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시크릿>>(Who you think I am, 2019)
<줄거리>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중년 여성 클레르 미요는 새 상담사 앞에서 연하의 연인 뤼도의 얘기를 꺼낸다. 뤼도와 진한 정사를 즐기는 사이지만, 뤼도는 슬슬 그녀를 멀리 한다. 그녀는 SNS를 통해 뤼도를 계속 탐지하기 위해, 젊은 여성의 이미지와 ‘클라라’라는 가명을 내걸고 새 계정을 만들었는데, 엉뚱하게도 뤼도의 룸메이트인 ‘알렉스’라는 청년과 교류하게 된다. 알렉스와 대화할 때면, 정말 24~5세의 젊은 여성 클라라로 새로 태어난 듯 짜릿한 느낌이 들고, 점차 그 흥분과 행복에 빠져든다. 수줍은 성격의 알렉스도 곧 이 독특한 관계에 스며든다. 남편과 이혼 후 다 커가는 두 아들, 늙어가는 육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연하 남친과 어린 학생들, 진부한 지인들에 둘러싸여 살맛을 잃어가던 클레어는 ‘클라라’로 사는 관계를 통해 삶의 생생한 기쁨을 회복해간다. 그녀의 강의는 18세기 후반에 <위험한 관계>를 썼던 작가 ‘라클로’와, 누구보다 독립적인 20세기의 작가였던 ‘뒤라스’를 경유한다. 클라라와 알렉스는 음성 소통에 이어 아주 실감나는 폰섹스까지 치르게 되고, 당연히 알렉스는 오프에서 클라라의 실체와 만나기를 열렬히 원한다. 그러나 또한 당연히, 클레어는 알렉스 앞에서, 차마 늙은 자신을 밝히고 만날 수가 없다.
클레어는 여성 상담사를 도발하기도 한다. “욕망 없는 사랑은 뭐죠?”, “환자와 자본 적 있어요?” 클레어는 알렉스에게, 계정에 걸어놓은 젊은 여성의 매혹적인 동영상을 보내기도 했는데, 상담사가 누구의 영상이냐 추궁하자, 처음에는 구글에서 얻어온 것이라고 하다가, 조카 카티아의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고로 죽은 오빠 부부의 딸을 자기가 데리고 있었고, 유산 상속 후 지금은 노르웨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다. 알렉스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오자, 클레어는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소원했던 동거남과 화해하게 되어, 브라질로 함께 가게 되었다’고 둘러대며 급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클레어. 계정을 없애버린 알렉스... 그리고 얼마 후, 클레어는 뤼도로부터 자기 룸메이트가 페북에서 만난 웬 사이코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충격 받은 클레어는 자신이 순진하고 연약한 청년을 죽게 했다는 가책에 시달리며 소설 한 편을 써서 상담사에게 건넨다. 소설의 내용은, 그녀가 알렉스 앞에, 뤼도와 사귀었던 중년 여인이 모습 그대로, 직업 관련 프로필 사진을 찍어달라며 접근하여 연인이 되고, 아직도 페북 연인이었던 클라라에 대한 미련과 상처가 남아있는 알렉스에게, 자신이 실은 클라라이기도 했었다는 비밀스러운 진실을 알리고는, 그 순간에, 이번엔 클레어 본인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스토리다. 상담사는 말한다.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행복을 거부하네요?”
그제서야 클레어는 핵심 진실을 밝힌다. 그녀가 카티아(클라라)가 되기로 한 건 조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적대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카티아는 노르웨이로 간 것이 아니고, 현재 자기 남편과 살고 있다고. 차마 말로도 글로도 쓸 수 없었던 진실은, 사랑했던 조카와 20여 년 동안 아들 둘 낳고 사랑했던 남편이 정분이 나 클레어를 버리고 떠나게 되었던 것.
“날 무너뜨렸어요. 그 애가요.”
“죽는 건 겁 안 나. 버려지는 게 싫어요.”
그 후, 알렉스가 차를 몰고 죽었다는 얘기는 클라라의 정체(클레어)를 알아차린 뤼도의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지고, 상담사가 클레어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소설을 고쳐 쓰는 중이라고 말한 클레어는 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녀는 이제 누구로서, 어떤 소통을 시도하게 되는 것일까?
<소감>
1) ‘아이구 참, 왜 거짓말을 해?!...’ 우리의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여주인공 클레어가 거짓 이미지와 젊은 나이를 내걸고 애꿎은 젊은 남자와 깊어갈 때, 엄청 곤란하고 불편한 심정이 되지만, 어린 조카와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를 버리고 지금 동거 중이라는 사실에 이르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2중의 배신, 곱절의 상처!...
