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톡톡] 신당동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나요? 누가 뭐래도 단연 국민 간식 '떡볶이'죠. 인기 그룹 DJ DOC는 신당동을 소재로 이런 노래도 불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 떡볶이를 너무 좋아해/ 찾아간 곳은 찾아간 곳은, 신당동 떡볶이 집/ (중략) 그녀는 좋아하는 떡볶이는 제쳐두고, 쳐다본 것은 쳐다본 것은/ 뮤직 박스 안에 디제이라네/ 무스에 앞가르마 도끼빗 뒤에 꽂은/ 신당동 허리케인 박…." 그런데 여자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은 허리케인 박이 실제로 존재하는 DJ라는 거, 알고 계셨나요? 더 놀라운 건 아직도 DJ를 보고 있다는 사실. 이젠 도끼빗이 필요 없는 머리숱 성성한 중년의 아저씨가 됐지만 "안~녕하세요. 오늘은 왠지~"로 시작하는 느끼한 멘트는 여전합니다. 떡볶이 얘기가 길어졌는데, 신당동에는 이외에도 숨은 이야기가 많답니다. 매콤 달콤 흥미진진한 신당동 골목으로 떠나보시죠. |
도성 안 사람들의 공동묘지
예전부터 도성 안에는 무덤을 만들 수 없기에 사람이 죽으면 광희문이나 서소문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졌다. 그래서 광희문을 수구문(水口門) 혹은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부른다. 망자가 있는 곳에는 무당이 있기 마련. 광희문 밖에는 자연스레 무당이 모여들었고 신당도 생겨났다. 그곳이 지금의 신당동(新堂洞)으로, 조선 시대에는 신당(神堂)이라 했고 갑오개혁 때 발음이 같은 신당(新堂)으로 바뀌었다.
"광희문 밖으로 나간 시신은 신당동, 왕십리, 옥수동, 금호동쪽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옥수동, 금호동 산비탈에서는 비가 많이 오면 백골이 나오기도 했지요. 1920년까지만 해도 신당동에는 묘지가 많았어요."
향토사학자이자 중구문 화원 총무과장인 김동주 씨에 따르면 일본인 전용 화장터인 신당리 화장장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초가집과 묘지가 많던 신당1동·5동과 달리 지금의 청구역 부근과 신당6동에는 조선총독부 하급 관리인이 많이 거주해 문화주택촌을 형성했다. 문화주택은 일본식과 서양식을 혼합한 주택으로 신당6동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가옥도 당시 지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청구역 주변을 앵구동(벚나무언덕마을), 신당6동은 문화동으로 불렀다.
현재는 행정 편의에 따라 신당1~6동으로 부르는데, 지난 7월 20일부터 이름이 바뀌었다. 중구는 "행정 동명 대신 옛 역사를 품고 있는 동 명칭으로 바꾸자"는 신당동 지역 주민의 의견에 따라 신당1동은 신당동, 신당2동은 다산동, 신당3동은 약수동, 신당4동은 청구동, 신당6동은 동화동으로 바꾸고, 신당5동은 주민 의견을 더 수렴한 후 변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장간, 공동 화장실! 여기 서울 맞아?
떡볶이 골목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신당동에 이렇게 역사적 이야기가 많을 줄이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러 신당동 골목길로 들어섰다. 산책의 시작은 망치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대장간이다. 대장간이라고? 다소 생뚱맞지만, 광희문에서 신당역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세 곳, 맞은편 한양공고 쪽에 두 곳 있다.
"1970~1980년대 건축 붐이 일 때는 꽤 많았어요. 그때는 건축에 쓰는 철근을 죄다 사람이 자르고 꺾고 했거든. 지금은 다 없어지고 이렇게 우리만 남았네요." 경남철공소 황용복 씨는 요즘은 건축자재나 농기구·연장·장식품 등을 주로 만드는데, 예전에 비하면 소일거리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래도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으니 만족스럽다고.
대장간을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구불구불 좁다란 길에 계단도 많다. 대부분의 집은 청계천 복개 공사 때 들어선 것이지만, 간혹 일제강점기에 지은 집도 보인다. 세월의 더께가 두껍게 앉아 낡을 대로 낡았다. 2006년에 주택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신당10구역(신당1주택재개발)이다. 10년이 다 돼 가지만 주민 간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탓에 조합이 해체되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고.
"아휴, 지겨워 죽겠어요. 짓든가 말든가 빨리 결정이 나야지. 만날 쌈박질만 하고 있으니, 원!" 이 동네에서 50년 동안 동명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영진씨는 주민들 사이에 골이 너무 깊어 현재로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며 하소연한다. 동명이발소가 있는 곳은 신당1동에서도 특히 낙후한 곳으로,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은 골목을 따라 7~15평의 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이런 골목이 7개로 총 500여 가구가 있는데, 대부분 방과 부엌만 있고 공동 화장실을 사용한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구조죠.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구제촌이라고 불러요, '빈민 구제촌'. 역사 자료에는 없지만 김구 선생이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요. 지금은 주인들이 넓은 곳으로 이사 가고 거의 다 셋방살이들이에요. 셋방이라도 비싸. 여긴 교통이 좋잖아." 이영진 씨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 중국 교포라고.
구제촌은 대추나무가 많아 대추나무골로도 불렸다. 지금은 다 베이고 태평한의원 맞은편 대추나무포차 가게 앞에 한 그루 서 있을 뿐이다. 수령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대추나무가 가로수처럼 크다. 손톱만 한 작은 대추가 달려 있는데, 하나 따 먹으니 달고 맛있다. 지나가던 주민이 '약대추'라고 귀띔한다.
