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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 선생 묘갈명(寧齋公墓碣銘)」(洪承憲 지음) 번역과 조선의 삼인정헌(三仁靖獻) 결단
2024년 9월 15일
이건창(1852-1898) 선생은 조선 말기에 유가 가치관을 갖고 왕권 강화에 애쓰며 자주적인 국력 강화(自强)를 바라며 문호 개방을 반대하고 청나라와 연대하려고 희망하였다가 실망한 보수파 관원이며 외교문장가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청일전쟁 기간에 은(殷)나라 삼인(三仁 : 微子, 箕子, 比干)이 걸어간 정헌(靖獻)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이건창 선생이 관직생활에서 오랫동안 승진이 막혀 좌절하고 자주 유배 갔던 사실을 살펴보면 대원군과 고종 임금이라는 군주뿐만 아니라 집권세력이 수구파 또는 개화파로 바뀌더라도 동참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건창 선생의 정치적 업적은 크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웠던 홍승헌(洪承憲) 선생은 이건창 선생의 성격이 깐깐(侃侃)하고 정의감이 강하였기(秉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에 수구세력 가운데 탐관오리와 무능한 지방 고관 예를 들어 충청도 감사 조병식과 함흥 감사 이원일 같은 인물을 조사하고 탄핵한 형사(刑事) 공적이 두드러지고 높이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건창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평가하면 안 됩니다.
세 분(이건창, 洪承憲, 鄭元夏에 이건승 포함하여 네 분)은 청일전쟁 기간(1894-1895)에 난리를 피하여 강화도에 함께 살면서 만날 때마다 앞으로 관직에 나갈지 말지 출처를 논의하였습니다. 홍승헌과 정원하 두 분은 강경하게(峻) 정헌(靖獻)을 주장하였고 이건창 선생은 출처에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緩). 그렇지만 이건승 선생은 강경하거나 여지를 남기거나 세 사람의 마음이 똑같다(同歸)고 말하였습니다. 사실상 세 분 모두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았습니다. 이건창 선생과 고종 임금의 대화를 보면 이건창 선생은 당시 수구파와 개화파의 혼란한 당쟁 상황을 동한(東漢) 멸망시기의 상황처럼 인식하였고 고종 임금도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이건창, 敍傳) 따라서 세 분은 조선 멸망을 앞두고 유가 가치관을 익혀온 관원으로서 공자가 은(殷)나라 삼인(三仁 : 微子, 箕子, 比干)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던 정헌(靖獻)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아울러 이건창 이건승 두 분과 교유하였던 황현(黃玹) 선생의 자결은 정헌(靖獻)의 길 가운데 하나이었습니다.
이건승(李建昇) 선생도 정헌의 길을 결단하였기에 만주에 망명하였습니다. 선생은 1909년 개성에서 황종희 『명이대방록』을 읽은 뒤에 「독『대방록』유감(讀『待訪錄』有感)」이라는 독후감을 남겼습니다. 「원군(原君)」과 「원신(原臣)」은 “군주의 권한을 억압하고 백성의 민권을 군주권보다 중시한다.(抑君重民)”는 것이 핵심 내용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죽는 것은 잘못이다.(臣不當爲君死)”는 황종희 평론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명이대방록』이 기자(箕子)의 마음이라고 변호하고 일부는 동의하였습니다. 정치사상사에서 보면 세 분과 이건승 선생 모두 네 분의 정헌(靖獻) 결단은 군주권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민권 사상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들의 정헌(靖獻) 결단은 조선 심학자의 마지막 결정이었습니다. 세 분은 하곡 정제두 선생의 학술보다는 심학 정신을 계승한 후학이며 후손입니다. 이건창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우 이건승 선생이 이들에 동참하고 강화도에 계명의숙을 세워 애국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나중에는 이건승과 정원하 두 분은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덧붙여 말하면 민영규 선생이 이건승 선생의 만주 망명을 두고 “강화양명학파 최후의 광경”이라고 수필을 썼는데 사실상 네 분의 정헌(靖獻) 결단을 모르고 쓴 글입니다.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홍승헌 선생은 심학 또는 성리학 관점에서 개화파 인물의 몰락과 이건창 선생의 명절(名節)을 진단하고 평가하였습니다. 개화파 인물들이 실패하고 몰락하거나 반란자 또는 반역자가 되었던 중요한 원인은 마음이 가려졌기(其心有所蔽)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개화파 인물들은 관직을 얻으려는 욕심에 판단력이 가려지고 질투와 탐욕 때문에 온갖 기괴한 사건과 당쟁을 일으켰고 결국에는 몰락하였다고 혹평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유가 관점에서 보면 개화파 인물들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의리(義理)보다는 공업(功業)에 편중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개화파는 공업에 치중하고 하곡 후학은 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하여 의리에 따르려고 노력한 것이 양대 정파의 서로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정치에서도 논란이 되는 정치인과 행정인에게 필요한 도덕성(義理)과 행정업적(功業) 두 가지를 비교하여 개화파의 도덕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이건창 선생 자신도 “중년에 몇 번이나 좌절하고 걱정하면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마음을 넓혔다고 자술하였습니다.”(敍傳︰“中歲憂患困厄,頗游心於性命之學以自廣。”) 홍승헌 선생에 따르면 이건창 선생은 질투심과 탐욕(忮求)을 끊었기(淸明)에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조짐을 미리 알고 또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행동하였기(剛介)에 명절(名節)을 지켰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따라서 홍승헌 선생은 이건창 선생을 주(周)나라 중산보(仲山甫)의 명철보신(明哲保身)에 견주어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홍승헌 선생이 개화파 인물들과 이건창 선생에게 내린 진단과 평가는 좁게 말하면 하곡 정제두 선생의 심학 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창 선생이 관직생활하던 시기에는 수구파와 개화파가 정책과 여론을 경쟁하며 대원군 또는 고종 임금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쓰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개화파와 수구파 모두 자신들을 지원하려는 외세에 휘둘려 각자의 정책을 실현하지 못하고 싸우다가 실패하였습니다. 물론 조선 전제군주 국가에서 정치적 실패를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고종 임금의 리더십 부족이었습니다. 고종 임금이 군주로서 리더십이 부족하고 행정 능력이 없고 국제정세에 어둡고 백성의 민의(民意)를 무시하여 모든 자주적인 개혁 기회를 놓쳤고 결국에는 조선이 멸망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고종 임금은 혼주(昏主)입니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는 31운동 국민의 민의를 중심으로 군주 없는 공화제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세워지고 조선의 국권을 계승하였습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각가지 외교정책과 속임수를 전개하였고, 청나라 역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배워서 조선과 청나라 왕실 사이의 우호관계를 식민지화 정책으로 전환하여 외교적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고 애썼습니다. 이건창 선생은 청나라와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 외교정책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임오군란과 대원군 압송 시기까지도 청나라와 연대하고 싶었으나 이홍장(李鴻章)과 당소의(唐紹儀)를 보고 겪으면서 상당히 실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건창 선생은 유가 가치관에 따라 청나라와 조선이 연대하길 바랐으나 실망한 것은 청과 조선의 양국 중심의 국제관계가 끝이 왔고 전 세계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하고 국제공약을 맺으며 국제교류를 확대하여 새로운 국제관계를 형성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건창 선생은 문호 개방의 전제조건으로 국력의 배양과 강화 곧 자강(自强)을 내세웠는데 구체적인 자강 방안은 설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이건승 선생은 계명의숙의 설립취지가 세계 1등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사실상 이것이 자강 목표이었습니다.
