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병원 문턱
부산 남천교회 장백희 장로
2011년 가을, 교회 설립 60주년 기념 예배드리고, 용인 일터로 올라왔다. 감기 증세가 있는지 목이 가라앉고 쉰 목소리가 나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가까운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감기 증세처럼 예사롭지 않은 상태를 직감했는지, 후두 내시경을 코에 깊이 넣어 진찰했다. 의사는 서슴없이 성대결절이라 진단하고, 가장 신뢰받는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김 교수에게 얼른 가보라고 추천서를 써주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놀라 그날 병원으로 득달같이 달려가 접수처에 진료를 신청했다. 그런데 창구 직원은 나의 어설픈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빤히 바라보며, ‘특진 교수님은 아무 날이나 와서 바로 진료를 할 수 없고요. 교수님의 진료 요일과 시간에 맞게 예약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하릴없이 아쉬움을 삼키며 담당 교수 다음 진료 일자에 신청하고 돌아왔다. 예약 한 날에 찾아간 김 교수는 3층 이비인후과 선임 교수였다. ‘교수님은 북쪽 수술실 방에 있으니 그리로 가보세요’라고 간호사가 친절하게 말했다. 나는 이 병원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가슴 두근거리며 천천히 마루를 지나 북쪽 복도로 무거운 발을 옮겼다. 복도 위에 [암 병동, 수술실]이라는 큰 글자가 눈에 번쩍 띄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암과 수술이라는 단어는 나의 정신을 하얗게 색칠하여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암 검사부터 해야 하나! 왜 나를 암 병동으로 가라고 했을까!’ 겁먹은 표정을 애써 지우고 교수를 만나 추천서를 건넸다.
교수는 간단히 진찰하더니 ‘성대결절’ 맞다 하며, 신검 후 수술하자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온화한 표정과 음성은 환자에게 두려운 마음을 덜어주는 탁월한 상담심리 의사이기도 했다. 돌아 나와 차분한 마음으로 지정해준 과마다 찾아 검사하기 여념이 없었다. 심전도, 대소변, x-ray 촬영, 음성, 채혈 등. 특히 혈액 채취는 네 개의 시험관에 그득히 채울 정도로 내 몸의 진홍 선혈을 얼추 다 빼내어 오장육부를 옥죄었다. 두 주 후 김 교수는 검사결과를 종합 검진하고, 수술 일을 알려주었다. 수술하기까지 용인에서 병원을 대여섯 번 왕복했다. 버스로 오가면서 그리 유용하지 않은 잡다한 생각들이 수천 발의 화살들로 예리하게 날아와 머리에 박혔다. 과연 수술하면 정상으로 치유될까! 걱정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다.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 그리 맘먹으니 차만 타면 기도했다.
12월 12일 수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는 물론 딸들과 사위들이 무지 걱정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가족이 있다는 혈연의 정이 얼마나 큰 복인가! 수술하는 날, 가게를 도저히 비울 수 없는 아내의 마음은 몹시 애탔다. 사정을 잘 아는 큰딸과 사위가 멀리서 달려와 보호자로 수술하는 동안 대기했다.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이름을 불렀다. 간수의 손에 죄수가 떨며 감옥으로 불려 가듯, 내 발은 간호사의 손에 이끌리어 덜덜 수술방 문을 넘었다.
대기실에는 양편으로 수술할 환자와 회복할 환자들이 병상에 나란히 누워있다. 환자들은 창백한 얼굴에 수심을 가득 안은 채, 눈은 허공을 응시하며 반쯤 지그시 감고 있다. 이름 확인 후,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혈압을 재고, 링거를 손에 꽂았다. 한참 후, 링거가 잦아들자 이름을 확인하더니 중환자를 보호하듯, 아니 숨을 거둔 사자에게 씌워놓는 흰색 천처럼 얼굴과 온몸을 덮었다. 그리고 두 간호사가 내 병상을 천천히 밀었다. 눈을 가린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미로를 헤매는 듯, 이리저리 문을 지나 굉장히 밝은 조명 아래에서 멈추었다. 그곳이 수술실대로 짐작했고, 정신이 생생하여 의료기 다루는 미세한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마취하는구나!’ 긴장감이 솟는 순간 내 기억회로는 간데없이 무의식으로 사라졌다.
