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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위임목사 주일오전예배 설교
2020.8.23. - 마태복음의 말씀(33) : 비올 확율 50%
마태복음 10:34 - 42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교회영아부가 온라인으로 여름성경학교를 하면서 각 가정에서 그동안 코로나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우리 자녀들이 한 1년 동안 훌쩍 자란 모습들을 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부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수련회를 잘 치르고 우리 도움 주신 분들께 감사의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잠시 두 영상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www.youtube.com/watch?v=vCuHxO3OpDw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있는 것입니다. 박수를 좀 부탁드립니다.
이거 예배당에 우리 자녀들이 수련회 하고 성경학교 한 것에 은혜받은 모습을 보고 또 아이를 위해 수고하신 선생님들 그 모습 가운데 격려와 그 축복의 박수가 흘러넘쳐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속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각 가정에서 오늘 영상을 보시면서 그 우리 자녀들의 노래 선생님들의 수고와 또 그 기쁨을 함께 박수로 축복해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사진 한장 더 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코로나 검사를 받는 모습입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우리 연동교회 교회학교도요 이번 코로라 재확산 때문에 잘 진행하던 성경학교 수련회를 모두 중간에 중단해야 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 갈 준비를 막 하고 있었는데 이 코로나 때문에 다음 학기에 준비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고3 학생들은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걱정과 근심에 빠졌습니다.
우리나라는요 맞은 놈은 있는데, 때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전화 심방 중에 한 가정에서 아이가 엄마한테 이렇게 묻더랍니다. 엄마, 우리 때문에 또 학교 못가게 되는 거야? 우리 때문에 우리 잘못 때문에 또 이렇게 되는거야? 그래서 그 집사님이 아니야, 너희 때문이 아니야 라고 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라고 얘기 하시면서, 많이 속상해 하셨습니다.
우리 아이들 때문이 아니죠. 지금 이 예배를 함께 드리는 우리 교회학교 자녀들에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대신 용서를 빌 수 있다면, 제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얘들아, 목사님이 미안하다.
제발 우리 자녀들이 우리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교회와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우리 연동교회 만큼은 저와 여러분 만큼은 세상에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세상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혹여 교회, 그리스도 인들 때문에 우리 이웃과 우리 자녀들이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다면 오늘 이 예배가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중보의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 나누겠습니다. 마태복음에 말씀 33번째 '비 올 확률 50%'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올해 장마는 참으로 깁니다. 아마도 사상 초유의 긴 장마였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기 예보에서 예전에 장마가 오면 3 4일 비가 오고 하루 이틀은 해가 떴습니다. 그런데 이번 장마는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 라고 하는 예보가 나옵니다.
일주일 내내가 아닙니다. 3주 연속, 4주 연속 다 우산에 비가 온다 라는 예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조심한다 조심한다 하면서 가끔 나 때는 말이야 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잠시 나 때는 말이야 라는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 TV 뉴스를 볼 때면 일기예보를 주의깊게 볼 때가 있습니다. 한 30년 40년전에 여러분 일기 예보를 기억하십니까? 모 방송국에 아주 유명한 일기예보 기상캐스터가 있었습니다. 김동완 캐스터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말입니다. 김동완 위원이 비가 온다 하면 비가 오는 것이고요, 눈이 온다 하면 눈이 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분이셨습니다. 소풍 가기 전날 아이들이 선생님 말보다 이 김동환 아저씨 말을 더 많이 믿었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소풍 날 아이들이 다 우산을 들고 왔습니다. 선생님이 묻습니다. 야 해가 이렇게 좋은데, 우산을 왜 가지고 왔느냐 라구요. 아이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김동환 아저씨가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어요. 그럼 정말 오후에 비가 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풍 전날 날씨가 흐려서 그 다음 날 소풍 날인데 비가 올까 말까 걱정이 돼서 이 김동완 아저씨가 하는 일기예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김동완 아저씨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일은 비 올 확률이 50% 입니다.
그럼 여러분 내일 비가 오는 것입니까? 안 오는 것입니까? 우산이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내일 하루 비가 올지, 안 올지, 비 올 확률 50% 인 것이 뭐 그리 크게 중요하겠습니까?
