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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2권 / 정종조 고사본말(定宗朝故事本末)
정종
정종 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 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은, 휘는 경(曔)이며, 자는 광원(光遠)이고, 처음 휘는 방과(芳果)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지정 17년 공민왕 6년 7월 초하룻날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 사저(私邸)에서 낳았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상(將相)까지 이르렀고,태조가 즉위한 다음에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하였다. 무인년 홍무 31년 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9월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를 물려 받고, 경진년 건문(建文) 2년 11월에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는데, 그해 12월에 인문공예(仁文恭睿) 어첩(御牒)에 기록한 휘호에 겹친 글자가 있고 시호 가운데 온인(溫仁) 밑에 공용(恭勇) 두 자가 있으나, 공(恭) 자가 겹쳐 나오므로 어첩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다. 라는 존호를 받았다.왕위에 있은 지 2년이고, 기해년 세종 원년 영락17년 9월 26일 무진에 인덕궁(仁德宮)에서 승하하였으니, 상왕위(上王位)에 있은 지 19년이며, 수(壽)는 63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공정(恭靖)웃사람을 공경하여 섬긴 것이 공이고, 너그럽고 즐겁게 살다가 잘 마친 것이 정이라고 한다. 이라고 하였다.숙종(肅宗) 7년 신유에 추후해서 묘호(廟號)를 정종(定宗)이라 하고 의문장무(懿文莊武)라고 시호를 더 올렸으며, 능은 후릉(厚陵)이다. 풍덕(豊德) 동편 흥교동(興敎洞)에 있으니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경자년(1420) 정월 초사흗날에 장사지냈는데, 표석(表石)이 있다.
○ 비(妃) 순덕온명장의정안 왕후(順德溫明莊懿定安王后) 김씨(金氏)는, 본관은 경주이니,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증 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을미년 지정 15년 정월 9일에 나서 무인년(1386)에 덕빈(德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덕비(德妃)로 올려서 봉하였다. 경진년(1400)에 존호를 순덕(順德)이라고 올리고, 임진년 태종 12년, 영락(永樂) 10년 6월 25일 무인에 인덕궁에서 승하하였는데, 수가 58세고 자녀는 없었다. 숙종 신유년(1681)에 추후하여 휘호를 온명장의(溫明莊懿)라 올렸다. 능은 후릉(厚陵)능은 대왕의 능과 같은 산에 있는데, 임진년(1412) 8월 8일에 장사지냈다. 이다.
○ 아들 열 다섯과 딸 여덟을 두었다.
첫째 아들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 지씨(池氏)가 낳았고, 시호는 민간(敏簡)이다. 철원 최씨(鐵原崔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금천 감무(衿川監務) 치숭(致崇)의 딸이다.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다.
둘째 아들 순평군(順平君) 군생(群生) 기씨(奇氏)가 낳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순창 설씨(淳昌薛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설존(薛存)의 딸이다.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셋째 아들 금평군(錦平君) 의생(義生)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금평군을 추증하였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직(司直) 홍숙(洪宿)의 딸이다.
넷째 아들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의(參議) 종성(宗誠)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안강 김씨(安康金氏)를 재취하였으니, 상호군(上護軍) 중약(仲約)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다섯째 아들 종의군(從義君) 귀생(貴生)문씨(文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종의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양구 유씨(楊口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정(正)으로 찬성(贊成)을 추증한 수빈(守濱)의 딸이다. 해풍 장씨(海豊張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주부(主簿)장균(張均)의 딸이다.
여섯째 아들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이씨가 낳았고,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의녕 남씨(宜寧南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상호군(上護軍) 남심(南深)의 딸이다.
일곱째 아들 수도군(守道君) 덕생(德生)윤씨(尹氏)가 낳았고, 죽은 뒤에 수도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여산 송씨(礪山宋氏)에게 장가 들었으니, 부사(府使) 계성(繼性)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여덟째 아들 임언군(林堰君) 녹생(祿生) 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언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혜안(惠安)이다. 고령 박씨(高靈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소윤(少尹) 박부(朴溥)의 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
아홉째 아들 석보군(石保君) 복생(福生)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석보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원주 김씨(原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대민공(戴敏公) 연지(連枝)의 딸이다.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두었다.
열째 아들 덕천군(德川君) 후생(厚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장수 이씨(長水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양후공(良厚公) 종무(從茂)의 딸이다. 아들 넷과 딸 다섯을 두었다.
