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역사스폐셜 27회 '동방의 피라미드-장군총의 수수께끼' (1999.05.08.)
27회 : 고구려기획 제2편 동방의 피라미드-장군총의 수수께끼
고구려기획 제2편 동방의 피라미드-장군총의 수수께끼
방송일: 19990508 조회수 : 4596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고구려기획 제 2편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프롤로그
0200 문으로 (자막과 동시에 멘트시작)
1995년 여름. 마침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0207 벽 훑고 (벽잠시 보다가)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0212 관대 남은 것은 관을 놓았던 흔적 뿐.
(잠시 포즈)
0223 cg 묘실관대 돌고 무덤은 적어도 천 오백년 전의 것.
그리고 고구려의 것. 과연 이곳에 잠든 이는 누구인가.
0234
타이틀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ST 1
mc 1s 고구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두가지, 바로 광개토태왕비와 장군총입니다.
역사스페셜의 고구려 기획, 지난 시간에는 광개토태왕비문을 통해, 광개토대왕시대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이 장군총을 통해, 고구려의 힘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장군총 멀리. mc.
지금 제 뒤로 보이는 것이 집안에 있는 장군총을 실물크기로 복원한 것입니다. 가까이가서 한번 보실까요.
장군총 당겨오고, mc. 줄어들고 장군총과 제가 한 화면에 들어가면 이렇게
보입니다. (하면 줄어들고)
높이가 약 12미터. 사람키로는 약 일곱배, 건물로 치면 5층높이나 됩니다.
mc bs 왜 중국의 학자들이 이 장군총을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천 오백년 전, 아시아의 제국이었던 고구려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장군총 줄어들면서, 지도의 일부로
사실, 그동안 장군총에 대한 학계의 관심도 컸지만, 지금은 고구려의 옛 영토가 남의 나라 땅이다 보니,
잊혀져 온데다가, 최근에는 한국인들이 고구려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을 꺼려한 중국정부가 현지촬영을 금지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있기 전에 장군총을 답사한 한 학자가 촬영해놓은 테잎을, 이번에 구하게 됐는데요,
그 속에서, 남의 땅이 되어버린 고구려의 옛 도읍지에서 천 오백년이란 세월을 꿋꿋하게 이겨온,
장군총의 전설적인 위용을, 비로소 볼 수가 있었습니다.
{{}}
VCR 1 (장군총을 찾아서)
0435 압록강 부감 오늘날, 중국과 한반도의 서부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791킬로미터의 압록강.
그러나 천 오백년 전 압록강은 국경선이 아니었다.
0448 줌인+북한해변 압록강을 타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북쪽으로는 중국이, 남쪽으로는 북한땅이 바로 몇미터
앞에 보인다.
0459 할머니 지금은 그 어느 쪽도 마음대로 드나 들 수 없는 땅이 되었으나,
0502 중국해안 줌인 서기 3년 고구려인들은 이곳 압록 강변에 도읍을 정했다.
0511 집안시내tk 그것은 바로 국내성,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다.
(두번째 커트 보다가)
이곳에는 아직도 그 시대 강성했던 제국 고구려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0526 교외tk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이목을 모으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 있다.
0534 부감 무덤떼 (잠시보다가)그것은, 집안시 외곽, 즉 천 오백년 전 국내성의 어디에서든 맞닦뜨리게 되는,
거대한 무덤떼들이다.
그 수가 무려 만 삼천 여기.
세계최대규모의 고분군이다.
0553 마차지나는 산으로 착각할 만큼 큰 무덤이 천 여기. 작다고 해도 집한 채 크기다.
0601 밑단 훑고 이 무덤떼는 대부분, 천 여년 전,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고구려시대에 만든 것들로,
0607 묘 두 개 팬 초기고구려의 강돌을 덮어 만든 무덤에서부터, 흙을 쌓아만든 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0618 장군총으로 tk 그런데, 만 이천 여기에 이르는 고구려무덤떼 중에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이
있다.
0632 덤불헤치고 장군총 (덤불 지나면)
마치 천 오백년의 세월을 비껴온 것 처럼,
0639 fs 완벽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돌무덤.
0646 옆에서 앞으로 pan 그것이 바로 장군총이다. 마치 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의 그 당당한 위용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0656 한헌구int
0712 화가 int
0716 모퉁이 돌아 사람들올라 밑변의 길이는 약 32미터, 높이는 12미터가 조금 넘는다.(잠시 보고)
돌의 나이와 축조방식으로 보아 무덤은 약 5세기의 것.
0727 돌 하나 (돌 그림에 걸쳐서, 포즈 주고)
0731 위에서 아래보며 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층과 층 사이를 규칙적으로 들여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0741 묘실에서 줌아웃 장군총은 이렇듯, 그 완벽한 형태와 빼어난 조형미, 그리고 탁월한 건축기법으로,
광개토태왕비와 함께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0755 이건하 교수
탁 보는 순간 주눅이 들리더라구요. 어떻게 저 큰 바위들을 세련되면서도, 웅장하게 구축할 수 있었는가,
여태까지 사람들이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겠더라구요.
그리고 천 오백년 전에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저렇게 구축할 수 있었는지 그 기술에 대해서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0821 장군총 부감 (흘리고)
ST 2
측면 장군총모습 배경으로 mc 기단부근처에서 돌 만지면서
저는 지는 장군총의 기단부와 일층 사이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돌은 모두 화강암으로, 전체 무게가 적어도
6천톤이상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철근을 박아 넣었다거나, 따로 기둥을 세운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돌로 쌓아올린 무덤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무게의 돌무덤이 어떻게 천 오백년이란 세월을 버텨왔을까요?
