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http://ko.wikipedia.org/wiki/%EC%BA%84%EC%B0%A8%EC%B9%B4_%ED%99%94%EC%82%B0%EA%B5%B0
3.
<혁명은 고통이다>이렇게 얘기 하지는 않습니다. <고통이 혁명의 밑불이다>이렇게 얘기하는게 통상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럽다. 혁명이 곧 발발한다>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통(苦痛)>의 경로, 종류가 너무 너절합니다.
위키백과는 고통을....<苦痛(통증, pain)....은 ㄱ. 실제적· 잠재적인 조직 손상 또는 피해, 악영향 등으로 서술될 수 있는 불쾌한 감각적·감정적 경험을 말한다. ㄴ.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잠재적인 위험 상황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하며, 손상된 신체 부위가 회복될 때까지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회피할 수 있게 한다. ㄷ. 고통은 말초신경계에 위치한 통각(痛覺)수용기가 자극됨에 의해 시작되거나 말초신경계나 중추신경계의 손상 또는 기능 장애에 의해 비롯된다. ㄹ. 대부분의 고통은 자극이 사라지거나 신체의 손상이 회복됨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때로는 그 후까지도 지속되기도 한다. ㄹ. 또 어떤 자극도 없고 병적 원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ㅁ. 다른 한편으로는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한다.고통은 많은 의학적 상태에서 나타나는 주된 증상이며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기본적인 기능을 해가는 데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4.
그리고 그 종류를(http://ko.wikipedia.org/wiki/고통)
<고통은 가장 간단하게는 체성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체성적 고통은 신체적 변화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을 말하며 정신적 고통은 마음의 변화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을 말한다.체성적 고통은 다시, 감각기관의 활성화로 인한 감각적 고통과 신경계로부터 유발되는 신경적 고통으로 나눌 수 있다.
ㄱ. 체성적 고통
(1) 감각적 고통
감각적 고통은 통각수용기에 수용된 자극에 말초신경섬유가 반응하는 과정이다. 감각적 고통은 열에 의한 자극(뜨겁거나 차가움), 기계적 자극(부딪히거나 찢어짐) 또는 화학적 자극(상처 부위를 소독할 때나 눈에 고춧가루가 들어갔을 때)에 의해 유발된다.
(2) 신경적 고통
신경적 고통은 신경계의 손상이나 기능장애로 인한 것으로, 크게는 말초신경계의 이상과 중추신경계의 이상으로 나뉜다. 신경적 고통은 하나의 병인이나 특정 부위의 손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감각장애나 역치이하의 유해하지 않은 자극에도 통증을 느끼는 이질통(allodynia)과 같은 것을 말한다. 신경통은 오랜 시간동안 계속해서 지속되거나 전기 충격과 같이 간헐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감각적 고통은 쑤시거나 아리는 느낌을 주는 반면, 신경통 환자 그 고통을 가려움, 저림, 무감각, 타는 듯한 느낌, 동통, 바늘로 찌르는 느낌으로 표현한다. 인구의 7% ~ 8%의 사람들이 이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으며 이중 5%는 매우 심각한 고통을 겪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특히 암 환자들의 경우 종양이 말초신경계를 압박하거나 화학요법, 방사선 치료, 수술의 부작용으로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ㄴ. 정신적 고통
정신적 고통은 정신성고통(psychalgia) 또는 신체형통증장애(somatoform pain)로 불리며, 정신적, 감정적, 행동적 요인으로 인해 고통이 유발되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지속됨에 따라 나타나는 고통이다. 때때로 두통, 요통, 복통과 같은 체성적 고통을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것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정신적 고통은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서는 오히려 드물게 나타나고, 현대인들에게서 더 많이 관찰되는데 사람들이 삶에서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거나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경우, 슬픔을 느끼는 등의 감정적 사건들에서 더 자주 유발된다. 정신적 고통은 스트레스나 감정적 갈등을 표출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기며, 사회심리적 문제들 또는 다양한 정신적 문제에 의해서 유발된다.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고통이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보호 과정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때때로 히스테리 증상이나 우울증, 건강염려증과 같은 정신적 장애를 갖게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극심한 상해로 인한 신경증이 만성질환을 가져온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보고된 바에 의하면 만성질환이 신경증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높은 신경증세척도(neurotic triad)와 불안감, 낮은 자존감과 같은 것들은 의학적 치료에 의해 만성질환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점차로 감소하여 정상 수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ㄷ. 환상통
