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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적 미학을 위한 시론
Pour moi, il n'y a qu'une série d'actions. Pour moi, penser à la poésie est aussi une action. Mais pour que cette action se produise, j’ai besoin de l’infinité de l’univers.
Yuksa Lee ( poète, 1904-1944 ), « faits de la saison » (1938)
청각의 미학이 있다. 청각의 미학은 세계를 듣기 위해 자신을 말하는 사람을 이해한다. 자신이 말하기 위해 세계를 듣는 사람이 이 미학의 주제가 아니다. 이 청각에서부터 시작하는 시의 고찰은 새로운 미학적 시론을 도입할 것이다. 이제껏 우리는 주체들이 입으로 말을 내뱉으며 만들어내는 담론에 집중하면서 여러 가지 미학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들의 미학도 청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주체들은 말하기 위해 듣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구심론적 미학은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주체를 강화하는 방식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 가장 중심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칸트의 감성론이 있었다. 이 원심론적 미학은 다분히 유아론적인 것이고, 진정한 실용주의일 수 없었다.
반면에 청각의 미학은 끝없이 주체를 넘어서는 원심론적 미학이다. 한 작품을 단지 작가 존재 혹은 독자 존재와의 대화로 두기를 거부하는 작업이다. 이제 한 작품은 원천적으로 전 세계를 듣고 세계에 자신이 들리도록 말한다. 세계는 언제나 있고, 나도 언제나 있다. 이 두 방향의 쉼없는 교차가 청각의 미학이 말하는 대화이다. 이는 방향으로서의 미학이기에 진정한 실용주의 미학이다. 예술과 세계는 이렇게 서로 가로지르면서 지속의 평면을 엮고 있다. 한마디로 예술은 공명하는 행동이다. 그 이유는 영원히 들으면서 말하기 때문이다. 말하면서 듣기 때문이 아니다.
이글은 청각적 미학을 위한 시론이다. 나는 우선 귀의 탄생과 시의 탄생을 함께 사유하여 타자성을 정의한다. 이 타자성은 사실들을 촉발한다. 이어서 나는 귀의 사실들과 시의 사실들에 내재한 흐름을 분석한다. 이글은 그 내재성이 어떻게 방향으로서 의미를 생성하는지 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연대하는 공명의 방향이 어떠한 철학을 예고하는지 말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청각의 미학이 입증하는 발화의 창의성이 일종의 행복론일 수 있는 조건을 말할 것이다. 행복이란 우리가 창조적으로 진화하면서 자연의 생성과 소통할 때의 감각이다. 이것들을 자세히 규명해보자. 말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귀로 말한다. 우리는 공명 속에서 말한다.
귀의 탄생, 그리고 시의 탄생
청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청각은 귀의 기능이다. 하지만 진화의 역사 속에서 소리를 듣는 것은 귀의 원초적 기능은 아니었다. 원시적 귀는 몸에 직접 다가오는 압박을 예민하게 느끼고 반응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는 눈의 진화적 출발점과 같았으나, 귀는 나아가서 음파의 운동을 느끼는 기관으로 진화했다. 이 진화는 눈과 달리 귀가 지속을 강도로서 더 쉽게 측정할 수 있게 했다. 처음에 청각은 환경에 반응하기 위한 수용기였다. 물고기의 청각은 아직도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신적 진화와 함께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귀는 자연을 지적으로 번역하여 분간해내는 기능까지 도달하게 된다. 우리의 청각은 이 수준까지 이르렀다. 청각의 이러한 발달은 인간 존재가 타자를 느끼도록 했다. 물고기에게는 다른 물고기의 개념이 있을 뿐 타자의 개념이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타자의 개념이 있다. 그러니까, 타자의 개념이 이 타자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러한 감각이 타자 개념을 도입하게 강요한 것이다.
