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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本 書 紀 上
<<日本書紀>> 권 1.神代 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素잔鳴尊이 奇稻田媛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脚摩乳. 手摩乳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石松이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山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素전鳴尊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素잔鳴尊이 뱀을 韓서劍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그 꼬리를 잘랐을 때 칼날이 조금 이지러졌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가르고 들여다 보니 따로이 칼 한자루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草艸+雉劍이라 하였다. 이 칼은 옛날에 素잔鳴尊이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尾張國에 있다. 素잔鳴尊이 뱀을 베었던 칼은 지금 吉備神部에 있는데 出雲國의 파川가의 산이 바로 이곳이다.
<<日本書紀>> 권 1, 神代 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리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때 素잔鳴尊은 그의 아들 五十猛神을 데리고 新羅國에 내려가 曾尸茂梨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 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出雲國 파川가에 있는 鳥上峯에 도착했다. 그때 그곳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큰 뱀이 있었다. 素잔鳴尊이 天蠅斫劍으로 그 큰 뱀을 베어 죽였다. 뱀의 꼬리를 베었을 때 칼날이 이지러졌으므로 꼬리를 쪼개어 보니 꼬리 가운데 한자루의 神靈스러운 칼이 있었다. 素잔鳴尊이 “이것은 내가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다” 하고는 五世孫 天之葺根神을 보내어 하늘에 바쳤다. 이것은 지금의 이른바 草艸+雉劍이다.
처음에 五十猛神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나무의 種子를 많이 가지고 왔다.그러나 韓地에는 심지 않고 모두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筑紫로부터 大八洲國안에 심어 푸른 산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五十猛命을 일컬어 功이 있는 神이라 하는데, 紀伊國에 모셔진 大神이 바로 이것이다.
권 1 神代 上,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素잔鳴尊이 “韓鄕의 섬에는 金銀이 있다. 만약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좋지 않다” 하고는 수염을 뽑아 뿌리니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서 뿌리니 이것이 전나무가 되었고 꽁무니의 털은 비자나무가 되었으며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의 쓰임새를 정하여 이르기를 “삼나무와 녹나무 이 두가지 나무는 배 만드는데 쓸만하고 전나무는
祥瑞로운 궁전을 짓는 재목으로 쓰며 비자나무는 천하 백성들이 장사지낼 때 죽은 이를 눕히는 도구로 쓸만하다. 또 모름지기
먹을 수 있는 80종의 나무를 모두 심어라” 하였다.
이때 素잔鳴尊의 아들 五十猛命과 그의 누이 大屋津姬命 그 다음인 과(木+瓜)津姬命, 무릇 3명의 神 역시 나무종자를 널리 퍼뜨릴 수 있었으므로 명을 받들어 紀伊國으로 건너갔다. 그후 素잔鳴尊은 熊成峯에 살다가 마침내 根國으로 들어갔다. 棄戶를 우리말로 須多杯라 하고 피(木+皮)는 磨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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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素잔鳴尊 : 거친 男神 혹은 出雲國 飯石郡 및 紀伊郡 在田郡에 있는 須佐라는 곳의 主神이다. 신화에 의하면, 伊장諾尊의 아들로 根國을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命을 어기고 高天原에서 난폭한 짓을 일삼았기 대문에 추방되어 出雲國에 내려와 八岐 大蛇를 물리치고 草艸+雉劍을 얻어 天照大神에게 바쳤다고 한다.
* 脚摩乳.手摩乳 : 出雲國의 神으로 奇稻田媛의 부모이다.
* 韓서劍 : 十握劍이라고도 한다. 명칭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래된 小刀로 보인다.
* 草치劍 : 天照大神이 내려주었다는 3種의 神器 중의 하나이다. 본래 이름은 天叢雲劍이었는데, 이는 素잔鳴尊이 죽였던 큰 뱀이 있는 곳 위에 항상 구름이 덮혀 있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景行天皇 때에 日本武尊이 이 칼을 휴대하고 東國을 정벌하던 중, 駿河의 燒津에서 적군의 火攻을 이 칼로 풀을 잘라내어 위기를 모면했으므로 草치劍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日本武尊이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 尾張國 熱田에 두었으므로 이후에는 그곳에서 보관하고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 出雲國 : 지금의 島根縣 동부에 해당하는데 동쪽으로는 鳥取縣, 남쪽으로는 廣島縣, 서쪽으로는 島根縣 서부, 북쪽
으로는 동해에 접해있는 지역이다.
* 파川 : 仁多郡 般通山에서 발원하여 島根縣 동쪽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흘러가 肉道湖에 흘러 들어가는 지금의 非+
文伊川이다.
* 千座置戶 : 신에게 잘못을 빌기 위하여 많은 祭物을 바치고 속죄하는 것으로, 千位置戶라고도 한다.
* 曾尸茂梨 : 신라의 옛 이름인 徐伐과 같은 뜻으로 지금의 경주 지방이라는 견해와 牛頭州 즉 강원도 춘천지방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 鳥上峯 : 島根縣 仁多郡 般通山의 옛 지명인 듯하다.
* 筑紫 : 지금의 .... 筑前,筑後를 합한 지역의 옛 명칭이다. <<萬葉集>>에는 都久紫, 都久志로 표기하였다.
* 大八洲國 : 伊장諾尊과 伊장염尊이 만들었다고 하는 8개의 큰 섬으로 일본 전국을 가리킨다.
* 紀伊國 : 현재의 和歌山縣 전부와 三重縣 일부 지역으로 산과 나무가 많아 木國이라고도 한다.
* 韓鄕의 섬에는 金銀이 있다 : 韓鄕은 신라, 가야지역을 의미하는 듯하다. <<三國志>> 위지 동이전에 변.진한에 철이
많이 난다고 하며, <<古事記>> 와 <<日本書紀>>에서 “金銀彩色 多在其國”, “西方有國 金銀爲本”, “金銀之國”, “金銀蕃國”이라 하여 신라를 金銀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國號인 徐伐 혹은 徐羅伐과 金官加耶의 異稱인 須那羅가
이 지방의 金銀 혹은 철생산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末松保和,<<任那興亡史>>,1949.138쪽)
* 熊成峯 : 紀伊國과 出雲國에 ‘구마나리’란 지명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熊津도 ‘구마나리’로 칭하여졌다. 素잔鳴尊의
행적에 관한 이설이 많기 때문에 그가 살았다는 熊成峯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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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 御間城入言五十瓊殖天皇 崇神天皇
65년 가을 7월 任那國이 蘇那曷叱知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任那는 筑紫國에서 2,000여 里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으며 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권6 活目入言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2년 이 해에 任那人 蘇那曷叱知가 자기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先皇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蘇那曷叱知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一說은 다음과 같다. 御間城天皇(崇神天皇) 때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한 척의 배에 타고 越國 笥飯浦로 그곳을 角鹿이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意富加羅 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都怒我阿羅斯等, 또 다른 이름은 于斯岐阿利叱智干岐이다.
