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타작 / 곽주현
추석 성묘를 하고 오는 길에 농장에 들렀다. 일주일 전에 옮겨 심은 배추 모종이 아직도 힘을 못 타고 쭉 늘어져 있다. 이때쯤이면 뿌리를 내려 잎이 어른 손바닥 크기로 자라야 한다. 뜨거운 햇살에 병충해까지 심해서 무, 배추가 몸살을 앓는다. 고추밭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난 5월, 지인이 자기 아들이 육묘장을 운영하고 있다며 채소 모종을 가져가라 했다. 그가 작년 가을에 농장에 들렸기에 무, 갓, 배추, 대파 등 김장감을 원하는 대로 뽑아 주었다. 김장해서 겨우내 잘 먹었다며 모종이라도 줘야 빚(?)을 좀 갚을 것 같다며 꼭 오라 한다. 고추 300주와 오이를 여섯, 가지 모종도 다섯 개를 얻었다. 그렇게 많은 고추 농사는 처음이라 걱정이 되었지만, 맘먹고 잘 지어 보겠다며 정성껏 심었다.
모든 농사가 다 그렇지만 고추 또한 잔일이 많다. 두둑 양쪽으로 지주대를 세우고 자라는 키에 따라 줄을 서너 번 친다. 늘어진 가지를 잡아 끈으로 일일이 하나씩 묶어주는 작업도 함께 해 주어야 한다. 고추를 잘 키워보려고 초봄부터 퇴비, 복합 등 밑거름을 충분히 주는 등 준비를 단단히 했다. 수확할 때까지 두세 차례 웃거름도 준다. 어릴 때는 옆 순이 많이 자라는데 그대로 두며 양분을 빼앗겨 굵은 열매를 맺지 않으므로 시차를 두고 몇 번씩 꺾어준다. 아내는 그때마다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요리하여 밥상에 놓는다. 어린잎을 살짝 데쳐서 참기름을 듬뿍 붓고 무친 나물이 식탁에 오르면 젓가락질이 바빠진다. 또 가지가 분화되기 전에 그루마다 한두 개씩 열리는 고추도 모두 따 준다. 그래야 나중에 열리는 열매가 실하게 큰다. 이것도 버리지 않고 조림해서 먹는다. 작물을 키우다 보면 이렇게 소소한 반찬거리가 자주 생겨 밥상이 늘 푸짐하다.
열매가 한창 열리고 자랄 때는 고추에 기름을 칠해 놓은 것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돌아, 가지고 놀고 싶을 만큼 예쁘다. 작황이 좋아서 길이가 한 뺌을 넘고 제법 묵직하다. 노지 재배로 키운 것은 7월 중순쯤 되면 붉게 익어간다. 병 없이 잘 자란 고추는 검붉은 빛을 띤다. 가지가 부러지게 주렁주렁 열리고 그것들이 빨갛게 익어 햇빛에 반사되면 마치 꽃을 피운 것 같다. 지나가던 마을 분들이 고추 잘 키웠다고 한마디씩 한다. 이럴 때는 미소가 지어지고 절로 어깨가 올라간다. 이제 나도 전문 농사꾼이 되었다며 잠깐 우쭐한다.
고추가 익으면 일주일에 한 번씩 따내고 곧 약을 치고 물을 뿜었다. 올해는 여름 가뭄이 심하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5일마다 급수를 해주고 농약도 10일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뿌렸다. 해마다 거의 약을 안 치고 키웠는데 그러다 보니 두어 번 수확하고 나면 병충해를 입어 망가지기에 올해는 날짜를 맞추어 예방했다.
고추는 여름작물이라 건사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올처럼 불볕더위가 계속되면 더 죽을 맛이다. 작업하는 날은 동이 틀 무렵에 농장으로 온다. 그래야 땡볕을 좀 피할 수 있다. 그래도 일이 끝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옷 갈아입기도 쉽지 않다. 생수를 병째 벌꺽벌꺽 들이마신다. 더운 날 몸을 많이 쓰면 물을 충분히 마셔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작업하다 보면 곧잘 잊어먹는다.
따서 모아 놓으면 오지기는 하지만, 그 작업이 만만치 않다. 쭈그려 앉거나 엉거주춤한 상태로 두어 시간 일하고 나면 허리 통증이 심해 한참 동안 바로 서기가 어렵다. 따낸 것은 빛깔이 고와지라고 사흘 정도 음지에서 말린다. 다시 그것들을 맑은 물로 씻어 건조기에 넣는다. 요즈음은 햇볕에 말린다 해서 태양 고추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기계의 힘을 빌린다.
적어도 100여 근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기대감을 키웠다. 매년 고추를 가꾸어 보면 세 그루당 한 근을 딸 수 있어서 그랬다. 맏물을 땄는데 말려서 열다섯, 두 번째는 20근이었다. 비닐 포대에 담아 농장 방에 두었다. 특유의 매운 향 때문에 조금 거북했지만, 바라볼 때마다 흐뭇했다. 이러면 금방 목표량을 금방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웬걸, 고춧잎이 하나, 둘씩 누렇게 변해가더니 9월 초순이 되자 우수수 떨어진다. 고추의 암(癌)이라 부르는 탄저병에 걸려 버렸다. 살균제를 여러 번 뿌려도 거의 효과가 없다.
