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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항목명 | 금고문논쟁 |
한자항목명 | 今古文論爭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요약>
유교 경전(經典)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금문학파(今文學派)와 고문학파(古文學派)의 논쟁.
<설명문>
이 논쟁은 전한(前漢)의 학계를 독점하고 있던 금문학파에 대한 고문학파의 반발로 야기되어 논쟁 자체가 한대(漢代) 경학(經學)의 골간을 형성하며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전한 무제(武帝) 때에는 유교일존체제(儒敎一尊體制)가 시행되어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학관(學官)에 임명된 것은 모두 금문학파의 학자였다. 그러나 전한 말 유흠(劉歆)은 『모시(毛詩)』, 『고문상서(古文尙書)』, 일례(逸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의 고문학을 존숭하고 그것을 학관에 세우려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에 따라 최초로 금문학의 사십박사와 고문학의 대립이 야기되었다. 이후 평제(平帝) 때에 처음으로 고문의 『모시』, 『고문상서』, 『춘추좌씨전』이 학관에 설치됐고, 왕망(王莽) 때에 이르러서는 『주례(周禮)』가 추가로 채택되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양자가 논쟁을 벌이면서도 금‧고문학이 양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흠에 의해 금고문학의 상위(相違)가 명확해지고, 이후 후한(後漢)에 이르러 가규(賈逵)‧마융(馬融)‧정현(鄭玄)‧복건(服虔) 등이 모두 고문을 존중함으로써 고문 흥융(興隆)의 기초가 닦여졌다. 당시 논쟁의 촛점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있었으며, 이를 둘러싸고 금문의 대가인 하휴(何休)가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 『공양묵수(公羊墨守)』를 저술하자 고문의 대가인 정현은 『잠고황(箴膏肓)』, 『기폐질(起廢疾)』, 『발묵수(發墨守)』를 저술하여 그것을 논박하기도 하였다. 정현은 그때까지의 금고문 대립의 판도를 변화시켜 고문학 우위를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는 주로 고문학의 입장에서 많은 경(經)을 주해(注解)하였고, 그 후에 진(晉)의 두예(杜預)‧왕숙(王肅)이 정현을 따름으로써 금문학은 쇠퇴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고문학이 보다 고대(古代) 경전의 원형에 접근해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면 북조에서는 왕필(王弼)의 『주역(周易)』, 복건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현의 『상서(尙書)』를 존중하고, 남조에서는 정현의 『주역』, 두예의 『춘추좌씨전』, 매색(梅賾)의 『상서』를 존중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경학자들은 정현과 왕숙에 대해서 논쟁하였을 뿐 금고문에 관하여는 문제삼지 않았다. 또 당(唐)의 육덕명(陸德明)은 『경전석문(經典釋文)』을 저술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은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저술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정현과 왕숙의 견해를 함께 수용하였다.
송대(宋代) 이후에는 정주(程朱)가 제경(諸經)을 두루 주해하고, 그것이 학문적 권위를 가지게 됨에 따라 한‧당(漢唐)의 주소(注疏)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청대(淸代)에 들어와서 고염무(顧炎武)‧혜사기(惠士奇)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은 한당대의 주소로 돌아갈 것을 제창하였으며, 더욱이 염약거(閻若璩)가 『고문상서』를 위서(僞書)라고 공격하고 왕숙이 그것의 위작자(僞作者)임을 증명함으로써 다시 금고문의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논쟁이 한대만큼 격렬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
한글항목명 | 기발이승일도설 |
한자항목명 | 氣發理乘一途說 |
유형 | 학설‧논변 |
한국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출전 | 『율곡전서(栗谷全書)』 「답성호원(答成浩原)」 |
<요약>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 마음이 발동하는 직접적 원인이 기라고 설명하는 학설.
<설명문>
이이가 제창한 것으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한 것이다. 이황은 『퇴계집(退溪集)』 「천명신도(天命新圖)」에서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라고 하고,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그 위에 탄 것이다.”라고 하여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을 모두 인정하였다. 그는 이기호발의 입장에서 사단은 선인 데 비하여 칠정은 선악 미정 또는 악으로 흐르기 쉬운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사단의 근원인 이(理)를 칠정의 근원인 기(氣)보다 우위에 두는 이존설(理尊說)을 확립하였다.
