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서서 책 읽는 여자
조명제
큰 서점, 어쩌다 들르면 시집
코너가 달라지곤 하지.
오늘은 불온한 시집 두 권을 사고,
신간 소설과 에세이 판대도 살펴본다.
바람이 불지 않아 닫힌 책들
사이사이,
칼눈으로 책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들
책의 표지도 유행을 따라 흘러가고,
구매자들은 있는 자에게 떡 하나 더 준다.
굵은 짜임의 아이보리색 V자 목 티에
검정 치마바지를 입은 아가씨는
서서 판대 위의 책을 내려다보며 읽고 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따금 거들떠보아도
그녀는 그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문장의 사막을 건너고 있는가 보다.
즐거운 오독은 길을 잃고, 없는 길에서
낙타가 낙타봉의 물을 끌어다 쓰듯,
내 안의 문장과 나 밖의 문장을 들볶아
길을 내어 나아가는 사람이여.
맞은편 기념품 코너에서, 생일이 가까운 아이의
선물을 사러 골몰히 돌아다닐 때에도
다시 서가 판대 쪽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다.
우윳빛 피부의 얼굴, 검은 눈썹의 유려한 아가씨
소설 한 편을 선 채로 다 읽을 셈일까.
오른쪽 머리채는 휘어져 내리다가
바깥쪽으로 살짝 꼬부라져 감기고,
왼쪽 앞머리의 채가닥은 눈을 반쯤
가리며 두어 번 휘어져 흘러내려
날지 못하는 새의 날개를 다독여 키운다.
당신의 생각이 어쩜 나의 생각이고,
나의 느낌이 어쩜 당신의 느낌이듯,
당신의 사유는 나의 사유와 다르고,
나의 문법은 당신의 문법과 너무 달라,
나는 문장 위에 다시 나의 문장을 쓸 터인,
묵독黙讀의 그녀는
적당한 오독이 텍스트를 부풀게 해 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책 읽기의 씨름에서 매번 지고도 이기고
이기고도 진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로 돌아와
마주친 무지無知와 대화하며, 한 점 무명無名의
촛불을 켠다. 미소로 열리는 어둠,
그녀가 사라졌다.
잡지
조명제
시골 면 소재지의 밤길을 서성이는
촌 건달패들의 늘어진 그림자 같은 삽화의 고향
세상의 책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책 잡지.
그 雜잡이 좋다. 복잡한 마음을
층층의 기사와 재간 있는 화가들의 삽화가
적당히 뭉개 주던 책,
그리운 삽화는 사라지고
디카시대의 사진이 디밀고 들어왔지만,
삽화의 자리는 따로 있다.
글만 있는 맹탕의 잡지가 권위인 양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 풍경
어쩐지 볼썽사납다.
대중의 마음을 요모조모로 꿰고
識者식자의 뻑뻑한 심리를 봄눈처럼 녹여뜨려 주던 책 잡지,
삼류잡지마저도 잡지는 잡지다.
뿌리 깊은 수치와 금기로 性교육이라곤 아예 없던 시절에
섹스의 방법과 체위를 적나라히 가르치고, Q&A 독자코너에선
(陰毛음모에 벌레가 생겼어요.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
까요?/ 어떤 아가씨의 질문은 약과) 기상천외,
별의별 고민과 전문가의 교묘한 답변이 인기였지.
많고 많은 잡지 중 시 잡지가 아직
다 사라지지 않고 가을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것은 천만다행인가.
인간의 정신교양이 백척간두에 매달려 있는 풍경,
잘 짜여진 시 잡지만큼 콧대 높은 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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