이건창 선생이 북경에 갔을 때 이홍장이 조선의 문호 개방 문제를 국제관계에서 중개하여 외교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를 알았습니다. 또 서울 소윤(少尹)을 맡았을 때는 서울에서 외국인(청나라 상인과 일본인 상인)이 가옥 매입하는 일을 놓고 영사(領事) 업무를 맡았던 당소의(唐紹儀)와 부딪혔습니다. 이때 청나라의 이홍장과 당소의 모두 조선을 식민지처럼 만들려는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아무튼지 이건창 선생은 청나라 관원들과 연대할 수 없었기에 교유 인맥을 형성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건승과 정원하 두 분이 만주에 망명하면서 청나라 지식인이나 관원과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건창 선생은 문호 개방을 반대하였기에 민영익을 비롯한 어윤중과 김옥균 및 김홍집 등 개화파 인물들과는 문호 개방을 놓고 충돌하였습니다. 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파견하여 철저하게 진압하고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윤중(魚允中)이 동학운동의 해산을 설득하는 회유정책에 반대하였습니다. 현재 보면 문호 개방과 민권운동을 반대한 수구파 생각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당시 이건승 선생은 유가 관원의 관점에서 자강(自强) 없이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국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자강과 문호 개방을 모순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동학은 군주권에 도전하는 반란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건창 선생이 고종 임금에게 건의한 여섯 가지 조목을 보면 민권 향상보다는 군주권 강화가 시급하였다고 보았습니다. 이건창 선생이 개화파와 충돌하였던 군주권 또는 민권의 정치사상 또 쇄국이냐 문호 개방이냐는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를 보면 유가 가치관을 가진 관원이라고 평가합니다.
홍승헌 선생이 지은 「이건창 선생 묘갈명」은 이건승 선생이 작성한 「이건창 선생 행장」에 근거하였고, 「행장」은 이건창 선생이 45살(1896)에 지은 「명미당 시문집 서전(明美堂詩文集敍傳)」에 근거하였습니다. 위의 글은 「서전」과 「행장」을 비롯하여 홍승헌 선생이 「묘갈명」에서 내린 이건창 선생 평론을 참고하여 서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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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 선생 묘갈명(寧齋公墓碣銘)」,홍승헌(洪承憲) 지음
출처 이건승, 『家乘』(續上)︰
현재 고종 임금 30년(1893) 가을에 선생(이건창)이 상소문을 올렸는데 임금 뜻에 어긋나서 호남지역 보성군(寶城郡)에 유배를 갔고 이듬해(1894)에 사면받고 돌아와 집에서 지냈습니다. 여름에는 일본 병사들이 궁궐에 침범한 뒤(1894-1895년 청일전쟁)부터 국가는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나(洪承憲)과 정원하(鄭元夏)는 난리를 피하여 강화도에 머물고 선생의 이웃집이 되었습니다. 선생과 만날 때마다 관직에 나가야 할지 말지 출처를 논의하였습니다. 나와 정원하는 오늘 상황에서는 오로지 『상서』,「미자(微子)」에서 “스스로 올바르게 살며 각자가 왕조 창업주의 뜻을 생각하여 신하 도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自靖,人自獻於先王。)”고 말하고 공자가 “은나라 삼인(三仁)”이라고 말하였듯이 관직에 나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은 “세상에 관직에 나가지 말아야 하는 시기도 없고 군자로서 눅도 관직에 반드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선생은 “두 분(홍승헌과 정원하)은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굳건한데(峻) 나는 관직에 나가는 여지(緩)를 남겨두겠습니다. 그렇지만 관직에 나가든지 안 나가든지 결과는 마음이 서로 같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조정에서 선생에게 법부(法部) 협판(協辦)과 특진관(特進官)을 연달아 임명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다시 해주(海州) 관찰사에 임명하였으나 굳게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연좌되어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유배되었습니다. 선생의 처신을 찬찬히 살펴보면 관직의 출처에 준엄(峻)하였고 말한 것(緩)과는 달랐습니다. 선생도 관직에 나갈 시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관직에 나갈 여지를 남기겠다는 태도(緩)에서도 선생이 차마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결과는 마음이 서로 같다.”고 말할 때에 선생이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선생의 이름은 건창(建昌)이고 자(字)가 봉조(鳳朝)이고 스스로 영재(寧齋)라고 불렀습니다. 가계는 정종(定宗)의 아들(別子, 大宗을 잇는 宗子를 제외한 아들들) 덕천군(德泉君) 시호 적덕(積德) 이름 후생(厚生)의 후손입니다. 호조 판서 증 영의정 효민공(孝敏公) 경직(景稷)과 판 돈녕부사 효간공(孝簡公) 정영(正英) 두 분이 훌륭한 신하이셨습니다. 증조는 증 이조 판서 면백(勉伯)입니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 시원(是遠)이며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오자 유언으로 상소문을 올리고 아우 증 이조 참판 지원(止遠)과 함께 약을 먹고 집에서 자진하였고 영의정에 추증받고 충정(忠貞) 시호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양산군(梁山郡) 군수이며 이름이 상학(象學)이고 이조 참판에 추증받았습니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파평 윤씨 자구(滋九)의 따님입니다. 선생은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났으며 말하기 이전 어린 나이에 글을 깨우쳤고 10살에는 사서삼경을 이해하고 문장이 될만한 글을 잘 지었기에 보는 사람마다 훌륭한 인재라고 여겼습니다. 고종 3년(1866)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기거주(起居注)에 뽑혔습니다.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에 선생은 대원군과 뜻이 맞지 않고 또 집안(전주 이씨) 때문에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머물며 높고 좋은 관직에는 승진하지 못하였습니다.
고종 10년(1873) 겨울에 최익현(崔益鉉)이 상소문을 올려 대원군을 공격하며 “권신(權臣)”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공정(直)하다고 칭찬하였으나 선생은 중립 입장을 지키며 “『춘추』에 따르면 임금이 부친을 회피하였고 또 고종이 아버지 대원군을 신하로 여길 수 없다. 최익현이 비록 공정하지만 마땅히 처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홍문관 높은 관원들을 불러모아 함께 반박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였으나 조정에는 보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고종 11년(1874)에는 서장관(書狀官)에 뽑혀 북경에 갔습니다.
