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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본 자본주의 사회의 시간 전쟁
류동민 지음, 휴머니스트 2018.
시급에는 건강하게 출근하는 것까지 포함된 거야 – 삶의 시간 vs. 자본의 시간
경제학의 눈으로 읽은 《편의점 인간》
소설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은 대학 졸업 후 18년째 편의점 점원으로 일하는 여성이다. 연애도 하지 않고 친구도 사귀지 않으면서 끼니조차 편의점 음식으로만 해결하며 편의점 안에 있을 때만 편안함을 느끼는 그녀. 자신이 받는 시급에는 건강하게 출근하는 것까지 포함된 거라는 다짐을 되풀이하곤 한다. 계속 바뀌는 아르바이트 직원에, 심지어는 점장까지 맞이하고 보내면서 늘 비슷한 생활을 반복하고, 어쩌다 다른 편의점에 들를 때도 무의식적으로 상품 진열 상태를 챙기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 편의점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일반적인 일터로 바꾼다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저자주-경제성장기 일본의 이른바 ‘회사형 인간’도 별로 다르지 않다) 얼핏 읽어서는 《편의점 인간》이 현실을 비관하는지 아니면 그저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을 따름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아쿠타 가와상을 받고 나서도 계속 편의점에서 일할지 점장과 상의해 보겠다는 지은이의 인터뷰를 읽으면 더더욱 그러하다.
소설 속의 맥락이 무엇이건 “시급에는 건강하게 출근하는 것까지 포함된 거야.”라는 문장만 따로 떼어내 경제학의 눈으로 읽으면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시급을 주는 이의 입장에서, 그러하니 노동자들은 일터 바깥에서 각자의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온전하게 유지할 의무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어느 대기업이 외국 출장지 도박장에 직원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장을 붙였다는 사례는 바로 이러한 관점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시급을 받는 이의 입장에서, 그러하므로 내가 일할 능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달라는 권리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건강하게 출근하는 것”을 의무로 보느냐 권리로 보느냐는 이렇게 갈린다.
따라서 노동시간의 길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서술은 이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여기에는 권리 대 권리라는 하나의 이율배반이 일어나고 있다. 즉, 쌍방이 모두 동등하게 상품 교환의 법칙이 보증하고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설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은 시급을 받는 점원이면서도 두 번째가 아니라 첫 번째 관점에서 예의 문장을 되새긴다. 지은이가 현실 비판을 의도했다면 자본의 관점을 내면화한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겠으나, 어쩌면 그저 건실한 생활인의 자세를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자기 일에 성실하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바람직한 덕목이다. 그러나 강제로 제한된 영역 안에서의 성실은 굴종의 미화일 수도 있으며 나쁜 구조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실은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먹고사는 노동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양면성, 즉 ‘실존적 성실’이라는 개인적 삶의 문제와 ‘권리는 힘을 통해서만 확정된다.’라는 사회적 삶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시간, 여가
어제와 다름없이 건강하게 오늘도 출근하는 상태를 노동력의 재생산Reproduction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삶의 재생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재생산과 삶의 재생산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노동력이 재생산되더라도 삶은 얼마든지 피폐해질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노동력마저 제대로 재생산되기 어려워진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노동 관계라는 사회관계의 재생산으로 귀결된다. 개인으로부터 관계만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듯이, 관계로부터 개인만 분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그저 스스로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용해 줄 수 있는 상대방이 존재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홀로 제아무리 높은 ‘스펙’을 쌓는다 한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바, 그 ‘인정’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본이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다.
그러나 삶의 재생산은 여전히 비자본주의적 영역에 크게 의존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 및 지인과의 관계, 삶의 재생산을 구성하는 많은 관계가 자본주의적 시장 원리를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삶의 재생산 영역에 속하는 많은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 영역에도 속한다. 가사노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많은 시급을 받더라도 노동력이 원활하게 재생산될 수 없다.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불가결한 소비 활동 그 자체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삶의 시간은 점점 더 시장화(혹은 상품화)한다. 예를 들어 많은 유형의 돌봄노동Caring Labor은 비시장적 관계에서 벗어나 상품 영역으로 흡수된다. 그렇게 자본의 시간은 삶의 시간으로 스며들어 뒤섞이곤 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적 관계는 영향을 미친다. 결혼이나 연애, 우정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경제적 지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계급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흔히 경제학 교과서는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돈을 버는 시간과 여가Leisure로 나눈다. 돈을 버는 시간은 노동하는 시간이며, 그 나머지 시간은 모두 여가로 간주된다. 뒤집어 말하자면 여가는 돈을 벌지 않는 모든 시간이다. 주체를 강조할 때 여가는 자유로이 선택된 시간이지만, 구조를 강조할 때 그것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된다. 노동과정을 위한 준비, 소비 활동을 통한 노동력의 재생산 과정, 때로는 소비 활동 그 자체를 위한 준비에 걸리는 시간은, 자본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돈으로 바뀌지 않는다. 통근 시간이 대표적이다. 지가 상승으로 말미암아 중심지의 작업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출퇴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지만, 그 지출은 보상받지 못한다.