日本國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귀화하려 합니다. 穴門에 도착했을 때, 그 나라에 伊都都比古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는데 臣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시 두 왕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사람됨을 자세히 보니 기필코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곧 다시 그곳을 물러났으나 길을 몰라 섬과 포구를 오랫동안 맴돌다가 北海로부터 돌아 出雲國을 거쳐 이 곳에 왔습니다”고 말하였다. 그 때 천황의 죽음을 만나 (이곳에) 머물러 活目天皇(垂仁天皇)에게 벼슬하여 3년에 이르렀다. 천황이 都怒我阿羅斯等에게 “너희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매우 바랍니다”고 답하였다. 천황이 阿羅斯等에게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다면 선황을 뵙고 모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御間城천황의 이름을 따서 바로 너희 나라 이름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赤織絹을 阿羅斯等에게 주어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 이름을 彌摩那國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이에 阿羅斯等은 받은 赤絹을 자기나라의 郡府에 간직하였는데, 신라인들이 듣고
군대를 일으켜 와서 그 적견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한을 맺은 시작이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都怒我阿羅斯等이 자기나라에 있을 때에 황소에 농기구를 싣고 농막에 가려했는데, 황소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보니 발자취가 한 郡家에 머물렀다. 당시 한 노인이 “너희가 찾는 소는 이 郡家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郡公 등이 ‘소가 짊어진 물건으로 미루어 보니 반드시 죽여서 먹으려는 것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 오면
물건으로 배상하자’하고 곧 죽여서 먹었다. 만약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지 물으면 재물을 바란다고 하지 말고 郡에서 제사지내는 神을 얻고자 할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郡公 등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가”라고 하자, 노인이 기르쳐준 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었다. 흰 돌을 소 값으로
주었으므로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었더니, 그 神石이 아름다운 童女로 변하였다. 이에 阿羅斯等이 크게 크게 기뻐하여 동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阿羅斯等이 다른 곳에 간 동안 동녀가 갑자기 없어졌다. 阿羅斯等이 크게 놀라 자기 부인에게 “동녀가 어디로 갔소”라고 물으니, “東方을 향해 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곧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멀리 바다에 떠서
日本國에 들어갔다. 그가 찾던 동녀는 難波에 나아가서 比賣語曾社神이 되었고 또 豊國의 國前郡에 이르러 다시 比賣語曾社神이 되어, 이 두 곳에서 함께 제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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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那國: 금관가야 또는 가야연맹체의 異稱이다. 임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보이는 우리나라의 자료는 廣開土王陵碑인데 ‘任那加羅’라 하였고, 三國史記 권46 列傳6 强首傳에 의하면 강수가 ‘臣本任那加良人’이라 하였다. 한편 鳳林寺眞境大師碑에는 “俗姓新金氏 其先任那王族 ··· 遠祖興武大王”이라 하였다. 『日本書紀』欽明天皇 23년(562) 봄 정월조에
의하면, “통털어 말하면 임나라 하고, 따로 말하면 加羅國·安羅國·斯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
稔禮國이니 합하면 10국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가야국의 명칭은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加耶를 사용하나, 각종 저술에서는 伽倻, 伽耶, 加羅, 伽羅, 迦羅, 呵羅, 加良, 駕洛, 伽落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 蘇那曷叱知: 新撰姓氏錄에 의하면 都怒我(쓰누가)는 都怒賀 혹은 都奴加로 되어 있는데 모두 蘇那曷(소나가)의
同音異寫이다. 蘇那를 都怒·都努·都奴로 표현한 것은 이마에 뿔(일본어로 쓰노)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데서 윤색한 것이다. 정말 뿔이 아니라 머리에 쓴 것이 뿔과 같이 보인 때문인데, 낙동강 연안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새 깃털 모양의
冠을 쓴 弁辰·가야 계통의 首長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曷과 都怒我阿羅斯等의 我는 加夫都(가후도)에
해당하는 말로서 冠帽를 뜻하는 韓語 갈(kar), 갓(kat)의 寫音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한편 叱智는 三韓의 渠帥의 이칭인 臣智·秦支라고 이해되고 있다(李丙燾,「蘇那曷叱智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pp. 339-350).
* 筑紫國: 지금의 大阪 부근인데, 筑前과 筑後를 합한 지역의 옛 명칭이다. 萬葉集에서는 都久紫·都久志로 표현
하였다.
* 北阻海: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것은 日本書紀 찬자의 잘못인 듯하다. 한편 이 구절을 근거로 임나를
오늘날의 對馬島로 비정하는 예도 있다(田溶新, 『 完譯 日本書紀』, 一志社, 1990, p. 104).
* 鷄林: 신라를 가리킨다. 원래는 慶北 慶州시 교동에 있는 신라 경주 김씨의 발상지이다. 三國史記 권1 신라본기1 脫解尼師今 9년 춘3월조에 의하면 흰 닭이 울고 있던 나무 위에 걸린 금궤에서 작은 아이가 태어났는데 閼智라 이름
하고 성은 김씨라 하였으며, 始林을 鷄林이라 이름을 바꾸고 국호로 삼았다.
* 越國: 古代 國郡制 시행 이전의 北陸지방의 범칭이다. 현재의 福井·石川·富山·新潟의 4현을 가리킨다.
* 笥飯浦: 福井縣 敦賀市 氣比神社 부근이다.
* 意富加羅: 意富를 ‘오호’로 音讀하여 大의 뜻으로 풀이하여 대가야를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李丙燾, 앞글, p. 340).
* 都怒我阿羅斯等: 阿羅는 于斯岐阿利叱智干岐의 阿利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閼川·閼智의 閼, 廣開土王陵碑에 나오는
阿利水의 아리와 상통하는 말로 大를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李丙燾, 앞글, p. 345).
* 于斯岐阿利叱智干岐: 干岐는 干(khan), 汗(han)으로, 삼한사회에서는 帥長을 칭하였으며 동북아시아 민족 사이에서는 군주를 부르는 공통어로 쓰였다. 日本書紀에서는 旱岐라고도 칭했다.
* 日本國: 日本書紀 찬자의 윤색인 듯하다. 三國史記 권6 文武王 10년(679) 12월조에는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新唐書 東夷傳 日本條의 “日本 古倭奴也 ··· 咸亨元年(670) 遣使賀平高麗 後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國近日所出以爲名”이라 한 기사에서 비롯한 것으로, 일본국이라는 국호가 이 무렵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 穴門: 古代 國郡制 시행 이전에 지금의 山口縣 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畿內와 筑紫를 연결하는 內海교통의 요충이었다.
* 御間城: 일본음으로 미마끼. 任那(nima-na)를 mima-na로 발음한 것으로, 고대 우리말에서 n과 m이 서로 넘나드는 음운법칙에 따른 것이다.
* 難波: 현재의 大阪市이다.
* 豊國: 豊前·豊後를 합한 지역의 古稱으로, 古事記의 大八島生成神話에서는 筑紫島가 筑紫國·豊國·肥國·熊曾國의 넷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풍국이라는 명칭은 고대 國郡制의 성립과 함께 소멸하고, 대신 풍전국·풍후국으로 칭해
졌다.
* 國前郡: 후일의 豊後國 國埼郡으로, 지금의 東國 東部·西國 東部·豊後高田市 및 杵築市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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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 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3년 봄 3월 신라 왕자 天日槍이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羽太玉 1개, 足高玉1개, 鵜鹿鹿 赤石玉 1개, 出石小刀 1자루, 出石鉾 1자루, 日鏡(청동거울) 1개, 熊神籬 1개 등 7가지였는데, 但馬國에 보관하여 항상 神物로 삼았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天日槍이 작은배를 타고 와서 播磨國에 정박하여 肉粟邑에 있었다. 그 때 천황이 三輪君의 시조 大友主와 倭直의 시조 長尾市를 播磨에 보내어 天日槍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天日槍이, “저는 신라 국왕의 아들인데, 日本國에 聖皇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知古에게 주고 귀화하였습니다”라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葉細珠, 足高珠, 鵜鹿鹿 赤石珠, 出石刀子, 出石槍, 日鏡, 熊神籬, 膽狹淺大刀 등 8가지였다. 이에 (천황이) 天日槍에게, “播磨國 肉粟邑이나 淡路島 出淺邑의 두 읍 중에서 너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 때 天日槍이, “신이 장차 거주할 곳에 대하여 만일 天恩을 내려 신이 원하는 곳을 허락하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지급받고자 합니다”라고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天日槍이 菟道河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으로 近江國 吾名邑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다시 近江으로부터 若狹國을 거쳐 서쪽으로 但馬國에 이르러 거주처를 정하였다. 近江國 鏡村谷 陶人은 바로 天日槍을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天日槍은 但馬國 出嶋의 사람 太耳의 딸 麻多烏와 결혼하여 但馬諸助를 낳았다. 諸助는 但馬日楢杵를 낳고 日楢杵는 淸彦을 낳았으며 淸彦은 田道間守를 낳았다.]
