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과 만난 영화
1. 김태웅 희곡 <이(爾)>, 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
‘훌륭한 영화는 연극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진화시킨다.’는 앙드레 바쟁의 말이 적절하게 들어맞는 예가 영화<왕의 남자>이다. 2005년 개봉되어 순식간에 천만을 훌쩍 넘었던 영화<왕의 남자>는 원작이었던 연극<이>의 무대를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극이 아무리 히트를 친다한들 영화의 복제와 파급 능력을 능가할 수는 없다. 흥행성적을 가늠하는 관객의 수는 작품성을 떠나 산업화 시대의 연극과 영화의 비교를 불허한다. 탄생 전력에 있는 영화는 연극에 감히 도전장을 낼 수도 없다. 영화가 시작된 19세기 후반 이미 연극은 수천 년의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히트작<왕의 남자>가 말해주듯 영화는 그 대중적 파급력에 있어 연극을 훨씬 앞서 있다. 그래서 연극은 지적인 탐구의 예술이라는 속성으로 매니아 계층에 의존하는 편이고, 영화는 지역과 계층을 막론하고 다수의 대중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이것은 어느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두 장르 사이에는 단지 나름의 독자적인 특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는 연극 <이>와 영화 <왕의 남자>를 비교분석 하면서 바로 그 독자적인 특성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연극과 영화든 아니면 여타 장르 사이에서 각색이라는 것을 통하여 새로운 무엇을 재생산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의 확보’이다. 이 문제는 재생산된 결과물의 생명력과 같다. 각색의 과정이 새로운 시각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것은 각색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여기서 시각의 확보라는 것은 재생산을 책임진 사람이 원작을 재료로 새로운 작품세계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지루하지 짝이 없는 동어반복에 그치고 만다. 역사상 잘 만들어진 각색물로 호평을 받았던 경우, 그것은 분명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원작은 그저 자료로서의 가치만 지니고 있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원작의 세계를 얼마나 충실히 담아내느냐가 각색을 성공으로 이끄는 관건이라고 주장하는 보수적 담론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원작의 우월성에 대한 편견적 의도가 강하다고 본다.
2. 이윤택 희곡 <오구-죽음의 형식>, 이윤택 감독<오구>
연극 <오구>는 90년대 우리 연극계의 대단한 수확이자 우리 문화의 잠재적 가능성을 예술적으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품이다. 전통을 현대화시키고자 하는 부활의 목소리가 70년대 이후 학계나 예술계에 깃발을 올렸지만 지식인층 중심으로 흐르거나 이슈화된 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대중적으로 흡수된기에는 요원한감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재미있게 혹은 쉽게 아니면 장난스럽게 우리의 전통을 서양식 무대에서 연희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연출가 이윤택의 탁월한 예술성이자 천부적 ‘끼’가 아니면 불가능한게 아니었을까.
연극 <오구>는 채윤일에 의해 89년 초연되었고 이윤택 연출로 선보인 것은 90년이다. 아직도 공연무대를 놓지않고 있으니 무려 17~8년에 가까운 세월을 공연돼 온 셈이다. 아마도 우리 연극사상 가장 롱런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연극과 영화의 비교 관점에서 서술해가는 이 글에서 분명 <오구>의 우위는 연극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구>의 소재는 그것이 프로시니엄 무대일망정 현장성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그것의 영화화작업은 일종의 실험적 가치만 인정하고 싶다.
소설과 만난 영화
1. 이문열 소설, 박종원 감독<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에 이어 학원소설이라 불리는 계보에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은 90년대가 낳은 대표작으로 자리하고 있다. 학교를 무대로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학원소설은 그것이 단지 학원이라는 특수성을 벗어나 성인 사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면에서 알레고리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도 알레고리의 코드를 찾아 적절하게 대입시켜보는 관점이 작품을 분석하는 근간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원작소설과 영화 사이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주제의식에 있다. 소설에서 이문열은 허상으로 가득 찬 영웅, 소설의 표현대로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의 몰락을 통하여 ‘권력의 허상’을 그리고 있다면, 영화는 몰락하지 않고 우리네 삶의 배면에 ‘존재하는 권력’의 실체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하여 영화는 몇몇 인물에 있어서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고, 4⋅19라는 정치적 환경을 상징요인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스토리 면에서는 엔딩 부분에서 가장 변화된 선택을 하고 있다. 그러면 소설과 영화의 흐름을 ‘차이’라는 관점에 기준을 두고 서술해 보자.