고종 14년(1877)에는 어사(御史)가 되어 충청도를 비밀조사하였는데 남루한 옷을 입고 걸어다니며 백성들의 고통을 물었고 남의 부탁을 거절하고 모든 것을 법에 따르고 위엄있는 목소리가 가는 곳마다 크게 울렸습니다. 높은 지방 관원들 모두 두려워하였고 충청도 감사(監司) 조병식(趙秉式)은 탐욕스럽고 성격도 괴팍하였으며 선생이 청렴하고 정직한 것에 겁이 나서 노자(路資) 돈을 바쳤으나 선생이 거절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조병식은 자신이 처벌을 벗어나려고 선생을 모함하고 비방하는 소문을 냈고 비방이 서울에도 퍼져서 선생을 무고하였습니다. 재상 민규호(閔奎鎬)는 조병식을 두둔하였고 사람을 시켜 선생에게 화를 자초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선생은 재상의 권고에 흔들리지 않고 곧바로 공주(公州)에 들이닥쳐 조병식이 숨겨놓은 장물 수만 원을 적발하였고 밤새 급히 서울로 돌아와서 보고하였습니다. 조선시기(近世)에는 어사가 탄핵하려면 먼저 부본(副本)을 올리고 재가를 받은 뒤에 상주합니다. 그런데 선생은 장계를 품고 곧장 대궐로 들어왔기에 많은 관원이 크게 놀랐습니다. 고종 임금은 비방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선생이 조병식에게 앙심을 품고 관직에서 쫓아낸다고 여겼습니다. 고종이 선생을 불러 만나서 야단쳤는데 목소리가 크게 울렸고 어전의 시자(侍者)들도 무서워 다리를 떨었습니다. 선생은 사실대로 대답하고 한마디도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곁에 있던 관원들도 서로 쳐다보며 칭찬하였기에 고종이 홍주(洪州) 목사 김선근(金善根)에게 공주에 가서 확인하라고 시켰습니다. 김선근은 선생이 보고한 그대로 확인하였고 조병식도 결국에 처벌받았습니다. 공주에 사는 선비 김학현(金鶴鉉)의 아들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고소하였습니다. 선생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곤장(棍杖)을 쳤는데 그가 출옥한 뒤에 화를 못 참고 죽었고 그의 아들이 고소하였으며 조병식이 고소를 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죄인을 함부로 죽였다는 죄목에 걸려 평안도에서도 아주 먼 변방 벽동군(碧潼郡)에 유배 갔다가 이듬해에 사면받았습니다.
고종 19년(1882)에 군난(軍亂)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장군(馬建忠)을 파견하여 책임을 물었고 대원군에게 죄가 있다고 보고 대원군을 붙잡아 연경에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고종 임금은 급히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보고하려고 예문관 제학 정범조(鄭範朝)를 불러 보고문 초안을 작성하고 또 선생을 불러 함께 상의하라고 시켰습니다. 선생이 들어와서 정범조에게 “반드시 임금을 대면하고 보고서의 큰 뜻을 들은 뒤에야 작성하여야 합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정범조는 “임금의 생각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생은 “오늘 일은 우리 임금이 죄를 인정하고 자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정범조가 들어가서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한숨을 내쉰 뒤에 선생을 불러 “보고서는 반드시 네가 지어야 하며 군난의 책임을 모두 나에게 돌리고 대원군을 위하여 분명하게 변호하여야 한다. 보고서를 보는 사람이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도록 글을 지어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그래서 선생에게 대원군을 따라가서 변호하라고 시켰으나 청나라 장군이 선생의 동행을 막았기에 선생이 보고서를 지을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가을에 선생은 진하선교관(陳賀宣敎官)이 되어 당상관 통정계(通政階)에 승진하였고 지제교(知製敎) 관대를 띠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김윤식(金允植)과 어윤중(魚允中)이 권력을 쥐었는데 선생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도우미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임금의 지시를 받을 때마다 중요한 기밀문서를 물었으나 선생이 모두 거절하고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하루는 선생을 급히 불러들였는데 어윤중이 임금의 지시를 말로 전달하며 “천진(天津)에 가고 싶으냐? 일본에 가고 싶으냐? 조정에서 중요한 기무를 맡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선생은 어느 것도 맡을 수 없다고 사죄하였습니다. 어윤중이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나와서 “국내에서는 관직을 맡을 수 있겠냐?”고 물었고 선생은 어쩔 수 없이 “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조정에서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고 싸워서라도 문호를 지켰으나 실제로는 국제정세에 어두웠습니다. 선생은 중국이 외국 가운데 큰 나라이니까 중국의 대외 상황을 살펴보면 문호 개방 여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중국에 가서(1874) 대외 상황을 본 뒤에는 탄식하며 “중국도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하였는데 우리나라도 뒤를 따르겠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서신을 보내 우리나라에 문호 개방의 이익을 설득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홍장의 말을 믿었으나 선생은 “이홍장은 아주 큰 중개인(거간꾼)이며 국제정세에 따라(時勢之從) 흥정을 붙이고 중간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자주적으로 부강하지 않고 남(이홍장)의 말을 믿고 의지한다면 뒤에는 반드시 그에게 매도당합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문호를 개방한 뒤에는 외척 민영익(閔泳翊)이 나이는 어려도 많은 명사와 사귀어 끌어들였고 어윤중(魚允中)과 김옥균(金玉均) 같은 사람들과 함께 문호 개방의 여론을 주도하였습니다. 어윤중과 김옥균은 똑똑한 인재라고 불리며 외국 사정을 분석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민영익에서 선생을 등용하라고 몇 번이나 추천하였습니다. 그래서 민영익도 선생에게 관심을 가졌고 선생을 불러 몇몇이 함께 술도 마시며 정치 시사(토픽)를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은 이 사람들 면전에서 문호 개방을 배척하고 국가를 멸망시킬 사람들이라고 욕하였기에 민영익이 선생에게 발끈하여 화를 내고 멀어졌습니다. 고종 임금이 민영익에게 선생을 물어보니 민영익은 선생이 도리에 맞지 않는 주장(鎖國, 문호개방 반대)을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종은 선생을 더욱 좋지 않게 여겼고 선생의 관직 생활은 더욱 막혔습니다.
대체로 선생의 주장이 옳고 생각이 깊고 멀다는 것(쇄국정책)은 여기(민영익과의 술자리에서 개혁파를 면박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으며 임오군란과 대원군 압송에 이르러 고종 임금이 선생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을 경기도 안렴사에 임명하고 고종 임금이 임명서를 직접 주면서 “내가 지금에야 너를 알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경기도 13개 군(郡)에 기근이 들어 선생이 진휼 방법을 만들어 구제하였고 덕분에 배고픈 백성들이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광주(廣州), 수원(水原), 개성(開城)의 세금을 면제하였는데 각기 수만 석을 면제받았습니다. 또 첨부한 보고서에서 올린 수십 가지 개선방안 가운데 대다수 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뒤에 고종 임금의 가까운 관원이 지방 관원을 나가서 탐람(貪婪)하자 고종 임금이 몰래 사람을 보내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이건창 같은 어사를 파견하겠다.”고 타일렀습니다. 고종 임금이 선생을 이처럼 중요하게 믿었습니다.
고종 28년(1891)에 아버지 3년상을 마치고 관직을 회복하면서 한성부 소윤(少尹)에 임명되었습니다. 업무를 맡은지 한 달이 넘어 상소문을 올려 “정부는 은전과 동전 2종을 발행하여 사용하여야 합니다. 만약에 외국인이 화폐발행 권한을 농단하도록 놔두면 커다란 경제적 피해를 가져올 것입니다.”고 건의하였습니다. 또 “여러 나라 외국인(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이 서울에서 가옥을 매입하는 데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 백성이 외국인에게 가옥을 파는 것을 금지하여야 합니다.”고 건의하였습니다. 청나라에서 파견한 영사(領事) 당소의(唐紹儀)가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비난하자 선생은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백성에게 금지하였는데 국제법에 금지 규정이 어디 있냐?”고 반박하였습니다. 당소의는 이홍장을 통하여 정부에 해금하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선생은 외국인에게 가옥을 매도한 사람을 몰래 붙잡아 다른 죄목으로 처벌하자 백성들이 가옥을 팔려고 들지 않았고 당소의도 뭐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 도민(都民)들은 기뻐하며 “선생이 소윤을 10년 동안 맡는다면 우리가 팔았던 가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함흥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감사 이원일(李源逸)을 파직하고 선생을 안복사(按覆使)에 임명하였습니다. 민란은 상인(市人)들이 일으켰다고 말하여 주모자를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은 주모자도 모르게 정보원을 써서 함흥에서 몰래 반란을 교사한 세력자(豪民)를 붙잡아 심문하자 곧바로 자백하였습니다.