88년 가을 7월 기유 초하루 戊午 여러 신하들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듣자하니 신라 왕자 天日槍이 처음 올 때에 가지고 온 보물이 但馬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귀하다고 여겨 神寶로 삼았는데, 짐이 그 보물을 보고자 한다”라 하고, 그 날 사자를 보내 天日槍의 증손 淸彦에게 조칙을 내려 바치도록 하였다. 淸彦이 조칙을 받고 스스로 神寶를 받들어 바쳤다. 羽太玉 1개, 足高玉 1개, 鵜鹿鹿 赤石玉 1개, 日鏡 1개, 熊神籬 1개 등을 바쳤으나, 오직 出石이라는 小刀에 대해서는 淸彦이 갑자기 이를 바쳐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도포 속에 숨겨놓고 자신이 차고 다녔다. 천황이 小刀를 숨겨놓은 것을 알지 못하고 淸彦을 총애하고자 하여 御所에 불러 술을 내렸다. 이 때 칼이 도포로부터 나와 드러나니, 천황이 보고 친히 淸彦에게, “네 도포 안에 있는 칼은 어떤 칼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淸彦이 칼을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바친 神寶와 같은 종류의 물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淸彦에게, “그 神寶를 어찌 달리 둘 수 있겠느냐”라고 이르므로, 이에 바치니 모두 神府에 보관하였다. 그 후 얼마있다가 寶府를 열어보니 小刀가 없어졌다. 이에 사람을 시켜 淸彦에게, “네가 바친 칼이 홀연히 없어졌는데, 혹시 너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淸彦이 “어제 저녁에 칼이 저절로 臣의 집에 이르렀다가 오늘 아침에 사라졌습니다”라고 대답하므로, 천황이 두려워하며 다시 찾지 말라고 하
였다. 이후 出石刀子가 저절로 淡路島에 이르렀는데 그 섬 사람들이 ‘神’이라 이르고 칼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 이는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낸다. 옛날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但馬國에 정박하였는데, “너는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신라 왕자인데, 이름은 天日槍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但馬에 머물러 그 나라 前津耳[일설에는 前津見이라 하고, 또 일설에는 太耳라고 한다.]의 딸 麻拕能烏와 결혼하여 但馬諸助를 낳았는데 이가 淸彦의 할아버지이다.
90년 봄 2월 庚子 초하루 천황이 田道間守를 常世國에 보내어 사시사철 나는 香菓[이는 우리말로 箇俱能未라고 이른다.]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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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日槍 : 古事記 應神天皇條에는 天之日矛라고 이르고 있는데 귀화의 동기와 경로 등은 위의 기사와 차이가 있다. 즉 “又昔 有新羅國主之子 名謂天之日矛 是人人蔘渡來也 所以人蔘渡來者 新羅國有一沼 名爲阿具奴摩 此沼之邊 一賤女晝寢‧‧‧姙娠生赤玉”이라 하고, 그녀가 일본으로 도망하자 찾아나서 그녀가 숨어있는 難波(지금의 大阪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神의 저지로 多遲摩國(但馬國)에 정착함으로써 인삼을 전래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면 日本書紀 垂仁天皇 2년조 都怒我阿羅斯等에 대한 일설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원전 무렵 辰韓人의 일본 이주설화로 풀이하거나(李丙燾, 韓國史大觀, 1964, p.64 ; 金錫亨,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 三品彰英,「天之日矛歸化年代攷」,日鮮神話傳說の硏究, 1943), 三國遺事 延烏郞 細烏女 설화와 비교하여 태양신화의 이동 전설로 보기도 한다(蘇在永, 「延烏
郞細烏女說話考」, 국어국문학 36, 1967 ; 李寬逸, 「延烏郞細烏女說話의 한 硏究」, 「국어국문학 55-57, 1972).
* 神籬 : 日本書紀 권2, 神代 下 9段의 高皇産靈尊의 勅에 ‘天尊神籬’가 보이는데, 이는 屋內外에 특별히 만든 곳으로서 神이 강립하는 장소를 뜻한다. 여기에서 天日槍이 가지고 왔다는 神籬는 신이 강림하는 장소에 까는 일종 돗자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 七物 : 古事記 應神天皇條에는 「玉津寶에 근거하여 “珠二貫 又振浪比禮‧切浪比禮‧振風比禮‧切風比禮‧ 又奧津鏡‧邊津鏡 幷八種也”라 하고, 이들은 但馬國 出石郡 出石鄕에 있는 伊豆志坐神社의 八前大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 但馬國 : 지금의 兵庫縣 북부지방.
* 播磨國 肉粟邑 : 지금의 兵庫縣 播粟郡.
* 日本國 : 日本書紀 찬자의 윤색인 듯하다. 三國史記 권6, 문무왕 10년(670) 12월조에는 “倭國更號日本 自言 近日所出以爲名”이라 하였는데, 이는 新唐書 東夷傳 日本條 “日本 古倭奴也‧‧‧天智死 子天武立 子摠持立 咸亨元年(670) 遣使賀平高麗 後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國近日所出 以爲名”의 기사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日本國이란 국호가 이 때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 菟道河 : 지금의 宇治川을 일컬음.
* 近江國 : 지금의 滋賀縣 坂田郡 近江町 箕浦 부근.
* 吾名邑 : 지금의 滋賀縣 蒲生郡 龍王町 綾戶의 蒲生郡 長村 神社 부근으로 추측됨.
* 若狹國 : 近江國의 북부지역.
* 鏡村 : 지금의 滋賀縣 蒲生郡. 한때 鏡宿으로 일컬었는데 鏡村谷은 鏡山의 동쪽 기슭에 있다.
* 陶人 : 토기를 제작하는 사람. 鏡村谷이 있는 鏡山 가까이에 須惠란 곳이 있는데, 5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전래된 陶質土器 須惠器는 이곳의 이름과 관련된 듯하며, 天日槍을 따라와 鏡村谷에 도착하였다는 陶人도 그러한 관련에서 기록에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須惠器의 일본 전래에 대해서는 崔鍾圭, 「美術上으로 본 韓日關係-陶質土器와 須惠器-」,(古代韓日文化交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참조.
* 太耳 : 日本書紀 권6, 垂仁天皇 88년 7월조에는 ‘前津耳’‘前津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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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後紀
(천황이 죽은) 다음 해 (景行天皇 2년) 봄 3월 辛未 초하루 壬午(12일) 田道間守가 常世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것은 사시사철 나는 香菓 8竿 8縵이었다. 田道間守가 이에 슬피 울며 탄식하여, “天朝의 명을 받들어 먼 이국땅에
가서, 만리의 파도를 넘고 멀리 弱水를 건넜다. 이 常世國은 神仙이 사는 신비한 구역으로서 俗人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로써 왕래하는 가운데 10년이 지났는데, 어찌 홀로 큰 파도를 넘어 다시 본토로 돌아올 줄을 기약했으리오. 그러나
聖帝의 神靈에 힘입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 천황이 이미 돌아가셔서 다녀왔음을 보고할 수 없으니 臣이 비록 살았다고 하나 또한 무엇이 보탬이 되리오”라 말하고, 천황의 능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뭇 신하들이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田道間守는 三宅連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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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田道間守 : 垂仁天皇 3년 일본에 귀화한 신라 왕자 天日槍의 高孫. 日本書紀 권6, 垂仁天皇 3년조에 ‘天日槍-但馬諸助-但馬日楢杵-淸彦-田道間守’의 家系가 보인다.
* 常世國 : 속인이 왕래할 수 없는 理想鄕으로서, 사물이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不老 不死하는 樂土를 일컫는다.