다른 어떤 감각보다 청각은 타자에 대한 정의에 많은 것을 빌려준다. 그리하여 사태는 이렇다. 청각은 스며듦의 영역을 개방한다. 이 나의 영역에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이 스며들 수 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내게 아주 큰 소리로 스며들었다면, 실제로는 스며들어서 나와 겹쳐 있을지라도, 나는 오직 혼자서만 세계를 채우고 있는 강력한 내가 아닌 것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내가 아닌 존재를 상상해낸다. 당연히 내가 아닌 것은 내게 큰 소리로 스며들 수도 있고, 작은 소리로 스며들 수도 있기 때문에, 청각 아래에서 타자는 강도에 따라서 너울거린다. 반대로 시각 아래에서 타자는 스며드는 것이 아니다. 시각 아래에서 타자는 덧칠된다. 시각 아래에서 타자는 어떠한 크기로든 있든지 없든지, 보이든지 아니든지 두 가지 뿐이다. 우리는 음악이 어떤 연주회장에서 어떤 음향 효과를 내며 녹음되었는지 진지하게 논의하지만, 미술이 도록에서 실재보다 작게 실려서 훼손되었다고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 시각 아래에서 타자는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시가 아직 타자로 존재할 때의 상황도 청각적이다. 쉽게 말해서 이 상황은 어떤 시를 쓰고자 하지만 아직 이 시가 기호화되지는 않은 상태를 말한다. 어떤 영감이 순식간에 나타나서 시인에게 덧칠되는 것이 아니다. 시작(詩作)의 초입에서, 마치 물감이 물감통 안에 퍼지듯이, 시인은 내가 아닌 것이 자연에서부터 풀려나와 내 세계에 퍼지고 있다고 느낀다. 시인은 지금 자신에게로까지 연결되며, 모호하고, 연속적인 내가 아닌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물감통 안에 물이 물감을 피할 수 없듯이 나는 이 앞에서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이다. 만약 이 시작의 문턱에 제 마음대로 능동적으로 드나들 수 있다면 시인은 시를 원할 때마다 숨 쉬듯이 써 내려갈 수 있겠지만, 그러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그런 사람이 되고자 부단히 욕망할지라도 그렇다.
시의 생성론을 쓴다면 우리는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치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상태와 같은 시의 초기가 있다. 먼저 말하자면, 자궁 안에서 태아가 타자를 인지하는 방식은 특히 청각을 통해서이다. 태아의 촉각은 양수 안에서 거의 완전하게 제어되어 있고, 심지어 태아의 시각은 출산 직후에도 완전하지 않다. 이 속에서도 태아는 모체의 소리와 모체 주변의 소리만은 뚜렷이 듣는다. 오히려 그 양수가 음파를 증폭한다.
이 청각이 우리가 최초로 느끼는 타자에 대한 감각적 상태이다. 태아는 무엇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오로지 다가옴이라는 방향으로서만 존재하고, 그 방향을 헤아리는 것으로만 구별되는 현상들을 최초의 타자로서 받아들인다. 요컨대, 태아가 듣는 소리 즉 타자는 기관 없는 신체(sans organs)이다. 기호가 없는 의미이다. 형태가 없는 방향이다. 태아에게 이 타자는 기관이 없다는 점에서 제도적이지 않고, 태아에게 이 타자는 자신이 불러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본능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어떤 기호론적 심리학으로도 번역될 수 없다. 우리는 태아의 이 타자를 태아의 성장론으로서 그러니까 일종의 생성론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태아에게 타자의 출현은 분화되고 분열되기 전 생성의 한 국면이다.
시가 생성되는 국면도 마찬가지이다. 형언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 자연에서부터 시인에게로 쏟아지고 있다. 시인은 이 연속을 행복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어떠한 구불거리는 방향을 그리고 있고, 이것을 나타내려면 그 방향을 묘사하려는 기호와 기관과 형태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당장 시인은 그것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마치 어떤 기호론도 아는 바 없는 태아가 부모를 호명할 수 없듯이, 시인은 이 흐름을 가둘 수 있는 기존의 기호는 있을 수 없다고 느낀다. 그것은 기호가 아니라 세계와 더불어 자신의 생장으로서만 표현된다. 달리 말해, 태아에게 소리가 기호로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시인에게 타자는 기호 자체로서 갑자기 출현하지는 않는다. 마치 태아에게 소리가 어떤 언어를 직접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다음 성장의 국면을 북돋는 것처럼, 시인에게 타자는 기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권능을 북돋는다. 이 지면에서 비판론을 개진하지는 않겠지만 내 견해로는 이 청각적 생성론에 라깡도 프로이트도 불러올 자리는 없다.
