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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_무진정
2023.1002
[내용] 무진정 / 무진정 가족나들이 / 함안명소
[1] 함안 무진정
無䀆은 조삼 선생의 호
🟦 함안 무진정
.▪️무진정은 1542년 조삼(趙參)선생 (1473~1544)이 후진양성을 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생육신 조려 선생의 손자이며 자신의 호를 따 무진정 (無盡亭)이라고 명명하였다.
▪️생육신은 누구가?
* 세조가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에 대하여 절개가 굳은 사육신은 목숨을 잃었다.
* 죽지는 않았으나 절의가 높았던 생육신은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다.
* 사육신과 생육신 개념은 남효온의 추강집에 의거한 명칭이다.
▪️선생은 17세인 성종20년(148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성주 . 상주에서 지방관을 지냈고, 중앙에서는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독서를 좋아한 올곧은 성격으로 성균관의 생원일 때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손자이다.
▪️정자는 출입문인 동정문( 動靜門)과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정자의 중앙에는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는 뒷마루를 두었다. 마루방과 뒷마루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을 더하였다.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준다.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다시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 주세붕이 무진정 기문을 지었으며,
▪️무진정 정자 앞에는 함안낙화놀이가 열리는 연못이 있다.
무진정 주련
어찌 홀로 전원에서 즐기기만 했겠는가.
한서에 말하는 관리의 치적이 있었다네.
어려운 시기에 처세에 지혜로웠고
칠형제 입신양명하여 술잔을 올리네.
육경을 공부하다 먹는것도 잊으니,
(육경 ; 시경,서경, 역경, 춘추, 예기 = 오경 + 악기)
위아래 구름 그림자 하늘 빛 띄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보내고 맞이하니,
오히려 백성과 나라를 먼저 걱정하네.
무진정 정문 동정문
무진정 댓돌 앞 동물형상 돌
거북? 혹 물개?
생육신 조려 선생 손자 조삼 선생
연산군, 중종 연간
🟦 주세붕 선생이 지은 무진정 기문
[현지 안내판 채록]
▪️지리산이 동녘으로 삼백 리를 치달아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말갈기가 떨치듯 물결이 용솟음치듯 함안의 진산을 이룬 것이 여항산이다.
그 한 가닥이 가볍게 날아오다가 십 리가 채 못 되어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자주 빛 봉새가 새끼를 품은 듯한데 성이 그 위에 자리 잡은 곳이 함안 고을이다.
성산의 왼쪽 갈래가 꿈틀꿈틀 뻗다가, 서북
쪽으로 굽어서 성난 말 같은 기세로 고을의 성을 에워싸고는 동쪽으로 청천에 이르러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곳의 산마루에 정자를 지은 것이 무진정이다.
▪️이 정자는 읍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 곧 우리 조목사 선생이 거처하시는 곳의 동쪽 언덕으로 선생이 이 언덕에 처음 집을 지으신 것이다. 큰 길가에 버려진 하나의 언덕이었고, 읍에서 사람의 왕래가 아주 잦은 곳이었다.
아라가야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 사람, 만 사람이나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다.
오직 선생은 한번 보고 이곳을 가려 잡목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 길을 옮기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중국 한나라의 숨은 선비 장후의 정원과 같은 길을 내어 꽃나무 대나무가 엉켜 하늘을 가리고, 나는 듯한 지붕이 기와가 높이 치솟았으며, 노비의 집들이 언덕 바깥에 늘어섰으니 길 가는 사람들이 신선의 집인 양 바라보았다.
▪️선생이 내게 이르기를 자신이 무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내가 선생을 매양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칸인데 서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모두 창으로 되어있고 창밖에는 단이 있어 구슬 문빗창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큰 냇물이 남쪽에서 굽이쳐 흘러오는데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것이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소리 같으며, 암벽을 돌아 풍탄으로 흘러간다. 시내 밖에는 천 여 그루되는. 벽오동이 있고 동으로 바라보이는 모든 산봉우리는 노송들이 십 리까지 뻗어 울칭하다.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어 돌아갈
곳" 이라 하셨다. 남쪽을 바라보면 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듯 하는데 정자와 마주하는 산이 파산이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눈에 천리나 보이는 들에는 보리가 자라며 푸른 물결이 하늘을 흔들고 곡식이 익으면 황금빛 구름처럼 땅을 덮는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을 열면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신선이
사는 곳의 자주빚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고 했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가 일찌기 귀거래사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증점의 영이귀(*답사자주 ; 안내문에 '중점' 은 오타, '증점' 이다. 논어에서, 증자의 부 증점이 공자에게 대답한' '詠而歸' '즉 노래하며 돌아올 것'이라 한 것.)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많은 녹봉을 받는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잠시 이 고을 일로서 말한다면 이방실 장군은 세상을 뒤엎을만한 충성으로 서울을 회복하여 우리나라를 참혹한 변란으로부터 구제하여 그 공적이 막대하였지만 살아서 횡액을 면치 못하였고 어세겸 정승 같은 분은 온 나라를 빛내는 문장으로 임금의 정사를 도와 많은 선비들의 기둥이 되어 그 명망이 더없이 높았지만 죽은 후에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선생의 낙과 비교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선생은 이런 일들에서 보는 바가 있었음인가? 그리고 선생은 눈앞에 있는 산을 가리켜 죽은 후에 갈 곳으로 삼았으니 이 또한 천명을 아신 것이다.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고, 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 즐거움
을 누릴 수 있었으니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한 것이다. 무진한 선생의 즐거움과 무진한 정자 이 경치가 모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선생의 이름과 더불어 무진할 것이 분명하다. 선생의 휘는 삼(參)이요 자는 노숙으로 함안이 본관이며 같은 고을사람으로서 진실로 덕이 높은 훌륭한 어른으로 벼슬길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한 것
으로 명성이 드러났고 형제가 일곱 분인데 세 분은 문과에 급제하고 한 분은 진사시에 뽑혔으며 동기간에 우애로 서로 빛났으니 고을과 나라에서 이를 영화로운 명예로 여겼다.