소설이나 영화에서 모두 발단의 장면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기 위한 회상기법을 사용한다. 1인칭 주인공이자 나레이터인 나, 한병태는 초등학교 시절의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키면서 막막해지는 느낌을 지금도 받고 있다. 현재 학원의 강사인 영화 속의 나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부고를 듣게 되고 문상을 가면서 과거로 플래쉬백 된다. 한병태에게 담임선생님의 부고는 일상적인 통과 의례 정도의 의미일 뿐이지만 장례식에 온다고 되어 있는 엄석대의 소식은 그의 잠재의식을 짓누르며 현재를 막막하게 만든다.
엄석대는 누구인가. 그는 한병태가 자유당 시절, 서울의 공무원이었다가 바람을 맞아 날려간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가게 된 한 작은 읍의 초등학교에서 맞닥뜨린 인물이다. 반장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지녔던 그는 학생 신분으로는 누리기 어려운 지도력과 혜택을 동시에 쥐고 있는 인물이다. 물이나 도시락, 과일 등 상납의 고리가 아이들과 엄석대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것은 물론 선생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으로 선생님의 지위를 유지하여 학생들에게 군림하는 5학년 2반의 제왕이었던 것이다. 엄석대의 통솔력은 그가 맡은 반을 전교 제 일의 반으로 이끌어 왔다는 전력 때문에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수월하고 효과적인 교육체계인 셈이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엄석대는 반장으로서 권력을 비호 받았고 누구도 거기에 저항하거나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병태는 새롭게 전학 간 엄석대 반에서 이러한 권력의 고리를 눈치 채지 못한 채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서울에서도 늘상 상위의 성적을 유지하던 모범생이었고, 이 작은 소읍에서 군수 다음의 위치에 있었던 아버지의 후광을 입는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잘난 한병태이지만 지속되는 아이들의 따돌림과 엄석대의 적대인물로 겪어야 하는 수난은 그를 곧 문제아로 만들었고 그의 부모조차도 엄석대를 시샘하는 그의 치졸함으로 모든 상황을 몰아붙인다. 엄석대를 향한 그의 저항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그는 곧 굴종을 선택함으로써 엄석대 다음 가는 서열자로서 대우를 받으며 편안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한병태의 굴종이 불러온 그들의 평화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엄석대의 왕국은 파국을 맞게 된다. 새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이 엄석대의 ‘매사 우수함’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엄석대의 실체가 들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동안 그의 우등생 전력이 실상은 시험지 바꿔치기에 의한 조작극이었음을 선생님이 밝혀내면서이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엄석대의 위상은 곧바로 아이들의 배신으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받았던 억압과 수탈, 비리의 고리가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동안 엄석대의 가장 절친한 조력자들이 그를 가장 강하게 몰아붙인다. 엄석대의 비리로 얽힌 위상도 그렇지만 또 다른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변절해가는 아이들의 모습도 무릎을 칠만큼 탁월한 심리로 묘사된다. 한병태도 그렇다. 어찌 보면 엄석대의 허상에 가장 짓눌렸던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적대적인 고발을 하지 못하고 ‘모른다.’로 일관한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중도적 인물의 비굴함인가. 아니면 그나마 남은 양심의 표출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인물은 김영팔이다. 그는 소설에서 없었던 인물로 영화에서 새롭게 창조된 인물 줄의 하나다. 영팔은 정신적으로 다소 모자란 아이로 바보형의 인물이다. 그의 이런 바보스러움은 엄석대 왕국에서도 그를 중도의 위치에 놓게 만들었고, 특유의 순수함으로 세상을 가장 정확하게 바라보는 위치로 만들었다. 그는 한병태가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때 유일하게 그를 따르며 그의 친구가 되어준 인물이다. 그러나 한병태가 엄석대에게 굴종의 깃발을 들었을 때 그는 전에 주었던 탄피를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엄석대의 비리가 낱낱이 밝혀지는 순간에도 그는 엄석대를 벌하기보다 그를 고발하는 아이들의 향하여 ‘너희들도 나뻐’라며 울어버린다. 한병태의 침묵은 모른다로 일관하는 비겁함에 가까운 중도지만 영팔은 양자 모두에게 채찍을 가하는 가장 진실에 가까운 중도이다.
