수급의 긴급성 등을 협의하였으며, 경영주들로부터 촉탁 받아 내한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이민문제를 제시했다.
고종황제는 한국인들의 이민은 예기치도 못하고 생소한 일이였지만 민생고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승낙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하와이 농장경영주 협회에서는 1902년 5월 9일에 제물포에 거주하는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의 데쉴러(D.W. Deshler)를 이민모집 요원으로 선정하였다. 데쉴러는 알렌과 함께 제물포지역 선교사인 죤스(H.G. Jones, 趙元時)의 협력으로 한국인 이민단을 모집하였다. 데쉴러는 동서개발회사와 데쉴러 은행을 설립하여 이민자들을 모집하고여 데려가며 경비는 데쉴러 은행에서 맡았고, 인천 제물포교회(내리)와 마당을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동서개발회사는 죤스 선교사에게 부탁해 내리교회 청년회원들을 고용하여 전국에 지사를 세우고 하와이로 이민 갈 ㅅ람들을 모집하였다. 한국인 총책임자는 장경화, 부책임자는 최병헌이었고, 내리교회 권사들이었다. 데쉴러의 통역사로 안정수 권사, 정인수 권사로 회사직책은 서기(Clerk)였다.(이상 참조-안형주: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서울 푸른역사 2013. p32-47)
2. “수민원” 설치하고 이민단 모집공고
고종황제는 하와이 이민사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1902년 8월 20일에 수민원(綬民院, 외무부 여권과)을 설치하고 민영환(閔泳煥)을 총대로 임명하였으며, 서병호(徐丙浩)를 국장으로 임명하였다. 서병호는 한국기독교 최초 유아세례인 이였다. 수민원은 서울, 인천, 부산, 원산 등지에 개발회사를 두고 이민자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이에 신문에 광고를 내며 거리에 국문으로 벽보를 부쳐 광고하였다. 이때 내걸은 일곱가지 공고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와이 제도 각 섬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독신이나 직계 가족을 동반해 주거를 원하는 사람은 편리하게 주선하노라. 둘째, 기후조건은 적당히 온화하여 심한 추위나 더위가 없으므로 개인의 기질에 알맞고 쉬이 적응되리라 믿는다. 셋째, 학교설립이 방대다면하여 모든 섬마다 학교가 이미 설립되었고 영문으로 학생을 교수하며 학비는 일체 없다. 넷째, 농부들은 그들을 위해 해마다 절기에 따라 직업을 얻기 쉬운데다가 다만 육체가 건강하고 품행이 방정한 사람이면 장기간의 직장을 구하기 쉬우며 하와이 법률의 제반혜택을 받노라. 다섯째, 보수는 미국 달러 화폐로 월말 15달러씩이며 경우에 따라서 후한 상여금이 있고 매일 열 시간 일하며 일요일엔 휴무이다. 여섯째, 노동자의 숙박비와 병원 치료비는 일체 경영주가 부담하노라. 일곱째, 대한제국 국내에 이 공시를 널리 광고할 권한을 대한제국 황제께서 허가하노라. |
이러한 공고사항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통하여 소개되었으므로 초기 이민자들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았다.
*하와이 이주 모집 한글과 영문고지(1903.8.6.)
3. 첫 이민자들 노예 같은 생활, 나라까지 잃어-교회개척, 신앙으로 극복
*첫 하와이 이민단을 수송한 겔릭(Gaelic)호와 인천항
이렇게 모집하여 첫 출발한 이민자 수는 1902년 12월 22일 겔릭호로 제물포 항을 출발한 121명이었다. 이듬해 1903년에는 1,133명, 1904년 3,434명, 1905년 7월까지 7,226명이 이민하였고, 이민사업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이후 중단되었다.
초기 이민자 중에는 죤스(H.G. Jones) 선교사가 담당했던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 교인들이 많았다. 이때 첫 이민단과 함께 파송받은 분이 전도인 홍승하(洪承河) 선교사였고, 하와이 감리교 감라사 피어슨(G.L. Pearson)께 도움의 편지도 보냈다. 제물포교회에서 목회하던 안정수 권사도 이민단 통역인으로 함께하였다. 2차 이민단에는 정동교회의 정동교회 현순(玄揗)목사가 통역인으로 참여하는 등 감리교 전도사(당시, 권사)로 활동하던 분들로 1905년에는 “하와이 군도 감리교 선교연회“(12월)가 조직되었다. 해밀톤 감독(Bishop J.W. Hamilton)의 사회로 열렸고, 하와이 군도지방 감리사는 워드만(J.W. Wadman) 목사로 당시 선교연회에서 파송받은 사역자와 교회는 다음과 같다.
안정수(통역관, Kahulch), 현순(玄揗,통역관,Lihue & Hanamaulu), 홍치범(洪致範, 남산현교회, 스프렉클스빌 & 와일루아), 임정수(林正洙,Kahuku & Waialua) 민찬호(閔燦鎬,배재학당,호놀루루) 이경직(李景稙, Eleele & Koloa), 김이제(金利濟, Waipahu), 신판석(申判錫, Hilo & Olaa), 최진태(崔鎭泰,Kohala), 윤병구(尹炳求, 한인기독보 주필), 송헌주, 이지성, 장경화(이민화사 총무), 문또라 등
*전도사역자 부족으로 파송받지 못한 7개 교회-라히이나, 카아나팔리, 키아네아, 케알리아, 마카왈리, 케카하, 코나, 호노카, 오아칼라, 하칼라우 등 (후에 미감리교 연회로 편입됨)
이분들은 하와이 교회개척뿐아니라 교포사회의 중심 지도자들로 민족독립운동에도 앞장 섯고, 귀국하여서도 활발히 전도활동하던 분들이며, 민족구국 독립운동, 교육운동 등에도 열렬히 활동한 우국지사들이였다.

*하와이 부인전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