고종 30년(1893) 여름에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반란당(賊黨)이 일어나서 동학(東學)이라고 호소하자 사방 각지에서 호응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을 파견하여 그들이 해산하도록 달래고 설득하였습니다. 선생은 상소문을 올려 빨리 군대를 파병하여 진압하고 확산을 막아야 하며 헛되이 그들을 달래고 설득하여 거꾸로 그들의 자신감이 커지도록 하여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또 “선무사 어윤중이 개인적으로 반란당을 ‘민당(民黨)’이라고 불렀는데 민당은 외국에서 군주를 없애자는 옳지 못한 정치 주장이며 군주권에 끼치는 피해는 홍수와 맹수보다 큽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여기에 더하여 임금 권위를 높이고 임금의 정치적 의지를 강화하고 여자 연예인들을 몰아내고 상금 하사를 줄이고 군대 기율을 엄격히 하고 지방 높은 관원을 잘 선발할 것 모두 6가지를 건의하였습니다. 상소문이 고종 임금에게 보고되자 대제학 김영수(金永壽)가 임금을 대신하여 지시문(綸音)을 지었고 또 반란당을 달래고 설득하는 임금의 글(慰諭)도 잘못 지었다고 처벌을 자청하였습니다. 고종 임금은 선생을 처벌하지 않으면 김영수를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생을 무겁게 처벌하려고 결정하였으나 선생의 상소문을 오랫동안 보류하고 정부에 하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권봉희(權鳳熙)와 안효제(安孝濟)가 상소문을 올려 정책을 비판하자 고종 임금이 화를 내며 이들과 선생을 함께 유배 보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전라도 보성에 유배 갔습니다.
고종 31년(1894) 6월에 왜병의 침략(청일전쟁)이 일어났고 대원군이 다시 국정을 주도하면서 김홍집을 재상에 앉히고 선생을 공조 참판에 발탁하였으나 선생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고종 32년(1895) 8월에 곤녕합(坤寧閤)에서 민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민비를 시해한 반란자들이 강한 이웃 국가 일본을 끼고 시해하였고 또 고종 임금에게는 민씨 왕후(민비)를 폐위시키고 평민으로 강등하라고 협박하였습니다. 이때 반란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무섭고 잔인하였는데 아무도 고발하지 못하였고 세상 사람들도 그들의 흉포가 두려워서 말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생과 나(洪承憲) 정원하(鄭元夏) 3명이 연명하여 상소문을 올려 반란자들을 처벌하고 민비를 복위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요약하여 말하면 “곤녕합 사건은 임금의 뜻이 아니라고 저희 신하들은 알고 있습니다. 민간 소문에는 ‘반란자들이 민비를 시해하였는데 시해 범죄자가 우리 백성인지 일본인인지를 아직 변별하지 못하였을 뿐이다.’고 말합니다. 신하가 군주를 시해한 범죄자가 관원이라면 사형시키고 절대로 사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군주와 아버지의 원수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춘추』의 의리(義理)에 따르면 ‘임금의 부인(小君)도 부부일체이기에 군주(君)와 신분이 같습니다.’ 곤녕합의 대신들만 이 의리를 몰랐겠습니까? 어찌하여 덮고 숨기고 무관심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합니까? 아마도 사건을 일으켜 요행을 바라고 임금을 협박하고 관원을 억제하며 권세를 얻으려는 음모가 있지 않겠습니까? 요컨대 범죄자가 군인이면 군인을 처벌하고 조정의 신하이면 신하를 처벌하고 외국인(일본인)이면 외국인도 처벌하여야 합니다. 일반 평민의 죽음에도 혐의가 있으면 원한이 없도록 처벌합니다. 그런데 국모가 시해되었는데도 국모를 시해한 원수에게 끝내 보복하지 않으십니까? 민비를 복위시키고 국모 장례식을 치러주시길 간청합니다.” 상소문이 내각에 올려졌고 내각 대신 김홍집이 보더니 씩 웃고는 “나를 시해자로 만들려는구나.”라고 말하고 고종 임금께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겨울(1895)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강화도 옆에 있는 보문도(普門島)에 들어가서 단발을 회피하며 섬에서 시문을 지으며 자신의 주장(단발 반대)을 나타냈습니다. 이때 시강(侍講)에 임명하였으나 상소문을 올려 사직을 허가하지 않고 강요한다면 신하로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알렸습니다. 얼마 뒤에 고종 임금은 이범진(李範晉)의 건의에 따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고 국가 사무는 더욱 엉망이 되었습니다. 조금 뒤에 고종 임금이 민비 시해 사건의 주모자들을 붙잡아 처벌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종 임금은 이범진의 추천을 받아들여 선생을 해주 관찰사에 임명하였는데 선생은 3번이나 상소문을 올려 사퇴하자 고종 임금은 상소문에 “경(卿)의 입장을 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부탁하며 굳이 임명하려는 이유가 없겠는가?”라고 비답(批答)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해주 관찰사에 임명받은 날 즉시 해주에 가서 민간 집에 머물며 처벌을 기다리며 임명을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고종 임금도 선생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처벌을 지시하였습니다. 새로운 형법에는 노역 3년에 해당하지만 유배 2년으로 경감하고 몇 달 뒤에 사면하였습니다. 고종 임금은 선생을 처벌하고 싶지 않았기에 몇 달을 넘기지 않고 사면하셨습니다.
아! 국가에 변란이 일어난 뒤부터 집권자(개화파, 수구파)들도 당시에는 명망이 있었으나 끝내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에 빠져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어찌 반란을 일으키고 반역하려고 생각하였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속에서 판단력이 이익에 가려져서 실패하고 침몰하여 그런 반란자 또는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국가의 변란과 혼란한 시기에 우뚝하게 기둥처럼 서서 끝까지 자신의 명절(名節)을 지키고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마음속에서 시기 질투와 탐욕을 끊어버렸기에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조짐(기미)을 볼 수 있었고 또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의리(義理)에 따라 판단하였기에 행동은 올바른 정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수천수만 가지 변란과 이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더라도 내 생각과 판단은 현혹되지 않았기에 행동이 항상 태연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시경』 「증민(烝民)」에서 “중산보(仲山甫)가 왕명(王命)과 정치를 잘 판단하고 철저하게 실행하여 자신의 명절을 지켰다.”고 읊었는데 아마도 선생도 중산보만큼 훌륭한 신하일 것입니다.
선생이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돌아와서 뇌졸중(風痱)에 걸렸고 1898년 음력 6월에 세상을 떠났고 나이 47살이었습니다. 그해 시월 신축일에 강화도 건평리(建坪里) 경(庚) 좌향 언덕에 장례 지냈습니다.
