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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사이
이원우
• 『수필문학』 『지우문예』 『한국수필』 천료, 『한글문학』 소설 부문 신인상
• 국제PEN한국 본부 이사(현), 수필가협회 이사 ·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 역임, UNESCO 부산협회 사무총장 부회장 역임 한국전쟁문학회 자문위원(현), 대한가수협회 정회원(현) · 전 부산덕성토요노인대학장 21년 · 전 26사단 홍보대사 · 전 부산 명덕초등학교장 · Daum 선정 ‘오늘의 인물’
• 수필집 『어머니의 초상화』 등 15권, 소설집 『母部隊 여군 만만세』, 『인간 노무현』(전자 책)등 7권, 기타 3권 등 개인 저서 25권(共著 제외)
• KNN문화대상 · 화쟁포럼 문화대상 · 경기PEN문학대상 · 부산PEN문학대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 『한국수필』 제정 청향문학상 · 부산수필대상 · 표암문학 대상 · 부산북구문학대상 · 허균문학상 · 한국전쟁문학상 · 부산가톨릭문학상 ·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봉사 본상 · 부산교육상 · 황조근정훈장 · 자랑스러운 부산교대인상 ·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장 감사패(아동도서 1500부 현지 전달/ 동남아 4개국) · UNESCO부산협회장 감사패 1호
33년생이라면 만으로 아흔 살을 넘긴 나이다. 17세에 소위로 임관하여 6‧25 한국 전쟁에 참전한 P 소위는, 포천(浦川) 근처에서 온몸에 인민군의 공격을 받아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다. 의식도 가물가물하여 그냥 주검처럼 누워 있는데, 적의 병사가 이를 발견, 생명이 붙어 있음을 알고 저들의 사단장에게 보고한다.
인민군 사단장이 이 미소년(?)을 급히 치료하여 눈을 뜨게 만들었다. 이윽고 소위가 음식을 넘길 정도로 회복하자, 사단장은 회유에 들어간다. 귀순하여 자기 수하에 들어와, 복무하면 온갖 혜택을 아끼지 않겠다는 거다. 진급도 빨리 시켜 주고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여담인데, 소위는 워낙 인물이 잘생겨 전투에 투입되기 전, 주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단다. 너무나 티 없이 맑고 고운 얼굴이어서다. 더러는 그를 보고 여군(女軍) 같다고도 했더라나? 인민군인들 처음 그런 오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리란 추측이다.
어쨌거나 미성년이나 다름없는 P 소위가 그저 평범했더라면, 저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괴뢰군을 증오하고 애국심에 불타는 대한민국의 용감무쌍한 장교였다. 그는 대답하는 둥 마는 둥 얼버무리고는 위기를 넘겼다. 이래저래 둘러대고, 지혜를 발휘하면서 적의 야전 병원에서 한동안 지냈다. 사단장은 휴머니티가 뭔지 알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따뜻하게 배려해주었다.
석 달이 조금 지나서였다. 혼자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무렵 소위는 사단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하한다. 갖은 고생 끝에 부대에 복귀하고 보니, 아뿔싸 이미 그는 전사자로 처리되어있는 게 아닌가! 국방부 당국에서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다 유해가 없는 무덤을 만들고 묘비까지 세웠더란다. 그 앞에 선 젊은 소위의 처연한 심경은 어떠했겠는가?
그러고 난 뒤 수십 년이 흘렀다. 무덤과 묘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소위였던 이야기의 주인공은 퇴역 장군이 되기까지 수시로 거길 찾았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때 부인을 동반하고 자신의 유택을 참배(?)하는 것이다.
이건 전쟁이 낳은 상흔이긴 하지만, 그 결과만 보면 어쩌면 전사(戰史)에 감동으로 길이 남을 일인지도 모른다. 소위는 부대 복귀 후 중위에서 차례로 진급한다. 중령 시절에, 그는 강재구(姜在求) 대위가 중대장으로 있는 대대의 지휘관(대대장)이었다. 강재구 대위는 부하가 훈련 중 잘못 던진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쳐 산화한 살신성인의 주인공임은 천하가 안다. 당연히 P 중령은 ‘재구 대대장’이 되었다. 재구 대대는 베트남에 파병,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P 중령은 그 뒤 대령을 거쳐 마침내 준장으로 진급하고 나서 군복을 벗는다.