열한째 아들 임성군(任城君) 호생(好生)지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임성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평창 이씨(平昌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수(郡守) 계동(繼童)의 딸이다.
열두째 아들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 지씨가 낳았고,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용인 이씨(龍仁李氏)에게 장가들었으며, 부사(府使) 수강(守綱)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다. 전주 최씨(全州崔氏)에게 재취하였으니, 사직(司直) 최수(崔洙)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열셋째 아들 장천군(長川君) 보생(普生)윤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장천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화순 최씨(和順崔氏)에게 장가들었으며, 군사(郡事) 자해(自海)의 딸이다.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다.
열넷째 아들 정석군(貞石君) 융생(隆生)기씨가 낳았고, 죽은 뒤에 정석군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충주 권씨(忠州權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직장(直長) 권돈(權敦)의 딸이다.
열다섯째 아들 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 기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이(昭夷)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사정(司正) 흥선(興善)의 딸이다. 아들 둘과 딸 넷을 두었다.
첫째 딸 함양옹주(咸陽翁主)지씨가 낳았다. 남편은 지돈녕부사 박갱(朴賡)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박갱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득중(得中)이다.
둘째 딸 숙신옹주(淑愼翁主)기씨가 낳았다. 남편은 판돈령부사 양평공(良平公) 김세민(金世民)인데, 아들 넷과 딸 넷을 두었다. 세민의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는 도관찰사(都觀察使) 김겸(金謙)이다.
셋째 딸 덕천옹주(德川翁主)남편은 행부사 변상복(邊尙服)인데,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상복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아버지는 도총제(都總制) 변이(邊頤)이다.
넷째 딸 고성옹주(高城翁主)남편은 지중추부사 김한(金澣)인데,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그 집 족보(族譜)에는 안성위(安城尉) 호평공(胡平公)이라 하였고, 본관은 안산(案山)이며, 아버지는 연성군(連城君) 위정공(威靖公) 정경(定卿)이다.
다섯째 딸 상원옹주(祥原翁主)남편은 행사직(行司直) 조효산(趙孝山)인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효산의 본관은 평양이고, 아버지는 의방(義方)이다.
여섯째 딸 전산옹주(全山翁主)남편은 행사직 이희종(李希宗)인데,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희종의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일곱째 딸 인천옹주(仁川翁主)남편은 행부사(行府使) 이관식(李寬植)인데,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다. 관식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성간(成幹)이다.
여덟째 딸 함안옹주(咸安翁主)남편은 부지돈녕부사 월림군(月林君) 소정공(昭靖公) 이항신(李恒信)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항신의 본관은 경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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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 육신(六臣)의 상왕 복위 모의(上王復位謀議)