비가 오면 비가 오는 것이고, 우산이 필요하면 우산을 가져가면 되는 것이고, 근데 진짜 문제는 우리 인생의 문제는, 이런 예보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50%가 비가 온다. 당신 인생의 비가 올 확률이 50대 50입니다 라고 들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이 잘 될 확률 50%, 잘 안 될 확률 50% 라면, 성공할 확률이 50% 실패할 확률 50% 라는 얘기를 듣는다면, 우리 신앙에 한번 적용해 보겠습니다.
구원받을 확률 50%, 구원 못 받을 확률이 50% 라면, 구원을 받는 겁니까,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까? 여러분 말씀에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 첫 구절에 이렇게 증거합니다.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노라'
화평과 화목 사랑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온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어 다투고 나누게 하신다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는 일반적인 복음의 말씀은 화목하라 화평하라 사랑하라 그것을 나누라 그럼 구원의 길이 있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이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완전히 반대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노라. 그러면서 35절과 36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가족을 가르고 가족을 나누고 다투게 하러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복음 19장 6절의 말씀을 보면,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면서 마태복음 19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짝지어준 가정은, 짝지어준 공동체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사람이 나눌 수 없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곳곳에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되야 된다 사랑해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서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가지고 오셨다 라고 증거합니다.
그것으로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 아들과 아버지, 그들의 관계가 서로 갈라지고 나눠지게 된다는 것인데, 이 모순이 하나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 믿는 자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평하라. 내가 검을 주러 왔다. 다시 앞에서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 비 올 확률 50% 라고 한다면 그 날 소금장수는 장사를 가야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소금은 비 오는 날 장사하러 가면 다 녹습니다. 비가 오면 나가지 말아야죠. 그런데 일기 예보에 50% 비가 온다. 그럼 가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우산 장수는 어떻습니까? 비 올 확률 50% 라면 우산을 팔러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방금 전에 읽은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화목해야 합니까, 화목하지 말아야 합니까? 제 아무리 김동환 캐스터가 이야기 할지라도 비 올 확률이 50% 라고 한다면, 그건 비가 오는 것인지 안 오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대로 말씀드리면 제 아무리 유명하고 존경받고 신뢰받는 목회자가 오늘 본문을 두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과 평안이 아니라, 검을 주고 다투고 싸우고 오셨다 라고 말씀을 전하다가 다시 다른 구절의 본문에서 화목하라 화평하라 평안하라 사랑하라 라는 반대되는 말씀을 전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말씀이 진짜인지 궁금하게 되고 혼란이 생기고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근데 여기서 한가지 더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예수님께서 한 쪽에서는 너희는 화목하라 하신 말씀과 내가 검과 칼을 주러 왔다 다른 한쪽에서 너에게 칼을 주어 갈라지고 나눠주고 다투라 하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현실과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동떨어져 있는 말씀인가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지요. 잘 생각하면 양쪽에 양극에 있는 아주 모순적인 이야기가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목하기도 하구요 때로는 반대로 갈라지고 싸우고 다투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화목하라는 말씀이 있는 동시에 다른 한 쪽에서는 다투고 싸우라는 말씀이 있는 이유가 그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성경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화목할 때는 화목해야 하고요, 다투고 싸워야 할 때는 다투고 싸워야 하지만, 그것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종교적인 율법 종교적인 규율 법칙 그런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인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지만 성경이 유대인들의 율법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한다 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서삼경 처럼 어떤 규율을 가리키고 철학적인 명법을 얘기하며 또한 수학적인 공식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성경 속에서는 거의 대부분 인간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 이야기, 이사야의 이야기, 베드로의 이야기, 바울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죠.
성경은 우리 인간들의 모습,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작년에 부임하자마자 사랑과 화해에 대해서 8주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가장 많이 나온 여러분들의 피드백 반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 딱 맞는 설교입니다. 딱 맞는 메시지 입니다. 우리가 꼭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설교가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아직 그 목사님의 설교의 메시지는 우리가 따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근데 여러분이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말씀은 좋은데 우리는 못 따를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8주의 설교로 한 교회가 한 사람의 심령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그런 여러분의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그런 판단을 존중합니다.
