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래님이 온각지 까페에서 논의한 “섞여서는 안 될 두 세계”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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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고의 노력 끝에 조선의 전통 정통 조선철전사법 별절로 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목마르다.
나는 성낙인옹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온각지 문파에 전했는지 알지 못한다. 인연이 없었기도 했겠지만 京制경제에 비해서 鄕制향제가 가지는 한계성이고 온각지 문파의 폐쇄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내가 활을 배우고 전통궁술에 목말라 하다가 5학년이 되던 해에 온각지활쏘기학교에 입교신청을 했더니 거부당했다. 한해 지나서 5학년 1반이 되어서 또 다시 신청을 했더니 또 거부당했는데, 그 원인을 몰랐다.
후일 정진명의 글에서 알 수 있었는데 온각지활쏘기학교의 교장 현곡이 한산보다 나이가 어려서, 가르치는 선생보다 나이 많은 한산을 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다.
온각지 문파가 지난세월 양궁출신 선수들이 국궁판에 몰려와서 활만 국궁을 잡고 양궁식으로 쏘아서 만든 턱밑살대 게발각지류파들의 공격으로 의기소침해지고 방어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좀 더 나은 방법으로 책 「조선의 궁술」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공부하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온각지문파가 책 「조선의 궁술」과 성낙인을 독점하고 절대권력(?=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책 「조선의 궁술」이 가지는 우리활에 대한 절대성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게 인류보편문화유산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보편성은 널리 알려지고 공유되어야 한다는 게 Copyleft를 善선으로 생각하는 한산의 생각이다. 책 「조선의 궁술」도 온각지문파의 것이 아니고, 성낙인의 유산도 온각지 문파의 소유물이 아니라 전통궁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유물로 남아야 그것이 진정 책 「조선의 궁술」을 남겼던 조상님들에 대한 바른 태도이고, 성낙인옹이 남겼던 많은 정보들이 올바르게 세상에 작동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한산은 한산이 배우고 익혀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무료로 다 알려주는(Open) 것이다.
전에 온각지 까페에서 읽었던 글 중에 여러 가지 질문 중에 惺齊성제 金台錫김태석이 책 조선의 궁술 표지에 자기 이름을 쓴 이유를 묻고 그 이유를 모르면 책 「조선의 궁술」 내용을 알 수 없다는 다소 황당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산의 입장에서 본다면, 별절사법서인 책 「조선의 궁술」을 가지고 별절로 쏠 줄 모르면서 책 「조선의 궁술」을 절대적으로 다 안다는 듯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나, 각궁 죽시를 가지고 양궁식 턱밑살대 게발각지로 쏘면서 국궁쏜다고 떠들고 댕기는 것과 개찐또찐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한산이 여러번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별절로 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한 발견에 속한다. 사실 알고보면 그 이면에 우리 조상님들께서 한산을 선택해서 실전된 별절궁체를 완성하게끔 예비하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발견한 과정은 우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산은 좀 바쁘게 살았다.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운이 좋아 지방국립대를 나오고 어쩌면 어부지리로 정부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집안사정으로 볼 때 대학갈 형편이 되지 못했는데, 갈지 안갈지 모르지만 일단 붙어나 놓고 보자는 심정으로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하니 우찌우찌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졸업당시 이란-이라크 전쟁이 격화되면서 중동갔던 토목기술자들이 대거 역수입되는 상황이라 공대토목과 출신 신출래기들이 취직할 자리가 없어지고 허공에 떠돌며 주경야독으로 살다가 친구의 꾀임에 빠져 얼떨결에 경상남도 공채를 봤더니 덜컥 합격하여 정부미로 30년을 살게 되었다.
정부미 생활중에 여러 시장놈들의 부정부패를 목격하고 한소리 했다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는 분개해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전국공무원노조를 만들게 되었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을 돕다가 삼남에 장애인콜택시를 만드는 등 엄청나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러던 중 눈을 들어 은퇴한 공무원 선배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퇴직한지 1년만에 폭싹 늙어서 영감처럼 변해버린 재임중 잘 못 살은 선배를 보고, 나는 저리 안살아야겠다 싶어 무얼할까 이리 저리 눈을 돌리다 인연이 되어서 밀양농악을 배우게 되고 북잽이로 16년을 살았다. 그 와중에 우연히 활선생을 만나 턱밑살대 게발각지를 국궁으로 알고 배웠고, 한참 잘 쏘아서 2연몰을 할때까지 잘 쏘았는데, 부상이 와서 쉬면서 책 조선의 궁술을 읽어보고 턱밑살대 게발각지가 국궁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고, 전통궁술을 배우려고 백방 노력한 과정 중에 위에 이야기한 온각지활쏘기학교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다.
지난세월 한산의 글을 읽어보면 다 나오는 내용이지만, 한산은 우리활과 인간이 가장 조화롭게 이상적으로 쏘는 조합을 궁리했다. 이게 6천년동안 활을 쏘아 모든 정수를 함축해서 책으로 다 나와 있는데, 책을 보고 공부해서 알은 것이 아니라, 그냥 활과 화살로 내 몸을 마루타로 삼아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탐구하다 별절까지 오게 된 것이고, 철전사법연구회 회장님이 사결 극력견전 대목을 보여주어서, 그때사 아 내가 그리 쏘고 있는데 그것을 별절이라 이야기하는 것을 알았다. 순서가 좀 뒤바뀐 것으로 보면 된다.