MC, 밑단으로 내려오면 처음에는 잔디로 덮혀있고,
그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의 하나가 바로 이 바닥에 숨어있습니다.
발 밑으로 강돌들 발굴하는 과정에서 장군총의 밑부분은 물론, 이렇게 주변까지 강돌을 사면에 둘러놓은 것이
스윽, 땅에서 나오듯, 드러나고, 발견됐습니다. 큰 것은 직경 일미터도 넘습니다.
이런 큰 돌을 규칙적으로 놓고, 작은 강돌로 다시 촘촘하게 사이를 메웠는데요.
돌위의 mc fs 건축학자에 의하면 이것이 무거운 윗돌의 압력으로, 무덤의 밑부분이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mc, bs 천 오백년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것 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을까 싶은데, 이런 것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VCR 2 (그랭이공법과 들여쌓기)
1009 고구려연구회로 장군총에 숨어있는 고구려인만의 독특한 건축기법.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10년간 장군총을 연구해 온 한 연구회를 찾았다.
1022 슬라이드 앞의 2S FS+화면 그 곳에서 장군총의 기록필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1030 서교수 현장음
(고구려사람들은 돌을 다루는 마술사다 하는 표현들을 중국 현지사람들이 많이 써요. 가서보면 실감할 수
있는데, 마치 마음대로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을 현장에 가면 느낄 수가 있어요)
1046 슬라이드 두장 넘기고 장군총을 천 오백년이란 세월을 버티게 한 돌의 마술사 고구려인들.
그들의 빼어난 솜씨는 먼저, 돌과 돌사이의 좀은 틈에서 발견됐다.
1058 밀려난 벽의 틈새 3컷 그것은 돌과 돌이 맞물린 부분에 만들어진 일종의 홈같은 것이었다.
그 홈은 모든 돌의 가장자리에서 예외없이 발견됐다. 폭이 약 9센티.
파인 홈의 깊이는 약 5센티. 안쪽은 높게 바깥쪽은 낮게 만든, 매우 정교한 홈이었다.
1124 들여쌓기 cg 즉, 돌 가장자리에 홈을 파서 밑돌을 놓은 다음, 그 홈에 맞추어 위돌을 정확하게 맞물린
것이다.
1133 슬라이드 측면사진으로 줌인 이것은 건축기법상 들여쌓기다.
(조금씩 들여쌓은 것을 볼 수 있다 까지 듣고)
그런데 이 들여쌓기는 원래 무덤을 쌓던 방식이 아니다.
1145 평원 DR.SHOT 중국대륙 동부와 서부의 경계인 요동 북부.
1152 평야 -Z.I-어렴풋이 보이는 성벽 중국은 주변국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몇백 년도 못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듭해야 했다.
1201 DRAG.SHOT성벽위로 그런데 바로 그 땅에서 천 년 넘는 세월을 견뎌온 것이 있다.
(이하 흘리고)
*1209 성벽커트들-줌인 치까지 바로, 고구려의 성이다.
(잠시 포즈 두고)
5세기, 고구려가 중국쪽 세력을 막기 위해 1차 방어선으로 쌓은 이 백암성은 구려가 망한 후, 지금까지 버려져
있는 상태. 그러나, 지금도, 성벽과 주요 방어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1236 성벽으로 가는 사람들 뒷모습 이처럼 중국을 능가했던 고구려의 탁월한 축성술, 그 독자적인 기법은 무엇
이었을까.
1241 손으로 들여쌓기 따라가주고 (손 보다가) 그런데, 그것은 성벽의 기단부에서 발견됐다.
1251 성벽 측면컷T.D. 그것은 성을 쌓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방식, 바로 들여쌓기였다.
1259 백암성VS장군총 장군총은 바로,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술인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1314 이건하교수에게로 그렇다면, 실제로 들여쌓기의 견고함은, 어느 정도나 될까.
1320 이건하교수현장음
(밑에서부터.....이런 식으로 들여쌓기 되어 있다) (현장음 처음만 조금 듣고)
측정 결과, 장군총은 정확하게 45도 각도로 들여쌓기를 했고, 위로 갈수록 층과 층 사이를 좁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1337 모형실험FS 그 결과를 토대로, 모형을 만들어 충격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1342 성쌓기 결과비교를 위해, 한쪽에 수직쌓기 모형도 함께 만들었다.
1349 수직쌓기 pan 들여쌓기 벽돌로 만든 모형속에 모래를 채우고, 위에서 충격을 주기로 했다.
1358 두사람 뛰면-무너지고 (무너지면)수직쌓기로 세운 벽은 두사람이 두번 발을 구르자,
이내 무너져내렸다.
1406 들여쌓기모형 그런데.
1409 두사람 세 번뛰고 들여쌓기로 만든 벽은 몇 번을 굴러도,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1414 네사람 함께 뛰고 네 사람이 올라갔을 때도 결과는 마찬가지.
1418 모형에서 pan 뒷면 결국, 버팀대가 벌어지도록, 들여쌓기로 세운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1426 무너진 수직쌓기 -pan 들여쌓기 수치로 계산하면, 들여쌓기는 수직쌓기에 비해 약 ___배나 견고한 것
으로 나타났다.