숨은 실체가 밝혀지고 엄석대는 교실을 뛰어나가 음지에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복수를 하며 보다 본격적으로 악의 실체로 변해가지만 영화에서는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도록 만든다. 그는 동창들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적인 실체가 돼버린 것이다. 누구의 말로는 그가 큰 차의 뒷 자석에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도 하고 누구는 그가 금융계의 큰 손이 되었다고도 한다. 동창들이 모인 선생님의 상가에도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으며 그 궁금증을 더한다. 소설에서는 강원도의 한 피서지에서 범죄를 저지르다 체포되는 것으로 엄석대의 몰락을 징계의 방향으로 몰고 가지만 영화에서는 한 무더기의 회환에 담긴 이름없는 실체로 계속 존재하게 만든다. 끝내 나타나지 않는 엄석대를 생각하며 새벽녘에 상가를 나오는 한병태는 독백처럼 그의 내면을 드러낸다.
“여전히 5학년 2반의 모습은 사회 속에 있고, 앞으로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실히 확산할 수 없다.”
한병태의 독백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한 마디로 요약해준다. 소설은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으로 과거 5학년 2반의 기억을 일단락 시키지만 영화는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모습이라는 면에서 5학년 2반을 현재진행형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차이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영화가 매우 부정적임을 보여준다.
영화의 부정적 사회인식은 5학년 2반에서 엄석대의 허상을 몰아내었던 젊은 담임선생님이 현재 국회위원이 되어 상가에 나타난다는 설정으로 보강이 된다. 그의 정치편력은 개혁을 선도했지만 또 다른 권력의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게 되는 권력의 통과의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 씁쓸함마져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 이를 선생님이 지닌 개혁의지를 현실적으로 실현해 보기 위한 선택으로도 볼 수 있지만 감독은 엄석대의 실체를 몰락으로 몰고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또한 시대적 배경이 된 자유당 시절의 부패와 4⋅19의거를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이 작품이 정치적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은 소설 나름대로 학원소설의 한 정점에서 알레고리의 탁월한 수준을 실현하고 있지만 그를 각색한 영화의 경우, 어찌 보면 우리의 정치 경험상으로 볼 때 보다 사실적이면서 비판적이라 볼 수 있겠다. 몬트리올 영화제, 하외이 국제영화제, 청룡영화제, 백상예술대상 등의 빛나는 수상기록만 보아도 이 영화의 우수성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2. 구효선 소설<낯선 여름>, 홍수상 감독<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구효선의 <낯선 여름>(1994)을 원작으로 하였다는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은 제목의 차별성만큼이나 원작과 떨어져 있다. 변형적인 각색 태도를 각색의 성공적인 케이스로 간주하고자 하는 이 저서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성공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연애소설인 원작소설을 가지고 홍상수 감독의 특유의 영상으로 재구서하고 있다는 면에서 전혀 별개의 두 작품이라는 풍성함마져 선사한다.
소설 <낮선 여름>은 전업작가인 김효섭과 유부녀인 강보경의 러브스토리를 특이한 구성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여기서 특이함이란 김효섭에게 배달되어 온 강보경의 글과 김효섭의 일인칭 서술의 교차하면서 이끌어가는 방식을 말한다. 이 방식은 두 자아의 사랑을 매개로 한 감정이 동시에 서술되는 효과를 가져와 각자의 지나간 삶과 사랑의 현주소를 동시에 읽히게끔 하는 작용을 한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강보경의 글이 그녀가 죽은 후 남편으로부터 송부된 것이 드러나면서 극적인 면모를 지나게 된다.
이 작품에는 김효섭과 강보경을 중심으로 민재와 강보경의 남편, 이렇게 네 사람이 구도를 형성한다. 소설가 김효섭은 전업 작가로 갑작스레 죽어버린 아내의 기억을 갖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출판사에 근부하여 알게 된 민재도라는 젊은 여성이 있지만 단 한 번의 잠자리 이후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민재는 조부모때의 프랑스 인과 베트남의 피가 섞여 한국인 아버지로 이어지는 복잡한 혈통의 인물이다. 김효섭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미모의 외모 탓에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근근이 변역일을 하며 부유하는 생활을 하는 인물이다. 보경은 자상한 남편과 두 아이를 둔 행복한 가정의 주부이다. 깨끗하고 고운 외모의 적당히 문화적 감각도 소유한, 이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중산층의 유부녀이다. 그녀의 남편은 기업의 중역으로 젠틀한 메너와 착한 심성을 지녀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천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보경의 행복하지만 평범한 상황은 그녀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다가온 격정적인 사랑, 김효섭으로 인해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가정의 결손이 탈선으로 이어지는 멜로물의 전형과는 달리 김보경은 원만한 가정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실재적인 무엇에 쏠림이 그녀를 흔들어 놓은 것이다.
