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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007 시리즈’에서 결투가 클라이맥스에 오른 순간, 관객들이 기대하는 게 있다. 립스틱 총, 풍선껌 폭탄 같은 제임스 본드의 기상천외한 비밀병기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를 천하무적으로 변신시킨 것은 암호명 ‘Q'로 불리는 무기 개발자 덕분이다. 국방과학연구소 김인우 박사는 007 시리즈의 ‘Q'처럼 최첨단 무기를 개발하는 사람이다.그는 군을 다녀온 한국남자라면 애인처럼 애지중지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K-1A, K-2, K-3, K-4, K-6 등 K시리즈 소총 개발에 참여한 한국 소총의 대부다. 지난 9월에는 차세대 한국형 복합소총인 ‘K11’을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5.56㎜ 소총과 20㎜ 공중폭발탄 발사기, 두 화기(火器)를 세계 최초로 하나의 총으로 결합한 형태. 방아쇠 조작 한번으로 두 화기를 한꺼번에 쓰거나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2중 총열 형태의 소총이다.총의 윗부분에는 SF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열상검출기가 달려 있다. 열과 레이저를 이용한 광학계산기와 조준기가 자동으로 표적을 찾으면서 거리를 측정해 조준하는 기능이다. 미국, 러시아 등이 오래 전부터 개발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 ‘상상 속의 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무기다.‘꿈의 소총’을 만든 그를 만나기 위해 대전의 국방과학연구소를 찾았다. 국가보안시설이라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후에야 김인우 박사의 연구실로 향할 수 있었다. 디즈니 캐릭터 중 하나인 ‘푸우’같은 인상을 한 그에게 ‘K11’에 대해 묻자 “무안하다”는 말부터 한다.“K11이 저만의 작품인 것처럼 모든 공(功)이 제게 돌아오는 것 같아 무안하고, 미안합니다. 이놈을 만들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생했어요. 이 연구소에서만 약 40~50명의 연구원이 참여한 프로젝트입니다. K11은 이들 모두가 힘을 합해 빚어낸 작품이에요.”K11프로젝트에 대해 김박사는 자신이 시작하긴 했지만 정작 자신이 한 일은 연구원들의 아이디어를 종합하면서 격려한 것뿐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K11’의 백미는 낮이든 밤이든, 벽이나 나무 뒤, 건물 안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곳까지 주변의 열을 감지하면서 적을 찾아내 스스로 조준한다는 것이다.광학계산기가 적까지의 거리를 자동으로 계산, 발사한 탄환이 벽을 뚫고 들어가 적의 머리 위 3~4m지점에서 자동으로 폭발하게 하면서 수많은 파편으로 적을 제압한다. 김 박사는 “이 소총을 들고 있으면 자신의 몸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않고도 숨은 적을 찾아 총을 쏠 수 있다”고 말했다.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소총 ‘K11’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 박사가 ‘K11’ 개발과정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전쟁터에서 소총은 장병들의 목숨을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병기예요.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 병사들의 공포심과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면 훈련 때처럼 조준해서 사격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각 나라마다 병사들의 생존율을 높이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경쟁적으로 미래형 소총 개발을 해왔죠.”
새로운 소총을 개발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이제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낸 나라는 없다. 무기개발 선도국인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가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입해 총을 만들고 있지만 크기나 무게에 있어서 휴대하기 어렵고,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이나 위력이 기존 소총보다 못했다. 무기개발 선진국들의 거듭된 실패 소식을 듣던 김인우 박사는 ‘우리가 한번 해봐야겠다’고 의욕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 때가 2000년.
“문득 ‘총알이 수류탄처럼 공중에서 터지면 어떨까? 총이 스스로 숨어있는 적을 찾아내면 어떨까? 총구가 적을 향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조준되는 총을 만들 수 없을까?’처럼 만화 같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명품 소총으로 평가받는 K-2 소총 개발 노하우에 세계최고라는 우리나라의 IT기술을 잘 조합하면 불가능하지도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소총만큼은 미국이나 러시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다음 과제는 로보캅 같은 미래형 군인장비 개발
이런 구상을 선배 연구원들에게 털어놓았는데, 선배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말이 되냐’ ‘요즘 만화 그리고 있느냐’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정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무작정 후배들을 데리고 시작하게 된 겁니다.”
개발을 시작한 후에도 어려움은 끊이지 않았다. “1990년대 말 정권이 바뀌면서 국책연구소의 연구과제들을 민간으로 이전하는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소총개발 역시 민간 군수업체로 개발 사업을 이전하는 분위기로 흘러갔어요. 연구 과제를 평가하는 연구심의회를 찾아 ‘우리가 개발한 K-2가 세계에서 인정 받지 않느냐’며 ‘조금만 정책적으로 배려해 주면 누구나 탐내는 명품을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하고 다녔지요.”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지 8년이 지난 여름, ‘K11’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반응은 뜨거웠다. 화력 시범을 본 세계의 군수 관계자들은 망설임 없이 ‘K11’을 ‘최고의 총’이라며 호평했다. 김 박사는 “이걸 완성한 후 이제까지 만든 K시리즈의 완결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 소총의 대부 김인우는 어떻게 총 만드는 남자가 되었을까? 그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아마도 성장배경 때문이 아닐까”라며 운을 뗐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장교로 입대해 월남전에도 참전한 군인이셨죠. 어릴 때 아버지 사진을 보면 항상 총을 들고 계셨어요. 군인인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 때만 일곱 번 전학했는데, 그 때마다 꼭 그 학교의 ‘짱’이랑 붙었어요.
싸움에서 지고 울면서 집에 돌아온 다음 날이면 제 기를 살리겠다며 아버지가 권총을 찬 채 학교 앞까지 데리러 오셨죠. 정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다 ‘김인우’하고 큰 소리로 부르셨어요. 다음날부터 아이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이게 어릴 적 총에 얽힌 기억이에요.”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첫 직장인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에 입사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총을 만들게 될지 몰랐다고 한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기계, 자동차, 조선 같은 중공업 육성이 국가정책이었어요. 군인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인지 국가의식이 뿌리 박혀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게 국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우중공업에 들어갔는데 일에서 재미를 찾지 못했어요. 이직을 생각하다 국방과학연구소에 지원했고, 운 좋게 붙었죠.”
1982년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온 그는 소총 개발 팀에 배정된다. “처음에는 탱크나 대포 같이 큰 걸 만들고 싶었어요. 그게 더 멋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소총을 만들다 보니 점점 재미있었어요. 탱크처럼 큰 건 수 백 명이 달라붙어 하나를 완성하니 제 작품이라고 하기 뭐하잖아요. 그런데 소총은 제가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만들 수 있더라고요. 비로소 ‘내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K-1에서 K-11까지 17년을 이어온 K시리즈 소총을 개발해온 그는 현재 미래형 군인장비 개발에 돌입했다. 전투복, 헬멧, 소총이 사람과 하나가 돼 마치 로보캅 같이 움직이는 미래형 군인을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이다.
“미래형 군인은 꼭 해보고 싶은 계획입니다. 충분히 가능할 거란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군인뿐 아니라 인류를 위해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도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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