첫째 부인은 대구 서씨이며 현감 서장순(徐長淳)의 따님이며 둘째 부인은 결성 장씨이며 장인근(張仁根)의 따님이며 두 분 모두 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습니다.
둘째 장씨 부인이 아들 1명 범하(範夏)를 낳았고 범하의 아들들은 모두 어립니다.
선생은 성격이 욕심 없이 청명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여 강개하며 얼굴에 자랑하거나 교만한 표정이 없고 사람들과는 어떤 주제도 이야기하며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돈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았으며 어떤 취미와 기호도 없고 오직 책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양친 3년상을 치른 뒤에는 “부모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현재 내가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실 분은 오직 우리 임금만이 남았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국가 상황이 날로 악화하자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습니다. 그렇지만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얼굴에 걱정이 비치고 한밤중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서 마치 책임자처럼 걱정하였습니다. 문장을 지으면서 애써 퇴고하고 가볍게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며 옛날 훌륭한 문장가처럼 되려고 하였으니 세상에서 문장 짓기를 배우는 사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저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20권, 『독역수기(讀易隨記)』 1권, 『당의기략(黨議紀略)』 1권이 있습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7년이 되었는데 선생의 아우 주사(主事) 이건승(李建昇)이 「행장」을 짓고 나에게 묘비석에 새길 명문(銘文)을 부탁하고 또 사마광(司馬光, 1019-1086)과 범진(范鎮,1007-1088)이 1038년 진사 합격 동년(同年)으로서 서로 가깝게 지내며 왕안석 신법에 함께 반대하였고 상대방 전기(傳)을 써주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묘지명을 써주자고 약속하였다는 고사를 들어 재촉하였습니다. 아! 내가 어떻게 묘지명을 쓰는 데 적합하겠습니까! 선생과 나의 우의(友誼)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돌아보면 묘지명 쓰는 것을 사양할 수 없기에 선생이 관직 생활에서 지켜왔던 큰 명절(名節)을 쓰고 명문을 짓습니다.
비석에 새길 글을 지어 말하길 :
아! 선생은 학술이 넓고 품행을 지켰으며
(출처 : 『中庸』 : “博學之,審問之,愼思之,明辨之,篤行之。”)
능력이 다방면에 많고 실행을 방정하게 하였습니다.
체구가 작고 힘도 약하였으나 마음은 억세고 강직하였습니다.
찬성과 반대 논의과정에서 항상 정의를 지키며 찬성(循)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반대(矯)하더라도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중년에는 관직 생활에서 날개가 접혀서 높이 날지 못하였습니다.
관직에 복직한 뒤에는 시대조류와 맞지 않아 험난한 길을 가며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유가의 도리와 원칙이 없어지고 무너지면서 귀신과 요괴 같은 사람들이 미쳐 날뛰었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선생은 우뚝하게 서서 올바른 뜻을 지키고 명절을 빛냈습니다.
글(文章)은 정성을 다하여 뜻이 순수하도록 지었기에 세상을 밝게 비추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 불후 가운데 시문과 저서(著書)의 입언(立言)을 남겼으니 관직(立功)에서 가끔 좌절하였더라도 무슨 상해가 되겠습니까!
(삼불후 출처 : 『左傳』, 襄公二十四年 : “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其次有立言,雖久不廢,此之謂不朽。”)
선생은 착함(善)의 모범을 남겼으니 앞으로 나라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묘소 앞의 비석에 새겨 먼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드립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이조 참판(前吏曹參判), 겸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사(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협판 내무부 사(協辦內務府事) 풍산 홍승헌 지음(光武七年,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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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齋公(李建昌)墓碣銘」,『家乘』(續上)︰
