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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일 관념론, 독일의 계몽사상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시민사회의 성장이 늦은 독일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도 봉건제의 유산이 잔재해 있는 분립적인 연방국가의 형태로 정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시민 층은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다.
이러한 18세기 초의 독일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었다. 데카르트 이래 17세기 합리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라이프니츠 철학은 여러 가지 문제성을 갖고 있었지만 볼프(1679~1754)에 의해 정리되어 연방국가적 절대주의 하에 독일 중산지식층의 사상적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독일의 대표적인 아카데미 철학이 되었다.
그것은 근대적인 개인의 해방과 인간적 이성의 자율성을 주장했지만 존재론적 형이상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개념적·형식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계몽사상은 주로 계몽전제군주인 프러시아 왕, 프리드리히 2세의 비호 하에 라이프니츠 철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근대적인 국민적 통일국가로 점차 발전해 가는 영국 및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고심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볼프를 후대한 볼테르를 초빙해 영국이나 프랑스 계몽주의적 사상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시키려는 프리드리히의 계몽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의 성격과 같이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타파하는 것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독일의 계몽사상은 어디까지나 제약된 시민의 합리주의로 머물고 말았다.
독일의 계몽사상은 프랑스의 계몽사상과 같이 사회비판, 또는 시민혁명과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연방국가적 절대주의의 제약 하에서 신흥 시민 층의 에너지혁명이 아닌 철학혁명을 가져왔다. 그 결과 칸트(1724~1804) 이후 독일관념론은 유럽사상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것은 중세적·봉건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또한 근대화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독일 시민 층의 입장을 사상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사상적인 측면에서 선진국, 영국 및 프랑스의 현실과 사상을 전망하고, 비판하는 시각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의 계산기
논리는 서양에서 2,500년 동안 이어진 숙제였다. 논리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기호(symbol)이고 다른 하나는 규칙이다. 규칙이란 기호를 연결하는 연장(tool)이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1646~1716)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또 외교관으로서 논리에 큰 업적을 남긴다. 그는 원활한 소통을 위한 이진법, 즉 언어를 계산할 수 있는 0과 1의 숫자로 바꿔주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라이프니츠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또 라이프니츠는 미적분도 만들었다. 한동안 미적분을 만든 사람이 라이프니츠냐 뉴턴이냐 논쟁이 있었지만, 아이디어는 뉴턴이 먼저 냈다고 알려졌지만 미적분에 관한 논문은 라이프니츠가 먼저 냈다. 그리고 뉴턴의 미적분은 지금의 미적분과 많이 다르며, 부호나 사용하는 기호도 다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독일 철학자로서 칸트나 쇼펜하우어에 비해 인정을 못 받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라이프니츠는 거의 논문이나 책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칸트의 비판철학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그의 철학이 미친 엄청난 영향 때문에 그는 역사상 ‘키 작은 세 거인’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다른 두 사람은 나폴레옹과 베토벤). 16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키에 굽은 등 때문에 늘 한마디씩 듣곤 하지만 그의 규칙적인 정확한 일과로 이웃 사람들은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독일 북부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난한 마구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15년간 대학 시간강사를 거쳐 마흔여섯에 비로소 정식 교수가 되어 생활이 안정되었으나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칼라닌그란드의 칸트대학 교정에 서있는 칸트 동상>
<칼라닌그란드에 있는 칸트의 묘석>
묘석에는「실천이성비판」의 유명한 구절이 나와 있다.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에 심취해 있었다. 인간은 경험에 의하지 않고도 이성의 힘으로 보편타당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합리론, 이를 충실히 따라가던 칸트에게 경험론 철학은 충격적이었다. 이에 그는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출간으로 이 두 철학의 통합을 시도하여 서양 지성사에 큰 획을 그었다.
왜 《순수이성비판》이 그토록 중요한 저서로 평가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 무렵의 서양의 지성사를 알아야 한다.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될 때는,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가 발표되어 그의 역학이 세상에 소개된 지 100년 가까이 지났을 때이다. 뉴턴의 역학은 단순히 새로운 근대학문으로서 물리학의 시작이라는 점에서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뉴턴 역학의 등장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나 현상은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확고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기대로 가득 찬 계몽주의 시대를 열어 제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의 사변적인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의 등장으로 더 이상 영예로운 학문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되거나 형이상학적 논변은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 철학을 제시한다.
그런데 18세기 후반, 계몽주의 정신이 그토록 강조했던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하고, 이성에 의한 역사의 진보라는 계몽주의 믿음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다. 즉 낭만주의가 그 싹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가 강조한 이성에 대한 신뢰를 거부하며 계몽주의에 도전장을 던진다. 이렇게 지성사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출간된 책이 바로 칸트의《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낭만주의 도전에 맞서 계몽주의를 옹호하고, 인류가 자율적으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계몽된 시대를 그리면서 계몽이 지속되어야 함을 강변한 것이다.
이성의 자율적 사용, 이를 위해서 칸트가 제안한 것이 바로 ‘이성비판’이다.