1433 이건하교수
(건물이 무너지는 중요원인이 안에서 바깥으로 누르는 측압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렇게 45도 각도로 들여쌓기를 하면 그 측압을 없앨 수가 있는 것이죠)
1446 장군총 모퉁이 t.u. 장군총이 천 오백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견고한 축성방식인 들여쌓기에 있었던 것이다.
1503 다시 슬 라이드 보는 장면 (잠시 보다가) 그런데, 들여쌓기 이외에도 눈길을 끄는 것이 또 있었다.
1508 슬라이드 그랭이
+서교수 현장음
(돌을 놓고, 그 위에 돌을 깍아서 맞추는 그런 것을 건축하는 사람들은 그랭이라고 그렇게 얘길합니다)
(얘기 듣자마자)
그것은 그랭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랭이c.u. +선 그어주고 (설명듣고나서)
1524 차따라 pan 하면 불국사 장군총에서 발견된 그랭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1532 불국사fs 한국 사찰건축의 백미로 손꼽히는 고찰 불국사. 통일신라 최고의 건축술이 결집된 건축물이다.
1541 발-덤불제치면 (걸어갈 때)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그랭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보면, 자연석인데 그 위에 돌을 깍아서 얹었죠 듣고)
1559 z.i. 그랭이 pan 장군총보다 약 4세기 후에 세워진 불국사 기단부에 똑 같은 모양의 그랭이가 있었다.
1613 t.u. 전각보이고 장구한 세월, 불당과 전각을 떠받쳐 갈 대들보와 건물의 초석과 기단부를 그랭이로
쌓아올린 것이다.
1622 나무 t.u. 목공들 그 뿐만이 아니다. 지난 95년 조선총독부가 사라진 자리에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홍예문이 복원됐다.
1633 문기현씨
(이걸 다 그랭이 해서 세운거다. 이렇게 기둥과 초석을 그랭이질을 해서 세우면 틈이 없죠)
(z.i. 3초) 가장 견고해야 할 대궐의 기둥까지도 어김없이 그랭이로 세웠다는 것이다.
1644 초석재고, 줄긋고 그 위력을 알아보기 위해, 그랭이 작업과정을 살펴보았다.
먼저 초석의 표면에 십자로 줄을 그어 중심을 잡는다.
1652 기둥세우고 그리고 기둥을 가운데 맞춰세운다.
1704 그랭이칼 그랭이 질을 할 때는 두 개의 대나무조각으로 만든 그랭이 칼을 사용한다.
1712 먹물질해서 긋기 시작 그랭이칼에 먹물을 묻힌 후, 마치 젓가락을 사용하듯, 벌려서, 돌 표면을 따라
그리면, 기둥에 같은 모양의 선이 생긴다. 그 선을 따라 기둥밑둥지를 깍은 다움 돌위에 빈틈없이 끼워맞
춘다.
1739 CG-그랭이로 끼워맞추기 장군총도, 같은 방식으로 윗돌과 아랫돌을 단단하게 끼워맞춘 것이다.
1744 문기현씨
(천 오백년 전에 돌을 그랭이질을 해가지고 짜서 맞추었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1751
ST 3
CG 장군총바닥에서 강돌. 그랭이공법으로 쌓은 부분 근처에 MC 서있고,
돌과 돌이 맞물린 부분에 손 대고 그랭이공법과 들여쌓기. 장군총이 천 오백년의 세월동안 완벽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런 고구려인들의 탁월한 건축술에 있었던 것입니다.
밑단에 돌 짜집기 한 부분 보여주며
돌빠져나와 구멍난 부분 보여주고 다시 들어감
또, 이런 곳을 자세히 보면, 이 돌과 이돌을 맞붙이고 남은 틈새는 이렇게 작은 돌을 꼭 맞도록 짜집기를 한 것
같은데요. 이 작은 틈새 하나도 그냥 두지 않을 만큼, 고구려인들은 철저했습니다.
돌 하나 품으로 크기 재고
그런데, 이 돌들, 정말 크군요. 길이가 얼마나 될까요. (숫자세며) 하나, 둘, 셋, 넷 하고 약 __센티.
제 품의 길이가 약 170미터쯤 되니까, 오미터가 넘는 셈인데요, 이런 엄청난 크기의 돌을 무려 천 백개나
쌓아올렸다고 합니다.
mc bs 그 시대에 이 많은 돌은 어디서 구했을까요. 그리고 기중기나 파워크레인도 없었던 그 시대에 어떻게
이렇게 높이 쌓았을까요.
VCR 3 (장군총을 쌓아라)
1925 산길DR.SHOT +선지도 (보다가 지도뜨면)
장군총에서 서북쪽으로 약 16킬로 미터 지점.
1937 산능선 pan 그곳에 산능선이 암벽에서 암벽으로 이어지는 해발 ____미터 높이의 우산이 있다.
(잠시 포즈)
바로 이곳에서 흥미로운 것이 발견됐다.
1951 계단 dolly+암벽사이로 t.u. 바윗돌 흙보다는 돌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산길은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암벽 사이로 이어졌다.
(거의 화면 바뀌기 전에)
그런데, 바로 그 길의 끝에 2004 고구려채석장 길림성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방기동이 발견해낸 '고구려
채석장'이 있었다.
2014 돌벽t.s. (자막:바위를 쪼개낸 흔적) 지금도, 곳곳에 쪼갰던 남아 있는데, (이어서)
2019 채석장3컷 천 오백년 전, 그 단단한 화강암을 어떻게 떼어냈을까. (이하 보고)
2032 현대식 자동쇄기 설명 요즘 채석장에서 사용되는 것은 벌림장치가 달려있는 발달된 형태의 쇄기.