3. 이창준 소설 <벌레이야기>, 이창동 감독<밀양>
2007년도 한국영화계의 가장 큰 경사는 영화<밀양>의 여주인공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연기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해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는 외신의 보도가 연일 이어진 것은 영화의 작품성에 대한 인지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밀양>은 이청준의 중편소설<벌레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얼개만 가져와 <밀양>이라는 제목을 단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다. 제목 ‘밀양(密陽)’은 이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작용하면서 소설의 비극적 결말에 그야말로 비밀스런 빛을 던져주는 의미로 변형되고 있다.
소설의 얼개는 매우 단순한 편이다. 유괴되어 살해당한 어린 아들로 인해 자살에 이르는 한 영자의 이야기이다. 남편의 일인칭 시점으로 술회되는 소설은 주인공 ‘아내’의 외적 행위를 관찰하고 진행하면서 그 내면을 추정해가는 관찰자적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자살에 이르는 아내의 내면적 갈등이 직접적이거나 극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서 독자의 입장에서도 그녀의 비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읽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일순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주제의식이 드러나면서 마치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논리처럼 객관적으로, 혹은 소설적으로 우리의 심부를 건드린다. 작가는 소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 같은 절망적 자각은 미물같은 인간이 절대자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로서 그의 삶 자체를 끝장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섭리의 세계를 함께 부수고 싶은 한계적 욕망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밀양>(열림원,2007) 작가 서문중에서-
작가의 이러한 진술은 사람의 존엄성과 섭리자의 사랑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가지는 한계에 대한 욕망으로 그리고자 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 아내는 종교의 힘으로 아이의 죽음을 잊고 심지어는 범인을 용서하는 극복심리를 보이는 듯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범인 스스로가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신의 섭리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무너지고 만다.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질서를 유지하는 신의 관용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죄가를 치르는 동안 범인은 가장 낮고 절망적인 자세로 세상에 임해야 했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의 포용력을 아내의 가슴으로는 절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섭리자가 그렇게 위대한 존재라면 차라리 그로부터 부여받은 내 육신을 포기함으로써 저항의사를 밝힌 셈이다. 아내가 법인의 평화를 용인할 수 없어 자살을 택하는 이 지점에서 소설의 극적인 포인트가 형성된다.
영화는 소설의 이 극적인 포인트를 끈으로 새로운 내러티브를 형성해 내고 있다. 남편과 사별한 뒤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아들과 함께 살러온 신애는 승용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카센터 사장인 종찬을 만나게 된다. 낯선 땅 밀양에 정착하는 동안 종찬은 살갑게 신애 모자를 돌보지만 신애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밀어내기만 한다.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적응이 되갈 무렵 아들아이가 유괴를 당하고 살해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범인은 아들애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으로 밝혀지고 사형수가 되었지만 신애는 슬픔을 이기지 목하고 절망에 빠진다. 그녀의 불행 뒤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종찬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밀양에 처음 들어와 얼굴을 익힌 후부터 집요하게 선교를 하던 약사부부에 의해 신애는 교회를 나가게 되고 점차 극복의 기미를 보인다. 누구 못지않게 신앙의 전선에 앞서가던 신애는 급기야 범인을 면회하고 용서의 의사를 전하겠다고 나선다. 다들 신애의 행동이 무리라며 말렸지만 결국 교도소를 찾은 그녀는 신을 영접한 법인의 평화를 목격하면서 해결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를 들끓게 된다. 그 때부터 신애의 저항심리로 인한 이상 행동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부흥집화를 방해하고, 자신을 교회로 인도했던 약사부부의 남편을 유혹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항의 그 끝에서 절규하던 신애집 마당에 한 줄기 볕이 내려쬐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소설에서 아내의 자살인 엔딩의 행위라면 영화는 신애에게 살아 있는 한 아직은 꺼지지 않은 희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서사적 차이는 소설과 영화가 담아내려는 세계관의 가장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한 여인은 신의 섭리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비극적 종말을 택했고 한 여인은 존재에 대한 희망적 잠지를 택했으니 말이다.