○ 동학사(東鶴寺) 《초혼기(招魂記)》에 말하기를, 이개(李塏)공회(公澮) ㆍ박팽년(朴彭年)헌(憲)ㆍ순(珣)ㆍ분(奮)ㆍ파(波)ㆍ녹대(彔大)ㆍ개동(丐同)ㆍ흔산(欣山)ㆍ금년생 여덟 사람 ㆍ성삼문(成三門)맹첨(孟瞻)ㆍ맹년(孟年)ㆍ맹종(孟終)ㆍ헌택(憲澤)ㆍ금년생 일곱 사람 ㆍ하위지(河緯池) 연(璉)ㆍ반(班)ㆍ유성원(柳誠源)귀련(貴連)ㆍ송련(松連) ㆍ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 ㆍ대년(大年)ㆍ기년(耆年)ㆍ영년(永年)ㆍ인년(引年) 박팽년의 아우 ㆍ권자신(權自愼)구지(仇之) ㆍ김문기(金文起)현석(玄錫) ㆍ성 승(成勝)ㆍ삼고(三顧)ㆍ삼빙(三聘)ㆍ삼성(三省)성삼문의 아우 ㆍ유응부(兪應孚)사수(思守) ㆍ박 정(朴崝)숭문(崇文)ㆍ계남(季男)ㆍ즉동(則同) ㆍ윤영손(尹鈴孫)ㆍ송석동(宋石同)창(昌)ㆍ녕(寧)ㆍ안(安)ㆍ태산(太山)네 사람 ㆍ이유기(李裕基)은산(銀山) ㆍ심신(沈愼)올미(㐚未) ㆍ권서(權署)ㆍ권저(權著)ㆍ최사우(崔斯友)ㆍ정관(鄭冠)ㆍ봉여해(奉汝諧)유(細) ㆍ김감(金堪)한지(漢之)ㆍ선지(善之) ㆍ이호(李昊)성손(成孫)ㆍ무손(茂孫) ㆍ이지영(李智英)사이(思怡) ㆍ이의영(李義英)ㆍ장귀남(張貴南)충(冲) ㆍ이말생(李末生)ㆍ이오(李午)철(鐵)ㆍ금(金) ㆍ심상좌(沈上佐)ㆍ황선보(黃善寶)ㆍ조청로(趙淸老)영서(榮緖) ㆍ이휘(李徽)ㆍ김구지(金九知)ㆍ이정상(李禎祥)ㆍ최치지(崔致地)ㆍ득지(得地)ㆍ허조(許慥)연령(延齡)ㆍ구령(九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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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손 이규(李珪)가 ->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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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4권 /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 금성(金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
○ 동학사 《혼기(魂記)》에 쓰인 사람은 유(瑜)ㆍ정종(鄭悰)ㆍ송현수(宋玹壽)ㆍ최면(崔沔)ㆍ최시창(崔始昌)ㆍ이수정(李守禎)ㆍ박수량(朴遂良)ㆍ임진성(任進誠)ㆍ박윤(朴潤)ㆍ홍적(洪適)ㆍ이상손(李祥孫)ㆍ권완(權完)ㆍ이귀(李貴)ㆍ김충(金忠)ㆍ인평(印平)ㆍ유대(柳岱)ㆍ윤기(尹奇)ㆍ김득상(金得祥)ㆍ길유선(吉由善)ㆍ최찬(崔璨)ㆍ조희(曺熙)ㆍ서성(徐盛)ㆍ김옥겸(金玉謙)ㆍ허수(許遂)ㆍ홍구성(洪九成)ㆍ홍옥봉(洪玉峰)ㆍ최승손(崔承孫)ㆍ최자척(崔自滌)ㆍ진유번(陳有蕃)ㆍ조유례(趙由禮)ㆍ목효지(睦孝智)ㆍ성문치(成文治)ㆍ이문(李聞)ㆍ이례숭(李禮崇)ㆍ신경지(申敬之)ㆍ맹지(孟之)ㆍ중지(仲之)ㆍ근지(謹之)ㆍ내관 엄자치(嚴自治)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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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金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 -> 金 -> 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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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4년 임자(1432) 10월 9일(갑오)
14-10-09[02] 정윤 이말생의 아내 이씨에게 사제하다
정윤(正尹) 이말생(李末生)의 아내 이씨(李氏)에게 사제(賜祭)하였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장수하고 단명함은 비록 자연한 이수(理數)에 매인 것이나, 돈목(敦睦)하는 뜻은 진실로 유명(幽明)에 간격이 없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대 이씨는 품성(稟性)이 곧고 아름다왔으며, 자태(姿態)가 단정하고 맑았도다. 세족(世族)의 가문에 태어나서 일찍이 부덕(婦德)의 행할 바를 알았고, 종친(宗親)에게 시집와서 이미 가정을 다스리는 법칙을 투철히 나타내었도다. 바야흐로 오래 살아서 길이 안락한 살림을 누릴 줄로 알았더니, 어찌 묘령(妙齡)으로 갑자기 떠날 줄을 뜻하였으리오. 부음(訃音)이 별안간 이르니, 마음 아파 슬퍼함이 매우 깊도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변변치 않은 제물(祭物)을 드리노라. 아아, 살아서는 친족으로 늘 애호하는 정을 베풀었더니, 죽어서 길이 다르매, 특별히 조휼(弔恤)하는 예(禮)를 더하노라.”
하였다.