“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IT 노동자들이 출근 지하철에서 졸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는 일이 업계에서는 일상다반사라서인지, 어느 디자인 업체에서는 IT 노동자 전용 모자를 출시하기도 했다. 모자에는 ”OO역에서 깨워 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IT 회사들이 많이 밀집해 있는 ‘구디단(구로디지털단지)’역, ‘가디단(가산디지털단지)’역, 판교역, 선릉역 등 네 가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이 모자가 굳이 ‘실수요’를 반영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장시간 노동에 지친 이들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 삶의 재생산에서는 중요한 요소인 그것이 자본에 의해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시간은 때로 정신을 잃고 자기에도 바쁜 나쁜 품질의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노동이 그러하듯이, 여가라 불리는 시간도 ‘텅 빈 시간’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제 시간의 밀도는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여가에도 적용된다.
프라이스리스: 여가의 기회비용
여기서 우리는 다시 개별과 보편의 문제, 혹은 구체와 추상의 문제로 돌아온다. 시장에서의 성공이 남들과 다름을 효과적으로 설득함으로써 도약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개별로부터 보편으로의 운동이다. 내 상품(그것이 일할 능력, 즉 노동력이라 해도 마찬가지다.)이 다른 상품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특질을 가지고 있는지 보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상품을 돈이라는 보편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화폐가 물신이라는 점은, 때로는 거꾸로 돈과 바뀜으로써만, 즉 보편을 획득함으로써만 상품이 자신의 개별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폐를 획득하지 못하는 노동은 무의미한 노동이 되며, 무의미해 보이는 노동이라도 화폐와 교환되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여가는 보편이 아니라 개별로 존재할 때 오히려 의미를 지닌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기 어려운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소중한 여가로서 의미를 갖기 어렵다. 여가를 상품화할 때, 그 주체인 자본은 실은 극도로 표준화된 여가를 판매하면서도 개별을 강조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살 수 있는 것은 마스터 카드로.”라는 광고 카피는 개별적 경험으로서의 ‘프라이스리스Priceless’를 강조한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는 오래전 한국의 신용 카드 광고 카피는 그러므로 좀 더 즉자적이다.
값으로 나타낼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삶의 시간이 지불 능력으로 치환될 때, 개별은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보편으로 바뀐다. 일하지 않는 시간, 즉 삶의 시간을 돈 받고 팔 수 있는 시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여가의 잠재 가격을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든다. 여가를 얻는 대신 일을 했더라면 벌 수 있었을 소득이 바로 그 여가의 가격이다. 이렇게 ‘프라이스리스’는 당신이 시간당 얼마를 버는 능력을 가졌는지로 환원된다.