▪️내가 이 정자에 이름을 남기게 됨은 얼마나 다행이랴!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오늘날 큰 문장가들이 위 아래로 어깨를 견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무진정의 의의를 남김없이 기록할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나의 우매함을 무릅쓰고 기문을 짓는 것이 또한 외람되지 않겠는가? 사양하여도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니 우선 그 시말을 적어 드리는 바이다.
🟦 괴산재
생육신의 한 사람인 정절공 조려" 선생의 손자인 무진경 조삼을 기리는 집의공파 종중의 재실로 괴항마을 서편 산기슭에 1670년 창건되어 300여 년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조삼 선생의 후손과 인근 청소년들의 교육전당으로 사용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초가로 된 서당이 노후화 되어 불편을 겪었는데. 구한말 동헌의 목재가 매각되자 이 자재를 구입한 후 원래의 자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터를 잡아 1899년 8월 27일(음력) 상량식을 했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고, 걸출한 인재들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학동들이 중심이 되어 격년제로 무진정에서 낙화놀이를 한 것이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3호 함안낙화 놀이의 시초이다.
차츰 신교육제도에 밀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문중의 모임 장소와 시제를 모시는 공간으로 위축됐다.
건물이 산 중턱에 있어 이용하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하여 옛것은 그 자리에 보존하기로 하고. 현재의 위치에 새 보금자리를 지은 후 1992년 5월 31일 괴산재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져와 낙성식을 했다.
2020년 12월
함안조씨 집의공파 종중
괴산재 마당
쌍절각, 조준남, 조계선 부자.
🟫 함안무진정 역내
부자쌍절각(父子雙節間)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5대손이자 이곳에 정자를 세운 조삼(趙參)의 증손자인 조준남의 효행과 그 아들인 조계선의 충절을 함께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 왕명으로 세워진 정려각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이 살던 집이나 마을 입구에 정려문이나 정려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이다.
각(閣)은 정려를 받은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나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임금의 권위에 따라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 조준남(趟俊男)
명종 5년(1547)에 태어나 효행으로 소격서 참봉이 되었다. 선조 30년(1597) 음력 8월에 왜적들이 부장품을 약탈하기 위해 증조부
집의공의 묘를 파헤치자 공은 적중을 뚫고 돌어가 흙으로 관을 덮으며 그들의 야만적 행위를 꾸짓었다. 왜적들이 의로운 자라며 죽이지 않고 강제로 포로로 끝고 가려고 하자 공이
"너회들은 우리나라의 불공대천의 원수다. 너희둘에게 끌려가 더 이상 모욕을 당하기 싫다."
하고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자, 왜적들이 의로운 자라며 옷으로 시신을 덮어주고 달아났다.
고종 5년(1866)에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이 가증(加增)되었다.
🟫 조계선(趙繼先)
조준남의 큰 아들로 선조 3년(1570)에 출생했다.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럽게 되고 부친이 왜적으로 인해 작고하자 무과를 준비해 선조 35년(1603) 급제했다.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1627년)답) 공은 선전관으로 평안도 의주 부윤 이완(李莞 ,이순신 장군의 조카 19세 때 노랑해전 참전)에게 왕명을 가지고 갔다가 음력 1월 14일 후금(청)의 3만 대군이
침략을 하자 이완과 함께 선봉에 나가 적을 무수히 무찔렀으나, 화살은 떨어지고 힘이 다해 이완, 최몽량과 함께 순국 했다.
묘소는 함안군 법수면 사정리 토현에 있는데 생전에 남긴 손톱, 머리털, 웃과 함께 초혼장(
휴) 으로 모셨다. 고종 5년에 병조참판에 가증되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집의공파(執義公派) 종중(宗中)
부자쌍절각
🟫 효자담 孝子潭
조삼(趙參)의 7대손 조경송(趙景松 ; 1678~1747)은 열 살에 어머니를 잃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마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멀리 외출을 하지 못했고 외아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해도 아버지와 친지들이
상심할까 슬픈 표정을 보이지 않았으며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넷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아버지를 봉양했다.
