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의 수단인 갈등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젊은 시절부터 습관 되어온 행동이 나도 모르게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몸이 날렵해서 행동이 민첩했고 따라서 행동이 빨랐습니다. 그런 행동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 육체가 약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동은 육체를 무시하고 민첩하게 움직이려고 합니다.
나이든 분들이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말들을 하셨는데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요즘 많이 느끼기 시작합니다. 마음은 청춘이라고 해서 갑작스런 행동을 하다가 원치 않는 불행한 일을 당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육체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젊은 시절처럼 행동하려다가 졸도하기도 하고 관절에 무리가 생겨 고생하는 분들이 우리 곁에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존재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육체가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에 몸에 베인 대로 갑자기 일어난다든가 급격한 행동을 한다든가 해서 무리가 생겨 병을 얻듯이, 육체는 장성한 성인이지만 영은 이제 방금 태어난 어린 아이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육체에 의지해서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영이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환경에 약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않도록 일정 기간 동안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접근을 금지합니다. 그리고 성장할 때까지 어른들이 보호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특별히 만들어 제공합니다.
이렇게 극진한 보호 속에서 성장해야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듯이 영도 마찬가지여서 갓 태어난 시기인 거듭난 직후에는 각별한 보호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깊이 생각하라’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히브리서 3:1절에 나오는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는 말씀에 사용된 헬라어는 ‘카타노에오’라는 단어인데 누가복은 20:23절에서는 ‘아시고’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깊이 생각해서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에 적용되는 것으로 영어에서는 ‘ponder’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pond’와 같은 뿌리에서 온 파생어인데 물을 가두어둔 연못이나 늪지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ponder’는 자신의 의식 속에 상황을 저장해 두고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깊이 생각하라’라는 이 말을 수식어 없이 단순 단어 ‘katanoeo’를 사용함으로써 ‘알기까지 생각하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여러 가지 상황을 다 적용해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우리에게는 갈등이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갈등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고 그래서 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대충 살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면 알수록 갈등만 생기고 혼란만 깊어집니다.
그래서 세상일로도 골치가 아프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데, 마음의 위로를 받고 쉼을 얻으려고 종교를 받아들였는데 더 큰 갈등이 생기니까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경험하는 문제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를 정신 수양이나 쉼을 얻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생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이나 여가생활 정도로 여기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갈등이 생기는 것을 못 견뎌 하며 갈등하지 않기 위해서 대충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편하게 믿으면 되지 너무 깊이 빠지면 괴롭기만 해.’라면서 방관자의 위치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믿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성이니 능력이니 하는 말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배척하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적 성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깊이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대충 보아 넘기거나 타성에 젖은 태도로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자연의 몸으로 태어났고 그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몸에 익숙해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거나 영적 성장에 실패하는 까닭이 방금 갓 태어난 새로운 몸을 이해하지 못하는 편향성에 있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즉 겉 사람과 속사람에 대해서 그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단순히 자연인의 연속으로만 여기게 되면, 영의 실체를 전혀 새로운 주체적 인격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연인의 연장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는 늙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젊은 시절처럼 행동해서 육체를 병들게 하는 어리석음과 비슷합니다. 자연의 몸과 신령한 몸이 우리 속에 함께 공존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이 두 몸이 주체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몸에 두 주인이 있으므로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두 주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주체의 변환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하면 충돌이 생기는 것이며, 이것이 혼란이며 갈등의 배경인 것입니다. 주체의 변환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해서 충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극복하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영성 훈련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육체를 덧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육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육체는 언젠가는 벗어야 할 옷과 같은 것인데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지 전까지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는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이 겉옷을 어떻게 통제하여 속사람인 영의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주제는 바로 속사람의 성장과 움직임입니다. 자연의 몸은 우리가 이미 세상에서 배워왔고 눈만 뜨면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여러 가지 관습과 법규로 통제되며 학문으로 질서가 잡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연의 몸이 활동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으며, 육체가 이미 성장해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점에서 뒤 늦게 속사람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몸인 이스마엘이 더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뒤에 태어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괴롭힌다고 설명합니다. 육체를 따라 태어난 겉 사람이 약속을 따라 태어난 속사람인 영을 짓누르고 억압합니다. 이것이 갈등의 본질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갈등에 휩싸여 전혀 전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주제 앞에 서 있습니다. 즉 육체를 따르느냐, 영을 따르느냐 입니다. 로마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룬 글입니다.
영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자연인이며, 갈등의 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갈등은 육과 영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신령한 몸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선택(alternative)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이 올바를 때까지 갈등의 주제들을 계속 내어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에서 다가오는 문제는 자신의 선택을 주님의 시각에서 교정하기 위해서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만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저 역시 오늘날 이런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지식을 얻은 것은 바로 끊임없이 다가오는 갈등을 겪으면서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문제를 계속 당하게 하심으로써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갈등하면서 보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영적 지식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주의 길을 여는 지름길이며,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려는 주님이 만들어내시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은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생각하라.”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생각할 대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생명의 길이며, 우리 영의 주인이십니다. 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속사람인 영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갈등을 통해서 영에 접근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영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주체가 영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영의 일을 육의 일처럼 내어놓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아무런 의식도 없이 마주치게 됩니다. 자연의 몸처럼 즉 세상의 일처럼 그런 모양을 취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빌립보서 2:6~7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그와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설명합니다.
영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육신의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현실의 문제로 갈등하게 만드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영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게 되며, 어느 날 전혀 뜻하지 않은 때에 영의 실체를 마주치게 됩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온갖 문제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이에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게 주님이 설치해 놓은 그 영의 길로 한 걸음씩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은 그 영의 농도에 젖어들어 점차로 영의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도 모르게 젖어버리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며,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주님은 본격적으로 영의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육체의 모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며, 그것이 골치 아픈 문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의 본질입니다.
겉모습은 종의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본질이신 예수께서 숨겨져 있었듯이, 겉모습은 고민거리고 갈등이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숨겨져 있음을 아직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의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깊이 생각하는 버릇을 기르게 하시려는 주님의 은혜의 또 다른 수단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영의 일은 이처럼 먼저는 육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가 그것을 안고 갈등하는 사이에 영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영의 사람으로 나도 모르게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영은 생명입니다. 거듭나면 그 때부터 자라기 시작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가 주 예수님이시며, 그 수단과 과정이 이렇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갈등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