* 8竿 8縵 : 延喜內膳式 新嘗祭供御料條에 “橘子卄四蔭 鉾橘子十枝”라고 보이는데, 竿은 꼬챙이로 꼽은 모양을, 縵은 줄 같은 것으로 이은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되므로, ‘8竿 8縵’은 田道間守가 가지고 온 橘의 수량을 일컬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 弱水 : 신선이 살고 있는 곳에 있다는 강으로, 기러기 털도 가라앉을 정도여서 가죽으로 만든 배만이 이를 건널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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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書紀 권 8 足仲彦天皇 仲哀天皇
(8년) 가을 9월 乙亥 초하루 己卯 群臣에게 詔勅을 내려 熊襲을 토벌하는 것을 의논케 했다. 이 때 神이 황후에게 신탁
하여 가르쳐 주기를,“천황은 어찌 熊襲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가. 그곳은 힘없고 쓸모없는 나라이니 어찌 군대
를 일으켜 칠 만하겠는가. 이 나라보다 더욱 寶物이 많은 나라가 있으니 비유하면 처녀의 눈썹과 같고 津의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다[碌은 우리말로 麻用弛枳라고 한다] 눈부신 금과 은,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이 나라를 杼衾新羅國이라고 한다. 네가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낸다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그 나라가 반드시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또 웅습도 복종하게 될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천황의 배와 穴門直踐立이 바친 水田, 이름하여 大田이라 이름하는 것 등의 물건을 폐백으로 하라”고 하였다. 천황이 神의 말을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 문득 높은 산에 올라 멀리 大海를 바라보았으나, 넓고 멀기만 할뿐 그 나라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천황이 神에게 “제가 두루 살펴 보았으나 바다만 있고 나라는 없었습니다. 어찌 텅빈 곳에 나라가 있겠습니까. 어떤 神이길래 헛되이 저를 속이십니까. 또한 우리 황실의 여러 천황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어찌 남은 신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신이 또한 황후에게 신탁하여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분명하게, 내려다 보아 내가 본 나라인데 어찌 없다고 하며 내 말을 비방하느냐. 그런데도
너는 이같이 말하고 마침내 믿지 않으니 너는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지금 황후가 비로소 태기가 있으니 그
아들이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황은 여전히 믿지 않고 웅습을 억지로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
왔다. (9년) 이 해 신라 정벌로 말미암아 천황을 장사지낼 수 없었다.
권 9 氣長足姬尊 神功皇后
9년 봄 2월 足仲彦天皇(仲哀天皇)이 筑紫의 橿日宮에서 죽었다. 이 때 황후는 천황이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고 신의 재앙임을 알아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를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群臣과 百寮들에게 명하여 죄를 빌고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고 小山田邑에 齌宮을 다시 지었다.
여름 4월 壬寅 초하루 甲辰 북으로 火前國 松浦縣에 이르러 玉嶋里의 작은 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시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서 낚시줄로 하여 물 가운데의 돌 위로 올라가 낚시를
던지고 “짐은 서쪽의 財國을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를 물게 하소서”라고 빌었다.
인하여 낚시대를 드니 비늘이 잔 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때 황후가 말하기를 “보기 드문 것이다.”[希見은 우리말로 梅豆邏志라 한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곳을 梅豆羅國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松浦라고 하는데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나라 여인이 매년 4월 상순에는 물속에 낚시를 던져서 銀魚를 잡는 것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남자는 비록 낚시질을 하더라도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황후는 신의 가르침이 징험이 있음을 알아서 다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하였다. 이에 神田을 정하여 이를 경작시켰다. 그 때에 儺河의 물을 끌어다가 神田을 기름지게 하고자 하여 도랑을 팠는데, 迹驚岡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도랑을 팔 수 없었다. 황후가 武內宿禰를 불러 칼과 거울을 받들고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하여 도랑이 통하기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천둥과 번개가 쳐 바위를 깨뜨려 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도랑을 裂田溝라 하였다. 황후는 橿日浦에 돌아와서 머리를 풀고 바닷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신의 가르침을 받고 皇祖의 靈을 힘입어 滄海를 건너가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바닷물에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었더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뉘어진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인하여 군신에게 “무릇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다. 安危와 성패는 반드시 여기에 있다. 지금 정벌할 곳이 있는데 이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맡겨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그대들에게 있게 되므로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는 부녀자이고 不肖하지만 잠시 남자의 모습을 빌려 웅대한 계략을 일으키고자 한다. 위로는 하늘과 땅의 신의 靈을 힘입고 아래로는 群臣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험한 파도를 건너 선박을 정돈하여 재물이 많은 땅을 얻고자 한다.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그대들과 함께 功을 얻게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만 죄가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런 뜻이 있으니 이를 함께 의논하자”고 하였다. 群臣이 모두 “황후가 천하를 위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또 죄가 신하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시니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9월 庚午 초하루 己卯 여러 나라로 하여금 선박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게 했다. 이 때 軍卒들이 잘 모이지 않았으므로 황후가 “반드시 신의 마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大三輪社를 세우고 칼과 창을 바치자 軍衆들이 저절로 모였다.
이에 吾瓮의 海人 烏摩呂로 하여금 西海로 나가서 나라가 있는지 살펴 보도록 했다. 돌아와서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磯鹿의 海人 名草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며칠 뒤 돌아와서 “서북쪽에 산이 있는데 구름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습니다. 대개 나라가 있는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吉日을 점쳐서 출발하기까지 며칠이 남았는데, 이 때 황후가 친히 斧鉞을 잡고 3軍에게 명령하기를 “징과 북소리가 절도가 없고 깃발이 뒤섞여 어지러우면 곧 士卒들이 정돈되지 않는다. 재물이 많기를 탐하고 사사로이 妻子의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적이 적더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적이 강하다고 해서 굴복해서도 안된다. 폭력으로 부녀자를 범한 자를 용서하지 말고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전쟁에 이기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요, 도주하는 자는 당연히 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神이 가르치기를 “和魂은 왕의 몸에 붙어서 목숨을 지킬 것이고,
荒魂은 선봉이 되어 군선을 인도할 것이다”라 하였다[和魂은 우리말로 珥岐瀰多摩라 하고 荒魂은 우리말로 阿邏瀰多摩라고 한다]. 神의 가르침을 얻고나서 拜禮하고, 依網吾彦男垂見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주재자로 삼았다. 이 때 마침 황후의 산달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빌며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낳게 해주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 伊覩縣의 길가에 있다. 이리하여 荒魂을 軍의 선봉으로 하고 和魂을 청하여 王船에 모셨다.
겨울 10월 己亥 초하루 辛丑 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겠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둘 바를 모른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天運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어니 동쪽에 神國이 있는데 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神兵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 圖籍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飼府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없이 봄 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阿利那禮河가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 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軍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財國을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飼部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있다. 이에 신라왕 波沙寐錦은 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金‧銀‧彩色‧綾‧羅‧縑絹을 배 80척에 싣고 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調를 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高麗와 百濟의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12월 戊戌 초하루 辛亥日 譽田天皇을 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宇瀰라고 불렀다.[일설은 다음과 같다. 足仲彦天皇이 筑紫 강일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沙麽縣主의 祖인 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비유하면 사슴의 뿔과 같아서 실속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천황이 타고 있는 배와 穴戶直踐立이 바친 水田, 즉 大田이란 것을 폐백으로 하여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金‧銀이 많은 눈부신 나라를 천황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이 신에게 “비록 신이라고 하지만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또 내가 탄 배를 신에게 바치면 나는 어느 배를 타야하는가, 그러나 어떤 신인지도 모르니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대답 하였다. 이 때 신이 그 이름을 일컫기를 “表筒雄, 中筒雄, 底筒雄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 신의 이름을 일컫고 또한 거듭하여 “나의 이름은 向匱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천황이 황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婦人이다. 어찌 速狹騰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신이 천황에게 “왕 그대가 이같이 믿지 않으니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지금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얻게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천황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뒤 황후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지냈다. 즉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 때 신이 (황후에게) 머물며 인도하였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신라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臣은 지금 이후로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內官家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또 일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
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軍船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이에 군대를 따라갔던 신 表筒男‧中筒男‧底筒男 세 신이 황후에게 “우리 荒魂을 穴門山田邑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때 穴門直의 조상인 踐立과 津守連의 조상인 田裳見宿禰가 황후에게 “神이 머물고자 하는 땅을 반드시 받들어 정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踐立을 荒魂을 제사지내는 神主로 삼고 穴門山田邑에 祠堂을 세웠다. 신라를 친 이듬해 봄 2월에 황후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穴門豊浦宮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천황의 널을 거두어 바닷길로 서울을 향했다. 이 때 麛坂王‧忍熊王이 천황이 죽고, 또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천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5년 봄 3월 癸卯 초하루 己酉日 신라왕이 汙禮斯伐과 毛麻利叱智 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微叱許智伐旱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許智伐旱을 꾀어 “사신 汙禮斯伐과 毛麻利叱智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데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葛城襲津彦을 딸려 보냈다. 함께 對馬에 도착하여 鉏海의 水門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毛麻利叱智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微叱旱岐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사람 모습을 만들어 微叱許智의 자리에 두고 거짓으로 병든 사람인 채하고 襲津彦에게 “微叱許智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襲津彦이 사람을 시켜 병자를 돌보게 했는데, 속인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에 나아가 蹈鞴津에 이르러 草羅城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이 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桑原과 佐糜‧高宮‧忍海 4읍의 漢人 등의 시조이다.