2041 망치질 2컷-돌에 금가고 이 쇄기를 전기드라이버를 이용해 돌 표면에 나란히 박아넣은 다음,
망치질을 해서 잘라낸다.
2051 쐐기 빼고-돌 벌어지고 그런데, 석공들의 말에 따르면, 돌을 쪼개는 방식은 그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2059 권오달int
(예나 지금이나, 석공들이 지혜가 있어서 돌을 보면 그 돌이 얼마나 잘 쪼개질 것인지 또 봐서, 결을 보고
결이 무르고 돌이 연하면 작은 쐐기를 쓰고, 돌이 강하고 결이 좋을 때는 큰 쐐기를 쓰는데, 고구려시대처럼
손으로 쐐기를 박을 때는 이것이 좀더 넓지 않았겠느냐..)
2128 쐐기 즉, 다른 점이 있었다면, 손으로 돌에 쐐기를 박아넣었을 그당시에는 쐐기의 크기가 조금 더 컷을
것이 라는 것.
2136 기중기 돌 나르고 그런데, 무게가 평균 15톤이나 되는 무거운 돌을 어떻게 날랐을까.
2143 내려가는 계단길 현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겨울에 비탈길이 얼면 돌을 아래로 굴렸을 것이라고 한다.
2153 권오달int
(가능하죠. 겨울에 눈이 와서 어름이 얼면, 여기다 돌멩이를 놓고, 밑에다가 돌을 바로 굴리면 안내려 오겠지만,
밑에다가, 나무를 넣고, 지금의 스케이트 처럼 밀어만 주면, 경사도가 있기 때문에 내려옵니다)
그곳은 겨울이 길고, 얼음이 두껍게 얼기 때문에 작은 힘으로 큰 돌을 옮길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2228 길 줌인 장군총 문제는 또 있다. 우산에서 장군총까지는 약 16킬로 미터 거리.
어떤 방법으로 돌을 운반했을까.
2241 이건하교수 Int
(기중기가 발명되기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큰 돌을 옮기는 방법이란, 유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16세기 일본에서 성을 쌓는 모습 이때까지도 큰 돌을 통나무를 깔고 나르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2304 그림+dis+재연화면 이런 방식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들은 고인돌을 쌓아야 했던 청동기인들.
5세기 고구려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돌을 옮겼을 것으로 추정 해볼 수 있다.
2324 3dcg-장군총 (잠시 보다가)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 돌 하나의 높이는 약 50센티. 넉단만 쌓아도 사람의 키를 넘는다. 장군총의
높이는 사람 키의 약 7배.
2338 양구선사박물관 fs 어떻게 그렇게 높이 쌓아올렸을까.
2345 전시대fs+청동기시대 안내판 우리나라 동해안에 나타난 선사시대의 흔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구 선사박물관.
2353 고인돌제작과정 이곳에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2357 판석 올리는 모형 그것은, 바로 청동기 인들이 고인돌의 버팀돌위에 판석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2406 키보드 치고
2408 이건하교수z.i.모니터
(옛날의 성쌓는 방법. 먼저 기단을 쌓은 다음에 둔덕을 만들어서, 석재를 날랐겠죠. 2단, 3단쌓으며, 둔덕을
만들어 쌓았을 것)
2434 장군총쌓기 cg 즉, 장군총도 고인돌의 판석을 운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기단부를 쌓은 다음,
흙으로 주변에 길을 만들고, 그 위로 돌을 날라오는 방식으로 스물두단을 쌓아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2448 흙 벗기고 그리고 다 쌓은 후에 주변의 흙을 제거했을 것이다.
2500 건축비용산출 자막뜨고
화강암 19000톤(5톤트럭 3800대분)
흙.12,500톤(5톤트럭 2500대분)
총동원인력 : 7만명 이런 것을 살펴볼 때.
장군총의 축조에는 기술뿐만이 아니라, 만 구천톤의 화강암과, 약 7만명가량의 인력등 엄청난 예산이 동원
됐음을 알 수 있다.
2512 이건하교수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단수히 기술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경제력과 함께 강력한 왕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죠. 이런 것을 5세기에 고구려가 지었
다고 하는 것은, 고구려가 그 당시 얼마나 강력한 국가였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cg-장군총
ST 4
MC, 장군총 꼭대기에 있는 FS-Z.I.
돌무덤 하나 쌓는 과정만 봐도, 그 시대 고구려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다 쌓은 장군총 꼭대기에
있습니다.
MC. 지붕 위에 있는 평면도 느낌
현재, 장군총의 정상은 이렇게 넓직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요.
줌아웃 되는 듯 하면서 앵글,
mc옆으로 다가가면서, 전체를 보여주고
(옆쪽 보면서) 여기, 좀 이상한 것이 눈에 띄는군요.
구엉옆으로 오는 mc.
가장자리로 이동하면서 찾는 듯이 구멍같은데요.
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내재어본다
한번 재볼까요. 직경이 약 9센티. 구멍과 구멍사이의 간격은 약 50미터. 이런 가장자리를 쭉 둘러가며 이런
구멍이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 분명 뭐가 있었다는 얘긴데.
(밑을 내려다보며) 이상한 것은 또 있습니다.
호석화면insert 잘 다듬어 만든 무덤에 울퉁불퉁한 커다란 자연석을 기대놨군요.
커트바뀌면, 정면의 오른쪽 계단 보이고,
MC. 계단내려오면, 앞에 놓인 커다란 호석.