관리자의 연봉이 몇 백배 높은 이유
노동력을 하나의 상품으로 보면, 여기에도 가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노동력의 가치는 필요노동, 즉 노동자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에 대응된다. 그런데 노동자가 소비한 상품이 투입되면 모종의 가공을 거쳐 노동력이 산출된다고 보는 마르크스에 기인하는 은유는, 자칫 그 과정이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노동력은 인간이 지닌 능력이므로 인간의 삶 자체가 다양한 과정을 거쳐야 유지될 수 있다. 배움의 과정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배움은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누군가의 가르침,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과 갈등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요구한다. 노동자로서 의 실존적 성실, 즉 주어지는 과제를 묵묵히 수행하는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 때로는 정신 훈련,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저자주-신입 사원 연수가 종종 해병대 체험 같은 극기 훈련으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필요노동시간을 넘어서는 잉여노동시간으로 착취를 설명하면, 착취는 마치 어느 개인이 다른 개인의 노동시간을 뺏는 문제로만 보인다. 그렇지만 착취를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설명은 어림짐작에 의존하는 하나의 휴리스틱Heuristics 장치일 뿐이다. 개인이 따로 떨어져 생산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업 내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 장소”에서 각자의 노동에 대한 평가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간과되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치를 노동시간에서 찾는 노동가치론은 얼핏 생각하면 노동시간에 비례하는 가치를 지불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자가 기여한 노동만큼 대가를 지불해 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노동과 기여의 대응이라는 원칙은 개인 수준에서는 깨지기 일쑤다. 노동과 기여의 대응 관계는 사회 전체 차원에서만 성립한다. 한편에 사회 전체의 총 노동량이 자리 잡고, 다른 한편에는 그 결과로서의 상품 총량, 엄밀하게 말하면 순생산물이 자리 잡는다. 순생산물은 가격으로 측정되므로, 우리는 노동 1시간이 평균적으로 얼마의 가격, 즉 화폐량에 대응되는가를 계산할 수 있다. 화폐로 표현되는 노동시간, 그 속에 노동시간의 정치경제학과 관련된 정보들이 담긴다.(*저자주: 순생산물-경제 전체의 총생산물에서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생산물을 뺀 나머지를 순생산물이라 부른다.)
프랑스의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제라르 뒤메닐Gérard Duménil과 도미니크 레비Dominique Lévy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아닌 관리자Cadre 계급이 등장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새로운 단계를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관리자는 자본가는 아니지만 노동자와 달리 “생각하고 의사를 결정하는” 기능을 맡는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는 관리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과 일종의 계급 동맹을 맺는다. 관리자에는 기업의 전문경영인뿐만 아니라 국가 기구의 관료 조직을 이끄는 고위 공무원, 지배 이데올로기의 생산을 담당하는 학계나 언론의 이데올로그 들도 포함된다. 바로 피케티가 슈퍼매니저Super Manager라 부르는 이들이다. 슈퍼매니저가 얻는 막대한 소득은 그가 생산에 기여한 바, 즉 노동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피케티의 지적은 그러므로 ‘노동과 기여의 대응’이라는 원칙이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과연 신입 사원 연봉의 몇 백배에 이르는 관리자의 연봉은 그의 노동시간이 몇 백배의 가치를 갖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일까? 현실은 오히려 그가 신입 사원의 몇 백배에 이르는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준다.
그러나 조직 내 민주주의가 확보되지 못한 사회에서 관리자의 자율성은 착시 현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관리자가 오너의 말 한마디에 일자리를 잃고 오너의 생각에 맞춰 영혼을 버려야 하는 시스템이라면, 관리자는 그저 잉여노동의 일부를 떡고물로 나눠 먹는 상층부 노동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나쁜 개인이 사라져도 나쁜 구조는 살아남아 여전히 현실을 지배하는 것처럼, 관리자 계급이 관리 시스템, 그 구조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착취 문제는 다시금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로 귀착된다.
삶 속으로 파고드는 자본의 시간
삶의 시간이 상품화하는 것과 동시에 노동시간이 삶의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현상도 일반화한다. 스마트폰 등의 발달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술적 기초다. 통근 시간 중에, 스타벅스에서, 그리고 집에서 쉬는 시간에조차 노동은 작업장의 경계를 벗어나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저자주: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의 ‘사회적 공장(Social Factory)’이라는 개념이 이를 가리킨다.) 심지어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 활동 속으로도 파고든다. 은행 업무 중에서 이윤 생산에 가장 도움이 덜 되는 노동, 예컨대 단순한 출납이나 이체 업무는 ATM 기기나 개인용 컴퓨터를 통해 소비자가 직접 수행하는 쪽으로 옮겨 간다. 때로는 흥미와 간편함, 때로는 수수료 절약 따위의 금전적 이득이라는 약간의 보상으로 사회 전체 노동량은 별로 줄어들지 않으면서 이윤은 늘어나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자본의 시간은 양면성을 지닌 모호한 것이다. 스마트폰이 시간을 죽이는 장치라 비난하지만, 역으로 여가의 질을 평준화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 지극히 낮은 품질의 여가밖에 누릴 수 없는 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적어도 남들처럼 여가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텅 빈 시간으로서의 여가, 개별과 구체의 흔적이 지워지고 보편과 추상만 남은 세계로의 이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1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