46년 봄 3월 乙亥 초하루 斯摩宿禰를 卓淳國에 보내었다.[斯麻宿禰는 어떤 姓氏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卓淳王末錦旱岐가 斯摩宿禰에게 “甲子年 7월에 백제인 久氐‧彌州流‧莫古 세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君王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久氐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久氐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에 가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요’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에 斯摩宿禰는 從者 爾波移와 卓淳人 過古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肖古王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綵絹 각 1필과 角弓箭 및 鐵鋌 40枚를 爾波移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使者에게 부쳐서 바친다”고 하였다. 이에 爾波移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志摩宿禰에게 보고했다. 바로 卓淳으로부터 돌아왔다.
47년 여름 4월 백제왕이 久氐‧彌州流‧莫古를 보내어 조공하게 했다. 이 때 신라국의 調使가 久氐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와 태자 譽田別尊이 매우 기뻐하며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지금 와서 조공하니, 천황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슬프도다”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하였더니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여 좋지 않았다. 이에 久氐 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된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沙比新羅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 久氐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久氐 등은 두려워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겨우 天朝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황태후와 譽田別尊이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천신에게 기도하여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일의 사실 여부를 조사시키며, 누구를 신라에 파견하여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라 하였다. 천신이 “武內宿禰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고 千熊長彦을 사자로 삼으면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千熊長彦은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일설에는 武藏國人이니 지금의 額田部 槻本首 등의 시조라고 한다. 百濟記에 職麻那那加比跪라고 한 사람은 대개 이 사람인 듯하다]. 이에 千熊長彦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 바치는 물건을 훔친 것을 질책하였다.
49년 봄 3월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沙白‧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라 하였다. 곧 木羅斤資와 沙沙奴跪에게[이 두 사람은 그 姓을 모르는데 다만 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精兵을 이끌고 沙白‧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比利‧辟中‧布彌支‧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父子와 荒田別‧木羅斤資 등이 意流村[지금은 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 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50년 봄 2월 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여름 5월 千熊長彦과 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久氐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久氐 등이 “天朝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驛으로 삼게 했다.
51년 봄 3월 백제왕이 또 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千熊長彦을 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父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끝내 두 마음이 없을 것이오”라 아뢰었다.
52년 가을 9월 丁卯 초하루 丙子日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55년 백제 肖古王이 죽었다.
56년 백제왕자 貴須가 왕이 되었다.
62년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百濟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壬午年에 신라가 貴國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加羅國을 쳤다. 가라국왕 己本旱岐와 아들 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 등이 그 人民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旣殿至가 大倭로 가서 “천황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加羅에 모여 그 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沙至比跪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比跪가 몰래 使人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沙至比跪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比跪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比跪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64년 백제국 貴須王이 죽었다. 왕자 枕流王이 즉위하였다.
65년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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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宅連 : 古事記에도 “三宅連之祖 名多遲麻毛理”라는 구절이 보이며, 신라 왕자 天之日矛로부터 내려오는 家系를 전하고 있다. 新撰姓氏錄 右京諸蕃‧同攝津諸蕃條에도 “新羅國王子天日鉾命之後也”라 하였으며, 同族으로서 橘守‧
糸井造 등이 있다.
* 熊襲; 오늘날 九州 남부의 日向‧大隅‧薩摩 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寶國; 신라를 가리켜 寶國이라 한 듯하다.
* 杼衾新羅國; 杼는 白布를 말하며 衾은 寢具를 의미하는 말로, 이는 신라의 産物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 新羅役; 神功 攝政 前紀의 이른바 신라 정벌을 가리킨다.
* 財寶國; 신라를 가리킴.
* 松浦; ‘마쯔라’라고 읽는데 梅豆邏는 ‘메즈라’라고 읽으므로 이와 音이 비슷했으므로 松浦에 比定한 듯하다.
* 西征; 서쪽 정벌이란 곧 신라를 정벌하겠다는 뜻.
* 橿日浦; 福岡市 香椎.
* 財國; 신라를 가리킴.
* 斧鉞; 원래 형벌의 도구로서 중국에서는 天子가 정벌할 때 大將에게 주어서 誅殺을 마음대로 하게 했다고 한다.
* 흰 끈을 목에 건다는 표현은 곧 自殺하고 싶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항복을 뜻하는 것임.
* 圖籍; 토지의 도면과 인민의 호적으로 이를 封印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의
상실을 의미함.
* 飼部;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며 馬具와 말먹이 등을 관장하는 부서인데 飼部가 되겠다는 표현은 항복하여 비천한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곧 신라가 일본의 복속국이 되겠다는 의미.
* 馬梳 馬鞭; 말의 털을 빗는 솔과 말채찍인데 말을 기르는데 필요한 도구로서 이를 바치겠다는 것은 곧 비천한 일을
自任하는 것임.
* 阿利那禮河; 경주의 閼川 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백제 도성하의 阿利水로 보기도 하는데 막연히 강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
* 波沙寐錦: 波沙는 삼국사기의 신라 5대 婆沙尼師今과 이름이 같지만 동일인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며 寐錦은
광개토왕비와 智證大師碑 등에도 보이는데 尼師今과 같은 왕호의 일종이다.
* 微叱己知波珍干岐; 微叱己知는 제15대 奈勿王의 아들인 未斯欣(또는 美海)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되며 波珍干岐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 4위인 波珍飡(또는 波珍干, 海干)이라 여겨진다. 5년 3월 조에는 微叱許智 伐旱이라고 보이며
欽明 21년 9월 조에는 신라 使人으로 彌至己知 奈末이 보이는데 同名異人이라 생각된다.
* 高麗 百濟 二國王: 고려는 물론 高句麗를 가리키는 것이며 日本書紀에 고구려의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神功皇后 攝政前紀 仲哀 9년 이른바 신라 征討기사의 맨끝에 나오는 것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으며, 事實을 기재한 것은 雄略紀 20년(478)의 고구려의 백제 공격기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 보고 있다. 백제의 이름이 日本書紀에 처음 보이는 것은 고구려와 동시인 神功皇后 攝政前紀 仲哀 9년의 이른바 신라 征討기사의 맨 끝에 나오는 것이며 이어서 神功皇后 攝政 46년에 斯麻宿禰의 傔人이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사이다. 이 46년조의 기사를 日本書紀의 紀年을 120년 뒤로 내려서 丙寅年(366)의 일이라고 한다면 일본과 백제의 최초의 교섭기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이다.
* 內官家屯倉; 미야게의 말뜻은 御宅 즉 屋舍 倉庫에 대한 敬稱인데 日本書紀에서 말하는 屯倉은 국가제도로서의 미야게를 일컫는 것으로 大化 前代에는 朝廷 직할의 농업경영지 또는 直轄領이라고 할 수 있다. 官家는 屯倉과는 별개의 것으로 欽明紀 등에 보이는 用例는 모두 백제나 任那諸國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군사기지라기 보다는 일본 朝廷에
대한 貢納國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速狹騰尊이라는 말은 하야사아가리라고 읽을 수 있는데 天照大神을 천상으로 보내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곧 천황이 어찌 속협등이라 하는가라고 비난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速狹騰을 하야사아가리라고 읽을 수 있는데 사는 神稻를 뜻하고 아가리는 죽음을 뜻하므로 神稻가 枯死한다는 의미가 되어 천황의 급작스런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 宇流助富利智干; 신라왕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三國史記 권 45 列傳에 나오는 于老가 아닐까 한다. 이에 의하면 于老는 奈解尼師今(196-229)의 아들로 舒弗邯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宇流助富利智干이라 표기한 듯하다.
