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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양반길
“거기 누구 없느냐고 여쭈어라.”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웃을 방문하면서 상대에게 바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양반과 평민들의 삶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주 양동마을은 낮게 내려앉은 산자락에 150여 가구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동남향의 마을 앞은 형산강 물길이 바다로 굽이쳐 흐르고 안강 들녘은 백리에 걸쳐 넓게 펼쳐져 시야가 훤하게 틔어있다.
경주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문화유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아득한 추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초가지붕과 사립문, 흙담이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만들고 있는 양동마을을 돌아보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더듬어보는 길이 된다. 마을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는 역사문화에서 삶의 정체성을 재발견 할 수도 있다.
양반과 노비의 삶을 재조명하는 정충각, 높은 곳에 넓게 자리한 관가정과 향단, 학자의 고뇌를 담은 수운정과 무첨당, 시대적 인물을 낳은 서백당, 육칠백년 묵은 향나무 등이 진하게 조상의 향기를 풍긴다. 물봉동산에 오르면 동서남북으로 훤하게 트인 시야에 양동마을의 형세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처가살이하던 조선시대 풍습까지 세세하게 읽혀지는 양동마을 양반길 골목투어로 새로운 삶의 지표를 찾아보는 것도 신선한 힐링의 길이 될 듯하다.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은 고택을 위주로 마을안길을 걸어보는 양반길, 마을에서 진행되는 체험행사와 마을을 지나 안계댐 양쪽으로 연결되는 자연친화적인 녹색길로 나누어 양동마을을 돌아본다.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관가정
경주 양동마을은 경주의 북쪽으로 강동면에 위치해 있다. 안동 하회마을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규모는 양동마을이 하회마을보다 두 배는 크다. 양동마을은 특이하게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성이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옥 형식을 그대로 띠고 있는 150여 채의 주택이 초가와 기와로 꾸며졌다. 대체로 기와집은 높은 곳에, 초가집은 낮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주거지로 전해내려 오면서 국보 1점, 보물 4점 등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양동마을의 씨족부락 형태는 조선시대 전기부터 시작되었지만 2천600여 년 전부터 집단으로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집안에 의해 형성되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양민공 손소가 결혼한 뒤에 청송 안덕에서 처가가 있는 양동마을로 이주해 재산을 상속받아 살다가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오르면서 기반을 잡았다. 손소의 둘째아들이 청백리인 우재 손중돈으로 경주 손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여강 이씨 찬성공 이번이 손소의 8남매 중 둘째딸과 결혼해 양동마을로 옮겨와 살았는데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이언적이 여강 이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남자가 처가로 들어와 사는 경우가 흔했다. 양동마을이 이러한 풍습으로 외손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를 대표하는 손중돈과 이언적은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두 가문이 같은 마을에 뿌리를 내려 화합하며 살아오고 있지만 학문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전쟁 이상의 경쟁적인 구도를 이어오고 있다. 보통 마을에 서당이 하나 정도 있지만 양동마을에는 서당이 네 개나 있는 것도 그러한 경쟁적인 구도에서 비롯됐다. 덕분에 양동마을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만 해도 문과 26명, 무과 14명, 사마 76명 등 110명에 이른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사법고시와 외무고시 등의 고시 합격하고, 장차관을 지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전시관
양동마을을 들어서는 입구 넓은 주차장에서 내려 공원으로 꾸며진 들판으로 들어서면 2층 건물 양동마을문화관이 있다. 문화관에는 양동마을의 생성내력과 문화재, 인물을 소개하는 전시실이 있다. 1, 2층으로 나누어 양동마을의 내력과 문화유적을 소개하고 있다.
1층 전시관 입구에 양동마을 주요 탐방길이 지도로 상세하게 소개한다. 또 500년 넘게 전통을 이어온 마을의 내력을 소개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양동마을이 보유하고 있는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 기념물 1점, 민속자료 1점, 문화재자료 1점 등 22점의 지정문화재가 소개되고 있다.
유일한 국보는 283호로 지정된 통감속편이다. 1422년 세종 4년에 인쇄한 원나라 진경이 지은 편년체의 역사서적이다. 중국 고대 반고씨부터 고신씨까지, 거란에서 오나라대까지, 당나라 천복에서 송나라 상흥2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다. 우리나라 서지학 및 인쇄기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양민공 손소를 그린 초상화가 보물이다. 손소 선생은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에 오르고,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낸 양동마을 개척자다. 적개공신으로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의 전신을 그린 초상화로 조선시대의 관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 연구자료로도 중요하게 쓰인다.
향단과 전경
다음으로는 조선시대 전통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무첨당, 양동향단, 양동관가정이 보물로 소개되고 있다.
서백당은 양동마을의 입향조 손소가 지은 경주 손씨의 종가집으로 우리나라 종가집 가운데 가장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손꼽힌다. 하루에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뜻으로 송첨이라고도 불렀다. 보수한 흔적이 많아 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됐다. 마당에 600년 수령의 향나무는 경상북도가 기념물 제8호로 지정했다.
서백당
서백당의 집터를 잡아준 풍수가 설창산은 집의 혈맥이 응집된 이 터에서 세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 예언했다. 서백당에서 손중돈, 이언적이 태어났다. 아직 위대한 한 사람이 더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낙선당, 사호당고택, 상춘헌고택, 근암고택, 두곡고택, 수졸당, 이향정, 수운정, 심수정, 안락정, 강학당 등의 중요민속문화재들이 현재 모습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양동마을 양반길
경주 양동마을 양반길을 걷는 일은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양동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경주 손씨의 종가 관가정과 여강 이씨의 종택 향단이 양대산맥처럼 두 줄기의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더위와 추위를 피해갈 수 있는 매점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연밭을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이 정충각이다. 임진왜란에 맨손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양반과 모시던 주인을 버리고 달아나지 못해 함께 화살받이가 된 충복의 넋을 기리는 비가 나란히 세워진 곳이다. 이어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담 너머 떡이며 옥수수 등의 정을 주고받았던 조선시대를 읽으면서 오르막을 올라야 된다.