만으로 90세를 맞는 소위 아니 장군은 지금 지방 어느 도시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술과 담배는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운동에 열중하는 한편 소설과 시 창작으로 거의 하루를 보낸다.
얼마 전에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온 장군의 목소리엔 아흔 노인이란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힘이 실려 있었다.
“전우여, 난 갈수록 건강이 좋아지는 느낌입니다. 방금도 땀 흘리고 운동을 하고 왔습니다. 우리 백 살을 훌쩍 넘길 때까지 삽시다. 전우는 술 담배를 어느 정도 하는지?”
“담배는 피워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술은 1년에 소주 한 병 정도 마십니다, 장군님!”
“거참 반가운 소리로군요. 소주 한 병이라니, 그것까지 끊었으면 해요.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줄담배를 피웠고, 거기다가 술고래였어요. 한데 어느 날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먼저 버린 겁니다. 그 뒤로 백해무익한 그걸 거들떠보지 않았지요. 단주(斷酒)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전우도 평생 그러니까 여생 동안에 소주 한 병이 아니라 한 잔까지 끊었으면 해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입니다, 장군님! 정말 그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어쨌거나 장군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금연 자체가 죽기만큼 괴로운 일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술까지 멀리하시다니….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웬걸. 그래도 이겨내고 자신과의 그 싸움에서 내가 이겼어요. 어긴 적이 없지요.”
“저도 장군님을 따르겠습니다. 전진!”
이렇게 노(老) 장군과 80대 예비역 하사인 그 사이에 말이다. 단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지켜야 할 남자로서의 맹세 하나가 성립된 거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P 장군과 그는 별다른 인연으로 만났다. 여기저기서 그 얘기를 듣고, 몇 가지 도서(圖書)로써도 눈으로 확인한 그였다. 마침 인터넷신문 기자로서 여러 취재원을 만나러 다니던 참이라 P 장군이 사는 유성 그의 자택을 방문하게 된다.
세 시간 이상 장군의 자택에 머물렀다. 마치 전선(戰線)에서 자신이 집총(執銃) 아니 거총(据銃)을 하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 탄우(彈雨)가 쏟아진다는 착각인들 왜 아니 했으랴. 장군의 전쟁 이야기는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장군은 이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집 분위기가 그럴 거요. 내가 약간 민망한 이야기 하나 하리다. 지금도 내 옆 가까이서는 아무도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오. 오랜 기간 적들과 싸웠던 터라, 나는 잠을 자도 콩 볶는 듯한 총소리, 천지를 진동하는 대포 소리, 피아간의 아우성 등이 현실인 듯 들린단 말이에요. 그 속에서 내가 ‘돌격’이니 ‘전진’이니 하는 명령인들 내지르지 않겠소. 깨보면 꿈….”
그는 장군의 그 잠꼬대 이야기에 웃음을 보이기는커녕 숙연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설이며 시를 써서 데뷔한 지 오래인 문단의 대선배인 장군 앞에 그는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거실 군데군데 공간이며 벽면, 전쟁에 관련된 흔적이 놓였거니 걸려 있었다. 특히 장군이 L 기자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한국전쟁문학회의 2대 회장이며 ‘한국전쟁문학상’ 2호 수상자라는 사실 앞에 온몸에 경련이 일 듯했다. 그 외에도 상패, 수많은 무공 훈장 등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 돌아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L 기자는 그 묘역을 한 번도 참배하지 못했던 터였다. 인터넷을 통해 내외분이 서 있는 자세로 찍힌 사진은 보았지만…. 다가오는 주일에 현충원에 들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장군님의 묘소를 찾기 힘듭니까? 채명신 장군님은 묘소로 몇 번 가 뵈었습니다만.”
“아니 내가 진정 존경하는 월남전 영웅이자 옛 상관인 채명신 장군님 묘소와 내 무덤과는 가까워요. 그야말로 지척(咫尺)입니다. 몇백 미터 정도니까요.”
“한가지 더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 보오.”
“저는 군가나 진중가요 들을 장병들에게 가르치는 가수입니다. 가수 중 거의 유일하다시피 현충원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말하자면 영령들이 제 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요? 거참 장한 일을 하는구려.”
“파주에 적군 묘지가 있습니다. 언젠가 거기에도 한 번 가볼까 합니다.”
“…….”