[주-D001] 이말생(李末生) :
정종(定宗)의 아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해철 (역) | 1980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0월 9일 甲午 2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정윤 이말생의 아내 이씨에게 사제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賜祭于正尹末生妻李氏。 敎曰:
壽夭之期, 雖已關於理數, 敦睦之志, 固無間於幽明。 惟爾李氏, 稟性貞嘉, 凝姿端淑。 生從世族, 早知維德之行; 來配宗親, 已著宜家之則。 方期壽考, 永享安業。 何圖妙齡, 遽然長逝? 訃音忽至, 傷悼悉深。 爰命禮官, 庸致菲奠。 嗚呼! 生則聯屬, 常申愛護之情; 死而殊途, 特加弔恤之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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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1년 기미(1439) 6월 6일(임오)
21-06-06[04] 이말생 등의 고신을 거두고 구사를 뺏다
임금이 김돈에게 이르기를,
“전일에 원윤(元尹) 이말생(李末生)이 기생 첩을 사랑한 까닭으로 헌사(憲司)의 탄핵을 입었으나, 그 첩을 취한 것이 오래지 않은 이유로써 내가 용서하였더니, 이제 다시 듣건대, 이말생의 음란(淫亂)함은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며, 이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시끄럽게 전지하기를, ‘인덕전(仁德殿)의 아들이 모두 황음(荒淫)하였다.’고 하니, 그 낳은 어미가 올바르지 못한 때문이었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 등이 아뢰고자 한 적이 오래였으나 다만 기회가 없기 때문에 말없이 있었습니다. 이호생(李好生)ㆍ이말생ㆍ이융생(李隆生)은 인덕전의 여러 아들 중에서 더욱 음란한 자들입니다. 이융생은 혹은 미복(微服) 차림으로 거리에 나와 놀며, 세 사람의 행위는 민간에서 시끄러우니 불초(不肖)함이 지극합니다. 그들이 음행(淫行)을 하는 곳을 매일 바꾼다고 하오니, 그 중에는 사통(私通)할 수 없는 여자도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이비의 이 말은 참소(讒訴)함이 아니다. 소년 때에는 조금 광태(狂態)가 있었으나, 이제는 노성(老成)한 독실한 사람인데 어찌 근거없는 일을 내게 말하겠느냐. 이무생(李茂生)ㆍ이의생(李義生)ㆍ이복생(李福生) 등이 서로 사통한 자가 이미 드러났으니 밖으로 내쫓고, 사통한 여자도 본역(本役)으로 돌려보내고, 이호생ㆍ이말생ㆍ이융생은 음란함이 비록 지극하나 사통한 것이 드러나지 아니하였으니, 아직 개(𧪚)와 영(寍)의 예에 의하여 고신(告身)을 거두고 그 구사(丘史)를 빼앗고자 한다. 너의 뜻은 어떠냐.”
하니, 돈이 대답하기를,
“신은 전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범한 바가 과연 상교(上敎)와 같다면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에 꾸지람을 듣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고친다면 역시 다행한 것입니다.”
하므로, 인하여 이말생 등의 고신을 거두고 구사를 빼앗았다.
[주-D001] 인덕전(仁德殿) :
정종(定宗)을 말함.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김익현 (역) | 1971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6일 壬午 4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이말생의 고신을 거두고 구사를 뺏다