今上三十年(高宗,1893)秋,上疏言事忤旨,竄湖南之寶城郡,明年(1894)宥,家居。夏,日本兵犯闕,國事至不可言。時,余(洪承憲)與鄭大憲元夏避亂,寓沁中,與公爲鄰,每遇公相與講論出處。余及大憲以爲今日惟靖獻(敍傳、行狀︰靖潛),公則謂︰“天下無必不可爲之日,君子無必不欲出之心。”且曰︰“二君峻於處義,吾當居其緩也,然卒與之同歸耳。”既而朝廷連除公爲法部協辦、特進官,皆不拜,又除海州觀察使,堅辭不就,坐是流古群山島。徐(余)觀公所自處,未嘗不峻,似與其言有不同者,公亦豈不知時之不可有爲哉!於其緩可以見公之不忍果忘於世,而其所謂“同歸”者,公之心則有定矣。
公諱建昌,字鳳朝,自號寧齋,系出定宗別子德泉君,謚積德,諱厚生。至戶曹判書,贈領議政,孝敏公景稷;判敦寧孝簡公正英,兩世爲名臣。曾祖贈吏曹判書,諱勉伯。祖吏曹判書,諱是遠,洋夷陷江都,上遺疏,與弟贈吏曹參判止遠飲藥卒于家,贈領議政,謚忠貞。考梁山郡守,諱象學,贈吏曹參判。
妣貞夫人,坡平尹氏滋九女。公生有異質,未語先識文字,十歲(1861)通三經四書,下筆成章,見者咸器之。上(高宗)三年(1866)擢文科,由起居注選入玉堂。
大院君柄國政,公忤大院君,又家世多嫌卻於人,用是沈淪,未嘗居華膴。
十年(1873)冬,崔益鉉上疏,侵大院君,指爲權臣。舉世稱其直,公爲持平,獨曰︰“『春秋』爲親者諱,且未可以臣大院君。益鉉雖直,宜罪。”邀長官合疏論之,不報。
十一年(1874),充書狀官如燕。
十四年(1877),以御史廉問湖右,衣弊衣徒行,詢民疾苦,屏于囑,一循以法,威聲讋一路。大吏皆恐,監司趙秉式貪而愎,憚公淸直,奉錢以爲資,公卻不受。秉式思陷公以自免也蜚謗(敍傳︰飛謗),達京師以誣公。宰相右秉式者,使人怵以禍。公不爲動(敍傳︰不爲聞),馳入公州,發秉式隱贓鉅萬,星夜還以聞。近世御史有臚劾,先以副本進,俟可乃奏。公懷啟直入闕,百僚大駭。上既入謗者言,意其憾秉式而擠之也。召見公,詰責之,威音震疊,殿上侍者皆股栗。公對以實,不撓一辭。左右相顧稱歎,乃命洪州收使金善根往按。善根悉如公所啟,秉式卒抵罪。公州士人(金鶴鉉)子有告其父冤者,公實杖有罪,而出獄恚自死。其子告則趙嗾之也,遂以濫殺人罪竄公極邊碧潼郡,踰年而赦。
十九年(1882),軍變作,淸遣將詰其事,以爲大院君罪,執大院君北去。上馳使陳奏,召藝文提學鄭範朝草奏文,且命召公與議。公入,謂鄭公︰“須上面命其大意,可下筆。”鄭公曰︰“如君意何如?”公曰︰“今日吾君惟負罪引慝而已。”鄭公入告,上嗟歎召公諭曰︰“文須汝作,致亂之咎,悉歸予躬,爲大院君辨晰明白,要使見者一字一淚也。”因命公陪護大院君,淸將沮公行,奏亦不用公作。
秋以陳賀宣教官陞通政階,命永帶知製教。
當是時,金允植、魚允中用事,欲引公以自助,每稱奉旨,詢機要文字,公悉辭之。一日,促召公入,允中口喧上諭曰︰“欲往天津乎?日本乎?在朝廷參機務乎?”公謝不能。允中入,頃復出曰︰“疆域之內猶可以宣力乎?”公不得已曰︰“諾。”
初,朝廷斥倭洋,主戰守,實昧於形勢。公以爲中國者,外國之樞,可覘而知。既而入中國,歎曰︰“中國已不可爲,吾邦其隨之。”北洋大臣李鴻章貽書,啖我以通和之利。時人信其言,公曰︰“鴻章大儈,儈惟時勢之從。我不自強而恃人,後必爲其所賣。”
及朝廷事外交,戚里閔泳翊年少結納名士,與魚允中、金玉均諸人,主其議。魚、金號才敏,能言外國事,數爲泳翊言公可用。泳翊亦傾心,嘗邀公與飲,論時議。公往往面斥諸人以爲誤國必此輩,泳翊怫然。上嘗問公於泳翊,泳翊對以橫議,上愈不悅,而公益困。
蓋公執守之正、識慮之遠,此可以見,而至是,上亦燭公矣。迺有畿輔按廉之命,上親授封書曰︰“予今知汝。”時畿沿飢,公設賑哺之,民賴以全活。蠲廣州、水原、開城稅皆萬計,別單所陳數十條亦多報可。後近臣有出宰而貪者,上使人以私戒之曰︰“不悛,當遣御史如李某者。”上之重公也如此。
二十八年(1891)起家,拜漢城少尹。莅事月餘,上疏言︰“政府請用銀銅錢。將使外國人操貨權,啟無窮之弊。”又言︰“各國人買屋無紀,請禁我民賣屋者。”淸差唐紹儀詰其非約,公曰︰“我禁我民,約於何有?”紹儀乃假李鴻章言怵政府使弛禁。公密訪賣屋者加以他罪罪之,民不敢賣屋,而彼亦無以難矣。都民喜曰︰“使公少尹十年,可以復我舊屋。”
會咸興民爲亂,逐監司李源逸,以公爲按覆使。亂由市人,不能得主名,公用鉤鉅得邑豪陰嗾者,一訊而服。
三十年(1893)夏,二湖賊黨起,號東學,四方響應。朝廷遣宣撫使魚允中以諭解之。公上疏請亟發兵剿之以絕滋蔓,不宜徒事慰撫以驕賊心。又言︰“宣撫使魚允中私立賊號曰民黨。民黨者外國無君之邪說,禍甚於洪水猛獸。”又請尊聖德,堅聖志,罷女伶,節賞賚,嚴師律,擇藩郡。疏既上,大提學金永壽以代撰綸音,慰諭失辭,將引罪。上念不罪公,無以安永壽,重罪公故留公疏久不下。會權鳳熙、安孝濟上疏論時事,上怒並竄之。於是,公有寶城之行。
三十一年(1894)六月,有倭兵之變。大院君復起主國務,金弘集爲相,擢公工曹參判,稱疾不出。
三十二年(1895)八月,有坤寧閤之變,賊挾強鄰行弒,既又脅上廢后爲庶人。是時賊方睢盱凶悍,無人狀,世畏其凶焰,無敢言者。公乃與余(洪承憲)及鄭大憲聯名上疏,請討復,其略曰︰“今者之舉,臣知非聖上意也。道路相傳皆云︰‘賊已行弒,但未辨賊之爲我人與日本人耳。’臣弒其君,在官者殺無赦。君父之讎,不與共天下。『春秋』之例,小君亦君也。彼閤部大臣獨不知斯義乎?奈何掩匿覆蓋,恝然若無事?無乃其中亦有貪禍幸變,以售其脅上制下,竊權逞勢之計者乎!要之,作賊者,兵則兵可誅也,廷臣則廷臣可誅也,外國人則外國人亦可誅也。匹夫四婦之死,而不得其命者,猶無不償之冤焉。有國母被弒而讎終不復者乎?仍請復位發喪!”疏入,內閣大臣金弘集見而嘻曰︰“是趙盾我也。”卻不以聞。
冬,斷髮令下,公入普門島爲空谷佳人歌以見志。會有侍講之除,上疏自陳如不獲命加以敦迫,臣則有死而已。未幾,上從李範晉言,御俄國公使館,國事又變,而命討稍從上出。用範晉薦有海州之命,公三上疏辭,賜批曰︰“卿之所守,朕已稔知,猶且委畀,豈無所以?”及命補外,即日赴海州,待罪於民舍,終不膺。上知其志不可奪,命下理。新法當輸作三年,改命流二年,數月而宥。上未嘗以公爲罪,故赦不踰時。
鳴乎!自國家變難以來,當事者亦皆一時之望,然終陷爲亂逆者相比也。其始彼亦曷嘗性於亂逆哉?由其心有所蔽,敗溺而至此耳。公處乎其間,屹然若砥柱獨立,卒能全其節而不污。惟其心絕忮求,能見於幾先,又一裁之以義,是以動不失其正。雖千變百怪迭興於前,吾之所見不眩,而所守者常自如也。『詩』曰︰“既明且哲,以保其身。”如公庶幾焉。
公自群山還,患風痱,乃以戊戍(1898)六月卒,享年四十七。是歲十月辛丑,葬于江華乾坪負庚原。
先娶大邱徐氏縣監長淳女,後娶結城張氏仁根女,俱先公卒,贈貞夫人。
張夫人生一男曰範夏,範夏男並幼。
公淸明剛介,無矜色矯情,與人言坦易不畛域。家居不問有無,心無耆好,獨嗜書,書未嘗去手。公既喪二親,曰︰“親不在,今吾未死一念,惟吾君耳。”見時事日非,益無意於世,然每國有事,憂見於色,或中夜累興,如任其責者。爲文章刻意不輕發,以古作者自期,世之學爲文者皆法焉。所著有『明美堂集』二十卷、『讀易隨記』一卷、『黨議紀略』一卷。
公既沒七年,弟主事君建昇爲狀,屬余銘牲繫,復以君實後死之責勉之。鳴乎,余何敢當!顧義有不敢辭者,遂著其立朝大節而爲之銘。
銘曰︰
烏虖!惟公學博而守約,才周而行方。
力不能勝衣,其中則強偘偘。
獻替秉義,以將弗循而媮,弗矯而伉。
中戢厥翼,迺困于翔。動與時乖,蹈險觸謗。
道喪綱墮,鬼怪猖狂。確乎有立,志完名彰。
溫粹其文,振耀昭光。不朽者存,雖躓奚傷!