“1‧21 사태 때 죽은 적군의 장병들이며, 그 외에 무명 북한군들이 묻혀 있습니다. 저들의 옆에서 ‘꿈에 본 내 고향’을 한 번 불러 주고 싶습니다. 원흉이 밉지, 그놈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저들에겐 죄가 없지 않습니까? 저들도 고향엔 부모나 형제들이 살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휴머니티를 실현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꽃은 한 송이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는 잠시 내외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얼핏 장군의 얼굴에는 60여 년 전, 북한 인민군 사단장의 휴머니티(?)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보내는 인민군 사단장이, 멀어져 가는 남조선 젊은 소위를 바라보는 연민의 정을 쏟는 모습이 환영으로 겹쳐졌다고나 할까? 장군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한데 부인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던지는 말이다.
“그러세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습니다. 거기 묻힌 적의 장병들인들 차가운 땅 밑에서 얼마나 부모를 그리워하겠습니까?”
그 뒤로 그는 더욱 현충원에 더욱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고 특히 채명신 장군과 P 장군의 묘역에 서서 목청을 드높이는 게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하도 시끄러운 세상, 살아 있는 장군의 묘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몇몇 못난 유튜버들의 아우성에 P 장군의 묘는 없어져 버렸다. 누가 대신 묻혔는지는 그도 모른다.
적군 묘지엔 두어 번 다녀왔다. 민요 가수이기도 한 그만의 특권(?)으로 ‘남북한 민요’를 부르기도 한다. 대신 현충원에서와는 달리 사진이며 목소리 영상 등은 남기지 않는다. 물론 구상 시인의 ‘적군 묘지 앞에서’를 혼자 낭송함도 물론이고말고. 아니 길지도 않아 죄다 외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적군 묘지’의 사진을 보기만 해도 그 전문을 토해낸다. 사자후(師子吼)로 느껴질 만큼인, 그의 톤이 높은 목소리에 행인들이 놀라기 예사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P 장군의 장수(長壽)는 L 기자가 장담한다. 모세가 120살에 숨을 거두었다는 건 널리 알려졌지만, 거기에 다섯 살을 더한다. 장군의 일상을 당신의 ‘인터넷’ 서재(書齋)에서 자주 접하는 그로선 그 확신에 한 치의 빈틈도 없다.
그도 장군을 따라 이승에 오래 머무르는 건 하나의 ‘임무’라 착각한다. 사경(死境)을 수없이 넘나들다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기사회생했으니, 그가 쌓은 삶과 죽음의 이야긴 만리장성이다. 그의 가족들에게 마땅히 남겨 줘야만 유산이랄까?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이 있잖은가? 여생의 해수나 달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경박한 속물근성에서 비롯된 얘긴데, 교직 생활 42년이라 그가 받는 연금이 만만찮다. 연봉으로 환산하면 상당액이다. 장군만큼은 못 살더라도 100살까지 목숨을 이어간다 치자. 죄다 저축한다 치면, 거금이다. 가능성은 반반? 나아가 P 장군을 따라 120세까지 산다? 그 천문학적인 총액이 된다.
그의 노인 학생 이야기. 그는 어느 여학생을 116세에 저승에 먼저 보냈다. 그가 워낙 여기저기서 떠들어댔으니 아는 사람은 또 그 타령이냐며 비아냥거리리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은 사실이니까. 초등학교 제자가 발행하는 『밀양신문』에 그 사실을 수필로 발표한 것은 차치(且置)하고라도 그가 암 수술 후에 회복 단계에서 만난 103세 한의사와 그 진위를 갖고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이윽고 <네이버>에서 옛날 『국제신문』의 기사를 발견함으로써 그가 ‘판정승’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노인학교에는 90세 이상 학생이 수두룩하였다. 적어도 수명에 있어서는 여학생>남학생의 부등식이 성립하지만, 97세에 기세(棄世)한 어느 남학생은 치아를 서른두 개 그대로 지니고 있었을 정도로 정정했다. 또래가 없어 자택 아닌 시내의 멀리 떨어진 경로당에 다니던 학생이었다. 아흔이 넘어서 일흔에 약간 못 미치는 여자를 하나 얻어 열두 평짜리 서민 아파트에 예순두어 살 되는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살다가 간 그는 또 하나의 전설이고말고.
그러나 그건 약과일는지 모를 또 다른 여학생이 있었다.
