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 21:1~11
제 목: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찬 송: 143장(웬 말인가 나 위하여)
기 도: 정현규 장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무엇인가 사전 준비를 하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으로 기대에 들 떠 있었습니다. 곧 새 세상을 이룩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기대에 한창 들 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도 지금 선거철입니다. 우리도 며칠 전부터 지금까지 국회의원 투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유명 정치인이 어딘가 오게 되면 사전 준비 작업이 무척 바쁘게 되지요. 그 사람이 유력한 대권후보라면 그의 방문은 대통령 정도의 사전 준비와 조치가 취해집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마치 이런 류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얼마 전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의 많은 이적과 더불어 주님의 역사는 예루살렘의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고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오시길 열심히 기다리고 그 분이 온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입성을 위한 무엇인가를 준비하십니다. 그 준비는 들 떠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그런 흥분이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류의 준비였습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흥분해 있던 군중들은 그 주님의 사전 준비와 퍼포먼서 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고 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나귀는 자신이 어떤 죽음을 겪고 이 땅에 주님이 오신 이유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아니라 겸손한 종으로, 권력이 아니라 섬김으로, 그리고 삶이 아닌 죽음으로 우리를 대속하려 오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의도와 메시지가 멍에를 메지 않은 나귀새끼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마를 타고 온 분이 아닌 나귀 타고 온 주님을 보는 군중들의 눈에는 여전히 정치적메시아로서, 왕으로서의 주님만 보였지, 섬김과 희생의 구원의 주는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들은 호산나 호산나 라며 얼마나 외쳐 떠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호산나라는 찬양 소리 속에 가진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귀 타고 오신 주님과는 철저히 다른 류의 것이었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갈구하는 정욕과 욕심의 바람을 주님을 통해서 얻고자 구하고자 하는 철저히 세상적인 것만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겸손의 왕, 섬김의 왕을 보았지만 그를 알 수 없었고 깨달을 수 없었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폭도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눈이 있다고 해서 다 보는 것이 아니고 귀가 있다고 해서 다 듣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입니다. 구원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교회는 그 분의 머리이지만 머리 되신 주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와 교우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어제 저는 주일 설교로 신앙의 진지함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이해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동시에 우리의 마음 자세, 삶의 투자에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따라다니며 소리 친다고 해서, 그 군중 속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닌 것 같이, 믿음생활도 몰려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물에 가랑잎을 띄우면 물길을 따라 바다까지 갑니다. 하지만 흘러가는 물에 돌이나 철을 떨어뜨리면 바다까지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바위보다 철판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가진 채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그리고 나 자신의 애통함이 있어야 은혜의 배에 우리 자신을 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 첫째 날입니다.
진지해지십시오. 주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군중이 아니라 제자가 되십시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면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번 주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여시고 나를 만나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 사랑을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있고 체험하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되길 투자하십시오.
이 시간 간절한 마음으로 개인 기도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성경본문: 마가복음 11:15~19
제 목: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하신 첫 번째 일은 성전을 정화하신 일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상인들 좌판을 뒤 엎어 버린 것입니다. 만약 제가 돌라츠 시장에 가서 그들의 좌판를 뒤엎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가겠지요. 시장에는 상인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제가 뒤집어 엎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뒤집어 엎은 곳은 시장이 아닙니다. 그곳은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기도하는 자, 말씀 듣는 자와 가르치는 자,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성전이 시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고, 없어야 할 것이 그곳에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성전을 파괴하셨습니다. 주님에게는 그곳은 이미 성전이 아니라 인간들의 야욕과 이기심의 결정체인 도적의 굴혈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파괴하셨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는 자는 엎어짐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진정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합시다. 동시에 없어야 할 것은 제거하여 버립시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 또한 정결케 되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끊지 못한 죄악들 고질적인 습관들, 문제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청소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제거해 나갑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을 때 우리 속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으실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집에 손님이 오면 다른 집도 마찬가지겠지만 청소를 합니다. 보통보다 더 열심히 합니다. 절대 더러운 것, 지저분한 것 손님에게 보여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집만을 깨끗이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왕 되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맞이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오늘 기도 시간에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나를 옭아 매고 있는 더러운 것들을 씻어 버릴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우리 심령이 깨끗해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성령님의 임재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근심하십시오. 돈 걱정, 사는 걱정, 내 체면 걱정이 아니라, 내 자신이 주님이 뒤 엎어시려는 그 성전은 아닌지 고민하시고, 내 기도가 왜 자꾸 막히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는 것이 힘든지에 대해서 고민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성경은 전합니다.
