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大道汎兮, 其可左右. 萬物恃之以生而不辭, 成功而不居, 衣被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矣. 萬物歸焉, 而不知主, 可名於大矣. 是以聖人能成其大也. 以其不自大, 故能成其大.
(자연으로서의 면모와 무위로서의 면모가 모두) 큰 도道는 (그 양편의 면모를 모두) 둥둥 떠다닌다! (따라서 오로지 그러한 도道의 양편의 면모를 모두 얻고 아는 성인) 그만이 (세상의) 왼쪽 (사람들)과 오른쪽 (사람들 양편)을 (모두 도道에) 맞게 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성인이 가지는 바가 있는 도道) 그것을 기댐으로써 살아가게 되지만, (성인은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말하지 않고,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이루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을 (두루) 덮어주지만, (그들을 일부러 일삼아) 주재하는 바를 일삼지 않는다. (이른바, 성인은)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성인은) “(유위가) 작은 사람”이라 이름 지어 불릴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성인에게) 되돌아가지만, (성인이 일삼음을) 주재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는데, (따라서 성인은) “(무위·자연이) 큰 사람”이라 이름 지어 불릴 수 있다. (이른바) 따라서 성인은 그 (자신의 이름이 저절로 그러하게 지어 불리는 바를) 커지게 하기를 잘하게 된다. 이른바, 성인은 일부러 일삼아 “(자신을 공功이) 큰 사람”이라 이름 지어 부르지 않는데, 따라서 (성인은) 그 (자신의 이름이 저절로 그러하게) 커지게 되는 바를 이루기를 잘하게 된다.
大, 道. 道之, 全也.
(자연自然·性·體으로서의 면모와 무위無爲·命·德·命으로서의 면모가 모두) 큰 것이 도道이다. 도道는 (자연自然·性·體으로서의 면모와 무위無爲·命·德·命로서의 면모가 모두) 오롯한 바이다.
得道之一偏者, 亦自以爲道矣. 而不該不偏. 知一而不知二. 能彼而不能此.
(그런데) 도道의 (양편의 면모 중 어느) 한편(의 면모)을 얻은 사람은 스스로 말한다. “(나는) 도道를 얻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도道의 양편의 면모를 모두) 갖춘 사람이 아니고, (도道의 양편의 면모에) 두루 이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道의 어느) 한편(의 면모)을 아는 사람이지, 양편(의 면모)을 (모두)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道의 어느 한편의 면모) 저것을 (얻거나 알기를) 잘하는 사람이지, (도道의 양편의 면모) 이것을 (얻거나 알기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雖伯夷之淸, 下惠之和, 亦未免乎此也.
(예를 들어, 『맹자孟子』가 「만장장구하萬章章句下」에서 일컬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은殷나라 정벌을 막아섰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王子) 백이伯夷는 (무위無爲가) 맑았던 사람이고, (세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났지만 원망하지 않았던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대부) 유하혜柳下惠는 (무위無爲와 더불어) 어우러졌던 사람이다. 이른바, (그들은 모두 도道의 한편의 면모) 이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唯聖人, 全體此道. 汎汎乎. 如不繫之舟. 無所適莫. 可左, 而左. 可右, 而右. 此, 所以能徧覆萬物也.
오로지, 성인만이 이 (양편의 면모가 모두 큰) 도道를 오롯하게 얻고 안다. (따라서 오로지 성인만이 비유컨대 도道의 그 양편의 면모를) 둥둥 떠다닌다! 마치, 묶지 않은 배처럼. (따라서 오로지 성인만이 도道의 어느 한편의 면모로만 나아가거나, (다른 한편의 면모로만) 저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오로지 성인만이 세상의) 왼쪽 (사람들을 도道에) 맞게 한다. (세상의) 왼쪽 (사람들에게) 나아간 채. (세상의) 오른쪽 (사람들을 도道에) 맞게 한다. (세상의) 오른쪽 (사람들에게) 저문 채. 이것이 (오로지 성인만이) 세상 사람들에게 두루 이르고, 세상 사람들을 (두루) 덮어주기를 잘하게 되는 까닭이다.
萬物恃之以生, 以下三句, 極言其功, 用, 之, 至大, 而無迹, 可尋也.
만물시지이생萬物恃之以生 이하 세 문장은 (이런) 뜻의 끝점에 이른다. “(따라서 성인은) 그 공功이 일삼아지게 되고, (따라서) 그것이 큰 바에 이르게 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발자국을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따라서 그 이름이 크게) 찾아지게 된다.”
道, 以虛爲軆. 故有道者, 常無欲. 無欲, 則謙冲. 而不自大. 故可名於小也.
도道는 (유위有爲를) 텅 비움(虛; 自然·無爲)을 (일삼음의) 속바탕(軆; 體)으로 삼는다. 따라서 도道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 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다. (도道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은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그는 무위無爲·자연自然을 자신의 위로 높인 채, 자신을 무위無爲·자연自然의 아래로) 낮추고, (유위有爲를) 텅 비운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무위無爲·자연自然이) 큰 사람”이라 (일컫)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유위有爲가) 작은 사람”이라 이름 지어 불릴 수 있게 된다.
由道言, 則曰, 衣被萬物而不爲主. 由物言, 則曰, 萬物歸焉, 而不知主. 萬物, 歸焉. 而皥皥乎. 莫知爲之. 唯天地爲, 然. 斯, 亦可以謂之大矣.
(일삼음의 주체로서, 성인이 가지는 바가 있는) 도道를 말미암아 일컬은 것이 “의피만물이불위주衣被萬物而不爲主”이고, (일삼음의 주체로서) 세상 사람들을 말미암아 일컬은 것이 “만물귀언萬物歸焉, 이부지주而不知主”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道를 가지는 바가 있는 성인에게) 되돌아간다. 그러나 (성인은 도道·無爲·自然가 아주) 밝고 밝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성인의 일삼음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살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성인의 일삼음을 또렷하게) 알아차리거나, (성인의 일삼음을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바) 그것을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이른바, 하늘과 땅이 일삼는 모습이 그러하다. (따라서 성인) 그는 “(무위無爲·자연自然이) 큰 사람”이라 일컬어질 수 있다.
以其不自大, 故能成其大, 猶前章, 夫唯不居, 是以不去, 及以其無私, 能成其私之意.
“이기부자대以其不自大, 고능성기대故能成其大”는 앞 (제2)장의 “夫唯不居, 是以弗去(이른바, 오로지, 성인은 자신의 공功에 일부러 일삼아 자리하지 않는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성인을 일부러 일삼아 떠나가지 않게 된다)”와 (제7장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그 유위有爲를 자기 멋대로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자연自然을 자기 마음껏 일삼는 바를 이루기를 잘하게 되었다)”의 뜻과 (더불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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