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5월로 접어드니 기차놀이 하듯 빡빡한 일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것은 딱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저마다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들이다. 소소한 것들은 빼더라도 어머니 수술, 큰 딸의 전국 컬링대회, 막내 지우의 일본선교여행, 아이들 치아교정차 서울 방문, 권정생 선생님 16주기 추모모임, 의성장애인부모회 부모교육, 향토사연구회 문화재 답사, 교회창립 5주년 기념주일 행사, 동문 독서모임, 경북 4개 지방 체육대회 준비를 위한 선교부 총무 모임, 집사님네 마늘작업 돕기, 이틀간 이어진 웨슬리회심기념 지방 연합성회, 향토사연구회와 교육청 간담회, 막내 지우의 향토순례 함께하기 등... 이 모든 걸 준비하는 시간을 더하면 정말이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더욱 기막힌 사실은 6월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부디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몸도 맘도 지쳐갈 때 즈음 하나님은 나에게 두 번에 걸쳐 숨을 고르게 하셨다. 그 은총의 순간 중 하나는 웨슬리회심기념 지방 연합성회 강사로 모신 송대선 목사님의 귀한 말씀을 통해, 다른 하나는 김기석 목사님께서 보내신 책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를 통해 찾아왔다.
2.
지방 선교부 총무를 감당하며 맞이한 첫 번째 행사인 웨슬리회심기념 지방 연합성회에 모실 강사를 떠올렸을 때 주저 없이 송대선 목사님을 떠올렸다. 송대선 목사님과의 인연은 감신대 학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부 시절 대학원 건물 뒤편(도서관 건물 옆)에서 몇몇이 모여 태극권 비슷한 동작을 하며 수련을 하곤 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묘한 끌림이 있어 언젠가 그들을 찾아가 함께 배우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알고 보니 태극권 비슷한 동작은 다름 아닌 민족 전통무예인 기천(氣天)이었다. 기천은 무예이면서 춤이기도 하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이 모임을 이끌고 있던 선배의 이름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어렴풋이 ‘지성철’로 기억하고 있다. 연락이 끊긴 지 25년이 지났으니 이름이 가물거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 싶다. 가물거리는 기억에 의지해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아하!’ 내 기억이 맞았다! 지성철 선배는 감신대를 졸업한 후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기천을 꾸준히 갈고 닦아 현재 기천문예무단 단장으로, DMZ평화 풍류예술단 대표로, 고구려풍류예술원 대표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심을 확인했다. 지성철 선배는 나를 ‘예수살기’라는 모임으로 이끌었는데, 그 모임의 실무를 맡고 계시던 일꾼이 바로 송대선 목사님이었다. 그곳에서 이오(二吾) 이현주 목사님에게서 ‘맹자(孟子)’를, 당시 강남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시던 정희수 감독님으로부터 ‘불교(佛敎)’에 대해, 당시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교육학을 가르치셨던, 그러나 후에 베트남 선교 중 그곳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신 고(故) 김영호 교수님으로부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해 배웠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예수살기 공부모임에 길게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시간은 신학생 1학년 시절 신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경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송대선 목사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흐릿하게만 지니고 있다가 목회현장에서 다시금 불을 붙이게 되었고, 의성에 내려와서는 송대선 목사님께서 집필하신 사순절 묵상집과 대림절 묵상집을 통해 교우들과 은혜를 나누곤 했다.
금번 웨슬리회심기념 연합성회에서 송대선 목사님은 차분히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은 말씀들을 풀어내셨다. 신앙조차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닌 우리들에게 그런 부담 훌훌 털고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시고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갖자고 위로하셨다. 그리고 이젠 제발 그분의 음성을 가만히 들어보라 하셨다. 듣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아니던가. 둘째날에는 일상은 물론 신앙의 길에서조차 거래적인 삶의 패턴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비거래적인 삶을 살아보자 촉구하셨다. 말씀이 이어지며 나의 감춰진 시커먼 욕망들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런 나의 삶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며 ‘난 참 멀리 와있구나’ 하는 회한(悔恨)이 밀려왔다. 뭔가에 쫓기듯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말씀은 나를 잠시 멈추어 세워놓고는 찬찬히 나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이것이 분주함에 파묻혀 살아가던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은총의 순간이다.
3.
김기석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따끈따끈한 책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는 웨슬리회심기념 지방 연합성회 이후 차분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을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이 책은 목사님께서 서문에서 밝혔듯이, 시대를 고민하며 쓰신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저자를 설명하는 글에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은 시대를 바라보며 쓴 칼럼 모음으로, “우리가 써가는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지향이 빼곡히 담겨 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내 삶의 자리로 맞아들이는 환대는 이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주체들의 소명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일상에 깃든 하늘의 뜻을 내 삶의 자리에서 고민하게 한다.