장군총 오른쪽으로 돌면, 정면보이는데. 세 개의 호석 놓인 상태. MC. 호석으로 다가가며
엄청난 크기의 바위군요. 돌 하나의 크기가 제 키의 두배쯤은 되는 것 같은데..
돌 살펴보다가 참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장군총에서도 보았듯이 고구려인들의 석재기술은 중국 문헌에서도
여러번 언급될 만큼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천 백개나 되는 돌을 정교하게 깍아서 무덤을 만든 고구려인
들이 왜 이 바위는 그냥 갖다 세워놓았을까요. 꼭대기의 구멍과, 이 거대한 바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VCR 4 (전각과 호석의 수수께끼)
2711 발견당시 사진 z.o. 장군총이 처음으로 중국학계에 보된 것은 1905년.
2722 사진, 정상부분 pan 무덤은, 천 여년간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목이 무성했다.
2729 담벼락의 기와편들 그런데 당시, 정상부분에서, 상당수의 기와편이 발견됐다.
2736 기와편fs+ts 그중에는 마치 주름을 잡은 듯, 가장자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누른 흔적이 있 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막기와가 상당수였다.
2751 연화무늬 수막새fs z.i. 정교한 무늬의 연화무늬의 수막새도 발견됐다. (잠시보고)
그런데, 이런 유물을 통해,
한가지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다. 즉, 장군총의 정상에는 어떤 형태로든, 건물이 있었을 것이며,
2807 돌아가는 수막새 z.i. 그렇다면, 무덤정상의 구멍은, 바로 그 건물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2816 이건하교수
(이구멍은 기둥을 세우기 위한 구멍으로는 너무 작습니다. 아마도 철재 또는 목재로 만들어진 난간 정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2834 cg. 난간생기고 구멍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건물 주변에 둘렀던 울타리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들어섰을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2850 이건하교수 책상앞에서 우선 건물의 크기를 추측해보았다.
2853 각도기로 높이 그리고
(건축물은 이 높이내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높이는 약 4.5미터..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건물은 요 사방 13미터 안에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건물은 대략 한면의 길이가 약 7미터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2930 설계도 위에 자막 뜨면 높이 약 4.5미터. 가로세로의 길이는 약 7미터의 전각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 지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2941 고구려고분벽화 넘기면 집그림들 고분벽화속에서 그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각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2951 모사도에서 현장음
(모임지붕, 팔각지붕,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장군총의 건물은 좀 달랐을 것)
3000 벽화모사도 paging 그런데 요동성총 벽화에서 비슷한 건물을 발견했다.
3007 요동성총 3층 전각 줌인 그것은 바로 3층전각이었다.
3013 이건하2s +현장음
(이것이 유일하게 나타나는 중층건물인데 꼭대기 지붕은 3육면 모임지붕이네요. 장군총의 전각도 대략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3026 CG-전각짓기 45도각도의 사각추 장군총. 그 건물 비례로 볼 때, 장군총의 정상에는 바로 이런 형태의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조형미를 완성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장식물이었을 것이다.
3048 CG-완성된 장군총 T.D (흘리고)
(열두개 돌의 정체)
3103 자료화면 호석 pan 그렇다면, 기단부에 기대놓은 엄청난 바위의 정체는 무엇일까.
3113 호석t.d. 바위의 크기는 3미터에서 큰 것은 5미터. 무게가 30톤 가까이 된다.
이런 돌들이 기단부 사면에 둘러져 있는데, 현재 발견되는 것은 전부 열한개.
3129 CG-장군총 호석위치도 정면에 두 개, 삼면에 세 개씩이다. 그런데 원래 정면에도 돌이 하나 더 있어 모두
열두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138 기단부 dolly 그런데 지금은 바위가 없는 무덤 정면의 중앙 기단부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됐다.
3147 무너내리는 기단부사진 줌인+자막 돌이 없는 바로 그 부분이 무너지고 있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바위가 무덤의 버팀돌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3157 호석+모퉁이
3202 이건하교수Int
(물리적인 버팀돌은 아니다. 상징물일 것)
3224 TK 김유신묘로 물리적인 버팀돌이 아니라면 열둘이라는 숫자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3230 묘 FS 신라 경주의 김유신 묘. 열둘이라는 숫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3236 12지신따라Dolly 김유신의 묘는 열두개의 지신, 즉 12지신조각이 등장한다.
3244 염소신 t.u.+fs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묘에 나타난 열둘이라는 숫자는 바로 이 십이지신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3258 dolly+문화재연구소로 그점을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았다.
3304 질문하고
(장군총 둘레에 열두개 돌이 있다. 이것이 12지신상과 관계가 있나)
3314 천진기연구사 답변
(보니까 자연석을 세 개씩 열두개를 돌렸는데요, 12지신상은 8,9세기부터 나타나. 장군총은 5세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356 태왕릉 부감 이런 사실은 태왕릉에서도 확인됐다.
3403 릉fs 장군총과 불과 __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태왕릉.
3408 호석3컷 태왕릉에도 장군총과 똑같은 형태의 자연석이 발견됐다. 축조시기가 거의 같고,
기본적인 무덤양식이 같은 광개토태왕릉의 바위는, 장군총과 같은 목적으로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3428 CG-평면도에 호석 생기고 그런데, 동서쪽 면에 다섯 개, 남북
쪽면에는 여섯 개씩, 모두 합하면 22개나 된다.
3435 현장촬영화면중 호석TS 버팀돌도, 십이지신도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3443 줌아웃 빠져나오면 (화면 바뀌기 전에)그런데...