백 살까지 그야말로 ‘구구팔팔’의 삶을 누린…. 여학생이 전해 준 일화가 있다. 젊었을 때 쌀장수를 한 그 여학생은 워낙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키 크고 안 싱거운 사람 없다고 하는 말이 유행이었다. 그게 장애가 되었는지 결혼이 힘들었더란다. 한데 워낙 힘 좋아 어지간한 남자 장골이라도 낑낑대며 들어올려야 할 쌀가마니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더란다.
한마디로 말해 모범생이었다. 80년대 말 노인 학생 80명 가까운 대단원을 인솔하여 대만에 4박5일 여행을 갔는데, 그 학생이 일행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헌신한 것이다. 학생이 아흔 살 되던 때였다. 학생은 트레이닝복을 치마 안에 받쳐 입고 모든 행동에 걸쳐 모범을 보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김포 공항에서 바리케이드에 걸려 넘어진 여학생이 있었는데, 마침 오른 팔목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고생께나 할 수밖에. 그런데 아흔 살 넘은 그 여학생이 모든 뒷바라지를 한 것이다.
몹시도 더운 해, 그 여학생은 재봉틀이 아닌 손바느질로 만든 잠옷을 하나 만들어-하의(下衣)-그에게 갖다주었다. 겉모양이 할머니들의 속곳과 어찌나 그리 닮았는지 그와 아내는 배꼽을 잡았다. 그런데 실제로 입어 보니 어찌나 시원한지 그 여름 한철 선풍기 신세를 훨씬 덜 진 기억이 난다나?
그의 장수(長壽)에 대한 어쩌면 지나칠 정도의 강한 욕구는 이렇듯 여러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하니 구태여 자책할 필요가 없다. 두어 명 남녀 학생 이외에도 기적 같은 경우는 부지기수라, 그냥 넘기자. 여기서 다시 군인 그것도 예비역 노(老) 장군 둘과 한 아흔 가까이 되어 저승에 간 어느 가수의 이야기를 들먹이려 한다.
그가 일흔을 훨씬 넘긴 나이에 인터넷뉴스 기자로 임명받은 지 두어 달 됐을까? 그즈음에 그는 정말 활발하게 움직였다. 군부대 출입 기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는 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그렇게 맺어갔다.
아흔아홉 살 되는 예비역 육군 준장을 자택으로 찾아 가 만난 건 새 지평을 여는 계기였다. 그가 정말 존경해서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는 어느 예비역 중령과 함께였다. 장군은 부인이 얼마 전에 먼저 저승에 간 터, 그 넓은 마흔 평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물론 도우미가 있었지만, 모든 일상생활은 자력으로 해 나간다고 했다.
장군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 월남했다고 했다. 육사에 입학하기까지의 소설 같은 이야기는 흥미를 넘어서 교훈이 되고도 남았다. 공산주의라면 철저히 배격하는 98세 장군의 이야기는 아직 귓전에서 맴돈다. 군인은 군인다워야 해요. 싸워서 이기는 게 군이오!
그러면서 건강 유지의 비결로 하루 ‘만 보 걷기’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꼭 실천한다 했다. 그 뒤로도 장군에 얽힌 감동 실화는 많다. 어느 여류 소설가와 한 번 더 장군을 자택에서 만났다. 자서전의 대리 집필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지만, 그건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고 말았다.
몇 년 뒤에 장군이 향년 102살로 소천하고 만 것이다. 백선엽 장군과 생년이 같았는데…. 창군 이래 최장수 장군이란 기록을 남기고 그분은 우리 곁을 떠난 셈이다.
외눈부처처럼 소중한 자료를 그분 댁의 벽에서 발견했으니 그게 이 이야기의 주제인지 모르겠다. 자기가 숨을 거두면 연락해야 할 사람과 전화번호가 벽에 붙은 종이에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 잠깐.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사실 하나.
P 장군과 J 장군은 성씨만 다를 뿐 이름 두 자가 같은 것이다. 이를 두고 어찌 우연의 이치라고만 치부하겠는가? 거기다가 놀랄 만한 사실이 또 있다. 두 장군과 이름이 같은 S 장군이 현존하는 거다. 그것도 둘씩이나! 이래서 아들을 낳고 ㅇㅇ이라고 이름을 지으면 장군이 되는 것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농반진반의 근거가 회자(膾炙) 될까? 내친김에 끝 자를 밝히자. ‘석’이다. 한자로? 아서라, 그건 지나친 모험이다.