○上謂金墩曰: "前日元尹 末生以昵愛妓妾, 被劾憲司, 予以娶妾未久赦之, 今更聞之, 末生之淫亂, 不可勝記。 非獨此也, 民間喧傳仁德殿之子皆荒淫, 以其所生之母不正也。 問於敬寧君 , 對曰: ‘臣等欲啓之久矣, 但無因, 故含默耳。 好生、末生、隆生, 於仁德殿諸子, 尤其淫亂者也。 隆生或以微服, 遊於街里, 三人之行, 喧於民間, 不肖極矣。 其所淫者, 每日更之, 焉知其中有不可私之女乎?’ 之此言, 非讒訴也。 年少時小有狂態, 今爲老成篤實之人也, 夫豈以無根之事言於予乎? 茂生、義生、福生所相私者, 旣見矣, 放黜于外, 所私者亦還本役。 好生、末生、隆生淫亂雖極, 所私者未著, 姑令依𧪚、寍例, 欲收告身, 奪其丘史, 於汝意何如?" 墩對曰: "臣前此未聞矣, 其所犯果如上敎, 則不可不懲。 年少之時, 受責自新, 亦幸也。" 仍命收末生等告身, 奪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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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3년 을해(1455) 1월 30일(병자)
03-01-30[04] 병조에 전지하여 지흥미ㆍ한보혁ㆍ양처공 등의 고신을 도로 주다
병조(兵曹)에 전지(傳旨)하여 지흥미(池興美)ㆍ한보혁(韓普赫)ㆍ양처공(梁處恭)ㆍ진중거(陳仲擧)ㆍ김하생(金何生)ㆍ최점(崔霑)ㆍ차진(車進)ㆍ조사준(趙思準)ㆍ홍유근(洪裕勤)ㆍ허파회(許波回)ㆍ김흥렬(金興烈)ㆍ박귀(朴貴)ㆍ고가물(高加勿)ㆍ이생(李生)ㆍ이춘경(李春敬)ㆍ김현(金鉉)ㆍ황양(黃良)ㆍ유연(柳衍)ㆍ이사준(李思俊)ㆍ박충무(朴忠武)ㆍ이운(李運)ㆍ정주생(鄭周生)ㆍ서이(徐彝)ㆍ김신(金信)ㆍ이길안(李吉安)ㆍ손중(孫中)ㆍ배균(裵鈞)ㆍ이하(李夏)ㆍ백인기(白仁奇)ㆍ김맹중(金孟中)ㆍ이성부(李成富)ㆍ김계손(金繼孫)ㆍ신맹린(辛孟磷)ㆍ송대평(宋大平)ㆍ이맹문(李孟文)ㆍ김수생(金守生)ㆍ이순(李順)ㆍ김윤화(金閏和)ㆍ염을지(廉乙之)ㆍ김귀손(金貴孫)ㆍ김산(金山)ㆍ방중신(方仲信)ㆍ김옥산(金玉山)ㆍ유사경(劉思敬)ㆍ김세의(金世猗)ㆍ엄신(嚴信)ㆍ김환(金還)ㆍ노중련(盧仲連)ㆍ박중산(朴仲山)ㆍ박효신(朴孝信)ㆍ윤찰읍금(尹察邑金)ㆍ박치상(朴稚祥)ㆍ서익명(徐益明)ㆍ서효남(徐孝南)ㆍ이말생(李末生)ㆍ박영생(朴永生)ㆍ장을명(張乙明)ㆍ남치명(南致明)ㆍ최경(崔敬)ㆍ최승말(崔升末)ㆍ김예(金禮)ㆍ박을(朴乙)ㆍ임학(林鶴)ㆍ양득수(梁得守)ㆍ방춘산(方春山)ㆍ박밀(朴密)ㆍ오춘부(吳春富)ㆍ함봉산(咸奉山)ㆍ배우(裵祐)ㆍ유순의(劉順義)ㆍ박득미(朴得美)ㆍ강중남(姜仲南)ㆍ김자진(金自珍)ㆍ박영근(朴永根)ㆍ김자진(金自珍)ㆍ전효선(全孝善)ㆍ홍상덕(洪尙德)ㆍ경선(景善)ㆍ김호생(金好生)ㆍ이흠(李欽)ㆍ신자강(申自康)ㆍ방중선(方仲善)ㆍ이상(李尙)ㆍ김순(金順)ㆍ전귀달(田貴達)ㆍ이말생(李末生)ㆍ김두(金斗)ㆍ한중산(韓仲山)ㆍ빈석(賓石)ㆍ조치화(曹致和)ㆍ박자순(朴自順)ㆍ김득생(金得生)ㆍ임중경(林仲敬)ㆍ김익희(金益希)ㆍ원성련(元成鍊)ㆍ홍보(洪寶)ㆍ홍우명(洪禹明)ㆍ박숭년(朴崇年)ㆍ이문(李文)ㆍ안득성(安得成)ㆍ김자산(金自山)ㆍ김계선(金繼善)ㆍ박인부(朴仁富)ㆍ김정(金鼎)ㆍ이흥덕(李興德)ㆍ유경로(兪卿老)ㆍ이종지(李宗知)ㆍ임권(任權)ㆍ이언양(李彦陽)ㆍ강한경(康漢敬)ㆍ박림(朴霖)ㆍ신자하(申自河)ㆍ한우(韓雨)ㆍ이맹절(李孟節) 등의 고신(告身)을 도로 주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김구진 이식 (공역) | 1977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 1월 30일 丙子 4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병조에 전지하여 지흥미·한보혁·양처공 등의 고신을 도로 주다국역원문.원본 보기
○傳旨兵曹, 還給池興美、韓普赫、梁處恭、陳仲擧、金何生、崔霑、車進、趙思準、洪裕勤、許波回、金興烈、朴貴、高加勿、李生、李春敬、金鉉、黃良、柳衍、李思俊、朴忠武、李運、鄭周生、徐彛、金信、李吉安、孫中、裵鈞、李夏、白仁奇、金孟中、李成富、金繼孫、辛孟磷、宋大平、李孟文、金守生、李順、金閏和、廉乙之、金貴孫、金山、方仲信、金玉山、劉思敬、金世猗、嚴信、金還、盧仲連、朴仲山、朴孝信、尹察邑金、朴稚祥、徐益明、徐孝南、李末生、朴永生、張乙明、南致明、崔敬、崔升末、金禮、朴乙、林鶴、梁得守、方春山、朴密、吳春富、咸奉山、裵祐、劉順義、朴得美、姜仲南、金自珍、朴永根、金自珍、金孝善、洪尙德、景善、金好生、李欽、申自康、方仲善、李尙、金順、田貴達、李末生、金斗、韓仲山、賓石、曺致和、朴自順、金得生、林仲敬、金益希、元成鍊、洪寶、洪禹明、朴崇年、李文、安得成、金自山、金繼善、朴仁富、金鼎、李興德、兪卿老、李宗知、任權、李彦陽、康漢敬、朴霖、申自河、韓雨、李孟節等告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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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2년 병자(1456) 6월 21일(기미)