시인은 알아듣지 못한 이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는 이 알아듣지 못했던 것을 알아듣고자 한다. 이 자신을 관통하는 연속성의 이질적 흐름을 체득하고자 한다. 이것은 이 자연의 흐름을 자신의 운동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는 수동적으로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노력을 요구한다. 권능이 북돋아졌다가 할지라도 행동이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품이 될 수 없다. 만약 그가 시인이라면, 이 시인은 이 흐름을 단어에 상응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하고, 이러한 단위의 형성은 곧 이 흐름을 분절하는 작업이다.
이제 이 작업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아는 일이 남아 있다. 시는 내적으로 재생산된 상황 자체인가? 내적으로 분절되어 흐름을 이해하는 일 자체가 곧 시가 되는가? 자연은 존재를 선별하여 관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인이 아닌 사람들도 그의 영혼이 구별하는 모든 자연의 일면들을 반복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자신도 아마 어떤 시적 촉발을 정확한 단어로 묘사하고 정확한 억양으로 발음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자연의 한 기조를 포착하고, 그것의 리듬을 따라가고, 심지어 그것을 나의 기억 속에 고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서 특유의 번짐과 뭉침들을 어렵지 않게 분별한다. 나는 마크 로스코가 말레비치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본다. 따라서 나는 어떤 작품은 마크 로스코 답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 그렇다고 내가 화폭에 마크 로스코의 번짐과 뭉침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경우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자연을 이해한다고 하여서 자연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청취한 자연을 내적 말이라는 수단으로 분절하는데, 이 수단은 단지 자연의 두드러진 윤곽만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내적 말과 자연 자체와의 관계는 악보와 연주된 음악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이 타자로서의 자연은 한 운동으로서 시인에게 다가오는데, 이 때때로 어려운 운동을 내적 말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말로 행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자연이라는 한 운동을, 즉 시인의 타자를 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른 운동들과 구별할 수 있는 핵심을 충분히 숙고하면 된다. 그러나 운동을 행할 줄 알기 위해서는, 자연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것을 신체가 체득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신체의 논리는 생략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체의 논리는 요구한다; 요구된 운동의 모든 구성적 부분들이 하나하나 제시되고, 그 다음에는 전체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완전한 자연을 탐해야만 한다. 여기서는 어떤 세부사항도 소홀히 하지 않는 완전한 분석과 어떤 것도 축약되지 않는 현실적 종합이 필요하게 된다. 상상적 시작은, 시발적인 몇몇 근육 감각들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소묘에 불과하다. 실제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느껴진 근육 감각들이 그것에다 색채와 생명을 부여한다.
귀의 사실, 그리고 시의 사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자. 귀의 사실 : 우리가 무엇을 듣는다는 사실은 이중적이다. 한편 우리는 소리의 움직임을 귀로 지각하고, 다른 한편 우리는 소리의 움직임을 정신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이해는 복잡한 지적 번역만을 의미한다기보다, 태아가 느끼듯이, 사람들이 그것을 타자라고 인식하는 그 자체를 뜻한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건대, 정신은 육체 그리고 두뇌에 새겨져 있지 않다. 영혼을 두뇌로 받아들인다면 이해는 쉬울 수 있으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영혼은 두뇌를 포함하는 귀와 연결된 신경계 전반을 회로로 삼아 작동한다. 단지 두뇌가 이 신경계 회로를 주도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뿐이다. 그 작동 중인 상태를 나는 정신이라고 일컫는다. 육체에 새겨지는 방식이 아니라 육체에 펼쳐지는 방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이 있다는 말이다. 요컨대 육체적 귀와 정신적 귀가 있다. 한편으로는 상기된 청각적 이미지가 최초의 지각과 동일한 신경 요소들을 진동시킨다는 것, 그리고 기억은 이렇게 해서 점진적으로 지각으로 변형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단어와 같은 복합적인 소리를 상기하는 기능은 지각 기능과는 다른 신경 물질의 부분들과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언어의 상기에는 육체와 정신의 연대가 필요하다.