얼마를 지났을까! 마취에서 깨는 듯, 나선형 소용돌이 파장이 빠르게 지나고, 어렴풋이 정신이 살아나며, 목이 몹시 따가웠다. 누운 병상이 구르더니 처음 대기했던 자리에 고정하고, 수술 후 주의 사항을 말했다. 중요한 대목은 2주간 일체 말을 금하고, 그다음 음성 높여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무거운 물건 드는 일 피하라. 목이 몹시 타서 물을 마시는데, 바늘로 목을 찌르듯 따갑게 통증을 느껴 물을 넘기기에 여간 거북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르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서 밖으로 나왔다. 딸과 사위가 그때까지 복도에서 근심 어린 낯빛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걱정시켜 미안했지만, 한편 내게는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고마운 마음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다행히 입원은 안 해도 무방하여 한숨 돌렸다. 수술비야 정해진 일이지만, 만약 대학병원에 입원한다면, 입원비도 꽤 부담될 뻔했다. 음식을 먹는 일도 어려웠다. 처음 며칠은 미음으로 연명했고, 다음은 죽과 부드러운 음식을 들었다. 언어소통은 불편했지만, 백지에 글로 써서 전달했다. 수술 예후 진단을 위하여 처음에는 보름과 1개월, 그리고 3개월마다 검진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2011년 12월 수술한 지 5개월도 안 되어 4월 중순부터 목이 쉰 듯 말이 불편했다. 이상 징조 예감이 들어 진료 예정일 전에 병원을 찾았다. 김 교수는 친절하게 진찰하더니 ‘이 녀석이 왜 말썽을 부리나!’ 의사는 수술을 다시 하자고 쉽게 말했지만, 나의 동공은 하늘이 노랗다. 한 달에 걸쳐 검사와 수술, 금언과 금식, 음성훈련을 거듭하다니! 기막힌 일인데 어쩌겠나! 하릴없이 한 달 걸쳐 신검하고, 6월 4일 수술 일을 잡았다
반년도 안 되어 재발했으니, 또 수술해도 온전히 회복할 거라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음도 점점 약해지고, 입맛도 잃고, 열정이 식으니 기력도 침윤되어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부득이 아내가 힘든 내 몫까지 맡아 일했다. 아내가 무거운 물건을 들고, 이리저리 뛰며 쩔쩔매고 애쓰는 모습을 목도 하니, 칼로 가슴을 저미는 연민이 일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저러다 혹시 아내마저 지쳐 쓰러지지 않을까! 종일 혼잡한 생각에 휘말린 채, 속절없이 자신과 부단히 싸웠다.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 있다고.’ 묵상하면 마음이 좀 편했다.
2012년 6월 2차 수술 때는 처제 정 권사와 동행했다. 아내가 가게를 비울 수 없어 동생에게 부탁했다. 처제는 열 일 제치고 찾아와서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대기 시간이 길어 휴게실에서 대화하다가 처제에게 내 심정을 고백했다. ‘내가 하나님께 서원한 일을 다 못 지켰다. 지금 그 일로 죄의 몫을 편달 받는 듯싶다. 선교지 교회 건축 헌금 일부를 못 드렸다. 봉헌은 이미 끝났지만, 어떤 방법이라도 서원을 지켜야겠다.’
2차 수술하고, 3개월마다 점검하러 병원을 드나들었다. 고통의 체험을 수없이 반복하니 걱정도 다소 느슨해졌다. 질병도 오래 지니면, 친구가 되는지 성대결절과 점점 친숙해졌다. 주께 서원한 부분은 때마침 서아프리카 말리, 니제르 국가 백성들이 기아로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월드비전에서 회원인 내게 구호 신청을 해 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아로 굶주리는 나라에 양식을 보내주었다. 서원을 온전히 이루니, 마음이 후련하다.
2013년 4월 말에 용인 고물상을 타인에게 넘기고 부산 집으로 내려왔다. 성대도 불편한데, 허리도 아파서 고물상을 경영하기 어려웠다. 아내와 상의하여 집을 팔고, 작은 상가를 사서 세 받아 생활을 꾸리기로 했다.
2년 후 2015년 8월 말에 상경해 검진했는데, 또 성대결절 진단을 내렸다. ‘또 이 녀석이 말썽을 부리는군.’ 김 교수의 한마디에 나는 당혹스럽고 난감했다. ‘한 달 신검, 수술, 금언, 금식, 음성훈련.’ 주마등처럼 스치며 아찔한 두려움이 엄습해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1.2차 때처럼 오래 낙망하지 않았다. 필경 주께서 나를 연단시키는 거라고. ‘재재 발병 상태에 왔음은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다는 묵시일지 모른다. 존재의 사유를 묵상하니 오히려 담담하다. ‘주님은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 : 2) 문제는 부산에도 병원이 있는데, 서울까지 천 리를 오르내려야 한다. 경비는 물론, 장거리 시간을 소화하는 번거로움도 짐이었다. 한번 대학병원 문턱을 밟은 발걸음이 빼도 박지도 못 하는 붙박이 환자가 되었다.
3차 신검 후, 수술할 때는 아내가 동행했다. 수술 후 매년 겨울 여름 두 번 성실히 검진했다.
2019년 12월 17일에도 상경하여 강남터미널에 도착했다. 날씨가 봄날같이 화창하다. 육교를 건너 서울성모병원 경건한 로비에 들어섰다. 성탄절을 맞아 로비 코너에 베들레헴 마구간을 옮겨 왔다. 마리아와 요셉이 지켜보는 말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가 누우셨다. 동방박사들, 목자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 예수께 경배하며 귀중한 예물을 드린다. 나도 잠시 발을 멈추고 경배드렸다. ‘우리의 죄 짐을 푸시고, 병든 약자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3층 이비인후과에 들어가니, 흰옷 입은 레지던트들의 고결한 인술 아우라를 자아냈다. 김민식 교수가 내시경으로 진찰하더니, 그의 온유한 얼굴에 유난히 밝은 미소가 번졌다. ‘아주 좋습니다. 이제 안 오셔도 됩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은택에 감사합니다.’ 3차 수술 후 4년 만에 완쾌 판정. 그 순간 기쁨의 감격이 밀려와 얼마나 가슴이 북받쳤는지! 세상이 아름답고 눈부시다. 성대가 바이러스에게 볼모로 압도당하여, 그 모진 손아귀에 매여 시달리고 고통받았는데, 발병한 지 8년 만에 시련의 바이러스 감옥에서 석방했다. 주신 고난과 연단, 기쁨도 하나님의 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