3459 DIS 부감. 집안 시내에서 외곽으로 그 해답의 실마리는 태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3510 광개토대왕비로 장군총과 광개토태왕릉에서 보았던 자연석을 쓴 곳이 또 있었다.
( 뒤 여유있게 보게 하고) 살아서는 위대한 군주였고, 죽어서는 신으로 떠받들어졌던 위대한 고구려의 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3527 현판+FS 그것은 바로 광개토태왕비였다.
3535 비석T.U.+MS 태왕비는 응회암. 화강암보다 훨씬 연한 돌임에도 불구하고, 글짜를 새겨넣은 표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혀 다듬은 흔적이 없는, 자연석이었던 것이다.
3549 전호태교수INT
(장군총과 가까운 광개토태왕비같은 경우도 우리가 보면 느끼겠지만, 되도록 다듬지 않으려고 한 그런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자연성을 이용해서 신성한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 장군총의 호석도 신성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쓴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DIS 3DCG -완성된 장군총 보기
완성된 전각 위에서 본 평면도 평면도에서 서서히 틸다운.
전각보이고, 밑으로 호석까지 보이면,
외경 한번 돌려보고.
ST 5
*완성된 장군총 뒤로 뜨고
*호석옆의 MC. 보이고
참 웅장한 모습이군요. 무덤이라기 보다는 조형미가 뛰어난 건축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장군총은 위에는 전각을 세우고, 기단분에는 칼을 대지 않은 돌을 배치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고구려시대에는 먼저 무덤쌓고, 그후에 주인을 모시게 되는데..
관은 어떻게 모셨을까요.
묘실앞에 흙길 생기고, 그 위로 걸어가는
MC. 걸어가면서. 멘트
묘실앞에서 아마 무덤을 쌓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관을 이렇게 옮겼을텐데요. 저는 지금 묘실 앞에 와 있습
니다. 묘실 안은 과연 어떤 모습인지 제가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계단 내려가는 MC
드러나는 묘실.
묘실 문앞의 MC. 안으로 들어가면
묘실 드러나고. 두 개의 붉은 관보이고
이곳이 묘실인가 봅니다.
현지 중국인들에게 전해져오는 얘기에 의하면, 1800년대말까지 이곳에 두 개의 붉은 관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묘실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약 5미터. 당시 지어진 다른 적석총에 비해 약 세배정도 넓은 것 같은데요.
6단의 벽 천천히 훑어주고 벽은 돌을 여섯단으로 쌓았고, 지붕의 모서리. 지붕의 판석 보여주고 천장안쪽에는
약 5미터 정도크기의 큰 돌을 지붕처럼 얹었습니다.
바닥으로 내려오면 두 개의 관. MC 보이고 fS개념.
(관, 천장 천천히 훑어본 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런데, 이렇게 탁월한 축성술로 지어진,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장군총이라는 이름 때문에 어느 장군의 무덤이라고 추측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광개토태왕비와의
위치 때문에 광개토태왕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장수왕릉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VCR 5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다)
3904 장군총FS 무덤의 주인을 추적하는 첫 번째 방법은 무덤의 형식이다.
3911 CG.고분의 종류(적석묘, 방단적석묘.방단개제적석묘. 봉토석실묘. 봉토 동실묘) 고구려의 무덤형식은
강돌을 쌓아올려 만든 적석총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 뒤를 이어 기단부가 있는 방단적석묘,
기단부는 물론, 무덤 전체를 돌로 쌓아올린 방단개 제적석묘, 흙으로 덮어만든 봉토석 실묘와 봉토동실묘의
형태로 변해간다.
3934 방단개제석실묘 그런데 장군총은 방단개제석실묘. 고구려의 전통적인 왕릉의 형태다.
3941 DIS 장군총 그런데 장군총은 3세기부터 나타나는 무덤형식.
3945 장군총VS모두루묘지 5세기에는 이미 벽화가 있는 봉토석실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에 적석총으로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3957 전호태교수int
(이런 적석총이 5세기에 나타나는 이유는고구려의 전통적인 묘제가 적석총인데, 왕실 입장에서는 전통적인
묘제형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어렵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듭니다.
왕실이 갖고 있는 전통과 제도는 그 자체가 왕실의 권위이자 신앙, 그러기 때문에, 어느정도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적석총형태를 지속하면서, 보다 발달된 형태로, 그리고 봉토 석실묘의 방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046 장군총실사 pan 장군총의 주인을 가려내는 또 한가지 단서가 있다.
4054 CG지도-장군총과 호태왕릉. 광개토대왕비 그것은 바로 장군총의 위치. 장군총은 왕릉급 무덤중에
태왕릉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4103 장군총 z.o 태왕릉 그런데 장군총과 가장 가까이 있는 적석총인 이 태왕릉은 집안의 무덤 떼 중 두 번째로
크다. 광개토태왕비와는 불과 1킬로미터.
4124 발굴당시 화면+전돌 발굴 당시 태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하나 발견됐다.
4133 CG 전돌글씨 태왕이라는 글씨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왕 중에 일생에 걸쳐, 일관되게 태왕이라 불린 사람은 단 한사람. 광개토태왕뿐이다.
4147 태왕릉VS장군총 장군총은 바로 이 광개토태왕과 가장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장수왕의 무덤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4201 신형식교수int
(아기자기하고 세련된 장군총의 모습을 보면, 장수왕때 상당히 번성했거든요. 서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일 때.
장수왕릉의 가능성을 생각 해본다면 그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4232 대성산성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했다.