다시 시로 돌아가자. 시의 사실 : 다시 말해보자, 시인에게는 언어 요소적 감각들이 생겨나는 문학적 권능이 내재한다. 이 권능은 말하자면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진행되는 두 상이한 측면들에 의해 작동될 수 있다. 앞에서 문학적 권능들은 우선 신체적이다. 감각 기관들로부터, 따라서 실제적 타자로부터 인상들을 받는다. 뒤에서의 문학 장들은 다음으로 정신적이다. 중개와 중개를 거쳐 잠재적 대상의 영향을 받는다. 문학적 이미지들의 장들이 영혼으로서 존재한다면,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 기관들과는 위상학적 관계의 기관일 것이다. 자연으로부터의 언어적 타자는 실제적 대상이다. 영혼의 관념이 아니며, 신체의 언어적 감각 기관이 실제적 대상들의 저장소일 수 없다. 저장소는 자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문학적 이미지들의 장들은 잠재적 대상들의 저장소가 아니다. 감각에 대한 창조적 대답일 뿐이다. 문학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
[이육사 교목]
시를 생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장 끝까지 추적할 때 우리는 가장 순수한 의도로서 말을 기억하려는 욕망, 말하려는 욕망을 만난다. 더 심오하게 생각해본다면, 존재가 자기 존재로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 나아가 존재가 자기 존재로서 있고자 하는 욕망,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이론까지도 만날 수 있다. 이 가장 순수한 의도와 시 사이에는 수많은 매개적인 추억들, 감각들, 이미지들이 개입한다. 예컨대 어렴풋한 어떤 감각들이 그를 휩싸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감각적 이미지에 위상학적으로 대칭되는 정신적 이미지가 호응해야만, 형언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시적인 상황이 시가 된다. 나아가, 순수한 의도가 조금 더 진전되어서 시로 쓰고자 하는 어떤 관념을 목적으로 분명히 삼을 때, 이 관념은 잇따라는 단계들을 통해 언어적 이미지, 시라는 작품 속에서 구현된다. 그렇게 해서 이 정신적 언어는 다양한 운동 기제에 종속되면서 예컨대 손으로 쓰인다.
시인은 지각에서 관념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에서 지각으로 이행한다. 습관을 따라 지각한 대로 말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이들의 대답은 창조적 대답일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창작은 일종의 전환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변혁이다. 앞서 말했던 흘러들어오던 자연이 이 변혁을 통해 흘러나가는 자연으로 방향을 바꾼다. 즉 새로운 의미가 태어난다.
귀의 대화 그리고 예술의 대화
시들은 개체적이다. 즉, 각각의 시는 고유하다. 이것이 단순히 이 시의 언어적 조합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일컫는 것일 수는 없다. 시의 고유성이란 이 시만이 드러내는 어떤 본질적인 현존이 고유하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 현존은 심지어 자신이 올라 탄 이 언어들과 비교해서도 고유하다. 분절된 문자들을 조합하여 시를 만들지라도, 그 분절에 일치하는 분절된 관념들의 연합이 시의 사유가 아니기 때문에, 이 시적 현존은 고유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적 현존은 자기자신으로부터도(dedans) 지속적으로 이질적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동일한 시가 늘 다르게 읽힌다는 것을, 정확히 같은 정리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복잡하게 말할 수 있다 : 진실로 시의 내면은 이질성의 흐름이다.
시의 내면은 흐르는가? 시인이 자신의 작품에서 흐르는 내면을 아주 적절하게 분절화하여 기호작용화(signification)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늘 그러하지만, 시인은 어눌하게나마 인상의 말을 더듬어보고 또 그 묘사를 준비한다. 그 소묘의 재료들이 몸에 이미 남겨져 있어야 한다. 예컨대 분명히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은 시인의 자산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기에, 앞서도 말했듯이 창작의 경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분절화의 내적 운동들 뒤에는 더 미묘하고 본질적인 어떤 것이 있다. 예컨대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훌륭한 시인은 아니다. 시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고, 이는 시의 흐르는 내면과 정확히 같은 말이다.