환상통은 신체의 일부가 존재하지 않거나 뇌가 더 이상 자극에 대한 신호를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느끼게 되는 고통으로 일종의 신경적 고통이다. 환상통은 절단 환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으로, 한 연구는 절단술 이후 8일 만에 환상통이 시작되었으며 72%의 절단 환자가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혔다. 6개월이 지나도 65%의 환자가 계속해서 환상통을 겪었다. 환상통은 쏘는 듯한 느낌, 으스러짐, 타는 느낌, 경련이 이는 느낌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고통이 오랜 기간 지속될 경우에는 신체의 온전한 부분이 자극에 민감해질 수 있어, 만지는 것만으로도 환상통을 유발하며 배뇨나 배변을 유발할 수도 있다. 신경이나 절단 부위 인근의 민감한 부분에 국소 마취제를 투여함으로써 며칠, 몇 주로부터 영구적으로까지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으나 이는 마취제의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에 한해서만 가능하다.>...고 나열하고 있습니다.
5.
<어디가 왜 아픈지>를 알려면...그리고 <그 아픔을 디디는 방법>을 찾을려면.... 딥다 복잡한 경로가 필요한 것처럼 그렇게 위키백과는 설명합니다. 논리의 습성이고, 그러다 보니 스스로 빠진 함정이 <설명해서 꼭 이해시켜야 한다>는 그 황당한 <논리의 아욕>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원인, 증상, 반응도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현상에 따른 실제적인 증세(생명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현상은 물리적인 고통을, 비물리적인 현상은 비물리적인 고통을 수반하죠. 따라서 <고통은 현상에 대한 정당하고, 적절한 생명의 대응>이 됩니다. 이게 생명이 현상과의 관계(거리)를 확인하는 <고통학>의 기초인 것 같습니다. 보통은 현상이 생명이 있는 곳에서 멀수록 고통의 크기는 작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현상의 크기가 작으면 고통의 크기도 비례해서 작아집니다. 그게 보통(일반적)이죠. 하지만 그게 반드시 그런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부터가 문제죠.
6.
현상은 왜곡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화답인 고통도 왜곡되기 쉽죠. 현재 우리의 상태를 유심히 보면 <그게 정말 그러네>싶어질 겁니다. 충분히 아파야 하는데 우리가 아프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거의 일상) 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대, 같은 그릇 안에 담겨있는데 고통의 원인과 크기가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고통의 분업화, 전문화, 집중화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현상과 고통의 왜곡현상으로 설명해야 하죠.
그처럼 현상이 만져지는 것처럼 고통도 누구(무엇)인가에 의해서 함부로 만져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상과 고통을 만지는 쪽이 있으면 그렇게 만져지는 쪽이 있고....우리는 만져지는 쪽에 갇혀버린게 아닌가, 그래서 결국 우리가 그런 현상과 고통의 왜곡을 방치 또는 수락한게 아닌가?>하고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7.
생명이 현상에 반응하지 않으면 현상을 만지는 쪽은 현상의 세기를 더 높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높힌 현상의 폭력적인 압력에 대한 주의에 게을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임의로 현상에 대한 왜곡의 세기와 범위가 생명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자칫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반응이 없으면(있어도 마찬가지 겠지만)그것을 만지는 쪽은 무감하게 하던짓을 계속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응해야 하는 쪽은 생명의 한계가 넘도록 쥐죽은듯이 견딥니다. 이게 현재고, 우리입니다.
그러한 고통에 대한 인내, 내성, 침묵은 미학이 아니죠. 현상을 함부로 만지고, 생명반응을 왜곡시키고 있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현상과 생명을 모욕적으로 다루는 공동범죄자 무리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현상에 반응 하는 것이 생명이다. 그 반응이 현상과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두 주체의 동시적 진화를 일궈내는 눈금이다>....이래야 하죠. 그러나 현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상은 의도적이고, 치밀한데..... 고통은 개별화되고, 완고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8.