65년간, 평양에서 살다가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 장수왕의 무덤이 국내성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4254 방기동의 논문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중국의 길림성의 고고학자 방기동이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나섰다.
4303 내용자막CG나오면 옛 고구려 풍습에 따르면, 결혼하면 수의를 짓고, 왕들은 즉위초부터 자신의 무덤을
짓는다는 것이다.
4315 장군총부감 즉, 장수왕도 국내성에 있을 때 이미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324 서길수교수 INT
(장수왕릉이 틀림없다고 했을 때, 어떻게 국내성에 있는문제점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초상준비한다. 태어나서부터릉을 만들었다는 것. 그런데 장수왕은 어디서 태어났느냐,
국내성에서. 그러니까 장군총이 장수왕릉으로 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
ST 6
바람이 휘 불면서 붉은 관 사라지고, 관대만 남아
관대 어루만지며
직접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서 아직 반론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장수왕. 그에 관한 우리의 상식은 간단합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고구려 최대의 영토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사람.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에,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에 비해 강하게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5세기 장수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위서기록뜨고
그 사실을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많은 기록들 중에 당시 중국의 가장 강대국이었던 위나라의 사서에 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위서의 기록 뜨고 고구려의 왕, (448년이면 장수왕을 말합니다).이 고구려의 왕이 죽으니 황제가 베옷을 입고,
대궐밖에 나가 곡을 했다.
mc, bs 중국의 황제가 베옷을 입고 통곡을 했다?
mc 얼굴로 퀵 줌
VCR 6 (위왕의 제사와 장수왕의 국제적 위치)
4323 드라마 용의 눈물자료
태조즉위식 장수왕의 죽음에 관한 위나라 황제의 조처가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 관련
기록 하나를 찾아보았다.
4536 태조 1년 0901의 기록 조선 태조 일년, 명의 황태자가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실록을 살펴보면, 이거인을 보내 조문하게 했다는, 비교적 간단한 기록이 등장한다.
4547 즉위식 계속 당시 명과 조선이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태도는 상당히 의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4559 위서 그런데 장수왕이 죽었을 때, 중국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중국, 즉 위나라의 반응은 상당히 달랐다.
4610 자막뜨고
(고구려 장수왕이 돌아가셨다. 내가 생전에 만나지는 못했으나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오.
왕은 특별한 애도식을 준비시켰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위나라 황제는 장수왕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특별한 절차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을
알 수 있다.
4630 신형식교수 int
(고구려의 세력도 인정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장수왕시대의 고구려의 위세라는 것은, 서방세계를 다 통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표시지 그런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국에 대해서 주체성은 올라갈수록 강했구요.
그런면에서 장수왕은 당당했던 고구려의 모습을 과시한 것이 아니냐 그런생각이 듭니다.)
4709 장수왕릉SLOW로 돌리고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눈에 비친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을까.
4721 CG-장수왕의 세력확장과정
국내성에서 평양천도. 평양천도에서 중원고구려비까지, 장수왕의 행로를 말해주는.
중원고구려비 Z.I.
427년, 평양으로 도읍지를 옯긴 장수왕은 한반도 남부의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그 정치적인 영향력을 강화해
나간다.
4735 중원고구려비+자막 중원고구려비에 나오는 충주지역의 고구려장수가 신라왕을 불러서 옷을 선물했다는
기록은, 당시 한반도내 고구려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4746 안학궁성모형도 이와 함께 장수왕은 고구려의 국적인 영향력을 높여갔다. 그 발판이 된 것이 바로
평양천도.
그것은 대동강연안으로 발달한 드넓은 평야지대를 발판으로, 농경국가로 변신하기 위한 경제적인 천도였다.
4825 신형식교수int
(그러니까, 이제 고구려가 북방민족의 성격에서탈피해서 이런 해양적인 성격을 가졌을 뿐만아니라,
남방의 벼농사의 문제, 그것을 확보해서 고구려로 하여금 경제적인 부를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
아닐까...)
4847 CG, 유연, 고구려. 북위 뜨고
화살표, 줄 긋고 농경국가로의 변신, 그 중요성은 당시 주변국의 상황을 보면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유모국가였던 유연과 송은 북위와의 불편한 관계에 있어, 고구려와 교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수왕은 이런 상황을 이용, 이들과 농산물을 교역하면서 유대관계 맺고 북위를 고립시켰다.
4911 cg앵글이동
자막뜨고.(실위, 지두우, 거란 고구려평양성) 뿐만 아니라, 실리적인 외교에 밝았던 장수왕은 유연과 지두우를
분할지배했다.
4921 지두우에서 말그림 나오고 그 사건은 주변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지두우는 동북아의 주요 말산지였다.
4930 거란+실위 고구려는 지두우를 차지함으로써, 기병을 조직하고 주변국과의 유대관계를 맺는데 활용했다.
4940 배그림 5012 장수왕은 뱃길을 이용해서 중국남부의 송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이런 경제외교로, 전쟁을 하지 않고도, 주변국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했고, 이런 고구려의 영향력을 북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ST 7
cg강역도 바닥에 깔린 상태에서
그 위에 선 mc,
고구려가 5세기 동아시아의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백성들이 입장에서 보면, 전쟁터에서 살아야 했던 광개토태왕시대보다는 풍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던
장수왕시대가 더 행복했을 지도 모릅니다.
