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단상
설 연후가 끝나는 날이다.
소한, 대한도 지나고 봄의 전령인 입춘도 이틀 전에 지났다. 대문간 공지의 겨울동안 비닐로 시웠다가 벗긴 동백 상단 부 꽃봉오리가 살며시 내밀고 있다. 어제 설날은 제사는 없지만 우리 부부사이에 생긴 친손 외손에 자부와 우리내외까지 모두 합쳐 13명 중 서울 외손녀 지윤이는 당직근무로 못 오고 손부는 산후 조리로 입원중이라 11명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아내의 주도로 감사 예배를 올리고 세배를 받은 후 떡국을 먹으면서 명절 분위기에 젖었다. 오후에는 진호차를 석호와 함께 타고 송현요양병원에 4년6개월 계속 입원 요양 중인 여동생 문병을 하고 왔다. 일어앉을 기력마저 없을 정도로 쇠잔했다. 전신이 아프고 어지럽다 고 했다. 갖고 간 밀감을 까서 입에 넣어 주니 2개를 입술로 받아먹었다. 약 40분간 피골이 상접한 손을 어루만지며 위로의 말문이 막혔다. 한방에 8명이 입원하고 있는데 꼼작도 않고 누어있는 사람 간병인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병실을 도는 사람 면회 온 가족과 담소를 나누는 사람 등으로 어수선했다. 주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침울한 병실 풍경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한 달 요양비가 2백6십만 원으로 기초생활보호자라 50만원만 환자부담이다. 요양 병원 시설로 정부보조가 없었다면 그 감당을 어떻게 할 것이며 경제적인 문제도 커지만 주변 가족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옛날 고래장이 떠올라 오싹하게 했다.
면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니 병원에서 임부의 산기로 전화가 와서 석호는 바로 갔다. 오늘도 석호 내외가 식사 하로 오겠다고 해서 아내가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는데 들어서자마자 병원에서 환자가 있다고 전화가 와서 급이 차를 몰고 가서 분만을 시키고 돌아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도 마시기전에 또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다녀왔다. 그러니 어제 설날 한번 오늘 두 번을 바쁜 걸음을 했다. 이제 얘기를 좀 나눌까 생각하고 있는데 둘째 내외가 소지품을 챙겨 나섰다. 할 말이 있다고 했더니 중한 얘기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기 에 그렇게 하기 로 하고 보냈다.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고 했다.
내가 재직 시 대구교도소가 시내 삼덕동에서 화원으로 이전 후 (1971년) 외곽이라서 의무관 지원자가 없었다. 삼덕동에 있을 때는 시내 병원을 개업하면서 겸직을 할 수 있었는데 교외로 나간 후에는 정원은 3명인데 한사람 있던 의무관도 사표를 내고 나간 후 채용공고를 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지금은 공무원 보수가 올라 사정이 달라졌지만 40여 년 전인 그때는 서기관 직급인데도 보수가 적다고 전임은 끄려했다. 시외인 화원으로 이전 후엔 더했다.
마침 교도소 인접에 한지의원(限地醫院)이 개업하고 있어 개업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조건으로 칙사 대접으로 모셔왔다. 그때는 오지로 의원은 한 군데 뿐이고 가끔 접촉사고 등 시비로 상해진단서 청구가 있을 때 확인하기 위해 엑선 촬영이 필요한데 시설이 없어 진단서 작성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기에 내 자비로 엑스선 기계를 구입 설치를 하고 엑스레이 촬영이 필요할 때는 연락이 오면 자전거를 타고 5분 거리에 있는 의원으로 가서 찍어주고 그 대금은 내 수입으로 했었다. 박봉에 짭짤한 수입으로 가계에 도움을 받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나 그 때는 묵인이 되는 분위기 이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일요이라 집에서 쉬고 있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상해사건으로 상해진단서를 요구하는데 에스레이를 찍어야 하니 빨리 오라고 전화가 왔다. 자전거를 타고 급히 달려갔다. 그 때 도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인데 지하철은 물론이고 버스도 시외라 자주 없었다, 자전거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엑스선상 골절상이 없어 상호 화해로 상해진단서비와 진료비만 물기로 하고 화해를 했었다. 의료보험시대가 아니라 나는 예상외의 부수입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날 늦게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사진 찍을 일이 또 생겼다면서 급히 오란 다 하기에 선 거름에 다시 병원으로 간 사실이 떠올랐다. 그 때는 손 전화가 없었든 때라 허급지급 자전거로 40분 이상 걸리는 병원으로 달리면서 고된 줄 모르고 배탈을 밟은 추억이 뇌리를 맴돈다.
지금은 1호선 지하철이 화원 교도소 앞을 지나 명곡까지 연장 되었고 교도소도 신축 이전지인 하빈으로 내년 하반기에 옮기게 된다고 한다. 상전벽해라드니 너무 변했다. 몇 해 전 내가 대곡 큰애 집에 살 때 20분 거리인 교도소 주변을 산책하면서 너무 변한 주위환경에 놀랐다. 병원도 문을 닫고 빈터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녹 쓴 철 대문에 원장 이름의 문패만 옛 추억을 더듬게 했다. 박봉에 아이들 공부 시키느라 한푼 두푼 모우는 재미에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수련의 전공의를 이수 대학병원을 거쳐 개업을 하다가 의대 선배의 권유로 3년 개업을 접고 함께한지가 14년이 되었다. 내 형편에 4년제 일반 대학도 힘 드는데 의대 6년에 수련의 1년 전공의 4년을 뒤 바라지하느라 이 애비는 친구와 막걸리 한잔에도 인색했다. 내가 못한 공부 3남매 너들에게 한을 풀고 싶었다. 다행이 모두가 바르게 자라 열심히 공부해서 이 애비의 바람을 풀게 했으니 고맙고 감사하다. 어제 오늘 설 연휴에 거듭 불려 나가는 둘째에게 나의 추억의 단상을 얘기하고 팠다.
2019년 2월6일 음력 설 이튼 날 우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