가끔 전 혼자 계란 후라이를 하거나, 파전을 데워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근데 그때 잠시 딴 생각하다가, 아니면 다른 일에 집중하다 계란이나 파전을 뒤집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제 아내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 타버려 전혀 먹을 수 없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지요.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없으면 죽습니다. 영원히 죽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뒤집어 엎으십니다. 성전 정화는 있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회개와 경고와 돌아옴의 촉구였습니다. 뒤집는 것은 아프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뒤집어시려고 할 때 버티지 마시고 내어 맡기십시오. 순종하십시오. 주님 앞에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체면 차리지 마십시오.
억지로 버티다 주께서 뒤집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참으로 불쌍한 것은 없습니다. 뒤집지 않아 타버린 계란 후라이와 같이 파전과 같은 인생이 되고 맙니다. 주님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가 금방 다 타버리는 촛불과 같은 인생인줄도 모르고, 버티는 뒤집지 않는 파전과 같은 인생입니다. 간섭 받지 않아 좋아 보이고 자기만의 철학으로 잘난 것 같지만 마침내 숯덩이가 되고 마는 인생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길에서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우리 자신이 성전 된 우리 자신이 날마다 날마다 점검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정켤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뒤집어십시오. 내 죄성을…. 뒤집어십시오. 나를 주님께로 이끌어가지 못하게 하는 나 자신의 모든 방해물과 찌꺼기들을… 오늘 이 시간에 정결케 되는 정화의 역사가 우리가운데 있길 축복합니다.
성경본문: 요한복음 13:1~11
제 목: 세족식
찬 송: 150장
기 도: 문정미 사모
몸에서 가장 쉽게 더러워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손과 발입니다. 손은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지체이지만 동시에 늘 깨끗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나 어떤 작업을 할 때 모두 손으로 합니다. 자연히 손은 정결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의 경우는 다릅니다. 발은 숨겨진 부분이고 또 쉽게 무시되는 부분이며 동시에 가장 땅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지체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발은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고 불결합니다. 값지고 좋은 선물도 발로 주면 그것은 원한을 쌓고 원수가 됩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노예가 상전의 발은 씻기는 것이 관례입니다. 더러운 발을 만진다는 것은 내가 철저하게 상대를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유월절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 종일 다닌 더러운 발입니다. 먼지 안 나는 아스팔트 길이 아닙니다. 비포장의 건전한 날씨로 먼지가 많이 묻은 더러운 발입니다. 주님은 그 발을 씻깁니다. 당신 자신이 종도 아니요 노예도 아니지만 그들의 발을 씻깁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도 여러분을 발을 씻길까?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근데 그때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 제가 여러분의 발을 씻기려고 든다면, 그것도 갑자기 말이지요…이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양을 할 것입니다. “목사님… 괜찮습니다” “왜 이러세요” 당황하면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저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동일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신다니 사양했습니다.
“주님…제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합니다”라고 말이지요. 그 베드로는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만약 베드로가 되어보니 두 가지 이유일 것 같습니다. 하나는 “선생님께서 감히 어떻게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발을 씻기려 하십니까? 이건 경우에 합당치 않습니다” 라는 예의와 존경과, 또 다른 이유는, “주님 내 발이 더러운데 부끄럽게 저의 감춰진 부분을 보려고 하십니까?”라는 이유일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어느 의미가 더 컸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저에게는 아마 후자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의미심장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더럽고 추한, 숨기고 싶은 부분을 내게 보여주지 않으면 나와 너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내 속에 있는 꼭꼭 숨겨둔 부분, 주님 앞에서도 보여주기 싫어하는 발과 같은 것을, 주님 앞에 내어 놓지 않으면 주님 곁에 있는 제자라도 주님과 관계 없는 사람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우리 몸 전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깨끗한 부분, 예쁜 부분, 자신 있는 부분을 보여주며 주님과 관계를 개선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발을 보자고 합니다 내 몸에서 가장 더럽고 숨겨진 부분을 보여 달라 하십니다. 그 부분을 내어 놓지 않으면 주님과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주님은 건강한 자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병자를 위해서, 아픈 자를 고치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두고는 주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주님은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숨겨진 부분, 더러운 부분, 감추고 싶은 부분, 입에 담는 것 조차도 부끄러운 부분 그것을 주님은 보자고 하십니다. 씻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부끄러운 부분일수록 신뢰가 있어야 보여 줄 수 있지요.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여도 부끄럽지 않지만, 믿음이 없으면 가려야만 부끄럽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
성경본문: 마가복음 15장 33~41
제 목: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찬 송: 151장
죽음을 가지고 장난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우리 자신을 숙연케 하는 인간존재를 한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죽음을 앞에서 진지하지 못한 자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죽음에 대해 우습게 여기거나 진지하지 못하고 장난 치는 자는 그 심판에 대해서도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주는 한계를 모르면 사람들은 의례 교만하게 되는데 그게 현시대의 증상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어린 꼬마 아이가 신나게 뛰어 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우는데 아이 혼자 웃으면서 장난을 칩니다. 그 장례식은 다름 아닌 그 아이 아빠의 장례식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모릅니다. 아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제 자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지금 노는 것이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에 다들 우는 그 장례식장에서 아이는 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이런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철 없고 부질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애곡하는 자가 없는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로 인해서 아버지가 친히 이 땅에 오시어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자녀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철부지 같은 어리석은 자식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죄 많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녀들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철부지 아이와 같이 뛰어 놀고 있습니다. 즐겁다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다 하고 있으며 전혀 그의 죽음에 대해선 관심이 없습니다.