혹독하게 추운 어느 겨울날 넷가 이수지(二樹池)에서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으며 혼자 슬피 울었다.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가 지나가다 우는 사유를 물었는데 "행인이 알 바가 아니오." 라고 하자 더 이상 물지를 못했으며
지나가는 사람을 통해 선생의 효행과 슬픈 사연을 들었다.
박문수는 하늘이 낸 효자라며 탄복을 한 후 함안을 떠나면서 문서로 함안군수에게 쌀과 어육을 내리게 했고 훗날 경상감사로 부임해서 다시 어물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선생이 작고한 후였다.
이 표지석은 조경송 선생이 물고기를 잡던 넷가인 이수지 옆에 처음 세웠으나, 쌍절각 옆으로 옮겼다가 정비 사업을 하면서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함안조씨 집의공파 종종
효자담 비석
무진정 조선(조삼)선생 신도비
신도비는 고관의 무덤이나 유적지 근처에 유적지가 있음울 알리는 비
연못 속의 영송루
무진정 효자담
크지는 않으나 단아하고 아름다운 못이다.
이 연못가에서 함안 낙화놀이가 열리곤 한다.
버드나무 고목
잉어, 비단잉어
무진정 주차장의 큰 솔
엄청 큰 버드나무 위주이고, 단풍이 고운 나무는 없는 것같아 아쉽다.
무진정 부근 함안 가을 황금 들녘
무진정 부근 함안 가을 황금 들녘
가을 하늘 새털구름
[2] 가족나들이
무진정에 앉아서
전속 할머니 모델, 멋진 장소에서~
[3] 함안 명소 몇 곳
▪️삼한시대 변진안야국 부족국가가 아라가야로 발전. 멸망 기록은 없으나, 신라 진흥왕때 신라에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경덕왕 16년 때 함안군 설치.
▪️함안 옛말에 '울고왔다 울고가는 함안 원님'.
부임 도중 산세가 험해 낙심하고, 살아보면 순후한 풍습과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서 떠날 때는 섭섭해 한다는 것.
▪️서북쪽이 낮고 동남쪽이 높아 물줄기가 남강이 있는 동남쪽으로 흘러 逆水로 여겨져 조선왕조시대 홀대를 받았다 한다.
▪️임진왜란 때 의령과 경계인 남강변 남강나루터(군북면 월촌리와 의령읍 정암리 사이) 부근은 곽재우 의병장군이 대승을 거둔 곳이다.
늪지역이어서 왜병들이 마른 곳으로 건너기 위해 말뚝을 미리 박아놨는데 우리가 몰래 늪으로 옮겨 놓아 왜적들이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릴때 기습하는 전법을 썼던 것이다.
▪️6.25때 낙동강 방어선의 최전선 지역으로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
성산 산성 발굴시 아라홍연 씨를 얻었다. 약 800년 전 고려시대 것인데. 싹을 틔워서 아라홍연 테마파크를 이루었다.
함안 아라가야고분등 몇 곳 가야고분은 2023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됨.
말이산 고분군
악양 꽃길
입곡 군립공원
입곡 군립공원
입곡 군립공원
입곡 군립공원
입곡 군립공원
강나루 생태공원 청보리밭
🟫 반구정(伴鷗亭) ; 대산면 장암리 낙동강변에 있는 정자.
▪️조선 명종때 조방(趙방)이 수학한 곳. 조방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을 도와 정암나루를 지켰고 화왕산성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호조참판 추증.
🟫 合江亭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 정자. 1633년(인조 11)에 처음 건립.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기슭 강변정자. 조임도가 은거 수학한 곳.
▪️조임도(趙任道)는 장광현의 제자. 인조반정 후 학행이 뛰어나 천거되어 공조좌랑을 지냈고, 인조효종 때는 대군의 사부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이곳에 은거 여생을 보냈다.
아라홍연 연꾳 테마파크
성산 산성 발굴시 아라홍연 씨를 얻었다. 약 800년 전 고려시대 것인데. 싹을 틔워서 아라홍연 테마파크를 이루었다.
승마공원
악양생태공원
칠원면 무기리. 조선 후기 연당.
▪️영조 4년 때 1728년에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주재성(周宰成)이 의병을 일으켜 김해진의 관병과 합세하여 격파했다.
▪️난이 평정된 후 관군이 연당을 파주고 菊潭이라 하니, 주재성이 국담을 자호하였다.
▪️영조는 양무원종훈일등공신은 서하고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관로에 나서지 않았다.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을 추서했다.
고려동 유적지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키며 살다 간 이 지방 절의 선비촌
장춘사
서산서원
무산사 (武山祠)
▪️우리나라 서원 창설자 주세붕 선생이 함안 출신이다. 주세붕 선생 묘는 칠서면 계내리에 있다.
▪️주세붕 영정은 무릉리 무산사(武山祠)에 수장됨. 무산사는 주세붕 생가터에 세운 주세붕 모신 사당.
무진정 낙화놀이
오횡목 군수가 낙화놀이를 읊은 시(1890)
"달이야 무슨 상관 있어 한 점 구름을 싫어하리요"
총쇄록이라는 일기체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