이에 대해 이이는 이황의 이발설(理發說)을 부정하고 기발(氣發)만을 인정하였다.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하여 그는 『율곡전서(栗谷全書)』 「답성호원(答成浩原)」에서 “사단은 칠정을 다 겸하지 못하지만 칠정은 사단을 포함할 수 있다.”고 하여 칠정은 기발, 사단은 이발이라고 두 가지로 나눈 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하였다. 즉 칠정은 이와 기를 겸하여 말하는 것이고, 사단은 오로지 이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황의 오류는 사단은 안에서 발하고 칠정은 밖에서 생긴다고 생각한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단이든 칠정이든 그 감촉(感觸)하는 바는 모두 외감(外感)이며, 감촉이란 이미 동정(動靜)하는 기이기 때문에 이발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부모가 없어도 효(孝)를 잘 할 수 있고, 임금이 없어도 충(忠)을 잘 할 수 있으며, 형이 없어도 경(敬)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사람의 진정(眞情)이겠는가?”라고 하여 외물에 의하지 않고 내면에서 자연히 발하는 정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황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등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과는 달리 본연지성은 기질지성 가운데 포함되는 것으로 기질(氣質)을 포함하지 않은 이(理)만을 가리킬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인심이나 도심이 모두 천리인데, 그것이 발하여 기의 엄폐(掩蔽)와 비엄폐에 따라 양자가 구별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황과 같이 인심을 곧 인욕으로 변칭(變稱)하여 악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즉 마음의 본질이 이미 가변적이기 때문에 인심이나 도심 등 일정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며, 성명(性命)의 정(正)에서 근원한 것이라 하여 도심=선이 아니고,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발생한 것이라 하여 인심=악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은 기가 이보다 앞선다는 주장은 아니다. 즉 그는 「여성호원(與成浩原)」에서 “천리의 조화와 마음의 발동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지 않은 것이 없다. 이른바 기발이승이란 기가 이보다 앞선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이 명제는 다만 기는 유위(有爲)하고 이는 무위(無爲)하다는 것을 뜻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답성호원」에서 발하는 것은 기, 발하는 소이(所以)는 이(理)라고 확신하여 이것은 성인이 다시 나오더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자주(自註)하였다. 따라서 그는 주희(朱熹)가 진정으로 이발을 믿었다면 주희 자신도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이의 이 명제는 후에 율곡학파(栗谷學派)‧기호학파(畿湖學派), 혹은 주기파(主氣派) 계통의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계속 주장되었다.
<참조항목>
기, 사단칠정론, 율곡전서, 이, 이기론, 이기호발설, 이발설, 이이, 인심도심도설, 인심도심론
기일분수설(氣一分殊說)
한글항목명 | 기일분수설 |
한자항목명 | 氣一分殊說 |
유형 | 학설‧논변 |
한국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요약>
세계의 본원을 일기(一氣)로 보고 만사만물(萬事萬物)의 유행(流行)을 기(氣)의 분화(分化)로 설명하는 임성주(任聖周)의 학설.
<설명문>
임성주는 명(明) 나흠순(羅欽順)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 송(宋) 장재(張載)의 기일원론(氣一元論) 및 정호(程顥)의 기역도도역기설(器亦道道亦器說) 등의 영향을 받아 유기론(唯氣論)을 수립하였다. 그 체계 속에서 임성주는 이(理)를 기의 자연(自然) 당연(當然)의 ‘연(然)’자의 뜻으로 해석하여, 이(理)를 기(氣)의 속성(屬性) 혹은 법칙(法則)으로 격하(格下)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기(氣)는 도(道), 덕(德), 건(乾), 신(神), 원(元), 원기(元氣), 명(命), 제(帝), 태극(太極), 자연(自然) 등의 이름으로 설명되며, 절대적인 실체이다.
반대로 이(理)는 기분화(氣分化)에 따라서 생기는 것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조작(氣造作)을 통해서 현상한다. 그러므로 천지 만상(萬象)은 모두 기화(氣化)이며, 그 본체 즉 원기는 ‘기지일(氣之一)로 설명된다. 임성주는 이것을 장재의 이른바 태허(太虛)나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일치시키고 있다. 그는 호락양론(湖洛兩論)이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이이(李珥)의 이른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입각하여 이동기이(理同氣異)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여 “세인(世人)들은 매양 이일분수를 가지고 이동기이로 생각하여, 이일(理一)이 곧 기의 일을 보고 말한 것임을 모른다.”(『鹿門集』 卷19)고 비판하고, “진실로 기지일이 아니면 무엇을 근거로 그 이가 반드시 하나[一]가 됨을 알겠는가? 이일분수란 것은 주리적(主理的)으로 말한 것이므로 ‘분(分)’자는 또한 마땅히 이(理)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기적(主氣的)으로 말한다면 기일분수라 해도 불가함은 없다.”(鹿門集 卷19)고 말하였다.
