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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가을: 제6공화국의 황혼을 살고 있습니다
장석준 지음, 산현글방 2022.
중산층 행동주의에 가린 투명인간들의 사회
수도권 아파트값 폭등으로 나라가 어수선하다. 몇 주만에 몇 천만 원은 예사이고 몇 억 원이 오른 곳도 있다는 소식이다. 항상 그렇듯이 이번에도 강남부터 뛰기 시작하더니 서울 전역으로 확산했고 이제는 경기도 여러 도시까지 대열에 합류했다. 노무현 정권 중반을 떠올리게 만드는 광풍이다.
이 광풍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투기 세력이다. 뭉칫돈을 달리 굴릴 데가 없어 집을 사고 팔며 불로소득을 벌어들이는 자들. 그러나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수도권 아파트값이 미친 듯 오르는 게 꼭 투기 세력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몇몇 언론 보도에 따르면, 수도권에서는 아파트 단지마다 다시금 가격 담합 바람이 일고 있다. 자가 소유주들이 실제 거래와 상관없이 수도권 다른 지역 시세에 맞춰 호가를 정한다. 만일 이 호가보다 낮게 매매하는 가구나 부동산 중개소가 있으면 제재를 당하게 된다. 지금 아파트 주민회, 부녀회, 온라인 모임은 이런 작전 모의로 뜨겁다는 것이다.
가격 담합에 동참하는 이들 대다수는 좁은 의미의 투기 세력은 아니다. 달랑 실거주용 주택 한 채를 소유한 가구가 대부분이다. 만일 이사라도 가게 된다면, 가격 담합 물결 때문에 지금 사는 집을 매도하며 이득을 보기보다는 이사 갈 집을 매입하며 손해 보기 딱 좋은 가구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투기 세력이 일으킨 불길에 뛰어들어 기꺼이 장작이 되어준다. 그 결과, 강남의 광풍은 불과 며칠 만에 수도권 전역의 대혼돈이 되고 만다.
이것은 하나의 운동이다. 한국 사회의 여론 형성과 정치 판세 결정에서 키를 쥐고 있는 특정 계층의 대중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체는 이른바 ‘중산층’이다. 하지만 이 중산층이란 정확히 어떤 계층인가?
중산층은 나라마다 그 중핵과 외연이 달리 나타난다. 중산층을 그 위 계증, 아래 계층과 나누는 불평등의 구조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소득 격차만으로 불평등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득 격차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 자산 격차, 그 중에서도 부동산 소유 격차이고, 교육 격차, 즉 학력⋅학벌 문제도 중요하다. 한국 사회 불평등은 최소한 이 세 축(소득, 자산, 교육)을 교차시키면서 바라봐야 한다.
한국의 중산층은 각 축의 특정 법위에 혹은 이들이 중첩된 영역에 포진한 계층이다. 우선 소득 측면에서는 임금 소득자 가운데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의 정규직 노동자다. 기업 규모 면에서는 대기업이어야 하고 고용 형태 면에서는 정규직이어야 한다. 자영업자 중에서는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 중 상당수(이 직군 안에서 지배 엘리트에 가까운 최상층은 제외)가 이에 해당한다.
자산 측면에서는 상당한 자산 가치를 지닌(이른바 ‘똘똘한’) 주택을 한 채 이상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주택은 대체로 대도시의 단지형 아파트다. 물론 그 안에서도 다시 계층이 나뉜다. 거주용 주택 한 채 말고도 임대 수익을 얻거나 투기용으로 활용할 주택을 한 채 이상 더 가진 계층이 있고, 실거주 주택 한 채만 소유한 계층이 있다. 하지만 일단 자가 소유주가 되고 나면, 세입자보다는 다주택 소유자와 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 측면에서는 학령기 자녀의 대학 입시 경쟁에 뛰어드는 가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입학 경쟁에 뛰어드는 가정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이 경쟁에서 ‘승리’해 자녀를 대학 서열 구조상 상층 대학에 밀어 넣는 것을 중산층 지위의 대물림이라 여긴다. 이 치열한 경쟁 때문에 공교육은 바람 잘 날이 없고, 귀족학교와 사교육이 팽창한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이런 한국 중산층의 기반 자체가 조직화와 동원, 여론 형성의 강력한 자원에 있다. 가령 한국 노동조합의 일반적 형태는 아직도 기업별 노동조합인데, 대기업, 공공부문의 정규직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 집단(중소기업, 비정규직 등)과 달리 기업별 노동조합을 통해 기업 단위 단체협상을 벌여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
한편 중산층 가운데 전문직 자영업자 역시 그들만의 조합, 즉 직능단체로 잘 조직돼 있다. 이들 직능단체는 기업별 노동조합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집단행동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직이다.