소설의 비교적 단순한 서사는 영화에서 다양한 서사로 확장된다. 가장 두르러지는 확장 구조는 신애에 대한 종찬의 사랑이다 .이것 때문에 마치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로 비춰진다는 것은 과한 분석으로 보이지만 영화가 흘러가는 내내 종찬의 비중은 신애 못지않게 무게를 지니고 있다. 바보스러울 만치 일방적인 종찬의 사랑은 이 작품의 주제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아마도 신애의 절망과 저항과 분노의 한 켠에 은근히 들어와 앉는 희망의 낌새가 종찬의 줄기찬 사랑행위와 순수함의 결과는 아닐런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소설 속의 아내에 비해 영화 속의 신애는 절망의 나락으로 보면 한 단계 더 밑에 있다. 그녀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 일도 있고 죽기까지 했다. 절망의 강도로 보면 ‘아내’보다는 휠씬 고강도이다. 이것이 어쩌면 그녀를 희망으로 이끄는 심리적 지지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소설이 지니는 인간과 신의 대립 상황이라는 단순구도에 신애나 종찬의 관계와 같은 덧씌우기 작업이 이루어져 소설에 비해 보다 다층의 의미구조로 확장되어있다. 이것은 단순히 소설과 영화의 볼륨의 차이로 인한 서사의 확장뿐만 아니라 그 안에 중층적인 주제의식을 담아내려는 감독의 복합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신애는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닌 낯선 땅 밀양으로 옮겨와 낯선 사람들과 교통하며 새로운 삶을 일구어 내고 있다. 마치 로드무비의 서사성처럼 보이는 이러한 스토리 전략은 그녀가 새로운 상황을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과 소통하는지를, 그녀의 내면이 얼마나 강한지를 배면에 깔고 있는 구조이다. 그래서 결망의 희망에의 메시지가 생뚱맞지 않게 유기적으로 다가올 수 있게끔 한다. 그녀의 내명에는 이미 고통을 감내하고 새로움의 세계로 진입하는 데 어렵지 않은 정신력이 바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서사의 신선함은 이미 이창동 감독의 전작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박하사탕>을 통해서도 이미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어려운 역추적의 플롯을 그럴 듯하게 얽어 놓지 않았던가. 이청준의 소설이 진지하면서도 철학적인 특유의 감수성으로 판 편의 관찰기록을 보여준다면 이창동의 영화는 보다 치밀하고 능란한 구성을 보 주었던 성공적 사례처럼 이 영화 역시 소설과 영화가 만나 새로운 의미의 장으로 확장되는 매우 유쾌한 각색의 사례를 보여준다.
동시에 소설과 영화로
김현경 소설, 허진호 감독<외출>
<외출>(2005)은 영화와 소설이 같은 소재를 가지고 동시에 창작되기 시작했다는 명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면이 있다. 소설이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은 영화초창기부터 빈번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출발선을 가진 기록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 영화계에서는 영화마케팅의 수단으로 소설을 먼저 출판하고 영화를 제작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그것은 소설이 영화에 종속되어 있다는 면에서 독자적인 목적을 가졌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외출>의 이러한 보기 드문 과정은 문학과 영화를 비교 논하는 입장에서는 유용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인쇄매체와 영상매체의 차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대비시키고 설명해 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외출>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연출한 허진호 감독이 영화를 맡았고, 소설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고 있는 김형경이 소설을 맡았다. 영화는 그동안 주목할 만한 작업을 보여준 감독의 이력도 그렇거니와 한류스타인 배용준을 캐스팅했다는 데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마치 영화 작업의 타겟이 일본에 있는 것처럼 김형겨의 소설도 일본어로 동시에 출판하려는 전략을 짜고 있었다. <외출>이 개봉되고, 국내에서는 제작 전의 관심에 비해 그다지 좋은 기록을 보이지 못했지만 일본에서는 흥행에 성>공했다. 일본을 겨냥한 캐스팅과 마켓팅 전략이 실효를 거둔 셈이었다. 허진호 감독은 일반적으로 멜로를 즐겨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그동안의 관행적 방식과는 다른 무엇을 보여주고 있다. 