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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보신 예수님 / 렘 10:1-10, 마 9:1-8
한보사건으로 구속된 홍인길 의원이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 날개는 누구이고 몸체는 누구인가? 아리송하기 그지없지만 검찰은 이번 사건을 조용히 끝내려고 한다. 북한 김일성 대학 총장을 지내고 주체사상을 확립한 황장엽의 망명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날이 쓰는 말 중에 애매한 말들이 많지만 믿음이라는 말처럼 그 뜻이 애매한 것이 별로 없다. ‘예수믿고 천당가시오.’ ‘예수믿고 구원받으시오’ 할 때 그것은 교회에 나와서 교인이 되라는 말이다. ‘예수 믿으려면 한번 잘 믿어야지!’ 하면서 잘 믿기를 권할 때는 그것은 교회 출석을 잘하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와 헌금을 충실히 내고, 헌신 봉사도 자주하고, 이따금씩 금식도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를 어떤 분이라고 믿는 것인지, 그를 믿는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하는 것은 엄밀하게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내리시는 믿음의 규정은 우리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본문 말씀은 막 2:1-12절과 눅 5:17-26절에는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갈릴리 가버나움 마을에 중풍병 걸린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 병자가 어떤 사람인지 예수님 앞에 오기까지 삶의 자세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저주받은 병자와 마찬가지로 이 병자도 절망과 체념에서 허덕이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 당시 모든 병이란 다 죄의 결과이지만, 특히 갑자기 중풍병에 걸려서 넘어져 꼼짝 못하고 누워 있게 된다는 것이야말로 악령의 특별한 조작이요, 커다란 죄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비관하고 살던 이 병자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한 예언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악령을 내쫓고 여러 종류의 병자를 고쳐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악령을 추방하고 악령에게 사로잡힌 병자들을 해방해 주신다는 것은 악령보다 더 능력있는 분, 그리고 악령을 대적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자기도 한번 그 분에게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자기를 깊이 이해하는 친구들을 불러 자기의 생각을 전하고 협조를 구했다. 그의 말을 들은 친구들은 다 그의 말에 동감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친구에게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어줄 기회가 바로 이때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곧 들것을 만들어 친구를 그 위에 눕히고 예수님이 계시는 집에까지 달려왔다. 그리나 그들 앞에 한 큰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조그만 집에 사람들이 꽉 차있어서 도저히 예수님 앞에까지 그들의 친구를 데려갈 수가 없었다. 두루 생각한 나머지 그들은 바깥 층계를 올라가서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집들은 돌로 지은 단칸방 집으로 지붕은 들보 위에 나뭇가지들을 깔고 진흙으로 덮어서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일년에 한번씩 다시 고쳐야 하는 것으로 뚫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사람들이 가득 차있는 상태에서 지붕을 뚫는다는 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간 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느냐는 것은 적지 않은 문제가 된다. 계속 ‘미안합니다’를 외치면서 자기들의 사유를 설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느냐 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여러 가지 난관을 무릅쓰고 병자를 예수님 앞에까지 끌고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이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는데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한 것도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흔히 그리고 자주 문제 삼았던 성서무오설이나 처녀 탄생설이나 삼위일체에 관해서 물어보신 것도 아니다. 그냥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본문과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그들이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그들이 그들 앞에 가로 놓여 있는 난관을 넘지못할 난관으로 보지 않고, 그것들을 다 제거하면서 기어히 주님 앞에 친구인 병자를 내려놓고야만 그들의 성의를 믿음으로 보셨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끈질긴 정성의 배후에 있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정성스런 행동을 하게 했는가?
1. 그들은 친구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상태로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된다고 믿은 것이다.
그들은 친구가 병자의 상태로 있다는 것은 어딘가 잘못된 데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죄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보다 훨씬 더 악한 자들이 활개치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누구도 죄없다고 할 수가 없지만, 왜 이 친구만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에게 죄가 있다면 그 죄가 용서받아야 하고 그도 남처럼 주어진 삶을 즐길 수가 있어야 한다고 맘 속 깊은 곳에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풍병 걸린 환자도 그 깊이에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한맺힌 억울한 민중들은 다 그렇다고 믿고 있다. ‘이래서는 안돼, 이럴 수가 없어,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나도 사람답게 살아야 해!’ 하는 것이 모든 억눌린 민중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꺼질 줄 모르는 불꽃인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리고 그 생명을 창조하신 분, 사랑과 정의로서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라면 이런 억울한 한을 풀어주셔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억울한 한을 풀어주지 앟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 의미없는 일이요, 그런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삶이란 엄청난 농담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렸다. 사랑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 행동하셔서 억울한 그들의 한을 풀어주시고, 새로운 세계로 그들을 이끌어 주셔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정의가 이룩되고야 말 것이라고 믿었다. 그럴 때 나사렛에서 오셨다는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이 그들에게 들려온 것이다.
3. 그들은 이 소식을 듣자 곧 행동을 개시했다.
