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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희망이 있는가> .슬라보예 지젝. 박준형 옮김. 문학사상.
(원제- Trouble in Pradise)
아! 무슨 운명이 ,무슨 저주가 우리로 하여금
이토록 헤어져 방황케 하는가.
우리는 침묵한 두 울부짖음
서로 엇갈린 두 운명. 파두 가수 아밀리아 로드리게스의 /어두운 숙명/ 중
11월 21일 경향신문에 2018년 1월 1일부터 2019년 9월 말까지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1천2백명의 명단이 실렸다. 다음 날 소설가 김훈은 기고를 하였다. 제목은 ‘죽음의 자리로 또 밥벌이 간다’ 였다. 그 중 한 대목을 옮겨 본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넘치되, 그 능력을 작동시킬 능력이 없으니 능력은 있으나마나다. 능력을 작동시킬 능력이 마비되는 까닭은, 이 마비가 구조화되고 제도화되고, 경영논리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깔끔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십 년 동안, 퍽 퍽 퍽은 계속된다/
나는 김훈의 비통의 글을 여러 번 읽고서 의문이 들었다. 우주 정복을 위해서, 스마트폰의 품질 향상을 위해, 20분 더 빨리 가기 위한 도로 건설에 천문학적인 돈을 쓴다는데, 죽음을 막기 위한 투자에게 왜, 이렇게 박할까? 하루에 평균 3명이 산업 현장에서 사고로 죽는다고 한다. 이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작은 돈이면 충분하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이유가 뭘까? 스마트폰의 품질을 낫게 하여 더 팔리면 매출이 늘고, 노동자의 죽음을 예방하는데 드는 비용은 소액이지만 비용 항목에 들기에 그렇지 않을까? 한 인간의 생명이 비용처리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진보’나 ‘자본주의 체제’를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희생물인가. 한 국가의 국력과 한 사람의 부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노력과 고달픔과 굶주림을 모아야 할까.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블룸버그란 자는 재산이 64조라고 한다. 상상해 보자. 그에게 64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한 국가나 한 사회의 부가 노동자 한 명(누구의 자식이며, 누구의 부모, 친구)을 사고에서 구할 수 없다면 도대체 그 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은 자본주의 문법에 맞지 않지 싶다.
영국에서 자본주의 초기에 게으른?(공장에서 일하기를 거부하는 자들) 사람들을 체포하여 강제로 수감하고 일을 시켰다고 한다. 자본주의 방식을 익히게 하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았다. 가히 인간에 대한 강제 개조였다. 개인인 남자들이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실한 돈벌레들을 6개월 정도 휴양지에 보내 살게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보게 하는 것이다. 성실과 악착같음과 뛰어난 계산 능력(자본주의 특징)을 약간이나마 누그려뜨릴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강압을 사용하였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그런 강제를 쓰지않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누구는 ‘우는 소리’ 좀 그만하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죽고사는 문제인데 어찌 우는 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본주의란 단지 경제 운용방식이 아니라, 그 속의 사는 인간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방식이자 제도다. 이런 질문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생사를 더 이상 자본주의에만 맡겨도 될까?’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가장 최악은 이런 질문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까.
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많은 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동력은 아마도 이 둘의 조합으로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장점이 있는 체계가 만약 그 시효가 다했다면 어떨까? 슬라보예 지젝은 수많은 예시를 든다. 영화에서부터 주위의 사소한 사건들까지 다양하다. 2차 대전 중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은 의회에서 ‘민주주의 제도’가 최악의 제도라고 하였다고 한다. 단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사회시스템 중에는 그나마 나은 시스템일 수 있지만, 우리가 상상하거나 대안으로 채택할 수 있는 시스템 중에서는 최악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을 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은 늘 한가지 착각을 하기가 싶다. 이 마당에서 살아남아야 하기에 지금 여기가 영원하다고 긍정해야 한다. 마치 ‘자본주의’ 와 짝을 이루는 ‘자유민주주의’를 자연적인 결과이자 대체할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해야 한다. 일테면 36년이란 식민지를 경험한 자들은 일제가 실제적 지배자이고 그들의 지배하에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온전한 일상을 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해방’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일제라는 배도 언젠가는 침몰할 수 있는 시효가 있는 체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중국에서도 한 왕조가 300년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도 500년을 넘지 못했다. ‘3대 가는 부자가 없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저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도 이 꼴을 당하지 못하리란 보장은 없지 않을까? 그러나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체제나 제도보다 힘이 막강하다고 한다. 전 세계를 단일한 경제시스템으로 묶을 수 있을만큼 ‘매력’적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서 삶을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한다. 또한 이 시스템을 지속하고 유지하는데 눈에 보이는 강압이나 강제를 동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사람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성에 딱 맞는 것 같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충분히 누리고 있고, 그 사람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면 누릴수록 이 체제는 더 단단해진다고 한다. 예를 들면 중국인들은 자신이 국가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자유롭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한다. 지젝은 이런 사태가 스스로 자발적인 억압을 받아들이는 현상이라고 하는 듯하다.