02-06-21[01] 모반과 관련된 최득지ㆍ최치지ㆍ권저ㆍ최시우ㆍ성삼성 등의 처벌을 명하다
사정전(思政殿) 문 밖의 월랑(月廊)에 나아가서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와 대간(臺諫) 등을 명소(命召)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박대년(朴大年)ㆍ이유기(李裕基)ㆍ성삼고(成三顧)ㆍ최득지(崔得池)ㆍ최치지(崔致池)ㆍ최사우(崔斯友)ㆍ박인년(朴引年)ㆍ이의영(李義英)ㆍ정관(鄭冠)ㆍ봉여해(奉汝諧)ㆍ성삼성(成三省) 등 17명을 끌어다가 그 도당을 추문(推問)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최치지ㆍ최득지ㆍ권저(權著)ㆍ최사우ㆍ박인년ㆍ이의영ㆍ김감(金堪)ㆍ봉여해ㆍ김선지(金善之)ㆍ이호(李昊)ㆍ이유기(李裕基)ㆍ박대년ㆍ성삼성ㆍ성삼고ㆍ정관ㆍ장귀남(張貴男)ㆍ이말생(李末生) 등은 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과 결당하여 역모를 꾀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모조리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어미와 딸ㆍ처첩(妻妾)ㆍ조손(祖孫)ㆍ형제(兄弟)ㆍ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 고을의 노비(奴婢)로 영속(永屬)시키고, 백부(伯父)ㆍ숙부(叔父)ㆍ형제의 자식은 먼 지방으로 안치(安置)하였으며, 그 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인 자는 외방에 보수(保授)하였다가 나이 차기를 기다려 영속(永屬)하거나 안치(安置)시키게 하고, 친 자식으로 나이 15세 이하인 자도 역시 외방에 보수(保授)하였다가 나이 차기를 기다려 변방 고을의 관노(官奴)로 영속시키게 하였다. 백관(百官)들을 군기감(軍器監) 앞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거열(車裂)하여서 두루 보이고 저자에 3일 동안 효수(梟首)하였다. 이유기(李裕基)의 아비 이맹진(李孟畛)은 연좌시키지 말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주-D001] 명소(命召) :
임금이 비밀히 의정 대신(議政大臣)이나 육조(六曹)ㆍ대간(臺諫) 등을 대궐로 부르던 일.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양대연 (역) | 1978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1일 己未 1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모반과 관련된 최득지·최치지·권저·최시우·성삼성 등의 처벌을 명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註 351]
○己未/御思政殿門外月廊, 命召義禁府提調及臺諫等入侍, 拿致朴大年、李裕基、成三顧、崔得池、崔致池、崔斯友、朴引年、李義英、鄭冠、奉汝諧、成三省等十七人, 推問黨與。 義禁府啓: "崔致池、崔得池、權著、崔斯友、朴引年、李義英、金堪、奉汝諧、金善之、李昊、李裕基、朴大年、成三省、成三顧、鄭冠、張貴南、李末生與李塏、河緯地、成三問、朴彭年等結黨謀逆, 罪應凌遲處死。 籍沒緣坐, 竝依律文施行。" 從之。 母女、妻妾、祖孫、兄弟、姊妹、若子之妻妾, 永屬邊邑奴婢, 伯ㆍ叔父、兄弟之子, 安置遠方, 其年未滿十六者保授外方, 待年滿永屬安置, 親子年十五以下亦保授外方, 待年滿永屬邊邑奴。 聚百官於軍器監前路環立, 車裂以徇, 梟首于市三日。 裕基父孟畛, 特命勿緣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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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3년 정축(1457) 8월 21일(임자)
03-08-21[02] 형조에 명하여 조석문ㆍ강맹경ㆍ박종우 등에게 계집종을 내려 주다
형조에 전지하기를,
“영광(靈光)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중비(仲非)를 도승지(都承旨) 조석문(曹錫文)에게 내려 주고,.....
