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元杜尤,1859~1916)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元杜尤)는 “언더우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입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를 언더우드의 한자식 발음인 “원두우”(元杜尤)로 불렀습니다. 한국 기독교를 이야기 할 때 “언더우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삶과 발자취는 다른 어떤 선교사보다도 매우 복음적인 사역으로 일관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5:16~18)는 말씀을 표어로 삼고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었으며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쉼없이 달려간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 다운 미국 선교사였습니다.
➀ 파란만장한 청년기와 화란개혁교회와의 만남(1881~1884)
1859년 7월19일, 잉글랜드 런던가, 언더우드는 화학자이며 발명가인 부친,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잉글랜드 런던선교회 심사위원장인 모친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출생하였습니다. 1872년, 부친과 함께 미국 뉴저지주 뉴더햄으로 이주하였으며 이곳에서 "화란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881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화란개혁교회 교단 신학교인 “뉴브런스위크”신학교(1881~1884)에서 공부하는 가운데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로 임직하였습니다. 1884년, 인도선교를 위한 의학을 수학하고, 그해 7월28일,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었습니다. 부친의 사업이 파산하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언더우드는 20리길의 대학교를 매일 도보로 다녀야 했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하루도 쉼없이 일을 해야 했을 정도로 8년간의 청년기는 조선선교의 환란을 극복하는 훈련기간이 되었습니다.
뉴브런스위크 신학교의 동문 “앨버트 올트먼스”(Albert Oltmans)는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조선에서 1천3백만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전혀 접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며 조선을 위해서 기도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언더우드는 그의 목소리에 영적인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또한 10년 선배인 윌리엄 그리스피의 “조선:은둔의 나라”를 접한 언더우드는 인도선교의 꿈을 접고 조선선교의 비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과 인도에 많은 헌금을 쏟아 부은 화란개혁교회는 더 이상의 지원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미 2차례에 걸쳐 조선선교를 지원하였지만 언더우드는 매번 같은 이유로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필요성은 절감하지만 당시 매우 위험한 선교지역으로 알려진 조선에 무리하게 선교사를 보내는 그 자체가 부담이었고 재정적인 압박도 화란개혁교회 선교부를 주저하게 하였습니다.
➁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조선선교를 향한 비전(1885)
1884년, 언더우드는 뉴욕 센터 스트리트에 위치한 북장로교 선교부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엘린우드 박사가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조선 선교사 파견을 즉시 결정해 주었습니다. 7월28일, 장로교 해외선교 교육을 이수한 언더우더는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항을 출발하여 이듬해인 1885년 1월25일,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 하였습니다. 북장로교 일본 선교사 “헵번”(J.C.Hepburn)을 비롯한 모든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의 장이 열린것에 대하여 감사하였으며 그 첫 번째 선교사인 언더우드를 대환영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어난 갑신정변(1884년)으로 인하여 언더우드의 조선행은 일부 지체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일본에서 조선어 성경번역가이며 문서전도인인 “이수정”(李樹廷)을 만나 그로 부터 조선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를 세심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주일,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이며 조선선교의 위대한 지도자인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와 함께 제물포항에 입국하였습니다. 4월7일, 한성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당시 조선선교의 법적 제한으로 인해 제중원 “약제사” 자격으로 입적하여 의학생들에게 물리,화학을 교육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마가복음 번역작업과 동시에 “조선어 문법사전”을 영어로 집필하였습니다.
➂ 교육과 성경번역과 선교와 선교단체의 설립
1886년, 언더우드는 한성 정동 사택옆에 기독교계 중등교육기관인 “언더우드 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조선의 고아들을 중심으로 개설된 언더우드 학당은 “존 디 웰즈 학교”(John D. Wells School)로 불리웠고, 그후 예수교 학당(1891년), 민노아 학당(1893년)을 거쳐 1905년에 “경신학교”로 개명되어 “배재학당”과 함께 기독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김규식”과 “안창호” 선생이 바로 이 학교에서 수학한 대표적인 조선인이었습니다. 경신학교는 조선인에 의한 기독 조선인 전도사 양성(신학대학)과 조선인 교사(사범대학)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1915년 대학부를 확대하여 경신학부 대학부로 개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현,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경신학교는 “성경”과 “교회사”를 비롯하여 기독교 진리를 중심으로 교육하였으며, 이것을 계기로 조선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조선인에 대한 복음전도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86년 7월11일, 유학자로서 “노도사”로 알려진 “노춘경”(盧春京)은 반기독교적인 문헌에서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 후, 알렌의 성경책을 대여해 읽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으며, 알렌의 어학선생인 그에게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례를 베풀어 줌으로서 기독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베풀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1887년, 기독 조선인의 참여로 조선장로교 교회사 첫 장로교 교회로서 “정동교회”(현,새문안교회)를 설립하여 “서상륜”, “백홍준” 등 장로교 최초의 장로를 추대하였습니다. 이어 1907년에는 “양평동교회”(현,영등포지역)를 설립하였습니다. 1887년, 성서번역사업을 위해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여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복음서 한글판을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1889년 3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의료선교사 “릴리아스 호톤”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순회전도로 다닐 정도로 언더우드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와 부흥운동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1890년, 문서선교를 위해 “조선성교서회”(현,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캐나다 출신의 미국장로교 선교사인 “게일”(James Scarth Gale), “레이놀즈”(Reynolds),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습니다. 언더우더는 “찬양집 번역”과 “기독교교리서”와 “소요리문답서”를 번역하여 문서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00년, “신약성경”을 완간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YMCA"를 조직하여 1903년이래 소천할때까지 회장으로 섬겼습니다. 1912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평택대학교,1912~1916)의 교장을 역임하며 미션스쿨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조선 기독교 교육회”를 설립하여 미션스쿨의 “선교와 교육”에 관한 기본정신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1916년 10월12일, 건강악화로 인하여 미국으로 귀국한 언더우드는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병원에서 소천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선교의 꿈을 이루었던 조선으로 돌아와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언더우드 가문의 후손들 또한 조선에 거주하면서 의료선교와 함께 “한남대학교”를 설립하고 복음 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사에 빛나는 하나님의 사도였습니다. 과연 한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들을 감당하였을까? 할 정도로 힘에 부딪히도록 헌신을 다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학자와 교육자로서, 성경번역자와 성경보급자로서, 교회(정동교회,양평동교회)와 대학(경신학교)을 설립하고, 최초의 세례자(노춘경,1886년7월11일)와 최초의 교회(정동교회)와 최초의 장로(서상륜,백홍준)와 최초의 목사(서경조)를 세운 가장 성경적인 선교사였습니다. YMCA와 기독교서회와 기독학교연합회 등 오늘날 존재하는 기독교 단체의 기초를 설립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