얼마 전 유행했던 ‘추앙’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도, 거지같은 전남친으로 인해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여주인공이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라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보라. 클레어는 일어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특단의 조처, -자극적 탈주가 아니고서는.
2) 서구- 유럽은 정말 우리와 다르다는, 일상생활에서 ‘개인주의’ 문화가 공고하다는 걸 다시 느꼈다. 한국에서였다면, 젊은 조카와 늙은 고모부가 바람이 났으면 그 흉흉한 소문과 비난이 온 가족, 친척, 상간남녀의 일상을 압살했을 텐데, 영화에서 클레어(엄마)를 대하는 두 아들의 태도를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그런 사건을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영화적 설정, 생략이 있었다 해도)
3) 나는 정말 나일까?
SNS를 통해 사진과 글로 일상을 올리고 ‘좋아요’ 답글로 소통하는 시대. 우리가 ‘보여주는 이미지’와 ‘실제의 나’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얼마간 느끼고 있을 테다. SNS 시대는 ‘거짓 자아’(혹은 편린)로 얼마간 ‘다른 나’가 되고 싶은 욕망에 따른 실험을 가능케 하는데, 영화 <트루 시크릿>은 거짓 이미지를 걸고 새로운 자아 체험을 하는 여주인공을 통해 이런 면을 좀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사랑이 가짜였을까? 그녀는 “내가 하는 말과 생각, 그게 바로 나잖아요.”라며 항변한다. 파란 불이 켜져 있는 동안 안식을 누린다고. 이런 대목은 인간에게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고픈,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픈 욕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려준다.
나 역시 이런 욕망, 나아가 ‘더 나은 나’가 되고 싶은 욕망 자체를 비난할 처지는 못 된다. 오래 전 영화 <썸머스비(1993)>도 떠올랐다. 남주인공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썸머스비 행세를 하며 훌륭한 남편으로 훌륭한 삶을 만들어가지만, 나중에 ‘진짜 썸머스비’가 살인을 저질렀던 사실이 드러나며 진퇴양난에 빠진다. 가짜 썸머스비였음을 고백하고 사형을 면할 것인가. 끝까지 자기가 썸머스비라고 우기며 죽을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한다. ‘내가 되고 싶은 나’, ‘그 나가 만들어낸 새로운 역사’가 그리도 소중했던 것이다. 죽음을 감수할 만큼. 인간은 그런 존재다. 거짓 믿음(?)이 믿음 없는 참을 압도하기도 한다.
4) 남의 사진, -젊은 여자 사진을 도용할 때 몹시 거슬렸는데(그 여교수가 낯모르는 여성을 갖다 쓸 것 같진 않아 어색하기도 하고) 나중에 혈연관계인 조카(더구나 그 젊음으로 남편을 앗아간)의 사진이었다고 하자 더 실감나면서 참 안쓰럽고 저릿했다.
“사람은 평생 아이에요. 저는 돌봐주는 손길이 필요했어요.” ㅜㅜ
5)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재미없지도 않고, 딱히 뭔가 앞뒤가 안 맞게 어긋난다거나 특별한 단점이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감동적이거나 충족스럽지도 않고 총체적으로 어정쩡한 느낌이었다.
다만 클레어에 대해서는 어쨌든 그녀는 행동했다는 것. 비록 거짓 자아를 내세워 어린 남자와 폰 상의 교제를 하는 곤혹스러운 과정을 거쳤지만, 자아통일의 한 과정으로서의 여정을 시도했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그렇게 핫하고 징한 과정을 겪어냄으로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한 발걸음을 옮겨갈 가능성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
첫댓글 “내가 하는 말과 생각, 그게 바로 나잖아요.” 클레어의 이 대사가 클레어 자신의 문제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나를 구성하고 표현할 말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고 그래서 나에 대한 생각이 부실하다면, 그 말로 다 채집될 수 없는 나는 어디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이 남기 때문일 거예요. 클레어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낼 언어가 부족해서, 그래서 그 고통을 넘어설 언어도 찾을 수 없어서, 자신이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한 언어로 포획 가능한 '클라라'의 이미지로 퇴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알렉스의 부고를 들은 뒤 여전히 알렉스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자신을 '죽이는' 픽션을 썼는지도요. 이런 글쓰기는 죄책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제 자리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모르는 클레어 자신에게서 해방되려는 의지의 반증이기도 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핫하고 징한 과정을 겪어냄으로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한 발걸음을 옮겨갈 가능성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 마지막 문장이 참 좋습니다. 언급하신 것처럼 영화가 좀 더 깊이, 좀 더 멀리 나아갔다면, 그 지도 밖으로의 행군을 상상하게 하는 힘까지 품었다면 참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