운봉(雲峯)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기덕(奇德)과 이말생(李末生)의 딸 석비(石非)를 부윤(府尹) 강곤(康袞)에게 내려 주고, 아산(牙山)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보덕(寶德)을 도절제사(道節制使) 유하(柳河)에게 내려 주고, 강진(康津)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약비(若非)를 관찰사(觀察使) 원효연(元孝然)에게 내려 주고, 울산(蔚山)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흔덕(欣德)을 중추(中樞) 최유(崔濡)에게 내려주고, 전주(全州)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한비(漢非)를 참판(參判) 황효원(黃孝源)에게 내려 주고, 김해(金海)에 영속(永屬)한 계집종 녹지(祿只)를 좌승지 윤자운(尹子雲)에게 내려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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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년 무인(1458) 1월 25일(갑신)
04-01-25[01] 후원에서 관사하고 입번한 내금위에게 소형명을 써 습진케 하다
후원에 나아가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양녕 대군 이제(李禔)ㆍ임영 대군 이구(李璆)ㆍ함녕군 이인(李䄄)ㆍ계양군 이증(李璔)ㆍ의창군 이공(李玒)ㆍ밀성군 이침(李琛)ㆍ익현군 이관(李璭)ㆍ영천 부원군 윤사로(尹師路)ㆍ진남군(鎭南君) 이종생(李終生)ㆍ도평정(桃平正) 이말생(李末生)ㆍ거평정(居平正) 이복(李復)ㆍ진례정(進禮正) 이형(李衡)ㆍ병조 판서 홍달손(洪達孫), 지중추원사 양정(楊汀)ㆍ홍윤성(洪允成)ㆍ박강(朴薑), 승지 등과 행 호군(行護軍) 민발(閔發)ㆍ겸사복(兼司僕) 등이 입시하였다. 입번(入番)한 내금위 등으로 하여금 소형명(小形名)을 써서 습진(習陣)하게 하였다.
[주-D001] 소형명(小形名) :
군사들이 훈련(訓練)할 때 지휘하던 법의 하나. 깃발과 북으로써 좌작진퇴(坐作進退)를 지휘하였는데, 그 규모를 간략하게 한 것임.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해철 (역) | 1978
○甲申/御後苑觀射, 讓寧大君 禔、臨瀛大君 璆、諴寧君 䄄、桂陽君 璔、義昌君 玒、密城君 琛、翼峴君 璭、鈴川府院君 尹師路、鎭南君 終生、桃平正 末生、居平正 復、進禮正 衡、兵曹判書洪達孫、知中樞院事楊汀ㆍ洪允成ㆍ朴薑、承旨等及行護軍閔發、兼司僕等入侍。 令入番內禁衛等用(小刑名)〔小形名〕 習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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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6년 경진(1460) 10월 4일(병오)
06-10-04[02] 중궁과 더불어 황해도ㆍ평안도를 순행하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황해도(黃海道)ㆍ평안도(平安道)를 순행(巡幸)하니, 왕세자(王世子)가 수가(隨駕)하였고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ㆍ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ㆍ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ㆍ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ㆍ순성군(順城君) 이개(李𧪚)ㆍ보성경(寶城卿) 이합(李㝓)ㆍ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ㆍ귀성군(龜城君) 이준(李逡)ㆍ신종윤(新宗尹)ㆍ이효백(李孝佰)ㆍ도평정(桃平正) 이말생(李末生)ㆍ무림정(茂林正) 이선생(李善生)ㆍ율원령(栗元令) 이종(李徖)ㆍ제천령(堤川令) 이온(李蒕)ㆍ부윤령(富潤令) 이효숙(李孝叔)ㆍ계천령(溪川令) 이계(李誡)ㆍ은산 부령(銀山副令) 이철(李徹)ㆍ고정감(古丁監) 이겸(李謙)ㆍ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ㆍ좌찬성(左贊成) 황수신(黃守身)ㆍ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ㆍ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원형(朴元亨)ㆍ이조 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ㆍ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ㆍ청성위(靑城尉) 심안의(沈安義)ㆍ동지중주원사(同知中樞院事) 이윤손(李允孫)ㆍ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질(金礩)ㆍ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극감(李克堪), 행 상호군(行上護軍) 김처의(金處義)ㆍ김한(金瀚)ㆍ한종손(韓終孫)ㆍ민발(閔發)ㆍ이비(李埤)ㆍ이징규(李澄珪)ㆍ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 인순부 윤(仁順府尹) 윤사흔(尹士昕), 상호군(上護軍) 정종(鄭種)ㆍ이사평(李士平)ㆍ봉석주(奉石柱)ㆍ유사(柳泗), 병조 참의(兵曹參議) 구신충(具信忠) 등이 호종(扈從)하였다. 