노(老) 장군 이야기의 백미(白眉)를 하나 더 보태자. 남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이라며 행여 코웃음을 날릴지라도 이분을 빼면 이야기가 안 된다. 두어 달 전에 선종(善終)한 L 장군이다. 다섯 해 전에 그는 장군을 자택으로 찾았다. 이웃의 아파트에 내외분이 살고 있었다.
육사 3기 출신이라는 장군은 그에게 물었다.
“어? 성함 끝이 우(雨)라니 혹시 본관이 경주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장군님”
“나와 같구려. 나는 종(鍾) 항렬이니 내가 아재비 되오.”
“장군님, 정말 반갑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하사로 제대했습니다. 계급이며 항렬이 그러하니 말씀을 낮추시지요.”
하지만 장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은 하대를 섞는 듯했지만, 대부분 경어를 썼다. 장군이 가톨릭 신자인 걸 알고 나서 어느 본당에 나가시느냐고 질문했더니 세상에 한 성전에서 같이 미사에 참례해 온 게 아닌가? 장군의 말이다.
“연령회에 나와야지, 내가 여태 못 봤던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장군님. 앞으로는 참석하겠습니다.”
“편하게 아저씨라 불러요.”
장군의 덕분으로 그도 게을리해왔던 연령회원으로서의 기도며 다른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가끔은 장군 내외분 앞에서 ‘복음 성가’도 봉헌했고….
그러던 중 하나의 작지 않은 사건을 겪는다. 그날도 미사 봉헌을 위해 나름대로 준비하는 중이었다. 하사 모자를 벗어 놓고 정좌(正坐)를 한 채 복음서를 훑어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 시장에 출마한 B 예비역 대장(大將)이 와 앉는 게 아닌가? 그는 예비역 하사임을 대장에게 넌지시 일렀다. 한데 이 대장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그는 왼쪽 저편을 가리키며 대선배 장군이 앉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자그마한 소리로 귀띔도 했다. 대장은 별 반응이 없었다.
시일이 흐르는 동안 그는 대장을 못된 장군이라며 마구 나팔을 불었다. 선거법 위반 수준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정도? 그랬을 거다. 대신 L 장군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실제 아저씨는 아흔을 훌쩍 넘겼으면서도 경차(輕車)에다 이웃에 사는 신자들을 태우고 성당에 오갈 정도로 훌륭한 분이었다.
중앙화수회 때 몇 번 아저씨를 만났다. 최고령 종친이었다. 의식이 끝나기 직전 만세 삼창을 이끄는 분도 아저씨였다. 몇 년 전부터 전담하다시피 한다는 전언이었다.
그동안 그도 바빠 가끔 간접으로 안부를 여쭙곤 했다. 코로나 때문에 화수회도 열리지 않아, 오직 전화에만 매달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몇 달 사이에 인터넷에 그분의 선종 소식이 떠 있는 게 아닌가? 사모님 아니 아주머니에게라도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문의하려 했으나 신호를 보내려는데 없는 번호라는 음성만 전해진다.
얼마 뒤 그분의 유택을 찾을 길이 생긴 것이다. 세상에,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중앙화수회가 정기총회 겸 회장 이취임식을 겸해서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경망스럽게도 무릎을 치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여기서 잠깐! 아흔을 넘긴 노인이라면 죽음 준비를 하는 건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여태 세 분 장군의 경우를 예로 들먹였는데, 특히 종친인 L 장군의 댁에서 겪은 일이다. 사후 즉시 연락해야 할 인사의 전화번호와 현주소, 현재의 직위(직업) 등을 일목요연하게 적어 벽에 붙여 놓은 게 아닌가? L은 한탄하였다. 신음을 섞어 그는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부르짖을밖에.
“아, 장군님 아니 아저씨께 내가 밉보인 모양이로구나. 그날 내 이름과 전화번호도 당신이 직접 적으셨는데…. 하지만 왜 화수회엔 연락하지 않으셨을까?”
J 장군 댁에서도 그와 같은 것을 목격했던 점은 전술한 바와 같다. L은 다시 옷깃을 여몄다.