지젝은 여기에서 재밌는 주장을 한다. 이 자유란 어쩌면 ‘선택할 수 없는 자유’일지 모른다고 한다. 자유란 내가 여러 개 중에 선택할 수 있어야하지만, 실은 대다수는 선택할 자유가 없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이동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자신의 생존 조건을 떠날 수는 없다. 내가 이 술집이냐 저 술집이냐는 선택할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일지도 모른다. 지젝은 브라질의 어느 카페의 예를 든다. 그 카페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게인데, 실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여성이 고객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 여성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였는데, 고객 남성이 나타나면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여성이 고객을 선택한다고 한다. 일반적인 선택과 거래를 뒤집는 방식이라고 한다. 지젝은 마치 이런 식이 진정한 선택일지 모른다고 한다.
‘선택’에 있어 한 가지 더 진지한 질문을 한다. 개인이나 사회나 ‘선택’의 폭이 더 넓은 사회가 더 나은 삶과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개인이 선택의 자유를 더 누리기 위해서는, 그 기반이 받쳐줘야 한다고 한다. 개인으로 치면 충분한 돈과 안정된 직업을 가진 자가 높고, 사회로 치면 보편적이고 공통의 복지(생존의 방식), 즉 공동체의 단단하고 확고한 강제적인 기반이 갖춰져야 가능하다고 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개인의 자유를 무한정 확장하면 반대로 선택의 자유는 없어지고, 개인의 자유를 사회적 규범으로 어느 정도 제약하면 거꾸로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의미다. 한국 사회를 예를 들면 비정규직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무한한데 실제로는 선택의 자유는 없다. 정규직은 자유가 제약을 받지만, 실은 그 이유로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지젝이 자유민주주의 자유를 조롱하고 빈정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유’의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 보자는 주장이다. 역설일까? 흔히 북유럽국가를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한다. 여기저기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소득의 50% 정도를 세금(공동체 기금)으로 납부한다고 하더라. 즉 사회를 유지하는 비용이지 않을까? 개인의 자유를 일정정도 억제하여 사회를 지킬 때 도리어 개인의 자유는 더 보장되는 것은 아닐까.
고르비쵸프가 소련의 ‘사회주의’를 작파하고, 독일에 가는 중에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를 방문하였는데, 총리가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지잭은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라고 한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나중에 친구에게 만나지 않은 이유를 말했다고 한다. 유럽의 복지가 이 정도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련이라는 사회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이제 유럽의 노동자들의 지위는 지금보다 훨씬 하락할지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사회민주주의자인 총리가 ‘사회주의’를 문 닫은 고르바쵸프가 달갑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슨무슨 주의를 빼보면, 사회가 무너지면 개인도 무너진다라고 할 수는 없는걸까? 사회는 없고 개인만 있다는 신자유주의에서 왜 개인은 이렇게 고통스러워할까? 한국인 두 명중 한 명이 울분을 가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식코’라는 영화를 보면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치료 받을 수 있다는 미국인들이 도리어 어떻게 어떤 치료도 불가능한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보면, 기차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 기차가 멈추면 이 기차 밖은 지옥이다. 앞 칸의 사람들은 초호화 생활을 하고, 뒤 칸의 사람들은 모든 자유와 복지가 박탈된다. 하지만 이 기차를 움직이게 하고 앞 칸의 자유롭고 호화스런 생활은 뒤 칸이 있기에 가능하다. 뒤 칸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차는 파국을 맞는다. 기차도 멈춘다. 마지막 장면은 기차가 멈추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새로운 최신 버전이라는 ‘신자유주의’는 파국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라고 겁박한다. 그럴수록 불로소득은 쌓이고,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커진다. 그러면서 뒤 칸의 생산인구에게 협박한다. 앞 칸의 자본가들이 무너지면 너희도 파멸이다. 이 세계는 파국이다. 언젠가 ‘큐빅’이라는 영화를 보았다.감옥 상자에 갇힌 남녀가 그곳을 탈출하는 이야기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들은 온갖 희생과 노력을 하여 장애물들을 하나씩 제거해 가는데 그럴수록 문제는 더 꼬이고, 새로운 문제가 출현한다. 사실 그들은 한 장소에 있었고, 그 거대한 상자가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그냥 바깥 문을 열면 되었던 것 같다. 온갖 시도 후에 그들은 멈추었고, 그리고 생각했다.
