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한국의사 100년 기념재단의 <열사가 된 의사들>
1907년 08월 01일
김 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에비슨 박사와 번역 작업을 상의 하고 있었다. 인근에서 느닥없이 총소리가 났다. 곧이어 병원으로 부상당한 조선 병사들이 밀려 들어왔다. 필순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열흘, 상황이 진정되고 필순은 조국의 현실을 묻게 된다.
1884년 갑신년에 청과 일이 붙어 청이 이겼다. 1894년 7월부터 10개월간 있었던 청일전쟁에서 일이 이겼다. 1905년 가을 러일이 붙어 일이 이겼다.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907년 6월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이 강제 퇴위되었다. 이또 히로부미는 정미7조약을 통해 군대 해산을 결정하였다. 당시 서울에 있던 조선군은 2만명. 서소문 군영의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군 2개 대대와 일본군이 남대문 지역에서 정면충돌한 것이다.
1908년 06월
세브란스 의학원에서 총 7명의 의사가 배출되었다. 그들의 졸업시험은 당시 미국, 캐나다 의사시험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 중 김필순이 들어 있었다. 필순은 바로 의학원의 교수가 되어 해부학을 가르쳤다. 그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겼다. 필순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11년 12월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독립군 후원과 이상촌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9년 09월 일제의 공작으로 음독 사망하게 된다. 그의 나이 41세.
1987년 01월 14일
대학생 한 명이 치안본부 대공수사관에 의해 불법 연행되어 취조를 받다가 죽었다. 당시 경찰은 탁자를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부검을 담당한 중앙대병원 내과 전문의 오연상은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술했다. 국과수 한적준박사도 ‘물고문,전기고문의 흔적이 있다’고 발표했다.
당시 성동 구치소에 있던 대학생 무리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한 대학생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투쟁이었다. 구치소측은 하루 만에 그 사실을 밝혔다. 드문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여론을 반정부 민주화 투쟁으로 돌려 세웠다. 여기에 신분의 위협을 느끼면서 진실을 말한 오연상과 한적준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열사가 된 의사들
1909년 12월 이완용 암살사건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 오 복원과 이 동수가 있었다. 일본에서 의사가 된 이 자해는 내몽고에서 광복군 초모활동을 하였다. 1919년 11월 의친왕 망명 작전에 당시 경성의전 2학년생 나 창헌이 참여 하였다. 그는 이후 철혈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
김 필순의 동기인 박 서양은 백정 출신이었다. 그는 학교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다가 1917년 북간도로 넘어가 진료와 교육운동을 펼쳤다. 필순의 후배 이태준은 몽골에 터를 잡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약산 김원봉에게 폭약제조 전문가를 소개했다. 러시아의 레닌 정부가 지원한 군자금을 운송하는 책임을 지기도 했다. 그는 왕진 중 일본군이 관여된 백위파에 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38세.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장 지락도 의대 출신이다. 삼일운동에 참여한 경성의전 학생 이 의경은 독일로 망명을 한다. 이학박사가 된 그는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제주출신의 최 정숙과 고 수선은 여성으로서 항일운동에 한 몫을 담당하였다.
1921년 05월
경성의전 해부학 교수 구보가 “조선인은 열등하다”라는 말에 조선인 학생들은 동맹 휴업에 들어 갔다. 학교 측은 주동 학생 9명 퇴학, 185명에게 무기 정학 처분을 내렸다. 이에 조선 학생 본과 194명은 동맹 퇴학으로 맞섰다. 이 사건은 교육의 불평등과 주체적인 독립정신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醫師가 義士여서 자랑스럽다. 정말!
책 익는 마을 원 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