惟善之貽,是將後昌。墓門有石,刻示茫茫。
嘉善大夫、前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協辦內務府事、豐山洪承憲撰(光武七年,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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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靖獻︰
『尙書』,「微子」:“自靖,人自獻於先王。”
孔穎達疏:“各自謀行其志,人人自獻達於先王以不失道。”
『論語』,「微子」第十八︰微子去之,箕子爲之奴,比干諫而死。孔子曰殷有三仁焉。
宋、李幼武纂集,『宋名臣言行錄』,『别集』上,卷八,胡寅(1098-1156,字明仲)︰
紹興二十六年,公卒于衡州。公既退居,乃著『讀史管見』三十巻,論周秦至五代得失,其論甚正,蓋以蔡京、秦檜之事數寄意焉。
朱文公(朱熹)曰︰公議論英發,人物偉然。向嘗侍之坐,見其數盃後,歌孔明「出師表」,誦張丕叔(張庭堅)「自靖,人自獻於先王」義、陳了翁奏狀等,可謂豪傑之士也。『讀史管見』乃嶺表所作,當時並無一冊文字隨行,只是記憶,所以其間有牴牾處。有好誦佛書者致堂,因集史傳中虜人姓名揭之一處,其人果收去念誦此真戱也。
宋、朱熹,『御纂朱子全書』,卷五十四,「論胡明仲」︰
胡文定(胡安國,1074-1138)云︰知至故能知言,意誠故能養氣,此語好。又云︰豈有見理已明而不能處事者?此語亦好。
胡致堂(胡寅,1098-1156)議論英發,人物偉然,向嘗侍之坐,見其數盃後,歌孔明「出師表」,誦張才叔「自靖,人自獻於先王義」、陳了翁奏狀等,可謂豪傑之士也。『讀史管見』乃嶺表所作,當時竝無一冊文字隨行,只是記憶,所以其閒有牴牾處。(論胡明仲)
宋、呂祖謙,『宋文鑑』,卷一百十一,經義,「自靖,人自獻於先王」(張庭堅,1074-1131,字才叔)︰
君子之去就死生,其志在於天下國家,而不在於一身,故其死者非沽名,其生者非懼禍,而引身以求去者,非要利以忘君也。仁之所存、義之所主,鬼神其知之矣。昔商之三仁,或生或死,或爲之奴,而皆無愧於宗廟社稷,豈非謀出於此歟!故其相戒之言曰︰“自靖,人自獻於先王。”蓋於是時,紂欲亡而未悟也。其臣若飛亷、惡来者,皆道王爲不善,而不與圖存。若伯夷、太公,天下可謂至賢者,則㓗身退避,而義不與俱亡。夫爲商之大臣,而且於王爲親,惟王子比干、箕子、微子也。三人者欲退而視其敗則不忍,欲進而與王圖存則不可與言,雖有忠孝誠慤之心,其誰達之哉?顧思先王創業垂統以遺其子孫,設爲職業祿位以處天下之賢俊,俾相與左右而扶持之,期不至於危亡而後已。子孫弗率,亡形既見,而忠臣義士之徒,猶不忘先王所以爲天下後世之意,以爲志不上達,道與時廢,亂者非可治也,傾者弗可支也,而臣子所以報先王者,惟各以其能自獻可也。雖然,君子之志不同,而欲死生去就,各當於義,不獲罪於先王,非人所能爲之謀,其在於自靖乎!蓋自商祀之顛隮,則微子以爲心憂,而辱於臣僕,不與其君俱亡,箕子、比干之所羞爲也。微子抱祭器適周以靖後,則奉先王之孝得矣。比干諫不從,故繼以死,則事君之節盡矣。箕子以父師爲囚,猶眷眷不去,則爱君之仁至矣。其死者若愚,其囚者若汚,而其輒去者若背叛,非忠也。然三子皆安然行之,不以所不能爲自媿,而亦不以所能爲媿人,更相勸勉以求合於義,而不期於必同。夫謂先王所以望於後世臣子者,惟忠與孝也。故微子之去,自獻以其孝,比干以諫死,箕子以正囚,則自獻以其忠,則是三子之非苟爲也。處垂亡之世,猶眷眷乎天下國家,而不在一身,故其志之所謀,各出其所欲爲,以期先王之知耳。古所謂“較然不欺其志(『史記』,刺客列傳第二十六︰立意較然,不欺其志)”者,非斯人之謂乎!雖然,『書』載微子與箕子相告戒之辭,而比干不與焉,何哉?人臣之義,莫易明於死節,莫難明於去國,而屈辱用晦者,亦所難辯者也。比干以死無足疑,故不必以告人,而箕子、微子不免“自靖,人自獻于先王”者,重去就之義而厚之故也。不然,安得並稱三仁哉!
立意較然,不欺其志︰
『史記』,卷八十六,刺客列傳第二十六︰自曹沫至荊軻五人,此其義或成或不成,然其立意較然,不欺其志,名垂後世,豈妄也哉!
『宋史』,卷三百四十六,列傳第一百五,「張庭堅傳」︰
庭堅在職逾月,數上封事,其大要言:“世之論孝,必曰紹復神考,然後謂孝。夫前後異宜,法亦隨變,而欲纖悉必復,然則將敝於一偏,久必有不便於民而招怨者,如此而謂之孝,可乎?司馬光因時變革,以便百姓,人心所歸,不爲無補於國家;陳瓘執義論諍,將以去小人,士論所推,不爲無益於宮禁。乞盡復光贈典以悅人心,召還瓘言職以慰士論。又士大夫多以繼志述事勸陛下者,臣恐必有營私之人,欲主其言以自售,謂復紹先烈非其徒不可,將假名繼述,而實自肆焉。今遠略之耗於內者,棄不以爲守,則兵可息;特旨之重於法者,刪不以爲例,則刑可省。近以青唐反叛,棄鄯守湟。既以鄯爲可棄,則區區之湟,亦安足守?臣謂並棄湟州便。”庭堅言論深切,退輒焚稿。
鉤鉅︰
『漢書』,卷七十六,「趙廣漢」︰廣漢爲人彊力,天性精於吏職。見吏民,或夜不寢至旦。尤善爲鉤距,以得事情。鉤距者,設欲知馬賈,則先問狗,已問羊,又問牛,然後及馬,參伍其賈,以類相準,則知馬之貴賤不失實矣。
宋、鄭克,『折獄龜鑑』,卷七,「察賊」,趙廣漢(孫沔附)︰
史稱廣漢善爲鈎距以得事情,謂鈎致其隠伏,使不得遁,距閉其形迹,使不可窺也。世言沔所用爲耳目者,雖左右親信之人,亦莫能曉,殆亦挟此術歟。
『春秋』之例,小君亦君也︰
『春秋左傳注疏』,卷二︰
隱公二年︰
『春秋』:冬,十有二月乙卯,夫人子氏薨。
『胡傳』:按穀梁子曰:夫人子氏者,隱之妻也。卒而不書葬,夫人之義從君者也。邦君之妻,國人稱之曰小君,卒則書薨以明齊也。先卒則不書葬,以明順也。有夫婦然後有父子,有父子然後有君臣,夫婦人倫之本也。入春秋之始於子氏,書薨不書葬,明示大倫。苟知其義,則夫夫婦婦而家道正矣。
隱公三年︰
