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母情)의 바닷길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충무공의 모친 변씨 부인이 아들이 포박당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는 말을 듣고 격랑을 헤치고 본가가 있는 아산으로 향한 것은 1597년 음력 3월 그믐날이었다. 83세의 고령으로 작은 배에 의지하여 험한 바닷길을 떠나기엔 무리였지만 아들이 누명을 쓰고 함거에 실려서 압송이 된 이상, 더는 은거지 고음천(熊川)에 계속 머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배에 오른 건 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죽더라도 아들 가까이 다가가 무사귀환을 빌고 자 하는 일념이었다. 항해 길은 실로 험난했다. 높은 풍랑과 멀미로 인해 탈진을 하여 고향 가까운 안흥량에 이르렀을 때는 사경을 헤매었고, 종내는 뭍에 오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간 거처 온 섬만 해도 몇 군데였던가. 출항지인 여수 웅천에서 낭도와 둔병도를 거쳐 고흥 발포, 금당도, 해남 어진, 진도 백파진, 그리고 목포 장산도와 영광 낙월도를 거쳤다.
당신이 숨을 거둔 날은 음력 4월 11일. 장군이 가혹한 고문으로 옥에서 풀려나 상한 몸을 이끌고 백의종군 길에 올라서 고향 가까이 내려오던 즈음이었다. 그 이전에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 나가 작전을 구상하던 중 금부에서 내려온 관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선조로부터 모진 고신을 두 차례나 당했다.
"꼭 죽여야 하고 용서할 수 없다."
선조의 노여움은 대단했다. 국왕인 자기를 업신여기고 적을 뒤쫓아 물리치지 않았다며 노발대발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함과 함정이 있었고, 어명을 받들지 못할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일본 첩자 요시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데다, 부산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을 피해 그 배후지역인 울산을 공략한다는 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격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장군더러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고 구실을 붙였지만 지금 당장 지키고 있는 견내량을 비운다면 아군이 위기에 내몰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선조는 막무가내로 어명을 어겼다며 앙앙불락하였다.
그 서슬에 어느 신하도 감히 앞에 나아가 고하지를 못했다. 그 살기등등한 분위기는 평소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던 류성룡 대감마저도 고개를 가로 저을 정도였다. 한데 이때 72세의 중추부사 정탁대감이 노구를 이끌고 진언에 나섰다. 도도한 인재론을 펴며 이순신만은 살려서 나라를 지키게 해야 한다며 제발 몸을 상하게 만드는 고신만은 말아달라고 읍소를 했다.
그 명문이 전해지고 있는바 긴 글을 다 옮길 수가 없이 간략히 요약하면 이러했다.
“성상께서는 이가를 어여삐 여기고 사랑했으나 미욱한 자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죽어 마땅할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그만한 사람도 찾기 어려우니 성상께서는 부디 한번만 선처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이가도 마침내 뉘우치고 잘못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가는 이미 고신을 당하여 몸이 온전치 못하옵니다. 더 이상 고신을 가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성상의 뜻도 아닐 것이며 어여삐 여기시는 마음을 신은 잘 압니다. 크나큰 은혜로서 미욱한 이가를 용서하신다면 살려준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분골쇄신하여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장군을 살린 신구차(伸救箚)이다. 목숨을 건 진언에 선조도 마음이 흔들렸는지 고문을 중단하고 장군을 풀어 주었다. 그날이 음력 4월 1일. 옥에 갇힌 지 한 달 만이고 모친이 기거지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지 하루 뒤였다.
장군은 풀려나 곧바로 백의종군을 할 임지로 향했다. 13일 만에 고향 아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거기서 모친의 부음을 전해들을 줄이야. 아직도 죄인의 몸인데다 , 도원수 권율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백의종군의 길이 기다리고 있는데 마냥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장군은 백암리 바닷가 해암에서 모친을 뵙고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본영(전라좌수영)에서 보내온 관으로 6일 만에 장례를 치르고 금오랑의 채근에 서둘러서 출발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장군은 모친에 대한 효심이 각별한 면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가정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한다.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가문이었지만 조부가 기묘사화에 연루가 된 바람에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장군은 서울 삼청동에 살다가 어머니 고향인 아산으로 낙향하게 되었다.
장군이 임지에서 모친을 모신 것은 정읍 현감 때부터다. 당시는 형까지 작고하여 어머니와 어린 조카들을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당시만 해도 근무지에 가족을 데려온 건 남솔(濫率)이라 하여 금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내려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뱃길로 십리길이 넘은 외진 고음천에 어머니를 모셨다.
나는 장군께서 모친을 모신 건 심리적으로 안정을 얻었을 뿐 아니라 전장에 나아가 승리하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친은 비록 노쇠하였으나 담대하여. 아들이 문안을 오면.
“나라 구하는 일이 급하니 어서 나아가 싸워라”라고 단호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헌법 재판관을 지내면서 <이순신>이란 책을 내고 선양사업을 펼치고 있는 김종대 선생은 장군의 뛰어난 점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자각과 수양을 바탕으로 대 인격을 이룬 성자요 군자라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공직자의 사표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항상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성공한 지도자임을 든다.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구국이란 목표달성에 성공했고 열세의 조선수군을 강군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감을 표한다. 하지만 장군은 복무 시에 시련도 많이 겪었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 그걸 말해준다. 그렇지만 사람의 일이란 반드시 사필규정인 것. 끊임없는 선조임금의 시기와 서인세력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허물을 벗고 한국인이면 누구나 우러르는 민족의 사표가 되었다.
그의 삶은 ‘죽게 되면 죽은 것이다’라는 결연한 의지로 뭉쳐진 것이었다. 그러한 장군과 장군의 전투지역을 떠올리면서 모친 변씨 부인의 마지막 바닷길을 생각해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떠났을까. 당신의 안위는 생각 할 겨를 없이 오직 아들의 무사복귀만을 바라지 않았을까. 노구에 얹힌 시름의 무게가 마치 물 먹은 솜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져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마음을 천근만근 짓누른다. (2020)
첫댓글 효심도 각별하셨던 충무공 이순신장군님의 일대기를 보는 듯 합니다. 특히 여수와 관련이 많으신
이순신장군님 ! 우리도 모두가 본받아야 할 충심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임병식 선생님 !
이충무공 모친을 생각하면 그 아들에 그 어머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420여년전 83세면 지금으로 보면 110세에 가까운데 그 노구에도 아들을 구하려고 험한 길을 떠난 모습은 그저 마음이 숙연해 지기만 합니다.
훌륭한 어머니 밑에 훌륭한 자식이 나온다고 합니다.
충무공의 어머니 변씨는 초계 변씨로 내가 사는 곳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적중입니다. 충무공이 백의종군으로 초계에서 권율장군과 함께 한동안 머물다 다시 좌수사로 벼슬을 받고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청석님, 충무공의 글은 감격입니다.
여수는 전하좌수영 본영이 있던 곳으로 이충무공의 흔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여수문화원 이사로 수년간 활동하다보니 관련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알려지거나 혹은 지 않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새롭게 조명하는 뜻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읽어주시고 댓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