P 장군은 어떤가? 그분의 벽에서 그런 준비성(?)을 봤는지 못 봤는지 그는 기억에 없다. 설사 그 선배 장군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앞으로 35년을 더 살 분이니, 천천히 작업(연락처 부착)해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옛날 그가 노인 학생들의 ‘가정 방문’을 했을 때, 그런 데에 별 관심을 안 두었었는데, 어쨌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드문 게 ‘사후 연락처’ 기록이었다. 이제 말이다. 그는 그게 단순히 나이가 많고 적음에 따른 물리(物理)가 아니라,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갖는 특별한 정서라는 화학(化學)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이려 하는 거다.
그렇다면 L 자신의 경우는 어떤가?
일생을 통해 가장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고 여기고 있는 지금 그는 천만다행히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다. 오직 삶의 목적은 아내와 자신의 공동선이요 가슴 벅차게 하는 손자 녀석과 딸 내외를 위한 기도로만 세월을 보낸다. 내외는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십 번씩 한다.
내친김에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
천 리 타관에 올라아 살다 보니 둘에겐 이웃도 동료도 없었다. ‘혈혈단신’이란 말 한마디만을 입에 올리는 것으로도 바깥출입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외부와는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다. 아내는 더 심했다.
다행히 그를 미망에서 깨어나게 한 게 있었으니 몇 개의 사회 활동이었다. 먼저 인터넷 심눈 기자의 신분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장군들도 그렇게 만난 거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문학에도 음악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윽고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우스운 얘기인데, 처음 그는 가끔 식구들에게 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내 죽음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
그걸 듣고 그들이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식구들이 그가 이순신 장군이나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며 농담도 했다. 남과 적(敵)은 동의어가 아님이 분명하지 않은가?
L 장군의 선종 이후 그의 생각은 달라진다. 미답의 세계가 아닐 바에야 연락처 메모를 하기로 한 거다. 그렇다고 해서 겨우 여든의 나이에 무슨 광고라도 하듯 에이포 용지 두 장쯤 되는 그걸로 벽면을 장식한다는 것도 무엇하다. 손자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장군이든 노인 학생이든 단둘이 여생을 보내는 집에서만 그 철학을 공유하더라. 아들딸 특히 손자들이 그 연락처를 보고 어떤 정서에 빠질지 두렵다.
궁여지책으로 컴퓨터에다 간단하게 입력시키기로 했다. 숨을 거두면 즉시 아래 문장부터 카톡에 올리라고 미리 당부해 놓는다.
저희 아버지(혹은 어머니)께서 향년 105(?)세로 영원히 이승을 떠나 주님 나라로 가서 영면에 드시게 되었습니다. 생전에 ( )님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래와 같이 조촐하게 장례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발인 및 기타
영면에 드실 곳(유택)
연락처: L 기자 자신의 전화번호(010-4731-435*) (딸) 010-
별지에다 이렇게 기록해 놓는다. (전화번호 포함)
• 5촌 이내의 친척: 이상언, 이상기, 손태광 (내종사촌) 외 15명/ 처남댁: 이순옥 외 1 명
/ 전우(戰友): 이경진(26사단 주임 원사), 허수진(15사단 군악대장), 김동률 여단장, 양병희 사단장 외 30명/ 전쟁문학회: 단체 카톡방(김종화 주간 별도 연락)/ 가수: 차도균, 김흥국, 김인순(인순이) 등 30명/ 경로당 회장: 구제식 외 10명 / 국제 PEN: 부이사장 김유* 교수 외 15명/ 한국소설가협회: 김두* 외 20명/ 한국수필가 협회 최원* 외 20명/한국가톨릭문인협회: 한국가톨릭 문인협회 단체 카톡방/ 동백 성요셉성당 사무국장 및 연령회(카톡)/ 경기PEN, 경기문학인, 『문학과 비평』 단체 카톡방
• 단 급하게 전화를 걸어야 할 곳은 KONOS<국립 장기이식관리센터 02)2276-0027> <천주교 부산교구 사회복지국 051) 516-0815과 051)515-0836,051)465-8801, 다른 모든 곳에 앞서 연락할 곳이다. 사전에 자신이 양 기관으로부터 철저히 다짐도 받아야 하고.
‘마음 전할 곳’을 기록하지 말라고 딸 내외에게 이야기한다.
이상의 궁색한 이야기는 컴퓨터 안에서만 딸과 사위만 열람할 수 있다. 손자들은 훨씬 세월이 지난 뒤에나 가능하다. 간사해서 그런지 이제 마음이 약간 놓인다. 서너 해 전에 일이다. 그가 사사한 문학의 거목이 급서(急逝)했을 때였다. 장례를 모시려니, 연락처가 없어 크게 곤란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이제 약간 안도의 숨을 쉰다.