이런 태어나는 흐름들을 듣기 위해서, 나는 이제 영혼의 귀에 대해서 더 말해보고 싶다. 잠시 음악으로 가보자. 사실 어떤 예술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음악에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곡가의 영혼에는 태어나는 소리들이 있다. 작곡가는 이 소리들을 듣는다. 주의하세요. 이 소리들은 음계를 갖춘 것이 아니며, 심지어 상기된 어떤 추억들이 아니다. 세상에 없었던 소리가 사람의 영혼에서 태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앞서 태아가 타자로서 느꼈던 자연과도 유사하다. 태아가 듣는 타자처럼, 이 흐름에는 방향이 있을 뿐 형태가 없다. 그러나 자아로서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이 흐름은 방향이 다르다. 이 흐름은 샘솟는 것이다. 작곡가는 이런 태어나는 소리들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는 이 태어나는 소리들을 악보에 상징적으로 기보할 것이다. 이는 모든 기호가 이 운동이 상징으로 삼은 것, 그리고 이 운동으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을 뜻 한다. 실재적이고 구체적이며 살아있는 이 흐름들은, 이 자연에 대한 진정한 사유는 어떤 음악 비평가들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내재성의 평면인데, 종래의 기호론적 철학과 심리학으로는 분석하기 어렵다. 분절화에 집착하는 그들은 자기 분석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서 이 지속의 장을 만날 것이다. 당연하게도 실제 사태는 연속에서부터 분화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는 무엇이 우리에게 만들어졌는지를 관찰하면서 우리가 무엇이 되고 있는지, 나아가서 될 수 있는지.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내면이라는 명사 아래에서 연구하는 것, 그것은 내면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이미지들과 관념들의 일체를 구성하여 얻어진 인위적 모방물일 뿐이다. 음악과 시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상상력이 곧 그 음악의 진실한 내면이라고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청각이 촉발하는 이미지들과 더불어 심지어는 관념들과 더불어서 시의 흐르는 내면을 재구성할 수 없다. 그 시를 점유하고 있는 인상들의 점을 아무리 많이 찾아내도 그것이 움직임이 되지는 않는다.
인상이란 흐르는 내면의 정지이다. 내면이 자기 길을 계속 가는 대신에, 정지할 때 또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올 때, 인상은 태어난다. 드뷔시는 자신이 작곡한 전주곡 악보들의 끝에 각각 표제들을 달았다. 그러나 이 너무나 유명한 곡들의 연주자와 청취자는 모두 이 전주곡들 하나하나의 제목과 관념들을 잘 알고 있다. 드뷔시의 올바른 의도를 배신한 우리는 이 곡에 대한 어떤 인상들을 갖는 것이다. 그 인상은 주로 제목과 관련된다. 자, 이제 우리는 그 제목만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백과사전의 도움을 받아 그 제목의 단어들이 뜻하는 바를 충분히 고찰하면서, 그 제목을 얼마 전에 들었던 드뷔시의 그 흐르는 내면으로 재구성하려 해보자. 혹은 이제 곧 들을 드뷔시의 그 흐르는 내면을 미리 재구성해보려 해보자. 이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내 의식이 상상력을 통해서 흘렀던 음악 혹은 흐를 음악을 재현하면서 순간순간 그 음악을 멈춰 세워 인상들을 구축할 수는 있겠지만, 그 반대로 구축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 드뷔시의 흐름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이 흐른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가 연속되어 끝없이 지각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은 앞서 충분히 말했다. 음악은 흐르는 것은 드뷔시의 영혼이 그 음악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태어나는 흐름들 자체를 고려해보자. 그러면 당신은 거기서 국면들이라기보다 방향들을 발견할 것이다. 태아는 어른이 되었고, 어른은 의미가 자기 안에서 샘솟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당신은 시적 사유가 본질적으로 연속적 창작이고 시라는 기호작용이 이 방향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 말하지만 이 연속적 창작은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행동이나 몸짓을 통해 바깥 공간 속에 이 생성을 직접 드러내거나, 이 생성을 암시할 수 있는 어떤 기호를 발표한다.