"가게 이름을 뭐로 지을까 고민하다가 대추나무가 있길래 대추나무포차로 지었어요. 팔고 남은 막걸리를 주었더니 대추도 많이 열리고 장사도 잘되네요." 대추나무포차 주인은 대추나무 덕을 많이 본다며 흐뭇해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주변에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다고 한다. 활인서는 도성 안의 환자, 특히 전염병 질환자를 주로 구호하던 의료 기관으로 대추를 약재로 많이 사용해 심은 것이 아닌가 싶다.
며느리도 몰라? 이젠 며느리도 알아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떡볶이 생각이 간절해진다. 태평한의원에서 다산로35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신당동 떡볶이 타운이 나온다. 신당동 떡볶이 원조인 마복림할머니집과 떡볶이 가게 여섯 곳이 합병한 아이러브신당동 등 떡볶이집 열 곳이 성업 중이다.
마복림할머니집으로 들어갔다. 고추장과 춘장의 절묘한 조화, 예전 맛 그대로다. 신당동 떡볶이 역사는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과 함께 신당동에서 미군 물품 보따리 장사를 하던 마복림 할머니는 1953년 한 중국집에서 자장면에 우연히 떨어뜨린 떡을 먹고 맛이 좋아 고추장에 춘장을 섞어 떡을 볶아보았다. 의외로 반응이 좋아 노점을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줄 서서 사 먹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 후 1970년대 가스가 보급되면서 지금의 신당동 떡볶이의 모습을 갖췄고, 1980년대 떡볶이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떡볶이 타운이 형성됐다. 넉넉한 인심과 베풂으로 주변 상인들의 모범이 되기도 한 할머니는 2011년 91세로 별세하셨다.
떡볶이 타운에서 마복림 할머니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상인회 회장이자 허리케인박인 박찬영 씨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 떡볶이 가게에서 DJ를 봤으니 자그마치 35년이나 됐다. 16세의 풋풋하던 학생이 지금은 50이 넘은 중년의 아저씨가 됐지만 여전히 찾는 사람이 있다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멘트와 차림새가 식지 않는 인기 비결이란다.
역사가 깊은 동네이니만큼 신당동을 거쳐간 유명인도 많다. 대표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으로, 김종필과 김형욱 등 영관장교들과 함께 5·16 군사 정변을 계획한 곳이 신당동 가옥이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자택도 신당동에 있다. 또 한 사람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서울 중앙시장 부근에서 '경일상회'라는 쌀집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하철 2호선 신당역 3번 출구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가옥은 2008년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흰 담장 너머로 향나무와 대추나무, 붉은 기와지붕 등이 보인다. 향나무는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것이란다. 대추나무는 관리인 박운영 씨가 심었는데, 7년 동안 열매가 맺히지 않더니 작년에 가지가 휠 정도로 열렸단다.
"대추가 많이 열리면 좋은 소식이 있다더니,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됐지 뭐예요. 정말 희한하더라고요." 박운영 씨는 어린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은 아주 얌전하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고, 육영수 여사는 검소하면서 부지런했다고 기억했다.
전통시장, 문화 예술과 만나다
박정희 대통령 가옥 맞은편에는 중구 지역 자활센터가 운영하는 '해피바게트'가 있다. 저소득층 주민이 자립할 수 있도록 마련한 일터로, 지난 7월에 문을 열었다. 최춘숙 씨 외 6명이 빵을 만들고 판매까지 하는데, 유화제·마가린 등 첨가물을 넣지 않은 건강 빵을 먹음직스럽게 진열해놓았다.
해피바게트에서 다시 신당역 방향으로 내려가면 중앙시장이 나온다. 신당역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300m에 걸쳐 형성된 시장으로, 전성기이던 1950~1960년대에는 청계천까지 약600m나 이어졌다고 한다. 시장 중간쯤 오니 천장에 대형 캘리그래피가 걸려 있다. 가게 이름과 특정 사연들이 삐뚤삐뚤 멋진 글씨로 쓰여 있다. 지난 5월 이곳 중앙시장에서 열린 '황학동별곡 100인 이야기'에 전시한 것들로, 서울시창작공간인 신당창작아케이드가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펼친 축제다.
"지상의 시장은 그런대로 활성화됐는데, 지하상가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폐점하는 상가가 늘어났어요. 청소년 우범 지역으로 변했죠. 그래서 2009년 서울시가 지하상가를 사서 예술 창작실로 바꾼 것이 신당창작아케이드입니다." 서울문화재단 최선혜 씨의 말이다. 그리고 "공예 작가에게 무료로 작업실과 장비를 지원해줌으로써 창의적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인큐베이팅 공간을 추구하고, 전통시장과 지역 문화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올해 이곳에 입주한 신전하 작가는 "작품 전시 공간, 아트 마켓까지 열어줘 많은 예술가가 선망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며 "매년 입주자를 공모하는데, 경쟁이 치열하다. 열심히 해서 내년에도 입주하고 싶다"는 소망을 비쳤다.
광희문에서 신당창작아케이드까지, 이야기 거리를 걷고 나니 어느덧 사방이 어두워졌다. 시장 입구 먹거리 좌판마다 퇴근길에 한잔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빈대떡이 부쳐지고, 술잔이 기울어지고…. 하루의 고단함이 알싸한 소주에 씻겨 내려간다. 청담동이 아닌 신당동이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일 터.
망치질 소리와 함께 늙은 대장장이, 좁은 단칸방이지만 코리안드림을 꿈꾸는 중국 교포, 떡볶이를 더 맛나게 해주는 DJ오빠, 닭발마저도 귀엽다는 닭집 아줌마, 고뇌하는 젊은 예술가…, 그리고 이 모두를 품에 안은 신당동을 위하여 건배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