* 이는 三國史記 권 45 昔于老傳의 于老傳說에는 이와는 달리 우로의 妻가 왜의 使臣을 醉하게 하여 불태워 죽임
으로써 남편의 원수를 갚자 倭人들이 분노하여 金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 毛麻利叱智; 三國史記 권 45 朴堤上傳에 박제상을 혹은 毛末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므로 毛麻利叱智가 곧 박제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
* 微叱許智伐旱; 신공황후 攝政前紀 仲哀天皇 9년 10월조에는 微叱己知波珍干岐로 나오는데 奈勿王의 아들 未斯欣
(또는 美海, 未叱喜)을 가리킨다. 미사흔이 왜에 볼모로 간 시기는 三國史記에는 實聖王 원년(402)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에는 奈勿王 36년(390)으로 되어 있다.
* 鉏海의 水門; 막연히 신라 방면의 바다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대마도
北端의 鰐浦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 蹈鞴津; 오늘날의 부산 다대포가 아닐까 추측됨.
* 草羅城; 오늘날의 梁山지방인 듯.
* 三國史記 권 45 朴堤上傳에 의하면 堤上이 미사흔을 왜에서 탈출시킨 후 제상은 木島에 유배되었다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으며 미사흔은 신라로 돌아오자 6부의 환영을 받았다고 하였다. 實聖王代의 倭兵 침입기사는 4년 4월,
6년 3월에 보이며 7년 2월에도 왜의 침공에 대비한 기사, 14년 8월에 왜인과 風島에서 싸워 이긴 기사 등이 보인다.
* 卓淳國; 欽明天皇 5년 3월조에는 㖨淳이라고 나오는데 대개 오늘날의 大邱로 비정되어 왔으나 최근 경남 창원지방에 있었던 가야연맹의 한 小國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탁순국은 6세기 전반에 高靈의 대가야국을 주축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다가 534년에서 541년 사이에 신라에 복속되어 멸망하였으며 欽明紀에 나오는 阿利斯等
또는 己能末多干岐는 창원 탁순국의 마지막 지배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 莫古; 三國史記 권 24 近仇首王의 즉위 이전에 즉 近肖古王 24년(369) 고구려 故國川王이 백제를 침략하자 태자인 近仇首王이 나가 싸웠는데 근구수왕이 계속 진격하자 장군 莫古解가 道家의 말을 빌어 중지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 肖古王; 三國史記 권 23에 보이는 肖古王이 아니라 권 24에 보이는 13대 왕인 近肖古王(346-375)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沙比新羅; 신라의 歃良州가 있던 오늘날의 梁山지방을 가리키는 듯하다.
* 百濟記; 日本書紀에 인용되어 있는 百濟係 史書의 하나로 神功紀에서 雄略紀에 걸쳐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기의 내용은 주로 백제 近肖古王에서 蓋鹵王에 이르는 시기의 기사로서 백제 前期의 사실이 인용되어 있어서
百濟本紀보다는 앞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의 내용은 설화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며 細註에 뿐만 아니라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倭를 貴國으로 표현하는 등 백제계
史書로서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 木羅斤資; 木羅는 木劦이라고도 쓰는데 백제의 8姓大族의 하나이다. 日本書紀에 木劦不麻甲背, 木劦眯淳, 木劦今敦, 木劦施德文次 등이 보이며 木羅斤資의 아들로 木滿致가 보이는데 三國史記 권 25 蓋鹵王 21년(475)조에 “文周與木劦滿致 祖彌桀取(木劦 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이라는 기록에 나오는 木劦滿致와 木滿致는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 7國; 7국의 위치에 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나와 있는데 우선 比自㶱은 경남 창령지방을 가리키는 듯한데, 眞興王巡狩碑 가운데 하나인 昌寧碑(561년 건립)에 比子伐로 나오며 三國史記 권 34 地理志에 나오는 比自火郡(또는 比斯伐)이 곧 比自㶱과 같은 곳으로 믿어진다. 南加羅는 곧 낙동강 河口인 金海에 있던 本加耶를 지칭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본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정식으로 병합되었다. 南加羅의 명칭은 三國史記 권 41 金庾信傳에 인용되어 있는 庾信碑에 ‘則南加耶始祖首露’라는 기록이 보인다. 㖨國은 㖨己呑國과 같은 것으로 大邱 부근의 慶山지방으로 추정해 왔으나, 최근 이를 경남의 靈山, 密陽 일대의 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6세기 전반까지 가야연맹을 구성하고 있던 小國으로 529년을 전후한 2-3년 사이에 가장 먼저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安羅는 경남 咸安으로 보고 있는데 三國史記 권 34 지리지에 咸安郡을 阿尸良國(또는 阿那加耶)이라 하였고 三國遺事 권 1의 五伽耶조에는 阿羅(또는 耶)伽耶를 당시의 咸安이라고 하였다. 多羅는 경남 陜川지역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三國史記 권 34 지리지 江陽郡조에 본래 大良(또는 耶)州郡인데 경덕왕 때에 이름을 바꾸었으며 지금의 陜州라고 하였다. 卓淳은 대개 오늘날의 大邱 부근으로 보아 왔으나 이를 경남 창원지방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있다. 加羅는 경북 高靈지방에 있던 大加耶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7국 平定의 주체는 왜가 아니라 百濟軍의 가야지역에 대한 작전을 기록한 것으로 이 때 가야 여러 나라는 백제의 세력권 속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古奚津; 古奚는 三國志 東夷傳 馬韓조에 보이는 狗奚國으로서 오늘날의 전남 康津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狗奚國을 전남 海南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 忱彌多禮; 應神天皇 8년조의 百濟記에도 보이는데 隋書 등에 耽羅로 기록된 오늘날의 제주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앞의 古奚津의 중심되는 부락으로서 康津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 貴須; 近仇首王을 가리킨다.
* 4邑; 4邑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개 이를 전라도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布彌支와 辟中은 각각 오늘날의 羅州와
寶城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이는 백제 近肖古王(346-375)이 馬韓을 멸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관우는 比利 등 4읍을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의 5읍으로 읽어 이를 각각 扶安(保安)‧
金堤‧井邑‧扶安‧井邑(古阜)에 비정하였다.
* 意流村; 백제의 始祖 溫祚가 도읍을 정했던 尉禮城과 音이 비슷하므로 백제국의 聖地로서 王都 漢城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辟支山; 백제의 옛 지명으로 오늘날의 전북 김제로 비정된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보이는 馬韓의 한 국가인 辟卑離國, 南齊書 百濟傳에 보이는 辟中, 三國史記에 보이는 辟城‧碧骨과 같은 곳으로 짐작된다.
* 古沙山; 三國史記 권 36 지리지에 古阜郡을 본래 백제의 古眇(沙의 잘못인 듯)夫里郡이라 하였으므로 古沙山도
오늘날의 전북 古阜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다.
* 多沙城; 蟾津江 河口 부근의 오늘날의 河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三國史記 권 34 지리지에 河東郡을
본래 韓多沙郡이었다고 하였다.
* 七枝刀; 7개의 가지가 달린 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백제에서 바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제의 近肖古王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일본 奈良縣 天理市 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이른바 七枝(支)刀가 바로 이것이라고 믿어지는데 이 刀面의 양쪽에 모두 69자의 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칼은 泰和 4년에 백제왕이 倭의 侯王에게 下賜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백제와 倭國과의 친교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이 泰和 4년을 일본 학계에서는 東晉의 太和 4년(369)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 北魏 太和 4년(480)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 七子鏡; 보름달과 같이 둥근 형태의 거울인 듯한데 七曜紋이 있는 거울 또는 七鈴鏡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藝文類聚의 天部 梁 簡文帝의 望月의 詩에 “形同七子鏡 影類九秋霜”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奈良時代까지의 거울은 일반적으로 圓形이므로 七子鏡도 원형 거울로 추정된다.