기차는 멈추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그곳에 사슴 한 마리를 보았을 뿐이었다. 큐빅를 탈출하기 위해서 온갖 시도를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큐빅만 더 강고하고 복잡하게 만들었고, 노력할수록 탈출은 점점 불가능해졌다. 지젝은 자칭 공산주의자이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생각하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세상을 보는 ‘척도’지 실재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수평선이거나, 잡을 수 없는 무지개이다. 소년, 소녀들이 수평선이나 무지개를 보고 가야지 발 밑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걸어서야 되겠는가? 결코 누구든지 그 무지개를 잡거나 수평선에 다다를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무지개를 잡으러 가야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를 골조로 하고, ‘자유민주주의’라는 벽돌로 지어진 집을 나와서 밖으로 나오라고 한다. 그 집이 영원히 안전하다면 그곳을 나올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파국을 맞을거라고 한다. 마치 타이타닉이 무서운 속도로 빙산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라 한다. 빙산으로 향하기 전에 탈출하자고 하는걸까? 지젝은 그건 아닌 것 같다. 작은 배로 탈출해봐야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는 듯하다. 그래서 지젝은 ‘탈영토주의’를 비판한다. 그럼 방향을 돌리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해야할까? 지젝에게는 그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건 마치 침몰하고 있는 배를 수선하여 침몰을 약간 더 늦추거나, 지연시킬 뿐이거나, 가속을 더하는 일일지 모른다고 한다. 설국열차의 뒤 칸이 약간 더 나은 원조를 받는다고 달라질 게 업다는 투다.
어쩌면 지젝은 하루라도 빨리 설국열차가 파국을 맞아 멈추기를 바라거나, 차라리 타이타닉이 빙산을 들이박고 멈추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기처와 타이타닉을 아니면 무너져가는 집을 수리하지 말고 차라리 무너지게 내버려두라고 하는 듯하다. 이 집이 무너지면 다른 집에서 살면 된다고 한다. 타이타닉이 아니라도 배는 많이 있고, 설국열차 밖은 지옥이 아니라, 어쩌면 설국 열차가 지옥일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는 거대한 자동설비된 건물에 살면서 내가 자유롭게 모든 곳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뛰고 구르고 해봐야 건물의 구조 안에서의 자유일 뿐이다. 이 건물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고도 이 건물에 갇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젝은 그 모든 이데올로기와 사유에 대해 시비를 건다. 우리는 흔히 이데올로기는 ‘좌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그일지 모른다. 비정상가족이 정상가족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정상가족들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가족에 대항하고 싶은가? 정상가족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정상가족되기를 멈추면 된다. 자본주의를 넘고 싶은가? 지젝의 처방은 ‘멈춰라, 그리고 생각하라’.
지젝에게 늘 따라다는 비판은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대안이 무엇인가’ 이다. 지젝의 대안은 대안 없음이 대안일지 모르겠다. 집 밖은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무너져가는 집에 깔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집이 무너지는 걸 기다리기 보다, 차라리 먼저 무너뜨리는 것이 낫지 않냐고는 하는 듯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슬라보예 지젝은 떠벌이에다 글쓰는 동물이다. 때로는 말장난을 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대단히 매력적인 철학자이고, 위험하고 급진적이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자라면 굳이 지젝을 읽지 않아도 된다. 읽을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자라면 무시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일지 모른다. 지젝을 읽다보면 내가 반자본주의자인데 친자본주의적 사고를 계속 하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을 할지도 모른다. 무얼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횡설수설하여도 지젝만큼 독자를 헷갈리게 하고 흐리멍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아마 지젝은 독자를 어지럽게 하여 하나마나한 사유의 틀을 단 번에 깨부수려는지도 모르겠다.
독자여 ‘멈춰라, 생각하라’ 발전이나 자본의 축적이 가능한가? 아니면 인간이 살만한 세상인가? 멈춰서 생각하라.
소설가 김훈은 /김용균의 시신은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머리는 룰러 위에, 몸통은 벨트 아래 떨어져 있었다, 현장을 돌아본 김용균특조위는 ‘일터는 깜깜했습니다. 위원회의 심정도 깜깜했습니다’라고 보고서의 서두에 썼다.발전은 빛을 얻고자 하는 사업인데 발전의 원료인 석탄은 캄캄했고, 그 석탄을 빛으로 바꾸는 과정의 노동현실은 더욱 캄캄했다/
첫댓글 은행을 만들어서 모든 사람을 평생 빚더미에 앉히는게 범죄다 거기에 비해 은행을 털어 작은 돈을 훔치는 일은 범죄 축에도 들지 않을지 모른다 박노자는 한국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벌레취급을 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읽어내는 지젝이군요.
국가가 빚더미를 부추겼잖아요..그럼 국가가 범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