600년 된 은행나무, 그 옆에 벼락을 맞아 고사목으로 남은 은행나무도 옛날처럼 나란히 서 있다. 악동들의 예절체험학습이 진행되는 관가정은 99칸의 거대한 규모였단다. 여전히 높은 곳에서 시원한 전망을 자랑하며, 땅과 하늘 그리고 인간세상의 우주진리를 담은 건축구조는 해설사의 입을 통해 낱낱이 살아난다.
관가정 후문으로 나서다보면 집 뒤쪽에 붉은 색으로 도배를 한 사당이 시야에 들어온다. 선조들의 조상을 섬기는 정신은 양동마을 고택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쪽문을 나서 동북방향 건너편에 여강 이씨의 종택 향단이 우람한 규모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물봉동산을 향해 언덕길을 양반걸음으로 천천히 오른다. 굴참나무와 대나무숲이 사립문처럼 줄지어 서있다. 악동들의 본부였다는 물봉동산은 펑퍼짐하게 넓은 공터로 남아 있다. 사방에 살구나무가 노란 열매를 달고 있다.
문인화 등의 체험행사가 진행되는 영귀정, 설천정사를 지나 돌담길을 걷는다. 돌담에는 줄장미가 너울지고, 비비추가 꽃대를 길게 내밀고 있다. 검붉은 자두가 설익은 얼굴로 총총 열려 있다. 대구, 부산, 서울 등에서 살고 있는 63년생 토끼띠 아줌마들은 양동마을에서 동기회를 하면서 30년 이전으로 돌아가 깔깔거리기 대회에라도 참여하고 있는 것 같다.
무첨당
봉선화, 초롱꽃이 불을 밝히는 골목길을 깡충깡충 지나 무첨당에 이르렀다. 이언적이 별채로 세운 건물이다. 왼편의 지붕은 날렵하게 끝이 하늘로 치솟은 맞배지붕이고, 오른편은 향사를 담당하는 엄숙한 사당의 형식으로 두 가지 형식이 혼재한 건축이다. 오래된 건축인만큼 처마에는 여러 현판이 걸렸다. 안쪽에 흥선 대원군이 대나무 뿌리로 쓴 ‘좌해금서’라는 현판이 있다. 좌해(左海)는 중국의 왼쪽으로 조선을 뜻한다. 금서(琹書)는 거문고와 학문을 뜻하는 글이라고 전한다.
토끼띠 여고동기생들은 대성현과 경산서당을 지나 내리막 꼬부랑 골목길을 걸으면서 수다로 추억을 불러낸다. 동방의 인재로 손꼽히는 손중돈과 이언적을 낳은 서백당에 들어서면 오래된 향나무와 전통적인 기와집이 더욱 무거운 기운으로 마주선다. 훌륭한 인재를 낳을 기운이라도 느끼고 싶어 심호흡하는 아낙들의 모습이 더러 눈에 들어온다.
낙선당, 창은정사, 내곡정을 지나 토속적인 골목길을 따라 출출한 허기를 달래줄 우향다옥은 이지휴 해설사 부부가 운영하는 전통한정식당이다. 구수하게 우러나는 된장에 가지, 고추찜, 조기구이, 상추와 쑥갓, 오이냉채, 산나물 무침 등등의 밥상을 마주할 수 있다. 흥선 대원군이 곡차를 기울이며 꿈을 다졌던 툇마루에서 그 느낌도 느껴볼 수 있다. 혼자 또는 여럿이 전통마을을 돌아보며 시간을 되돌려보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이지휴 해설사의 구수한 입담을 들으면서 걷는 시간은 더욱 실감나게 한다.
◆양동사람 이지휴 문화재해설사
은행 출신으로 해외근무 경력을 가진 이지휴 문화재해설사는 이미 환갑을 지낸 묵직한 입담의 소유자로 재미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그는 또 현대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양동마을 출신 양반이기도 하다.
이지휴 해설사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양동마을의 역사이자 우리나라의 역사요 세계사다. 지나간 날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이 삶의 지표로 삼을만한 교훈들을 생생한 그림으로 제시한다.
옛날 관광객들이 문화재를 안고 살아가는 양동마을 사람들의 안방까지 카메라를 들이대고, 거실에 신발을 신은 채로 올라서는 일들이 있어 다소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며 주의해야 할 일들도 알려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국제화시대에 맞춰 바쁘게 살아가는 탓에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하기 쉽다”며 “참을 인자 백번을 쓰며 화목한 가정, 사회를 꾸려갔던 선조들의 슬기를 본받는다면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싶다”고 은근히 좌표를 제시한다.
역사적 사실들이 오늘날 삶의 지침으로 부활하는 이지휴 해설사의 달변에 양동마을 탐방객들은 많은 일정을 양동마을 투어로 바꾸기도 한다. 이 시인의 목소리가 양동마을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 청량제가 되는 것 같다.
첫댓글 아흔아홉칸의 양반집, 단칸 초가집, 처마끝을 이어 돌아가는 골목길.........
아련한 옛 기억을 돌아보게 하는 힐링센터와 같은 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길이 보존하고 가꾸어 가야할 조상들의 숨결이 서린 삶의 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