우리가 이 기호의 진정한 실체를 알려면, 시의 실체를 알려면 생생한 사유가 형성하는 이렇게 한 인격에서부터 사회를 향한 움직임을 추리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이 실체가 있는 시를 전달하려면, 타인의 영혼 속으로 이 흐르는 실체가 생생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질적 노력 : 시의 모든 것, 운율, 형태, 음성, 심지어 여백까지도,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시인의 사유 방향을 종이 위에 표현해야 한다. 우리 편에서는 이 모든 것을 꼼꼼히 읽을 때 그나마 이 시인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노력 : 시인은 이 모든 것이 무리 없이 읽혀서 시의 내면이 중단 없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 편에서는 시인의 영혼에 동감할 수 있도록 우리 감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 두 노력의 연대를 통해서 우리는 실체를 탐구한다.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것, 그것은 물질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 중 한쪽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이 두 노력 사이의 왕복 그 자체이다. 내가 이 왕복이 수고스럽지 않다고 느끼고, 자발적으로 행할 때, 나의 샘솟음을 예고하는 타자와 공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청각의 생성론이 시작되어 이 공명은 증폭될 것이다.
결론 혹은 공명
공명une certaine correspondance, 마지막으로 이것을 말할 때가 되었다. 그전에 되돌아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몇 차례의 연대들을 통과해왔다. 우리는 이것들 사이를 왕복하며 진동한다. 귀와 예술, 타자로부터의 흐름과 자아로부터의 흐름, 아이와 어른, 신체적 청각과 정신적 청각, 시의 바깥과 시의 내면, 물질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 이는 존재가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면서 남기는 기호론적인 흔적들이다. 옐름슬레우가 기호는 표현과 내용으로 이중분절된다고 하였다. 지금 양극들은 생성을 하나로 기호로 만들 때, 달리 말해 우리가 생성을 묘사할 때 불가피하게 만나는 이중화들이 그 이중분절이다. 그러나 분석하기 전의 원래 기호가 하나이듯이 생성은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기억은 하나이다.
그런데 공명은 이 연대와 연대, 이 연대들이 모두 하나의 직관의 형식 아래에서 함께 소리를 듣고 함께 소리를 낼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 공명은 그대로 대화의 정의이다. 우선 소박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글을 쓰고-글이 쓰이고-글이 읽히고-글이 행해지는 것은 하나의 공명이다. 공명이 강력할 수록, 마치 글 자체가 세계를 바꾸는 듯이 느껴질 것이다. 그 공명은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연대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 공명은 또한 쓰고, 쓰이고, 읽히고, 행하는 사람 혹은 사람들 사이의 실용주의적 대화를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서 공명하며 생성이 솟아오르는 한 방향을 추적할 때 우리는 이 연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움직이는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예컨대 그 글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달리 말해 존재는 어떻게 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를 하는가? 이는 실용주의 철학의 과제이다. 실용주의는 세계와의 실제적 공명을 실체로 삼아 사유하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이 대화에 대한 철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세계와 더불어서 생성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명은 궁극의 긍정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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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런데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에 그가 있다면, 그는 전혀 미학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그는 삶의 예술을 완전히 놓치고 예술의 삶에만 탐닉하게 된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실천주의 실행주의 pragmatisme 가 아니라, 나조차도 실용주의라고 한 것이 몹시 거슬리기는 한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추후 수정하자. 이 번역은 정말로 심각한 오역이다.
태아의 청각 34주 촉각 12주 시각 28주 미각 24~27주. 이렇게 볼때 태아에게는 청각적 타자 감각 자체가 타자적인 시기가 꽤 길게 존재한다. 이때는 모체의 감각을 정말로 자기 감각으로 느끼는 유일무이한 신비의 시기일 것이다. 그리고 면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