『春秋』:夏,四月辛卯,君氏卒。
『左傳』:夏,君氏卒,聲子也。不赴於諸侯,不反哭於寢,不祔於姑,故不曰薨,不稱夫人;故不言葬。
「注」︰夫人喪禮有三薨,則赴於同盟之國,一也;既葬日中自墓,反虞於正寢,所謂反哭於寢,二也;卒哭而祔於祖姑,三也。若此則書曰夫人某氏薨,葬我小君某氏,此備禮之文也。其或不赴、不祔則為不成喪,故死不稱夫人薨,葬不言葬我小君某氏,反哭則書葬,不反哭則不書葬。今聲子三禮皆闕,釋側論之詳矣。
『釋例』曰︰夫人子氏赴而不反哭,故不書葬。定姒則反哭而不赴,故書葬而不言小君。以此二者,據『傳』則然理在不惑,但不知赴而不祔,祔而不赴者,辭當云何耳。薨者夫人之死,號不稱夫人,必不得稱薨也。小君者,夫人之別號,不稱夫人,必不得稱小君也。孟子卒,下注云不稱夫人,故不言薨,是夫人與薨文相將也。葬定姒,『傳』曰:不稱小君,不成喪也。注云︰不赴不祔,故不稱小君,傳以不赴,不祔解不稱夫人。注以不赴,不祔解不稱小君,是夫人、小君文相將也。夫人也,薨也,小君也,三者相將之物不可致詰,蓋赴祔二禮果行一事,則具此三文二事並廢,則三文皆去耳。何則撿此傳相配。不赴則不曰薨,不祔則不稱夫人,是稱夫人由祔不由赴也。孟子之傳乃云不赴,故不稱夫人,是稱夫人由於赴不由於祔也。定姒之,《傳》云:不稱夫人,不赴且不祔。又以二事並解不稱夫人,注云赴同祔。姑夫人之禮二者皆闕,故不曰夫人明,是二者俱闕,乃去夫人果行一事則稱夫人,稱夫人則必書薨,書薨則必稱小君所異者,不反哭則不書葬。若不書葬則小君之文無所施耳。即仲子是也,赴同祔,姑皆是夫人之禮,故赴而不祔,祔而不赴,則皆曰夫人某氏薨。惠公自有元妃別為仲子,立廟則仲子未必祔姑,蓋以赴同之故,得稱夫人薨也
『禮記』,「雜記」:“凡婦人,從其夫之爵位。
『儀禮注疏』,漢、鄭玄,卷十一︰
(臣恂)按此論於義為繆,上妻為夫疏,引『曲禮』“婦人從夫之爵,坐以夫之齒。”此乃云,然亦自相矛盾。蓋當時修纂者非一手,故論說或錯出不符,賈氏未審定耳。
漢、毛亨,『毛詩注疏』,卷四,柏舟二章章七句︰
序君子偕老,刺衞夫人也。夫人淫亂失事君子之道,故陳人君之德、服飾之盛,宜與君子偕老也。
正義曰︰以上篇公子頑通乎君母,母是宣姜,故知此亦為宣公夫人、惠公之母也。以言刺夫人,故知人君為小君。以夫妻一體,婦人從夫之爵,故同名曰人君。
是趙盾我也︰
『春秋左傳』,宣公二年︰“秋九月乙丑,晉趙盾弒其君夷皋。”
忮求:嫉害貪求
『詩』,邶風,「雄雉」:百爾君子,不知德行?不忮不求,何用不臧?
既明且哲,以保其身︰
『詩』,大雅,「烝民」︰肅肅王命,仲山甫將之。邦國若否,仲山甫明之。既明且哲,以保其身。夙夜匪解,以事一人。
君實後死之責︰
宋、蘇軾,『東坡全集』,卷八十八,「范景仁墓誌銘」︰
熙寧、元豐間,士大夫論天下賢者,必曰君實(司馬光)、景仁(范鎮)。其道德風流,足以師表當世。其議論可否,足以榮辱天下。二公蓋相得歡甚,皆自以為莫及,曰:“吾與子生同志,死當同傳。”而天下之人亦無敢優劣之者。二公既約更相為傳,而後死者則志其墓。故君實為「景仁傳」,其略曰:“呂獻可(呂誨,1014-1071)之先見、景仁(范鎮,1007-1088)之勇決,皆予所不及也。”軾幸得遊二公間,知其平生為詳,蓋其用舍大節,皆不謀而同。如仁宗時論立皇嗣,英宗時論濮安懿王稱號,神宗時論新法,其言若出一人,相先後如左右手。故君實(司馬光,1019-1086)常謂人曰:“吾與景仁兄弟也,但姓不同耳。”然至於論鍾律,則反覆相非,終身不能相一。君子是以知二公非苟同者。君實之沒,軾既狀其行事以授景仁,景仁志其墓,而軾表其墓道。今景仁之墓,其子孫皆以為君實既沒,非子誰當志之,且吾先君子之益友也,其可以辭!
李建昌、洪承憲、鄭元夏 3인의 연명 상소문 :
『明美堂集』卷七,「請討復疏」(當在本卷論剿邪匪云云之下)︰
特進官臣李建昌、前吏曹參判臣洪承憲、前刑曹參判臣鄭元夏等,頓首上言︰嗚呼!粤在聖上初服,我神貞王后,親揀令族,聿求元妃,俾佐我聖上,承宗廟,子萬姓。迄三十年受天之祜,誕育元良,用啓我丕丕基。惟休惟恤,咸與共之。中經百變,亦旣備嘗。自昨年以來,隣嘖外訌,逆圖內蔓。雖聖上之威斷,尙有不能自由者。况在宮壼之內,安有過失之可言?藉或有之。以聖上齊體之義,念東宮止孝之情,何忍遽至於廢降乎?然則今者之擧,决知非聖上意也。嗚呼!窮天地而所未覩,亘萬古而所未聞。道路相傳,萬口汹汹,皆以爲二十日之變,賊已行弑,但未辨賊之爲我人與日本人而已。『禮』曰︰臣弑其君,在官者殺無赦。又曰︰居君父之讎,不與共天下。不反兵而討?『春秋』之例,小君猶君也。彼閣部諸大臣以下在廷者,獨不知斯義乎?奈何掩匿覆蓋,經旬閱月,恝然若無事?無乃其中亦有貪禍幸變,以售其脅上制下,竊權逞勢之計者耶?不然則是不過姑息之說。其必以爲復讎尙可緩,激變不可再。設使變之再激,何以加於二十日?加於二十日,則有亡而已。然不激而不亡,庸有愈於激而亡乎?且我之所大恐積惴者,强隣耳。然日本人,雖異於廷臣,外臣亦臣也。果有其犯,獨不可以伏我法乎?至如訓鍊兵,則雖其獍凶猘狂,是特朝鮮人種耳。剮之則斯剮矣,磔之則斯磔矣。萬民之輿情如沸,萬邦之公議四發,彼亦安敢復激?要之,作賊者,在兵則兵可誅也,在廷臣則廷臣可誅也,在外國(人)則外國人亦可誅也。匹夫匹婦之死,而不得其命者,猶無不償之寃。豈有國母被弑,而讎終不復者乎?嗚呼!變後今十餘日,上自儲宮,下至臣庶,尙不能發一聲哭,掛一縷麻。天理人情,胡寧忍斯?伏願聖上,亟下明命,還收廢后勑令,備禮發哀,仍行鞫覈,以伸討復,俾八域臣民,少泄貫穹徹壤之慟焉。嗚呼!臣等俱以世祿,厚蒙恩造,値茲凶變,宜死不死,跧伏窮澨,幷闕奔問,籲天痛哭,不能自已。三十年臣事之義,言止於此。惟聖上矜諒焉。臣等無任哀痛崩迫之至。乙未九月初五日,送于內閣。自外還退,十三日,再呈,復自內閣退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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