신앙의 고갱이라 한다면 두 가지가 아닐까? 하나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무한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무는 것, 또 하나는 그 속(하나님 안에 머무름)에서 얻은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나’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이웃들에게 흘려보내는 환대의 삶...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생각을 ‘머무름’과 ‘함께함’이라는 두 그릇에 담아낸 것은 참 의미 있지 싶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머무름과 함께함은 서로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머문다는 것은 마음을 내어 줄 의지처가 생겼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다는 것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시선이 머무는 것이고, 나의 길을 멈추어 그 시간, 그 공간, 그 이에게 오롯이 머문다는 것이다. 머무름과 함께함의 대상은 둘이 아니다. 성육신은 인간에게 머무시고자 했던,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었다. 이 사랑의 방식은 모든 관계에도 유효하다. 머무름 없이, 함께함 없이 사랑은 불가능하다. 서로 곁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에게 머무르기를, 그와 함께하기를 꺼리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면 그와 머물고 싶고, 그와 함께하고 싶다. 이성선 시인의 <다리>에서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제 앞길만 바라보고 휑하니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일컬어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자신 주변에 있는 이들을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효용을 따져 대상화하기 쉬운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사는 세상은 삭막하다. 그러나 가다가 서고 먼 산도 바라보고 그러다 또 걷고, 그러다 또 쉬고... 쉬엄쉬엄 걸으며 주변을 살피며 걷는 사람은 다리의 고마움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고, 주변을 돌아보아 눈길을 줄 줄 아는 사람이다. 다리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러 있던 이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느릿느릿 걸으며 그의 시선에 담아낸 풍경은 아마도 그의 삶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해주었으리라. 그런 이들이 사는 세상은 따뜻하다.
우리의 시선을 더 근원적이고 깊은 차원으로 향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품이 넓은 사람이 되고 더 멀리 보는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깊은 신앙의 사람일수록 옹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닮아 누구든 받아들일 줄 아는 환대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책을 꿰고 있는 줄은 ‘환대’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적어도 시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마땅히 어떠해야 할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내 삶의 자리로 맞아들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 동시에 정의이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 탐욕에 이끌리던 삶을 나눔과 절제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 고립의 세상에서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주체들의 주어진 소명이다. (서문)
머무름과 함께함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머물고 싶어하고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 함께 해야 할 이는 지금 이 순간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셨다. 내가 지금 예수의 길을 잘 걷고 있는가? 그것을 알려면 난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가슴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다. 세상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없다. 온 세상이 그분의 몸이기 때문이다. (53)
저자는 여러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 됨에 대하여 ‘누군가의 품이 되어주는 것’이라 말해왔다. 이것만큼 명징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있을까? 본회퍼 목사님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타자를 위한 존재’ 이는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사람을 규정하는 정의이기도 하다. 우린 이렇듯 누군가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을까?
한희철 목사님의 <환대>라는 시가 귓가에 맴돈다.
누군가 상처 입은 모습으로 돌아왔다면
가슴을 열고 따뜻하게 맞으시라
다친 날갯죽지로 둥지에 돌아온 것은
그의 최선이었을 터이니
- 한희철, <환대>
우린 이미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대의 경험이 있다. 누가복음 15장은 우리를 환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무조건 받아들인다. 다른 이유가 없다. 아들이기 때문이다.
웨슬리회심기념 지방 연합성회 첫째날 말씀에서 송대선 목사님은 예수의 세례 장면을 묵상하며 깊은 깨달음을 주셨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사탄에게 시험을 받기도 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런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다(마가 1:9-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마가 1:11)
아버지 요셉의 목수일을 도와 평범하게 살아오던 이가 이제 하늘의 뜻에 감응하여 주의 뜻대로 살기 위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의 머리 위에 내려오며 하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좋아한다” 그때는 사탄의 시험을 멋지게 이겨내기도 전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본격적으로 하늘의 뜻을 펼치기도 전이었다. 그냥 그뿐인 것이다. 아들이 될만한 자격을 논하지도 않고 그저 그의 모습 그대로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신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길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면 아버지를 닮게 된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행하려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우리를 환대하셨듯이, 자녀됨의 자격을 논하지 않고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들이셨듯이 우리도 누군가를 환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삶인 것이다.
저자가 온몸으로 느끼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엔 온갖 불안과 불합리함이 만연되어 있다. 그만큼 설 자리가 줄어들고 삶이 팍팍해지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마저 삶이 위축되고 무기력하고 불안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때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를 내 삶의 일부로 맞아들이는 것은 저자가 이야기했듯 어둠 속 작은 촛불을 켜는 일이기도 하다.
분주함 가운데 만난 두 가지 은총.. 송대선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김기석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과 나는 물론이고 내 곁에 있는 이들의 관계를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너무도 고마운 은총의 순간들이었다. 뭔가에 쫓기듯 살던 내게 주님은 억지로라도 잠시 멈춰 세우셔서 진정으로 무얼 위해 살고 있는지 묻게 하신다. 참 고마운 일이다.
[웹진 평:상 80호] 책,삶,목회 | 김기석의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 (creatorlin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