내가 별절로 쏠 수 있다고 해서 우리활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조상님들께서 활을 별절로 쏘았다는 것과, 그 별절이라는게 예기 사의에서 말하는 도성덕립을 이루기 위한 몸짓을 활에 녹여내여 만든 궁체가 별절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고 그것을 쏠 수 있게 된 정도다.
사실 失傳실전된 중요무형문화재를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님들의 가호를 받아서 한산이 복원을 했고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다. 이 황당한 사건을 한산이 만들어 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산이 스스로를 마루타로 삼아서 공부하며 별절로 쏠 수 있게 되면서 알아낸 것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하고 많은 궁체중에 왜 꼭 별절로 고집해서 쏘았느냐?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내가 해답을 알았다고 해서 활로서 도통의 궁극을 이룬 后羿射日후예사일의 李羿이예만큼 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射以觀德사이관덕을 이루기에는 한산에게 시간과 공간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한산은 씨뿌리는 사람으로 만족하고 세월이 흘러서 누군가 수확할 사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과정중에 좀더 많은 자양분을 후학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면 얼마든지 노력할 의지가 있다. 그 방법 중에 하나로 내가 알아낸 별절을 온각지에 전수해 줄 수도 있고 온각지로부터 책 「조선의 궁술」이 가지는 비의를 청취해서 좀 더 풍부한 자양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희망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별절을 앞(땅)짚기라고 활병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온각지 입장에서 보면 나의 바램은 허공에 대고 삿대질하는 바보보다 더 허망한 몸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실상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줌손과 활장이 방사된 후에 필히 불거름으로 져야 하나니, 이것은 줌손등힘이 밀려야 되는 것인즉, 이러하여야 살이 줌뒤로 떠서 들어와서 맞게 되나니, 이것은 사법에 제일 좋은 법이 되나니라.”
발시후 줌손이 불거름으로 맹렬히 못떨어지는 온각지 문파에서 별절을 앞(땅)짚기라 활병이라 생각하지 않고 책 「조선의 궁술」이 이야기하는 제일 좋은 사법으로 인식하고 교류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응할 마음이 있다.
그러나 온각지 문파에서는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지난 몇 번의 논쟁(?)이랄 것도 없는 글을 통해서 확인한 바 있으므로, 그냥 세월이 흘러 온 세상이 전통 정통 조선철전사법 별절궁체로 쏘아 사이관덕이 흘러 넘치는 국궁의 르네상스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첫댓글 그래도 그 글에서는 이쪽에 대해 순수성과 진실성은 인정한다, 자기들도 아직은 조선의 궁술이 전해주는 세계를 '온전히는 모른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렇게 때로 겸손히? 말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서는 자기들만 조선의 궁술(전통사법)을 계승하는 유일 적자이고 우리 연구회같이 조선의 궁술을 해석하면 창작사법, 사이비라는 식으로 이야기들을 하니 답답할 노릇이지요.
정말 그 글에서처럼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무조건 본인들의 외길만 걸을 게 아니라 (예전에) 먼저 말을 건넨 우리들과, 그리고 이번에 여러 글을 올리신 나무아래님과 진지한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반응은 귀막고 내 길만 가겠다였지요.
그래서 저는 그 양반들이 (늘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우리 활쏘기의 중흥과 발전에 마음이 있는가 의문을 품는 것이지요. 곧, 그냥 본인들의 헛된 명예와 자존심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나무아래님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그 글에 답글을 단 것으로 보입니다.
1929년 책 조선의 궁술이 지어질 당시 조선궁술연구회소속 궁사들 중에는 별절을 시전할 수 있는 궁사가 없었다. 그러나 별절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서 이중화 선생이 “발시후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지는 활이 제일 잘 쏜 활”이라고 삽입해 놓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책 조선의 궁술은 별절사법서이긴 하지만 책을 지은 당사자나 당시 궁사 모두 별절로 쏠 줄 몰랐다. 이게 아마 팩트가 아닐까 합니다.
1930년대 활쏘기를 우리 활쏘기의 전형으로 알고 별절을 시전하지 아니하는 온각지문파의 한계가 명확해지는 지점이지요. 盛國성국의 최절정 궁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찾고 발전시킬 생각을 못하고, 망국의 망한 활쏘기를 전통이라 생각하는 오류를 가지고 수정할 줄 모르는 우직함(?)이 그들을 망치는 근원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우리궁술이 최절정기에 있었던 임진-병자 양란이후 조선중기의 활쏘기를 추구했던 한산의 설정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세월이 흐르면 온 세상이 별절로 쏘는 날이 있을 것이니 의심말고 열심히 수련하시면 됩니다.
온깍지 문파는 제가 볼 때 십여 년 안에 역사의 저편으로 조용히 사라질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전통 활터의 사풍이나 문화에 대해 발굴한 것들은 나름 귀중한 자료로 남겠지만요. 뭐 그것들도 대부분 우리 시대에 그대로 계승 보급되긴 어렵고 아마도 박물관의 전시품같이 일종의 구경거리로나 여겨지겠지요.
하늘서기님이 잘 보신대로 그들은 헛된 자존심만 붙들면서 우리 활쏘기의 진정한 세계화나 발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아니면 아직도 성낙인 옹이라는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본인들만 하늘 위에서 노닐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겠지요. 자신들에게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