이제 그들이 해야할 일은 사랑하는 친구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것만이 남았다. 그를 예수님 앞에 데리고만 가면 모든 것이 바로 될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런 믿음이란 어느 한 사람의 믿음이 아니다. 억울하게 짓밟혀 한에 맺힌 모든 사람의 믿음이다. 그들은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 믿음,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정의가 이룩되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은 모든 민중들의 삶 깊은 곳에 보관하고 있는 믿음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믿음이요, 삶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행한 믿음이다. 이런 민중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에 대한 믿음으로 찾아와서 새 삶을 창출해 주는 이가 있을 땐 그동안 잠재 형태로 축적돼 있던 믿음이 폭발해 터져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전진’의 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역사의 주님 앞에까지 나아가 새 삶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이런 믿음을 보신 것이다.
그들에게서 이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죄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맏는 담이다. 따라서 죄지은 사람은 하나님과 격리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그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신 말씀은 ‘너는 이제 하나님의 품에 있는 것이다. 너와 하나님 사이의 담은 벌써 무어진 것이다. 이제 너는 생명의 나라 백성이 된 것이다’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제 나는 너를 용서한다’ 하는 선고가 아니라 그의 죄는 이미 용서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하나님과 화해된 상태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처럼 돌아오는 순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중들에게 있어서 죄란 체념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탄하고 앉아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어나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순간 용서는 거기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화해와 새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중의 재기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삶의 소중한 것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수용해서 재생시키는 사랑의 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거져 주시는 은총이다. 예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었다. 민중들의 삶의 주장의 재확인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에 있는 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그렇게 싫었다. 그들에게 있어선 죄인들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어나 자기의 삶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유리한 현상을 뒤집어 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말은 귀에 거슬리는 말이다. 그들의 재기를 옳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두둔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선언이 바른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결과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에서 본다. ‘이제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로 되었다’ 하는 선언이 그들에게 참 생명에 찬 새 삶을 갖다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선언이다. 반면에 그것이 그들의 삶에 재앙과 화를 초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소중한 것은 생명이요, 생명이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예수님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했을 때, ‘내가 하라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라’ 했을 때 그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이때 무리들이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게 영광을 돌렸다.
저는 이것을 한룰의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 중풍병자처럼 자기들이 착취당하는 운명을 한탄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그 부당한 제도와 그 제도를 타고 배부르게 사는 자들을 향하여 깊은 울분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그들이 1970년 대에 들어오면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억울하다고, 우리도 사람이라고, 우리의 인권을 짓밟지 말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마치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호소했듯이 그들은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온 인류를 향해서 외쳤던 것이다. 이 외침이 오늘의 사무직 노동자들까지도 참여하는 운동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외치는 것을 사회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이 하는 것이 공산주의 수법이라고 하면서 정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이것에 민중들이 호응했고, 일반사회도 그들의 외침이 정당하다고 인정하게 됐다. 학생도, 교회도, 언론인도 그들 편이 되었다. 이것은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는 선포와도 같았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해했고, 사회와 바른 관계에 서게 됐다.
이렇게 되면서 그들은 새사람이 됐다. 그들의 깨달음은 깊어 갔고, 그들의 꿈은 높아 갔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들의 임금이나 노동환경을 위하여 투쟁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립하자 그들의 의식은 장족의 발전을 해서 이 땅의 민주화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투쟁하는 정신적인 거인이 됐다.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천생연분’이라는 시는 이와 같은 성숙한 노동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는 그의 노동 운동의 둘도 없는 동료인 동시에 따뜻한 이해로 감싸주는 아내를 예찬한 다음,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한다.
도중에 깨진다 해도 / 우리 속에 살아나 / 죽음의 역사를 넘어서서
이른 봄마다 당신은 개나리, 나는 진달래로 / 삼천리 방방곡곡 흐드러지게 피어나
봄바람에 입맞추며 옛 이야기 나누며 / 일찍이 일 끝내고 쌍쌍이 산에 와서
진달래 개나리 꺾어 물고 / 푸성귀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젊은 노동자들이 모습을 보며 / 그윽한 눈물로 지자, 여보야 /
그는 자신이 화려한 내일에 살지 못한다 해도 오고오는 세상에 사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피땀으로 행복하게만 된다면 그것으로 흐뭇해 하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이 그의 죽음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평화가 있을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에 기쁨을 느끼시는 고귀한 모습과 흡사하다. 어떻게 이와 같은 고귀한 구원받은 경지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한이 많은 자리에 중풍병자처럼 앉아 있지 않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여명의 닭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 그의 삶의 당연한 권리를 찾아 주님 앞에까지 나왔었기 때문이다. 그 삶의 광장에서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과 화해하고 약속의 내일을 향하며 전진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이런 삶의 적극적인 전진을 말한다.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한탄으로 삶을 갉아먹는 것을 죄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적극적인 삶은 죄에서 해방이요, 하나님과의 화해요 부활이다. 이와같은 믿음의 삶은 모두를 놀라게 하는 기적을 낳고야 만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번 사순절 기간에 우리 가슴에 맺힌 모든 한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자. 우리가 가진 모든 짐을 벗어 놓자. 그리고 우리 가슴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가득 채움으로 믿음의 새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7-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