이일분수에 있어 이일(理一)은 기일(氣一)을, 이분수(理分殊)는 기분수(氣分殊)를 그 기저로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이이는 담일청허지기(湛一淸虛之氣)의 다유부재성(多有不在性)을 주장하여 일원기(一元氣)의 편만성(遍滿性)을 부인하고 이통기국설을 제창한 바 있다. 그러나 임성주는 음양(陰陽)의 근원으로서의 일기, 즉 원기 혹은 담일청허지기의 실존을 주장함으로써 그것의 일동일정(一動一諍)에 의하여 일음일양(一陰一陽)이 현출(現出)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시(四時)나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五行)도 그에 의하여 현상(現象)한다고 보았다. 그러한 인식의 기초 위에서 동정음양하는 현실적인 힘의 기저에 그 동정음양의 가능성의 세계로서 원기가 놓여지며, 그에 따라 임성주의 독창적인 기일분수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임성주의 철학은 우주일기(宇宙一氣)를 근원으로 하여 자연계에 있어서는 ‘형내포호기(形乃包乎氣)’, 인간계에 있어서는 ‘만강자도시기(滿腔子都是氣)’의 유기론에 도달하였고, 그에 따라 이(理)는 기(氣) 작용의 자연‧당연의 법칙으로서 기(氣) 안에 포함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임성주는 기일분수를 토대로 이일분수를 연출하여 그 근원이 기(氣)에 있다는 것, 그리고 분수(分殊)는 일(一)의 분화이며 일(一)은 사물의 모든 분화 상태에 담일청허로서 편만해있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에게 있어 원기→양의(兩儀)→오행→만상의 관계는 작용의 관계이므로 일원기가 만상기(萬象氣)로 분화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기일분수설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지만 정이(程頤) 이후 수백년 동안 모두 이일분수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성주에 이르러 비로소 기일분수란 말을 썼다는 것은 그만큼 기론(氣論)이 성숙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참조항목>
기일원론, 녹문집, 담일청허지기, 이일분수설, 이통기국설, 임성주
기일원론(氣一元論)
한글항목명 | 기일원론 |
한자항목명 | 氣一元論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명청 시기/명 |
<요약>
이(理)가 ‘기의 존재 양식을 규정하는 최고의 존재 원리(存在原理)’라는 것을 부정하고 단지 기는 이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여 만물(萬物)을 형성하고 존재하게 한다는 본체론의 입장.
<설명문>
이것은 “태허(太虛)는 무형(無形)한 것으로서 기의 본체이고 기의 취산(聚散)은 변화하는 객형(客形)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장재(張載)의 태허설(太虛說)에서 비롯되지만 당시 아직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理)에 대한 기일원(氣一元)이라고 하는 의식은 없었다. 만물은 기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하는 자연 철학은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있었으며 전한(前漢)의 『회남자(淮南子)』에서 보이는 생성론(生成論) 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이러한 것들도 기일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보통은 송명(宋明) 이후의 것으로 말한다. 기일원론은 명대 중기의 나흠순(羅欽順)‧왕정상(王廷相)에서 시작되어 오정한(吳廷翰)‧당학징(唐鶴徵)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진확(陳確)‧왕부지(王夫之)에서 정정조(程廷祚)를 거쳐 청대(淸代) 중기의 대진(戴震)에 와서 그 이론이 완성되었다.
기일원론에 있어서 이(理)에 대한 이해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기 및 사물의 존재나 운동 변화의 법칙성을 이(理)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며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도 대부분 정욕긍정론(情慾肯定論)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성(性)을 기(氣) 만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정욕(情慾)을 성의 고유한 본질적 작용으로 간주하게 되고 따라서 정욕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는 물질의 근원이며 또한 생명력‧활동력의 근원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기일원론은 유물론(唯物論)과 상통하는 점이 있으며, 현재 중국의 학계에서는 이것을 이미 유물주의 철학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기일원의 기는 ‘정신에 대한 물질’과는 발상을 달리한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한글항목명 | 기자동래설 |
한자항목명 | 箕子東來說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출전 | 『상서대전(尙書大傳)』,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
<요약>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조선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는 설.