그 숭고한 십자가의 사건 속에 어린 아이와 같이 장난 치는 인생이 내가 아닙니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낄낄대고 있는 모습이 우리가 아닌가요? 장난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의 죽음을 흥미거리로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몰랐기 때문이지요. 그 주님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에 마치 장례식장을 뛰어다닌 어린 아이와 같이 그렇게 무지하게 장난치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선상에서 드린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아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지금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주님의 절규의 목소리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면 하나님을 부르짖는 그 목소리를 마치 노래 소리마냥, 아니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DJ의 멘트처럼 여기면 구경하고 장난치고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엘리야를 부른다..” 라고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고통을 줄여주고자 해면에 포도주를 적시어 올립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합니다. “엘리야가 와서 도와주나 보자…”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 뽑는 군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릅니다. 철저하게 모릅니다. 아니 모르다 못해 괘씸하고 분노를 발하고 싶은 정도로 무식하고 철이 없고 어리석습니다. 이런 이들을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이런 무식하고 경우 없고 철저히 악질적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피를 다 흘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저는 예수를 우습게 아는 사람, 예수를 욕하는 사람, 교회를 놀리고 핍박하고 무시하고 빈정대는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몹시 나쁩니다. 근데 그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다고 하십니다.
몰라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니느웨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오늘 십자가 선상에서 죽으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다시 우리가 발견하기 원하고 우리도 교만한 마음, 강퍅한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 애통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구원의 길로 초대합시다.
성경본문: 누가복음 23:50~56
제 목: 무덤에 계신 그리스도
찬 송: 154장
진심은 위기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아무리 입으로 떠들고 몸으로 행동해도 위기상황에서 말이 달라지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가 말한 모든 것은 진심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말하게 하고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 진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그 ‘진심’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심을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진심이라도 위기 앞에서는 진심을 물리고 변심을 따라 가는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심을 겸손히 지켜야 합니다. 성화란 진심을 지키고 변심을 죽이는 훈련입니다. 위기가운데서 변하고 싶은 진심을 지키는 것을 제자화라고 합니다.
아리마데 요셉은 주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 처형과 함께 모두 숨어 버린 그때에 자신이 믿는 바를 진실로 나타낸 남은 자였습니다. 우리는 진심을 지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진심을 숨기며 두려워했던 것 같이 이 시대에도 동일한 증세가 믿는 성도들에게 존재합니다. 세상의 모임 자리에서 주님에 대한 진심을 숨기지 싶은 유혹이 강합니다. 주님에 대한 진심을 보이면 필연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영적인 두려움과 압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믿자!’ ‘강요치 말자!’ ‘너무 티내지 말자!’ 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 열심이 이상한 것 같으로 보는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열심이 도리어 전도를 막는다!’ 라는 사탄의 선포가 성도들에게 늘 먹혀 들었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은 티 나면 철저하게 불이익을 당하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열심을 낸 제자였습니다. 부활 전 주께서 침묵하신 그 때에, 역사가 없는 그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그때에, 자신의 진심을 보여준 사람이 아리마데 요셉입니다.
사람들은 진심을 믿습니다. 변심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면 진심을 통해서만 진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는 자들입니다. 진리를 믿는 자들은 진리를 따르는 진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진리에 대한 진심이 자꾸 변심으로 보여지기에 세상은 그 진리를 가벼이 알고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이 말씀은 믿음의 길과 세상의 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화할 수 없는 길입니다. 이 말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야 할 진리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을 세상이 싫어하기에, 이상하게 보기에, 부담을 주고, 두려움을 주고, 유혹을 줍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에게 조화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렇게 변심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진심을 가질 수 없고 나중에는 진심 없는 신앙이 되어 버려 세상에서도 버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익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일은 부활절입니다. 내 속에 주님에 대한 진심으로 인해 부활의 큰 기쁨과 기대가 넘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