마찬가지 양상이 수도권 아파트 단지의 가격 담합 운동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의 주된 주거 형태가 아파트이고 핵심 투기 대상도 아파트라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단지형’ 아파트다. 대규모 단지를 이뤄야만 시장 가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지로 모여 있기에 거주자들의 집단행동도 쉬워진다. 주민 중 세입자를 제외한 자가 소유자들이 쉽게 정보를 나누고 의견을 모으며 이를 행동으로까지 연결할 수 있다. 입주자 투표로 선출된 주민회 같은 나름의 공식 조직은 입주민을 대표한다는 구실로 집단행동의 사령부가 된다. 심지어는 호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매매하려는 가구에 제제를 가하며 높은 수준의 규율을 강요하기도 한다. 꼭 이런 공식 조직이 아니더라도 아파트 단지 인근 교회나 학교 학부모 모임이 비공식적으로 이런 기능을 대신하기도 한다.
단지형 아파트 거주는 부동산뿐만 아니라 교육 영역에서도 중산층이 지닌 집단적 역량의 굳건한 토대가 된다. 아파트 단지 안의 수많은 대면 접촉 모임이나 비공식 조직에서 주로 오가는 이야기는 부동산 시장 정보 아니면 입시 경쟁 정보다. 그래서 입시 경쟁 중심 교육이 이러한 아파트 단지 공론장을 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이들 공론장을 거쳐 정리된 교육 관련 여론은 항상 중산층 자녀의 입시 경쟁 성공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생각되는’ 방안으로 수렴된다.
이렇듯 한국의 중산층은 자신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세 축(소득, 자산, 교육) 모두에서 중산층 이하 집단은 누리지 못하는 강력한 조직화-여론 형성 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소득, 자산, 교육의 세 사다리에서 중산층 밑에 있는 어느 계층보다 더 활발히 집단행동에 나서고 가시화-세력화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 사회 특유의 중산층 행동주의가 이 땅에서 작동하고 있다. 중산층 행동주의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대학 입시제도 개정 등 개혁이 논의될 때마다 가장 눈에 띄는 변수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아파트값 폭등 속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중산층 행동주의가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실은 촛불항쟁도 중산층 행동주의를 이루는 요소들의 결합이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소 부동산-입시 정보로 넘쳐났던 중산층 공론장은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 뒤에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성토와 자연스러운 집단적 지지 철회 그리고 촛불시위 정보 교환의 통로가 됐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맞서 싸우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들 중산층과 젊은 세대가 새로 결합하면서 촛불시민연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항쟁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찾아온 일상의 시간 속에서 중산층 행동주의는 오히려 사회 개혁의 장벽이 되고 있다. 그렇게 되고 만 이유를 살펴보려면, 먼저 한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추격사회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추격사회란 한국 자본주의의 추격 성장 전략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추격 경쟁으로 내면화된 상태의 사회를 뜻한다. 추격사회에서는 계급의식이 발전하는 대산 추격의식이 확산된다.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집단들과 연대해 위와 대립, 협상, 타협하기보다는 자기보다 위에 있는 집단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아래를 차별, 경쟁,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금 중산층 행동주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추격사회의 관성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수도권 아파트 단지의 가격 담합 운동은 아파트값 폭등의 광란 속에서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 가치의 상대적 하락을 막으려는 필사적 몸부림이다. 그러나 이 몸부림 때문에 1주택 소유 계층 바로 밑의 계층은 좌절의 수렁에 빠진다. 자가 소유 의지를 지닌 전세 세입자들은 부동산 중개소 앞에 나붙은 매물 시세(?)를 보며 “내 생애 주거 불안에서 벗어날 날은 없겠다”는 절망에 휩싸이는 것이다.