대미를 장식한다는 뜻에서 고 금사향 가수의 아름다운 경우를 적지 않을 수 없다. 기자로서 그분을 찾아간 것은 몇 년 전이다. 선생이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일산의 어느 요양 시설 그분 방안에서 취재했는데 소요된 시간이 자그마치 180분을 넘겼다.
현관에 걸려 있는 선생의 상반신 초상화가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20대 초반의 아가씨 때 모습이었다. 너무나 미인, 탄성을 절로 나타내게 하였다. 세 시간 꼬박 사진 찍고 질의응답을 거듭하는데, 사이사이에 ‘홍콩 아가씨’며 ‘임 계신 전선’ 등을 그들은 소릴 높여 불렀다.
파격에 가깝게 예우(?)하여 그분의 기사는 여덟 번에 걸쳐 연재하였다. L은 그 기사를 여기저기 실어 날랐다. 자신의 열성에 힘입어 연(延) 20만이 조회를 했음을 확인하고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말고. 특히 가수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금사향 선생 그분이 그만 이승을 하직하고 만 거다. 향년 89세였다. 선생은 마지막으로 머무르던 곳에서, ‘묘음성’이라는 법명을 가진 채 입적하고 말았으니 오호통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협회 정기총회 시에는 젊은 가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입장하던 선생이었다. 허리가 아픈 선생이 다중을 앞에 두고 ‘임 계신 전선’을 열창하면서 도중에 의자를 가져다 달래서 앉은 채 태극기를 흔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생은 임실호국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화장 뒤에 한 줌의 유골로 봉안당에 모셔져 있다는 얘기다. 호국원이 여성(女性)인 선생을 품에 안게 되었는지는 알 말한 사람은 안다. 선생이 젊은 날 군예대(軍藝隊)에 몸담고 장병들을 노래로 위문한 덕분임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겠다.
여기서 잠깐! 선생의 거처에는 벽에 예의 그 ‘연락처’가 붙어 있지 않았다. 대신 조그마한 수첩에 가수들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이었다. L 기자가 타 기자 기자들과는 달리 가수들에게 연락을 쉽게 할 수 있는 건 인터뷰 당시에 그걸 죄다 메모를 해 뒀던 탓이다. 어쨌든 벽면과 수첩에 올리는 연락처-자기 죽음은 알리는 대상(對象)-는 나이 든 사람에게는 신분을 떠난 ‘오십보백보’의 함수일까?
그는 가끔 체념에 빠진다. 여기 오기 전, 저승으로 떠난 수백 명 노인 학생 중 장례식에도 못 가보고 유택도 참배하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이젠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존해 있는 학생은 거의 없다. 99 프로 이상이 저승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대신 말이다. 그는 그 아쉬움을 앞서 들먹인 장군들과 용사들의 유택을 더 부지런히 찾을 결심을 할 수밖에.
금사향 선생의 ‘임실호국원’은 사뭇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워낙 거리가 멀어 하루 만에 다녀오기도 힘들 테지만, 선생은 봉안당에 모셔져 있어서, 생전 약속인 노래 두 곡 ‘임 계신 전선’ ‘홍콩 아가씨’에 목이 멜 수 있을지는 가늠하기도 힘들다. 향토 사단 군악대가 반주해 주기로 약속은 했는데…. 전화로 이야기하는 도중 직원들의 너무나 친절한 태도가, 어떤 난관이라도 뚫게 해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하게 했지만 말이다. 봄에 찾아가리란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으니 낭패 아니고 뭔가.
그가 이제 진심을 토로할 때다. 장황하기 이를 데 없는 앞의 모든 서술은 한갓 물거품일지 모르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만은 뭔가 아름다운 걸 남기고 싶다. 미확인 소문에 의하면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 즉시 안구를 기증했으나, 고령으로 인해 각막에 손상이 있어 이식 수술을 받은 이가 시력 회복을 못 했다 하더라. 그분보다 그가 5년 넘게 살았으니, 걱정이 앞선다. 지금 당장 저승으로 떠나면? 심장 신장 안구 및 사체 기증이 모두 성공을 거둘 수 있으니, 오래 살아 몇억 운운 따위는 한갓 물거품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