말씀 좋아요,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예 여러분의 그런 삶을 인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저와 여러분 우리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사의 삶이 그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교회에서 목회자가 인생의 일기예보를 해뜰 확률이 90% 입니다 라고 설교 할지라도,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실의 삶은 매일 비 올 확률 50%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뒷주머니에 우리 인간의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무슨 얘기일까? 제가 새벽기도 때 사택에서 교회로 올 때면 대학로에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인지 할아버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항상 그 새벽길에 가거든요. 새벽길에 차도에 위험한 데도 불구하고 리어카에 폐지를 싸놓고, 그 리어카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에 새벽 기도를 가려고 차를 타고가는데, 어김없이 그 대학로 차도에 오는 비를 다 맞으면서 비에 흠뻑 젖어서 그 폐지가 그렇게 무거워지고 축 처져 있는데도 그 모든 폐지를 주워담고 리어카를 끌면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인간 사이의 현실이 참으로 가혹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론 저는 이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저 어르신은 분명히 일기예보에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했는데, 분명히 비가 올 줄 알면서도 왜 저렇게 비를 쫄딱 맞아가며 그 무거워진 비에 젖은 무거워진 폐지를 주으러 왜 밖에 나오셨을가?
아무리 이유를 철학적이고 실존적이고, 사회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물으려고 해도 그런 것에서는 답이 안 나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그 어르신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 끼 먹고 살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그 폐지를 줍는 몇 천원을 현실 가운데 받기 위해서, 그 분은 그 비오는 날에도 폐지를 주으러 리어카를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비가 올 확률이 100% 였지만 그 분은 폐지를 주으러 나와야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그 비를 맞아가면서 밖에 나오신 것이지요.
더 분명히 말씀드리면 그분은 비 올 확률이 0% 10% 아니 비 올 확률 50% 아니 비 올 확률이 100% 일지라도 상관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혹여 그분이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아들의 가족이 사업에 실패하고 부부가 갈라져서 자녀도 키우지 못하는 상황일는지, 자기의 아버지에게 자기의 어머니에게 그 손주를 맡겨서 그 어르신이 그 손주를 키우면서 손주 밥 한 그릇 먹고 문방구에서 문구 하나 사주기 위해서 제대로 먹이고자, 제대로 키우고자 폐지를 주으러 나오셔야 하는 것이 그 어르신의 우리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우리는 그곳에 뛰쳐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현실에 살면서 일기예보는 사치에 불과합니다. '비가 올 확률 50%' 에 비가 올까 말까 따지는 것은 우리 인생의 사치일 뿐입니다. 비가 오든 말든 우리는 일터로 가야 하고요, 아파도 직장에 가야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손님 하나 오지않아도 셔터 문을 열어야 되고, 직장에 가야 하고, 하루종일 가게를 지켜야 하는데, 예전에는 수십명의 손님이 오는 곳이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지금은 한 명 두 명의 손님이 오지 않더라도, 내 가게, 내 일터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그곳을 지켜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현실 아닙니까?
한 성도님께서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이번 장마 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할머니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비를 피하지 못하고 팔아야 할 채소를 그대로 놔 둔 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비를 다 맞아가면서 그 차도는 지금 홍수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 인간의 모습, 저와 여러분의 모습 아닐까요? 특별히 이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가 오면 맞고, 눈이 오면 맞고, 비바람 몰아치는 그것도 다 맞으면서 내가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의 삶, 인간의 현실, 우리 인간사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런 눈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마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때로는 가족 안에서 다툼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되고요, 구역 식구가 되기도 하고, 직분자가 되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있는 목회자도 여러분의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나도 내 제자가 나를 팔고 배신해서 원수 지간이 되었다.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그게 우리 인간사라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거죠. 우리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화목해 할 때는 반드시 화목하고 평안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갈라서고 다투고 싸워야 할 때는 원수가 되도록 싸우고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보다 사람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싸우라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보다 세상에 면류관, 세상의 영광, 세상에 명성과 권력과 인기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 있거든 갈라서고 다투고 치열하게 싸우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삶은 절반은 저쪽에 있고요 또 다른 절반은 이쪽에 있는 것입니다.