지금 이 절망에서 비롯된 원성이 드높다. 그래서 정부는 부랴부랴 부동산 대책을 쏟아낸다. 물론 제대로 된 부동산 처방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추격사회에서 나타나는 중산층 행동주의가 드리운 깊은 사회적 그늘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화-여론 형성 자산을 지닌 계층의 집단행동이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 현실을 타파하려는 고민이 필요하다.
여러 방안이 있겠지만, 근본 대안 중 하나는 중산층을 넘어선 행동주의의 확산이다. 즉, 불평등 사다리에서 중산층 아래에 위치한 계층도 집단 행동주의의 주역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간 중산층 행동주의에 가려 ‘투명인간’에 다름없던 이들이 가시화-세력화하고, 이들의 행동주의가 중산층 행동주의의 균형추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중산층 이외의 집단들도 나름의 조직화-여론 형성 역량을 갖춰야 한다. 가령 중소기업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해야 한다. 이미 오랫동안 이 방면에서 여러 노력이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촛불항쟁 이후 조금씩, 하지만 의미 있게 상황이 바뀌고 있다. 오랫동안 노동조합 바깥에 방치돼 있던 이들이 노동조합운동의 문을 두드리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투운동이 사회운동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투운동 자체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운동은 새 시대의 조건과 가능성을 앞서서 드러낸다. 과거와는 달리 거대한 수직적 조직이 받쳐주지 않아도 개인들의 수평적 연결만으로 여론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보화 혁명이 연 네트워크 사회만의 특성이다. 이는 조직 자산의 부족 때문에 행동주의의 주역이 될 수 없었던 이들에게 힘과 영감을 준다. 이런 가능성이 전통적인 조직화 노력과 결합한다면,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투명인간’들의 가시화-세력화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이와 함께, 정치 영역에서 ‘투명인간들’을 더 이상 투명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선거제도 개혁의 의의를 또 다른 각도에서 확인하게 된다. 선거제도 개혁의 핵심은 정당 지지율만큼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독일식)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다.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그간 중산층 행동주의에 가렸던 집단들이 비로소 정치적으로 가시화-세력화하는 데도 커다란 효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하다.
현재의 승자독식 선거제도에서는 가장 강력한 조직화-여론 형성 능력을 갖춘 집단에 의해 선거의 승패가 쉽게 좌우된다. 한 표라도 더 많이 받는 후보가 유일한 승자가 되기에 누구든 승리하려면 가장 효과적으로 집단행동을 펼치는 집단의 의사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 집단은 결국 중산층이다. 이제껏 이 논리에 따라 범민주당과 범새누리당은 중산층 끌어안기 경쟁을 벌여왔고, 둘 중 누가 권력의 주인이 되든지 중산층 행동주의는 불패 신화를 이어갔다.
선거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늘 승자와 패자가 똑같은 이 게임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아파트값 폭등을 잠재우지 못하더라도 자유한국당이 지금 모습 그대로라면 2020년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승리의 주역은, 범새누리당이 지배정당 지위를 놓치지 않았던 과거 모든 총선과 마찬가지로, 투기-세습-불로 소득 세력과 중산층 행동주의 간의 불길한 연합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선거제도 개혁이 중요하다. 진보정당들이 여기에 사활을 거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정파적 이해 때문만이 아니다. 이제 선거제도 개혁은 이 나라에서 사회 개혁이 진짜 시작될 수 있을지 판가름할 관문과도 같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진보정당의 선거제도 개혁 노력은 정치 개혁 캠페인에 그칠 수 없다. 그쳐서는 안 된다. 노회찬 의원이 부르짖은 것처럼, 진보정당은 우선 ‘투명인간들’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당이 돼야 한다. 재벌 같은 지배집단 아니면 중산층만 눈에 띄는 한국 사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나머지 모든 이들의 정치적 육신이 돼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투명인간들’도 선거제도 개혁에서 그들 자신을 가시화-세력화할 길을 찾고 그 완강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문제는 중산층 행동주의가 아니다. 실은, 이 움직임 밖에 있는 모두가 그저 암흑지대에 남아 있는 현실이 문제다. 오직 ‘암흑’으로만 표상되는 뭇 삶들이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X가 될 때, 진보정당은 비로소 그 이름에 값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201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