<설명문>
기자동래설에 관해서 다음의 세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 “주(周) 무왕(武王)이 옥에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가 그 석방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조선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이 조선후(朝鮮候)로 봉(封)했다.” 둘째,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 “무왕이 은(殷)을 멸하고 기자를 방문하여 안민(安民)의 도(道)를 묻고 그를 조선후에 봉했다.” 셋째,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 “은나라가 쇠함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禮儀)와 전잠(田蠶)과 직조(織造)를 가르쳐 주었더니,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 사회에는 범금팔조(犯禁八條)란 법금(法禁)이 행하여졌다.” 이러한 자료에 근거하면 어떤 경로로든 기자가 조선후에 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기자동래설은 우리나라에 유교가 언제 전개되었는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장지연(張志淵)은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단군시대 말기 기자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기자는 말기에 주를 피해 우리나라에 온 뒤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도리로 동방을 교화하였다. 홍범은 곧 역상(易象)의 원리이고 유교의 조종(祖宗)이다. 그러므로 기자가 이것을 무왕에게 전하고 또 조선에 와서 팔조(八條)의 교를 가르쳤다고 한다면 지금 그 팔조가 비록 유결(遺缺)되어 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자가 찬역(贊易)해서 “기자의 명이(明夷)는 그 도를 동방에 밝힌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이 유교 종조(儒敎宗祖)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가 비록 고대 하(夏)‧은(殷)에서 일어났으나, 그의 유일한 승계자였던 기자가 우리나라에서 몸소 교화했으니 바로 우리나라가 유교 교화의 종주국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장지연은 이 기자의 유교 교화는 그 후 더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그에 따라 우리나라는 다시 중국에서 계승되고 새롭게 발전한 공자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 곧 장지연은 유교를 공자 이전의 정교일치(政敎一致) 상태의 유교와 공자에 의해 도덕 윤리화한 유교로 나누고 전자는 기자동래와 더불어 전래되었으며, 후자는 공자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를 다시 연대로 환원하면 B.C. 1110년경에 공자 이전의 유교가, 그리고 B.C. 500년경에 공자 이후의 유교가 전래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장지연의 설에 동조하여 유승국(柳承國)은 『한국유학사서설(韓國儒學史序說)』에서 중국 상고대 유학의 형성과 연원을 고찰하면서, 중국 유학의 형성 과정이 역사적으로 동이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졌음에 주의해야 하며, 그 후 주나라 이래 공자시대에 이르러 중국 유학이 확립되고 우리나라에 전래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섭취‧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중국 유학과 우리나라 유학이 일치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체로 기자동래설의 근거가 되는 문헌들을 연구 비판하고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기즉성(氣卽性)
한글항목명 | 기즉성 |
한자항목명 | 氣卽性 |
유형 | 학설‧논변 |
중국 시대 | 송원 시기/북송 |
출전 | 『하서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
<요약>
생명을 가진 인간의 본성은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기(氣)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호(程顥)의 학설.
<설명문>
정호는 장재(張載)의 일기론(一氣論)을 바탕으로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측면에서 인성(人性)도 천연(天然)의 생(生)이라고 하였다. 정호는 고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을 “생을 성이라고 한다. 성은 곧 기이며 기는 곧 성이므로 생이라고 한다. (生之謂性, 性卽氣, 氣卽性, 生之謂也. )”(『河南程氏遺書』)라고 해석하였는데, 성즉기(性卽氣), 기즉성은 결국 생지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생(生生)하는 것이 바로 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호는 이 생의 성을 인(仁)이라고 보았다. 이 인은 주돈이(周敦頤)식의 오상(五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공자(孔子)식의 근본체(根本體)를 의미한다. 인은 청통기(淸通氣)와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정호는 인을 통하는 기같이 보았고 이 인체(仁體)로 인하여 사람은 만물과 동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일분수설(氣一分殊說)을 확립한 임성주(任聖周)는 주리파(主理派)의 ‘심즉리(心卽理)’와 주기파(主氣派)의 ‘심즉기 성즉리(心卽氣 性卽理)’를 모두 반대하고 ‘성즉기 기즉성(性卽氣 氣卽性)’ 더 나아가 심성일치(心性一致)를 주장하였다. 임성주는 “인성의 선은 곧 기질이 선할 따름이다. 기질의 밖에 따로 선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鹿門集』)라고 하여 주리파가 생각하는 본연성(本然性)의 순선(純善)과 기질성(氣質性)의 유선악(有善惡)의 선을 동일시하였다.
<참조항목>
기일원론, 기즉리
담연무형(淡然無形)
한글항목명 | 담연무형 |
한자항목명 | 淡然無形 |
유형 | 개념/학설‧논변 |
한국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출전 | 『화담집(花潭集)』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원이기(原理氣)」 |
<요약>
서경덕(徐敬德)이 선천(先天)의 세계인 태허(太虛)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
<설명문>
맑고 형체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화담집(花潭集)』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원이기(原理氣)」 등에 보인다. 그는 세계를 선천과 후천(後天)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일기(一氣)가 응취(凝聚)하여 나타난 현상계를 후천이라고 하고, 아무런 질량도 아직 생성되지 않은 상태를 선천이라고 상정하면서 이것을 바로 담연무형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무(無)는 아니지만 비어 있고, 움직이지는 않지만 운동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태허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된 용어로서 『주역(周易)』의 적연부동(寂然不動)과 궤를 같이 한다.
<참조항목>
태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