50%는 화목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고요, 또 다른 50%는 그럴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인생의 연속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그 답은 성경에 있는 대로 서로 모순되고 양극에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화목하라 내가 너희에게 칼을 주러 왔노라.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인간의 모습이고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서 말씀 드린다면 하나의 성경안에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한쪽에서는 화목하라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다투고 갈라서라 하는데 이렇게 모순된 이야기가 하나의 말씀 안에서 우리 신앙으로 전해지는 이유는 그 첫 번째는 인간의 삶이 절대적인 율법과 규율과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실과 우리 인생의 삶은 A 는 B 다 라고 딱 떨어져서 얘기할 수 없습니다. A 가 B 도 되고 C 도 되고 D 도 될 수 있는 인생이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은 절대적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것이죠. 그 가운데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겸손한 사람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낮아지는 삶, 나중된 삶을 우리에게 항상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비 올 확률 50%' 라고 붙인 것입니다. 비가 올 것입니까, 말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하늘을 보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하는 겸손한 신앙의 삶을 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단 1분 1초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코로나가 초기에 확산되었을 때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 점집에 코로나 확진자가 들러서, 그 무당도 확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당이 용하다 하면, 그렇게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확진자가 손님으로 올 것을 알아 맞춰야죠. 그게 그렇게 안되서, 무당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그게 인간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내일을 내다본다, 내일을 알아보겠다, 내가 이런 계시를 하겠다는건 헛된 욕망입니다. 허무한 짓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습니다. 아니 1분 1초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차라리 내 인생은 비 올 확률 50% 입니다 하는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성경적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율법과 법칙 공식과 명법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 인간의 절대로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비 올 확률 50%' 일기예보를 받아들고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금 내가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수익이 절반, 아니 3분의 1, 아니 그 이하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마지막 소망을 붙잡고 내 가족을 위해서라도 내 일터와 내 직장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게 신앙입니다.
비가 올지라도 폐지 하나라도 주어 팔 수 있다면 리어카를 끌고 밖에 나가는 우리 인간의 현실의 사명, 내게 주어진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그저 하나님과 나와 내 자녀들이 알 수 있는 나에게 주어진 그 역할,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난 신천지발 코로나로부터 시작되어 이번 교회와 어떤 집회를 통해 코로나가 확산되는 일로 거의 대다수의 아주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 이제 우리나라에서 선교와 전도는 끝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안 믿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전도하고 어떻게 선교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이제 교회는 끝났습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코로나 이후에 교회 전도와 선교 성장과 부흥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이 가득 할지라도, 그래서 교회에 미래가 비 올 확률 50% 로 예측될지라도 저는 목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는 자로서 맡겨진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 하셔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 아니겠습니까? 이제는요 분명히 전도하면 욕 먹을 겁니다. 선교 하다가 분명히 비난받을 거고요. 떳떳하게 예배 드리지 못하는 세상이 곧 올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녀들이 엄마 아빠가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할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절망적이고 낙담되고 좌절됐지만 그래서 비 올 확률 50% 라는 예측을 받아들고 있지만, 그렇게 소나기가 내리고 우중이라도 손주에게 호떡 하나라도 더 사주기 위해 그 빗 속에서 폐지를 주으러 나오시는 그 어르신 가운데 이제 우리 교회는 우리 믿는 자들은 작은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점점 비 올 확률 50%의 예측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비가 올지 안 올지. 더욱더 예상할 수 없는 세상. 수많은 자연재해, 테러와 전쟁과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우리는 더욱더 비가 올 확률 50% 라는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비가 오던 비가 안 오던, 성공하든 실패하든, 인생이 잘 되던 잘 안 돼든, 내 가정이 화목하던 그렇지 못하던, 내 삶이 평탄하던 평탄하지 못하던,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영광보다 십자가를 더 사모하되, 지금 내게 주어진 너의 인간 현실 속에 있는 그 일과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여러분 코로나로 참으로 힘듭니다. 정말 예측하기 힘든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렇게 대면하는 예배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의 뜻대로 제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이든 이후든 김주용이라는 목사는 여러분이 전에 보던 목사와 이후에 보던 목사로 동일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코로나로 교회를 당분간 나오지 못할지라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지라도 이 교회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킬 것이고요, 선교하고 전도하는 거 힘들지라도, 어떻게 하든 낮아지고 낮아지는 모습으로 다시 선교하고 전도하는 우리 믿음을 지켜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비가 오던 눈이 오던 비바람과 풍랑이 몰아치더라도 교회를 지킬 것이고 더불어 여러분과 함께 신앙의 삶을 신실하게 지켜낼 것입니다. 손주를 위해서 비가 오는 날에도 폐지를 줍는 그 어르신의 모습처럼 저와 연동교회는 비 올 확률 50% 의 세상에 일기예보 우리 인생의 일기예보에 상관없이 신실하게 변함없는 모습을 지켜내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요 신앙이라 믿습니다.
마지막 39 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얻는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 변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내 목숨을 잃는다면 내가 십자가를 지고 내가 가장 낮은 자로 나중된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비 올 확률 50% 인생을 살더라도 오직 변하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지켜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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