뒤에 벽화 뜨고 (강서데묘. 쌍영총 등)
저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유물중의 하나인 무용총속에 들어와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화려했던 고구려의
문화를 말해주는 벽화고분도, 장수왕시대의 풍요와 평화속에서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벽화에는 그 시대 고구려의 힘을 말해주는 흥미로운단서가 숨어있습니다.
수레쪽으로 다가가며
그동안 우리가 미처 눈여겨 보지 못했던 것 그 단서는, 바로 이런 수렙니다.
스튜디오는 벽화속의 대문앞 전경.
그 앞에 수레놓여 있고. MC 다가옴
수레보고
옆으로와서 당시에는 이런 수레를 주로 소가 끌었던 모양이군요. 이 벽과 덮개는 가죽과 비단으로 만들었고,
모양 자체도 조형미가 있는 아름다운 마차인데요. 그런데 이 바퀴가 상당히 큽니다. 지름이 일미터가 넘구요,
둘레에는 이렇게 철로 테를 둘렀군요. 방사형이라고 부르는 이 바퀴살도 촘촘히 박힌, 상당히 발달된 형태의
수레인데요. 이런 바퀴를 단 수레라면, 상당히 먼거리까지 물건을 나르기도 쉬웠겠습니다.
그런데 천 오백년전에 그려진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이런 수레가 약 40여개나 등장합니다.
수레, 그 시대 고구려인들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요.
VCR 7 수레를 통해서 본, 고구려 최대의 전성기, 장수왕시대
5205 오회분 오호묘의 수레의 신 가장 화려한 고분벽화중의 하나인 오회분 오호묘의 벽화. 거기에는 바퀴의
신이 등장한다.
(c.u.컷 보고)
5221 오회분 4호묘의 수레의 신 오회분 사호묘에도 바퀴의 신이보인다. 고구려인에게 수레가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를 말해준다.
5228 수레바퀴 팬 소와 사람 벽화에 등장하는 수레의 형태는매우 다양하다. 커다란 바퀴의 매우 탄탄해보이는
짐차에서부터
5238 쌍영총의 수레 바퀴 귀족들이 타던 화려한 수레까지약 40여 대가 등장한다.
5245 정동찬실장Int
(살이 붙은 바퀴에다가 쇠테까지 씌운단 말이죠. 이것은 대단한 발전이고, 당시로서는 첨단과학기술이예요.
이것이 1960년대까지 타이어가 나오기전까지 다 그대로 썻거든요. 그러니까. 물건을 대량으로 옮길 수가 있고,
도로망이 자연스럽게정비가 되는 것...)
5327 국방군사연구소 수레가 있었다는 것은, 도로가 그만큼 잘 정비돼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5330 지도 설명하는 현장음
실제로 고구려는 이미 3,4세기부터, 성과 성을 있는 도로망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5404 여호규int
(지방의 물자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적인 도로망을 확충했던 것 )
5426 안학궁성터 이러한 사실은 장수왕시대에 건설된 평양의 안학궁성 터에서도 발견됐다.
5434 안학궁성의 성문터 1935년 발굴조사된, 안학궁성의 문지에 이상한 것이 발견됐다.
다. 그것은, 약 20센티 폭의 홈이었다.
5448 성문터설계도 홈과 홈의 간격은 약 1미터 4십센티. 조사결과 그것은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임이증명됐다.
5446 지도자료-고구려다리터 그로부터 약 50년 뒤에는 평양시 외곽, 안학궁성에서 멀지 않은 대동강변에서
또 하나의 흔적, 고구려나무다리터가 발견됐다
5502 다리터유적(1981년) 대동강의 양쪽 해안에서 발견된 오래된 나무조각들. 그것은, 바로 337미터에 이르는
고구려나무다리 유적이었다.
5513 cg 대동강의 다리 18세기에도 강에 다리가 없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천 오백년 전에 다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5530 정동찬 Int
(정보통신의 발달이라는 것은 강대국의 요건에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강대국으로서 주변국가를
아우르고 했던 부분도, 바로 좋은 수레, 그리고 아주 잘 닦인 도로망, 이런 것들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5558 벽화 대행렬도 이런 도로망을 바탕으로, 고구려는 국내외교역을 확장해 나갔고,경제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풍요로운 선진국가로 성장했다.
5611 행렬도+위서기록자막뜨고
(고구려의 경계는 요동남쪽 천리에 이르고인구는 전보다 세배나 늘었다) 당시 고구려는 주변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인구가 세배나 늘어날 정도였다고 중국의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5622 수레그림들
5636 장군총cg 광개토태왕의 영토확장으로부터시작된 고구려의 전성기, 그것은 농업을 바탕으로 한 장수왕의
탁월한 경제외교로 완성됐다. 이들이 120년간에 걸쳐 이록한 국가적 기틀은,
이후 200년간의 평화와 안정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ST 9 MC, 클로징
장군총 전각까지 있는 타이트 샷 보이다가
장군총FS 멀어지면, MC FRAME. IN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나라, 독자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갖고 있던 나라,
그리고, 우리 민족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경영했던 제국.
지난 주부터 두 시간에 걸쳐서 본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시대의 고구려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사실, 고구려를 얘기할 때마다,
특히 이 시기의 고구려를 다시 볼 때마다. 웬지, 가슴이 뭉클해져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고구려를 다시 보는 것은, 단순히 화려했던 과거 한 때의 기억을 돌아보는 감상에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천 오백년의 세월을 넘어, 그시대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고구려인들의 힘과 그 진취적인
기상이 지금의 우리에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그래서, 숨가쁜 오늘을 헤쳐나갈 힘을
얻고 싶은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