그무엇이란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에서 보여준 방식인데, ‘드라마틱함’보다는 ‘천천히 미세하게 포착하기’ 로 표현해야 할 듯싶다. <외출>역시 그러한 필모그라피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데, 이전의 작품들과는 또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지점도 우리의 관찰 영역에서 중요한 지점을 형성한다. 그것은 ‘천천히 세밀하게’에서 ‘과감하게 뛰어넘기’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혹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뛰어넘기 방식이 등장인물의 내면의 흐름과 다소 상충되는 면 때문에 영화에의 몰임이나 감정선이 살지 못했다고 비평이 가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감독이 구석구석에 배치해 놓은 상징들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외출>은 가장 대중적인 소재로 출발했지만 지적인 탐색 작업이 따라야 할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시와 만난 영화
장정일 시 <요리사와 단식가>, 박철수 감독<301 302>
소설이나 희곡이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어온 역사는 영화의 역사와 일치할 정도로 오랫동안 빈번하게 이루어져 왔지만 시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시가 지니는 양식상의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시의 경우 순간적 정서를 이미지화하는 특성 때문에 서사성을 바탕으로 영화를 재구성하기가 용이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시를 원전 텍스트로 하는 영화의 경우, 서사적 요소가 풍부한 시를 선택하는 확률이 높은 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시의 이미지만을 차용하여 재창작을 하거나 다른 서사를 끌어들여 혼용하거나 하는 방식 등의 다양한 속성을 보인다.
시를 텍스트로 한 영화작업은 작품의 볼륨을 키우기 위한 서사의 확보가 주 안건이 된다. <301 302>는 시의 표면을 이루는 서사에 내적 동기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가고 있는데, 시 안에서 결과론적으로 제시된 두 인물의 평면적 대립관계는 이로써 입체화되고 설득력을 얻게 된다. 두 여인이 왜 요리사와 단식가가 되었는지 원작시는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철수의 <301 302>(1995)의 원작으로 볼 수 있는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1988)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대부문 차용하고 있다. 이렇게 두 장르 사이의 재창작 관계를 너무도 쉽게 상정해 볼 수 있음에도 영화는 이서군의 시나리오로만 기록을 남길 뿐 장정일 시에 대한 ‘밝힘’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논쟁의 진위를 언급할 마음은 없고, 이 글에서는 차용과 재생산의 관계를 당연히 인정한 채로 영화의 특성을 위주로 서술하려고 한다.
고전과 만난 영화
고전소설<장화홍련전>, 김지운 감독<장화, 홍련>
계모형 원귀소설인 <장화홍련전>의 모티프를 빌어와 현대화한 <장화, 홍련>은 한국형 스릴러물에서 실력을 발휘한 김지운 감독의 2003년도 작품이다. 그동안 한국영화계에서 몇 차례 영화화된 기록을 갖고 있는 장화홍련 스토리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전해지는 줄거리에 의하면 원전에 가깝게 영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록 고전소설에서 소재를 빌려왔다고 하지만 계모와 전실 자식이라는 인물 구도만 유사할 뿐 김지운의 <장화, 홍련>은 새롭게 써내려간 것이나 다름없다. 이 작품은 현실과 착란의 세계를 교묘하게 병치하면서 무엇이 사실인지를 알아내가는 과정에 스릴러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 특이 체험을 선사한다. 따지고 들어가면 여러 영화의 흔적들을 끄집어낼 수 있겠지만 마치 미로 찾기와 같이 설정된 메타포를 조립해보는 맛이 꽤나 괜찮은 한국 호러장르의 수작이라 볼 만하다.
영화는 장화홍련 스토리를 한 소녀의 죄의식과 분열증상으로 발전시킨 김지운 감독은 본격적 각색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각색의 재미있는 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는 ‘변형적 각색’이라 불리는 범주에서 거론될 수 있겠는데 영화의 독자적인 시각 확보와 창의성을 우위에 두는 입장이다. 장화홍련 모티프에서 멜로로 빠지지 않고 인물의 심리를 확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우리의 고전을 현대화하는 작업의 9할 이상이 원전에 충실한 각색이거나 배경의 현대화 정도에서 머물러 있다면 이는 원전의 창조적 변형이자 작가로서 감독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모범적인 창작의 사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문학과 만난 영화」오영미 도서출판 월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