* 谷那鐵山; 당시 백제 王都가 오늘날의 서울 부근이었고 나라 서쪽에 江이 있다고 한 기록의 강은 臨津江, 禮成江으로 추정되므로 谷那는 이 두 강의 상류에 있는 황해도 谷山郡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枕流王; 三國史記에 의하면 枕流王은 近仇首王의 元子로서 384-385년 2년간 在位하였고 元年에 불교를 수용하
였다.
* 가야사에서 가야의 국왕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혹 근초고왕대의
백제가 가야 서부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 加羅; 여기에 나오는 加羅가 구체적으로 김해의 본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고령의 대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또는 다른 가야 소국을 가리키는지는 잘 알 수 없다.
* 貴須王은 삼국사기의 近仇首王(375-384)을 일컫는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에 의하면 근구수왕은 近肖古王의 아들로서 王太子 시절부터 父王인 近肖古王의 정복사업을 크게 도왔으며 즉위 후에도 父王의 사업을 착실히 계승하여 3년(377) 10월에는 그 자신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한 일도 있었는데, 사기에는 10년(384) 4월에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近仇首王을 이어 즉위한 枕流王(384-385)은 近仇首王의 元子로서 母는 阿尒夫人이며 아버지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 三國史記 권 25에 辰斯王에 관하여 近仇首王의 仲子이며 枕流王의 아우인데 침류왕이 죽자 太子가 어렸으므로
叔父인 辰斯가 즉위했다고 하였다. 王子 阿花는 三國史記에 백제 제 17대 왕인 阿莘王(또는 阿芳)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즉 三國史記에 阿莘王(392-405)은 침류왕의 元子였는데 父王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叔父인 辰斯가 즉위했으나 辰斯王이 在位 8년만에 죽자 阿莘王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日本書紀에는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고 三國史記에는 왕위 계승이 순조로웠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이 다르며, 또 日本書紀의 年代는 120年을 내려야 三國史記의 辰斯王 卽位年代와 일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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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10 應神天皇 (譽田天皇)
(卽位前紀) 譽田天皇(應神天皇)은 足仲彦天皇(仲哀天皇)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氣長足姬尊(神功皇后)이다. 天皇은 (神功)皇后가 新羅를 정벌하던 해인 庚辰年(仲哀天皇 9년) 겨울 12월에 筑紫의 蚊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물을 깨달아 보는 것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하는 행동은 절도가 있었고 성스러운 모습은 남다름이 있었다. 皇太后가 섭정한 지 3년 되던 해에 皇太子가 되었다[그 때 나이가 3세였다]. 처음 천황이 뱃속에 있을 때, 하늘과 땅의 신이 三韓을 주었다. 태어났을 때 굳은살이 팔뚝 위에 나 있어서 마치 그 모양이 화살통(병:ほむた)과 같았는데, 이것은 황태후가 男裝을 하고 화살통을 매고 있던 모양과 비슷하였다[肖는 우리말로 阿叡라 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譽田(ホムタ)天皇이라 하였다[옛날 사람들은 병(화살통)을 「褒武多」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 天皇이 太子가 되었을 때 越國에 가서 角鹿의 笥飯大神에게 제사하였는데, 그 때 大神과 太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大神을 去來紗別神이라 부르고, 太子를 譽田別尊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大神의 본래 이름은 譽田別神이고, 태자의 원래 이름은 去來紗別尊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다른 데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잘 알 수 없다].
(3년) 이 해 百濟의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日本)의 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木菟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7년 가을 9월 高麗人・百濟人・任那人・新羅人이 함께 來朝하였다. 그 때 武內宿禰에게 명하여 여러 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韓人池라 불렀다.
8년 봄 3월 百濟人이 來朝하였다[百濟記에는, “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日本이) 우리의 枕彌多禮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直支를 天朝(일본조정)에 보내어 先王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9년 여름 4월 武內宿禰를 筑紫에 보내어 백성을 감찰하게 하였다. 이 때 武內宿禰의 동생 甘美內宿禰는 형을 폐하고자 천황에게, “武內宿禰는 항상 천하를 엿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筑紫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홀로 筑紫를 나누고 三韓을 불러들여 나에게 조회하도록 한 다음 장차 천하를 지배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천황은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武內宿禰를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武內宿禰는 탄식하며·····.
14년 봄 2월 百濟王이 縫衣工女를 바쳤다. 眞毛津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오늘날 來目衣縫의 始祖이다.
(14년) 이 해 弓月君이 百濟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臣은 우리나라 120縣의 人夫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新羅人이 방해하여 모두 加羅國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弓月의 人夫를 加羅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15년 가을 8월 壬戌 초하루 丁卯 百濟王이 阿直伎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輕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阿直伎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廐坂이라고 한다. 阿直伎는 또 經典을 잘 읽었으므로 太子인 菟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天皇은 阿直伎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王仁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上毛野君의 조상인 荒田別과 巫別을 百濟에 보내어 王仁을 불렀다. 阿直伎는 阿直岐史의 始祖이다.
16년 봄 2월 王仁이 왔다. 太子 菟道稚郞子는 스승으로 모시고 王仁에게서 여러 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王仁이라는 사람은 書首 등의 始祖이다.
(16년) 이 해 百濟의 阿花王이 죽었다. 天皇은 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東韓은 甘羅城・高難城・爾林城이다].
(16년) 8월 平群木菟宿禰・的戶田宿禰를 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詔를 내려, “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新羅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木菟宿禰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新羅의 국경에 다다르자, 新羅王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自服하였다. 그래서 弓月의 人夫를 거느리고 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25년 百濟의 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木滿致가 國政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天皇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百濟記에는, “木滿致는 木羅斤資가 新羅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功으로 任那에서 專橫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貴國(日本)에 갔다가 돌아와 天朝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天朝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28년 가을 9월 高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리고 表를 올렸는데, 그 表에 “高麗王은 日本國에 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太子인 菟道稚郞子는 그 表를 읽고 노하여 高麗의 사자를 꾸짖었다. 그리고 그 表文이 무례하다고 하여 表를 파기하였다.
31년 가을 8월 여러 신하들에게 詔를 내려, “官船 가운데 枯野라고 하는 것은 伊豆國에서 바친 배이다. 그런데 이 배는 썩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官用으로 쓰인 功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여야 그 배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詔를 받고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그 배의 材木을 땔감으로 하여 소금을 굽게 하였다. 그래서 500광주리(籠)의 소금을 얻어 여러 나라에 두루 나누어 주고는 배를 만들게 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는 한꺼번에 500척의 배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을 모두 武庫의 水門에 모아 놓았다. 이 때 新羅의 조공 사신이 모두 武庫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新羅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人을 책망하였다. 新羅王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匠人을 바쳤다. 이들이 猪名部 등의 始祖이다·····.
37년 봄 2월 戊午 초하루 阿知使主・都加使主를 吳나라에 보내어 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阿知使主 등은 高麗國을 지나서 吳나라로 가고자 하여, 먼저 高麗에 도착하였으나 (吳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高麗에 구하니, 高麗王은 久禮波와 久禮志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吳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吳의 왕은 工女 兄媛・弟媛・吳織・穴織 등 4명의 여자를 주었다.
39년 봄 2월 百濟의 直支王이 누이 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新齊都媛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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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是歲 : 이 해는 壬辰年이다. 그러나 百濟의 阿花(莘)王이 즉위한 해는 392년 壬辰年이므로, 書紀 紀年을 2巡을 수정
하면 三國史記의 기사와 일치하게 된다.