고통은
현상에 대한
정직한(당연한) 생명반응입니다.
그런 생명반응이 없으면
그것은 이제 생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상이 광범위한 것이면
고통도 광범위하게 나타나야
이치입니다.
현상이 광범위한데
그것에 대한 반응이 국소적이거나
외부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런 세상은 죽은 세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다음이고,
이 세상도 그렇습니다.
9.
물리적인 가격이 있으면
물리적으로 아파야 하고,
비물리적인 가격이 있으면
비물리적으로 아픈것
그게 바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픔을 견디는 것으로 넘어가지 않고,
아프게 하는 그것을 치우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적극적인 생명의 대응입니다.
그러므로
<민중에게 혁명이 뭐냐?>했을 때
그것은 <생명이 가야 할 길을
저 스스로 가려는 본연의 행동이다>이렇게
대답하는게 맞을 겁니다.
결국
민중혁명은
<살려는,
기필코 그렇게 살아야 하는
본래 그들의 길이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온 뒤
산길이 미끄럽더군요.
땅이 군데군데 녹은 곳이 있고...
재수 좋으면 냉이를 캐거나,
야생팽이버섯을 딸 수도 있습니다.
이맘때
녹은 눈사이로 모습을 보이는 팽이버섯을 훑어다가
무우, 멸칫대가리(돼지 비계), 매운 고춧가루, 들기름 등을 함께 넣고
끓여 놓으면 술안주, 속풀이 해장국으로
따봉입니다.
집에서
식구들하고 서로 지겨운 얼굴 마주보거나,
지나간 연속극을 본다고 죽때리거나
그러는 것 보다는
<혹시나?>하고
밖에(산골짜기 등에) 나서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죽는거도 그렇지만
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요.
첫댓글 민중혁명은
<살려는,
기필코 그렇게 살아야 하는
본래 그들의 길을 가는 것이다>
저 역시 그케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팽이버섯을 훑어다가
무우, 멸칫대가리(돼지 비계), 매운 고춧가루, 들기름 등을 함께 넣고
끓여 놓으면 술안주, 속풀이 해장국
- 확 와닿습니다
'삶은계란' 이 아니라
삶은- 고통이고- 생명이고- 사랑이고- 혁명입니다
- 잘 읽었습니다
글은 <부드러운 소꼬챙이>인 것 같습니다.
뭘 직접 쑤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진배없는 짓을 글이 하는 것 같아서 입니다.
짧지만
그런 맛이 있는 글들을 틈틈이 보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만지는 쪽과 만져지는 쪽으로 구분하셨는데, 보통 사람들은 두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직장에선 만져지지만 집에 오면 처자식을 만지죠. 며느리와 시어머닌 두사람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사람인 것이죠.
둘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자각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늘상 당하기만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자주성이 확립되죠.
자각하고-인정하고-극복하고-살아야겠지요
자주성 & 자족성
'숭고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닭.개,쥐같은 무리들이 '정신적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는것은 당연한 것이고 남은 것은 위에 말한 '체성적 고통'일 것인데,,저것들의 '현상과 이에 대한 대응' 매커니즘은 왜곡안되고 온전하리라 봅니다.따라서 저것들은 외부적 위험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작은 고통에도 몸서리치겠지요. 과연 저것들이 전쟁을 상정할 수 있는 무리들인가. 북이 협박을 하면 전달되는 불안과 고통의 양은 어느정도일까.북이 이번과같이 허심탄회하게 '마지막 권고'조로 타이를때 전달되는 불안의 양은 어느정도일까.그 좋았던 보금자리가 날아가는 상상의 고통의 양은,,
잘 읽었습니다.
누르스름한 야생팽이 버섯, 하얀 봉지 팽이버섯만 맛본 사람에겐 --- 차원이 다른 맛입니다.
눈내린 어느날 돌옷을 끓여서 먹어본 사람도
맛을 내보이지 않치만서두
기실 별맛이 있을까
나만이 느끼는 건 알고보면 넘들도
느끼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