화순군에 사는 친구가 한잔하자며 오라해서 달려갔다. 고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집 것은 잎들이 싱싱하고 아직도 가지가 휘어지게 열렸다. 그는 농작물을 전혀 농약을 안 쓰고 키우는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친구도 올해 별일이라며 자기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 한다. 병균이 이곳을 모르고 지나쳤나 보다. 자연의 신비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럭저럭 50여 근 말렸다. 기대치의 반만 얻었다. 그래도 망하지는 않았다.
첫댓글 선생님 글을 늘 따듯해요.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기대치의 반이라도 얻으셨으니 대박입니다. 하하하
건강 잘 챙기면서 하셔요.
그럼요. 반이지만 대박이지요.
어휴, 고생하셨어요. 얼마나 힘들지 눈에 선하네요. 저는 허리 시술하고는 가보지도 않았어요. 작물들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돌아보세요.
자식농사 다음으로 고추농사가 제일 어렵다던 엄마 말이 생각납니다. 대단하시네요.
고추는 말리는 게 어려운데 요즈음 건조기 때문에 조금 쉬어 졌습니다.
고추 다섯 그루 키우고 있는 우리집 남자도 선생님처럼 때맞춰 순도 따주고 했는지 모르겠네요. 고춧잎 나물을 좋아하는데 아직껏 만들어 볼 생각을 못했습니다.
고춧잎 나물 맛있습니다. 꼭 요리해 드세요.
와, 전에 부모님 농사 짓는 것 보면 고추가 제일 고생스럽던데요. 그래도 돈은 된다고. 하하.
여름,
글과 고추 50근을 남겼으니 박수.
고추가 단위 수확액이 가장 높다고 해요.
올여름은 농사 짓기 정말 힘드셨을 거 같아요. 이 더위에 반타작도 잘하신 겁니다. 늘 그렇듯 글도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저희 남편도 100주 심었는데 20근쯤 거뒀어요. 아파트에서 태양초로 다 말렸답니다. 내년에 10주만 심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참입니다. 너무 고생스러워요.
선생님, 올해같은 무더위에 너무너무 고생하셨어요.
20근이면 성공하셨네요. 부군이 농사에 소질이 있으신가 봐요.
선생님, 텃밭이 그려지네요.
이 더위에 가꾸고 수확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심심풀이로 하는데요. 그래도 땀은 많이 흘렀습니다.
땀없이 고추가 열리겠습니까?
다들 대단하시네요.
선생님은 50근, 솔향 선생님은 20근.
텃밭 농사지은 지 7년이 넘은 남편은 작년에 100주 심어서 빵근.
빨간 고추를 따긴 해도 태양초로 만들지는 못해서 결국은 다 버렸답니다. 쓰지는 못하고요.
올해는 다섯 주만 가볍게 심었습니다.
태양초는 어려워요. 건조기가 없으면 고추 말리기가 힘들 겁니다.
비닐로 간단하게 가림막하고 말리면 가능합니다.
고추는 탄저병 와버리면 끝이랍니다. 그래서인지 따고 난 뒤에는 매번 약을 치더군요.
50근이면 김장하고 내년 고추 나올 때까지 넉넉하게 쓸 수 있는 양이지요?
매운 거 못 드시면 노란색 당조고추와 보라색 가지고추를 심어보기를 권합니다.
올해같이 덥고 가뭄이 심한 날씨에 가꾸고 거두느라 힘드셨겠어요.
줄 사람이 많아서 부족할 것 같아요. 세 아들딸, 건조기 주인, 모종 주인에게 나누어
주려고 계산해 보니 우리 몫은 거의 남지 않을 것 같아요.
우와, 대단하세요. 닭도 키우고, 고추도 수확하고. 전 학교 텃밭에 네 그루 심어서 아이들 집에 보내 주었는데 그것도 다 주지 못해 찜찜함이 남아 있습니다.
취미내지는 심심풀이로 농사를 짓는데 점점 힘들어져서
내년에는 좀 줄여야 겠습니다.
어쩜 이렇게 부지런하실까요? 건강하게 농사를 짓는다는 건 큰 축복이죠? 노년을 흙을 만지며 사는 선생님의 생활이 제게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 말하고 있습니다.
농사 짓기가 힘들 때도 있지만 보람도 큼니다.
선생님, 고추 키우시는 걸 보니 정말 성격이 찬찬하시네요. 남편도 작년에 퇴직하여 50주 심어서 무농약으로 고추 8근 빻았어요. 제가 줄 칠 때 옆에서 도왔는데 살짝 힘들기는 했어요. 고라니군이 그물을 뛰어넘어 어린 고춧잎을 따먹는 바람에 힘들었거든요.
올해는 말뚝도 높이 그물도 높이 쳐서 그 아이들이 옮겨 갔는데 그들의 거처를 궁금해 하다가 남편한테 핀잔도 들었답니다. " 참말로 자네는 부처님이네." 하면서요. 올해처럼 무서운 여름, 남편은 목포에서 진도로 왔다갔다 하면서 작년처럼 8근 예상 하네요. 선생님의 글에서 남편의 땀흘리는 모습이 겹쳤습니다. 농사도 그리 깔끔히 하시면서 글도 부지런 하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부군이 작물 가꾸시는 걸 좋아하시나 봅니다. 땅이 사는 곳과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진도에서 농사를 짓는다니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