* 百濟의 辰斯王이····예의를 잃었으므로 : ‘貴國에 예의를 잃었다’는 표현은 應神紀 8년조 注文을 통하여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百濟가 日本의 半島政策에 따르지 않을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이 기사의 경우는 百濟의 對高句麗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당시 辰斯王代은 高句麗의 南下政策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죽던 해인 辰斯王 8년 7월에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高句麗王德談(廣開土王)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德談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이라 되어 있는 바와 같이, 高句麗 廣開土王에게 漢水 以北의 諸城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 이로 말미암아····사죄하였다 : 辰斯王의 죽음에 대하여 三國史記 百濟本紀 辰斯王 8년조에는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이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의 표현형식으로 미루어 辰斯王이 불시에 고의적으로 죽임을 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書紀에 보이는 이 기록은 그 진상을 전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辰斯王의 즉위에 대하여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太子(阿花)少 故叔父辰斯卽位”라고 되어 있고, 書紀 神功皇后條에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이라고 되어 있어서, 즉위에 이르기까지 조카 阿花와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辰斯王의 죽음은 이와 같은 왕위계승상의 문제 및 당시 百濟의 對高句麗정책과 그에 따른 日本의 대응 등과 크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 阿花王에 대하여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阿莘王[或云 阿芳] 枕流王之元子·····王薨時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라고 되어 있고, 三國遺事 王曆에는, “第十七阿莘王 一作河芳 辰斯子 壬辰立 治十五年”이라고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阿花와 阿莘・阿芳・河芳을 비교해보면, 花와 芳은 뜻이 통하고, 音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莘은 花와 음이나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莘은 華의 誤字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阿花 또는 阿華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阿花王의 즉위에 이르는 사정은 辰斯王의 즉위 및 죽음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한 바 있다. 阿花王의 재위 15년 동안에는 중국에 조공사신을 보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同王代에 高句麗와 해마다 전쟁이 계속되었고, 倭와의 교섭도 여러모로 행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 韓人池 : 古事記 應神段에, “亦新羅人參渡來 是以建內宿禰命引率 爲役之堤池 而作百濟池”라는 비슷한 기사가 있다. 韓人池와 百濟池는 모두 歸化人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라는 점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百濟池는 奈良縣 北葛城郡
百濟村의 땅에 비정되고, 韓人池는 奈良縣 磯城郡 川東村의 唐古池에 비정되기도 한다. 이하 應神・仁德 兩紀에는 이와 같은 治水土木・土地開發 등 농업관계 기사가 많이 보이는데, 일본에 있어서 이와 같은 治水土木의 성행은 半島에서 歸化人이 많이 渡來해 오던 시기와 맞물려, 이들이 새로운 농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歸化人에 의한 農耕의 발전은 일본 大和朝廷의 경제적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 阿花王이····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無禮於貴國)’고 한 것은 앞서 살펴본 辰斯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高句麗에 대한 굴종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高句麗의 공격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辰斯王을 제거하고 즉위한 阿花王은 당연히 高句麗에 대하여 강경책을 취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2년 가을 8월 기사에,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라 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즉위 직후부터 阿花王은 高句麗에 빼앗긴 漢水 以北의 諸城을 되찾기 위하여 北進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同王 3년과 4년에 계속적으로 高句麗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廣開土王碑文의 丙申년(396) 기사에 의하면, 阿花王 5년 고구려의 廣開土王은 대규모로 南進하여 百濟의 王都를 공략하고 百濟王을 臣伏시켰다.‘無禮於貴國’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과 관련이 깊다. 바로 이 때문에 百濟는 王子 直支를 日本에 보내게 되었다.
*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 : 4개를 각각 별개의 지역으로 보는 설이 있고, ‘峴南・支侵・谷那 등 東韓의 땅’이라고 하여, ‘東韓의 땅’이 위의 세곳을 총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후자는 應神天皇 16년 是歲條 分注에, 「東韓者 甘羅城・高難城・爾林城是也」라고 되어 있는 것을 취한 해석이다. 즉, 峴南을 甘羅에, 支侵을 爾林에 그리고 谷那를 高難에 비정한 것이다. 그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지 잘 알 수 없지만, 대체로 峴南은 全北방면이 아닐까 추정되며, 支侵은 忠淸南道 洪城・大興 부근, 谷那는 全羅南道 谷城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直支 : 三國史記에는 腆支, 宋書에는 映이라고 쓰여 있다. 直支를 日本에 보낸 사실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6년 5월조에도,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이라 기록되어 있어, 書紀의 기사와 일치한다. 그는 阿花王의 사후 百濟에 돌아오 왕위를 계승하였다(應神天皇 16년 是歲條 참조).
* 弓月君 : 新撰姓氏錄에는 “太秦公宿禰 秦始皇帝十三世孫 孝武王之後也 男功滿王足仲彦天皇八年來朝 男融通王[一云 弓月王] 譽田天皇 十四年來歸 率百二十七縣百姓歸化 獻金銀玉帛等物····”이라 하여, 弓月君을 秦始皇帝의 후예라고 기록해 놓았다.
* 阿直伎 : 古事記에서는 阿知吉師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吉師는 族長을 나타내는 敬稱이다.
* 輕 : 奈良縣 橿原市 大輕町 부근.
* 王仁 : 古事記에서는 和邇吉師라고 하였다. 書紀에는 그가 阿花王 말년경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하여, 古事記에는 百濟 近肖古王 때의 사람으로 되어 있어 전후 30~40년간의 차이가 있다. 續日本紀 延曆 14년 4월 8일조에는, “漢高帝之後曰鸞 鸞之後王狗 轉云百濟 百濟久素王(貴首王)時 聖朝遣使徵召文人 久素王 卽以狗孫王仁貢獻 是文武生等之祖也‘라고 하여, 王仁을 중국계 王氏의 인물로 기술하였다. 王仁은 阿直伎와 더불어 百濟文化를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일본의 고대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우리나라 문헌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王仁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다. 王仁의 무덤은 日本
大阪과 京都의 중간지점인 枚方에 있다.
* 書首 : 文首라고도 하며, 東文氏에 대하여 西文氏라고 하기도 한다. 文筆 전문의 姓氏로서, 河內에 거주하는 史姓諸氏 가운데 중심적 지위를 점하였다. 天武 12년 9월에 連, 同王 14년 6월에 忌寸, 延曆 10년 4월에 일부가 宿禰라고 改姓하였다.
* 直支王 : 阿花王의 長子로서 阿花王 8년에 인질로 日本에 와 있었다.
* 甘羅城 : 全羅北道 咸悅에 해당한다는 설이 있다.
* 高難城 : 應神天皇 8년 3월조 分注에 보이는 谷那(全羅南道 谷城)로 비정하는 설이 있지만 잘 알 수 없다.
* 爾林城 : 忠淸南道 洪城・大興(옛날 명칭은 任城郡)에 비정하는 견해와 全羅北道 金堤郡 利城(옛날 명칭은 乃利阿)에 해당한다고 보는 두가지 설이 있다.
* 久爾辛 : 三國史記 百濟本紀 久爾辛王 元年條에, ‘腆支(直支)王長子 腆支王薨 卽位’라 되어 있고, 同王 8년조에, ‘冬十二月王薨’이라 되어 있다.
* 木滿致 : 三國史記 百濟本紀 蓋鹵王 21년조에 보이는 木劦滿致이다. 劦은 리의 잘못인 듯하다. 木리는 百濟의 複姓으로 木・木羅와 같다.
* 木羅斤資 : 百濟 近肖古王, 近仇首王 때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神功皇后攝政 49년 3월조에 보인다. 比자伐・南加羅・啄國・安羅・多羅・卓淳・加羅 등의 가야지역과 新羅를 공격 또는 회유하여 선린관계를 맺는 한편, 百濟의
동남부 강역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관한 日本書紀의 전승은 百濟 近肖古王代의 영토확장 과정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 高麗王이····조공하였다 : 이 기사는 사실인가 의심스럽다. 이 시기의 高句麗는 廣開土王・長壽王의 치세 때로서 日本과는 항상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일본에 朝貢사신이나 表를 보냈다고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