칸트는 계몽의 모토가 “과감하게 알려고 하라!” “따져 보라!”라고 말한다. 이성 비판이란 바로 과감하게 알기 위해서 열심히 따져보는 것이다. 이성이란 인간의 능력을 통칭하는 것인데, 그러한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하고 평가해 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성에 대한 이론이나 교설(doctrine)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긋고 명료하게 하는 작업이 바로 이성 비판인 것이다.
이제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장점들만 취함으로써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에게 확실한 지식이란 합리론처럼 선험적이면서도, 경험론처럼 종합판단적인 것이어야 했다.
칸트는 바로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세 가지 질문을 함으로써 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을 기획하였다. 칸트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이고,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이다.
첫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책이 《순수이성비판》이고, 두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책이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답하고 있는 책이 《판단력비판》이다. 이것이 칸트의 유명한 3대 비판서다.
3) 피히테와 셸링
데카르트가 세계를 정신과 물질로 나눈 이후, 서양철학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과연 철학자들은 자아와 자연, 의식과 대상, 주관과 객관 사이의 대립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칸트 이후 전자들을 강조한 철학이 관념론이라고 한다면, 후자들에 집착한 철학이 유물론이다. 피히테(1762~1814), 셸링(1775~1854), 헤겔(1770~1831) 등의 독일 관념론자들은 이 양쪽을 종합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철학자들이었다.
1806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러시아(프로이센)가 위기에 처하자 피히테는 1807년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3월까지 매주 일요일 오후에 ‘독일 국민에 고함’을 강연했다. 이 강연을 통해 피히테는 독일 재건의 길은 무엇보다도 국민정신의 진작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독일 국민의 분기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4) 헤겔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에게 흘러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였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나갔고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라는 찬사의 말이 있다.
1818년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은 피히테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의 교수로 취임했고, 콜레라로 죽기 전까지 13년 동안 재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헤겔은 분명히 관념주의자로서 칸트주의자이지만, 가장 강력한 칸트 철학의 비판자이기도 하다. 그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을 종합한 자신의 철학을 절대적 관념론으로 규정했다. 관념론이란 기본적으로 사고·이념·이성·정신을 앞세운다. 피히테는 자아(정신) 쪽을 좀 더 강조하는 편이었고, 셸링은 자연 쪽에 조금 더 치우친 편이었는데 헤겔은 이를 종합하려 했다.
헤겔은 우리의 인식 단계를 셋으로 나눈다. 즉 직접적인 긍정으로서 정립(定立) 단계와 부정으로서 반정립(反定立) 단계를 거쳐 종합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두 가지 대립하는 것들을 지양함으로써 더욱 높은 차원의 통일로 발전해 가는데, 이런 과정은 정신이 세계 전체를 구체적으로 인식할 때까지 계속된다. “진리는 전체다. 절대자는 본질적으로 결과이며, 맨 끝에 가서야 비로소 본래의 그것이 된다. 그러므로 ‘미네르바 올빼미는 황혼이 질 무렵에야 날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에 해당한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올빼미(부엉이)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래서 ‘미네르바 올빼미’는 지혜, 좀 더 나아가 철학을 일컫는 뜻이다.
헤겔은 변증법의 예로 도토리 나무를 든다. 도토리 한 톨은 나무로 자라기 위하여 싹을 틔워 나무로 자라야 한다. 이 나무에서 다시는 도토리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도토리 나무는 이렇게 해서 많은 도토리 열매를 맺게 된다. 도토리 한 톨은 ‘정’이 되고, 나무는 ‘반’이 되며 많은 도토리는 ‘합’이 된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은 ‘인식’의 발전 논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의 발전 논리이기도 하다. 즉 논리적인 관점에서 사유 형식으로만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물의 자기 운동 형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헤겔학파는 슈트라우스(1808~1874)의《예수의 생애》 출판을 계기로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진다. 좌파에는 실증주의와 유물론자들이, 우파에는 역사학파와 낭만파가 속해 있었다. 좌파가 진보적이고도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우파는 정치와 종교에서의 기존 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다.
어쨌든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현대의 세 가지 중요한 철학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실용주의다.

첫댓글 칸트가 이과적인 냉정한 분석철학자라면
헤겔은 문과적인 열정의 역사철학자입니다.
칸트가 선험(이성, 연역)과 후험(감성, 종합)을 모았다면
헤겔은 댐의 문을 열어 시원하게 방류한 사나이겠네요.
헤겔은 이원론의 모순이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며,
역사를 정반합의 역동적인 변천과정으로 보았지요.
칸트도 이성비판, 실천비판, 판단비판의 삼단계 과정을 선보였지만,
헤겔 역시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삼단계 과정으로 종합했습니다.
덧붙여서 헤겔은 시류를 잘 탔는지 학자로서는 드물게
사후에 프로이센에서 국장으로 예우했다고 합니다.
철학 책 읽기에서 칸트와 헤겔 부분은 특히 어렵더군요.
그래서 저는 칸트가 이상주의라면 헤겔은 현실주의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말았지요.
낙솔 덕분에 두 사람의 철학을 비교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언제 도동 교수님께도 한 수 지도를 부탁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