내금위(內禁衛) 2백으로 사자위(獅子衛)를 삼고, 별시위(別侍衛) 갑사(甲士) 2백을 뽑아 사대(射隊)ㆍ장용대(壯勇隊)를 삼고, 파적위(破敵衛) 1백을 병합하여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권남(權擥)ㆍ윤사로(尹師路)ㆍ윤사윤(尹士昀)ㆍ최항(崔恒) 등을 수상(守相)으로 삼아 도성(都城)에 머물러 서무(庶務)를 총괄하여 다스리게 하고, 성봉조(成奉祖)ㆍ심회(沈澮)ㆍ조석문(曹錫文)ㆍ이극배(李克培) 등을 수장(守將)으로 삼아 군무(軍務)를 총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식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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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2년 병술(1466) 8월 22일(신유)
12-08-22[01] 충순당에서 수령의 탐오와 침학 등을 의논하고 관찰사에 유시하다
임금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서 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ㆍ병조 판서 김국광(金國光)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서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이 탐오(貪汚)하여 백성을 침학(侵虐)하고 대납(代納)하는 등의 일에 대하여 의논하고, 종친(宗親) 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ㆍ옥산군(玉山君) 이제(李躋)ㆍ도평 도정(桃平都正) 이말생(李末生)ㆍ무림 도정(茂林都正) 이선생(李善生)ㆍ금산 도정(金山都正) 이연(李衍)ㆍ호산 부정(湖山副正) 이현(李鉉)ㆍ복성수(福城守) 이영(李穎)과 조관(朝官) 정자양(鄭自洋)ㆍ안훈(安訓)ㆍ허선(許譔)ㆍ권중희(權仲禧)ㆍ최근공(崔謹公)ㆍ정효종(鄭孝終)을 문폐사(問弊使)로 삼아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어 거핵(擧劾)하도록 하고, 이어서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였는데, 유시는 다음과 같았다.
“국가에 아무런 일이 없으면 상하(上下)가 모두 편안하고, 국가에 일이 있으면 상하(上下)가 모두 괴로우니, 그런 까닭으로 일을 벌려놓기를 좋아하는 것이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국가에 일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은 모두 관리들이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한 개의 탐심(貪心)뿐이다. 내가 일찍이 교지(敎旨)를 내려서 번번이 알아듣도록 타일렀는데도 간사한 관리의 폐해는 조금도 고쳐짐을 볼 수가 없으니, 어느 시기에 화락(和樂)한 태평의 정치를 기다리겠는가? 지금 백성들로 하여금 상공(常貢)ㆍ상세(常稅)ㆍ군무(軍務)ㆍ농병(農兵) 이외에는 일체(一切) 무사(無事)하도록 하여 국가의 대체(大體)를 알고 전무(田畝)에 편안히 살면서 처자(妻子)가 재미있게 놀고 먹고 마시도록 할 뿐이다. 적당한 사건(事件)을 빨리 관문(官門)에 게시(揭示)하고서 삼가 받들어 시행하라.
1. 늘 시행하고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 있다. 【늘 시행하고 빠뜨려서는 안될 것은 유사(有司)가 이를 지키니, 대전(大典)에 기재된 상공(常貢)ㆍ상세(常稅)ㆍ군무(軍務)ㆍ권농(勸農) 등의 첨가(添加)해서도 안되고 빠뜨려서도 안될 일정한 법과 같은 것이다.】
1. 한 때만 시행할 것이 있다. 【한 때만 시행할 것은 위에서 이를 명령하는 것이니, 한 때에 구하는 식이(食餌) 1근(斤), 쑥즙[艾葺] 10냥, 겨릅대[麻骨] 1묶음[束], 범이 사람을 물은 데에 구료(救療)하는 술 1배(杯) 등 상공(常貢) 이외의 물건과 같은 것이다.】
1.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사욕(私欲)으로 백성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사욕(私欲)으로 백성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만일 조금이라도 백성에게서 부당하게 징수한다면 비록 사용(私用)이 아닐지라도 모두 장죄(贓罪)로써 논죄(論罪)되며, 또 부지런히 법을 받들지 않고서 잠시동안이라도 사무를 보지 않는다면 비록 사무에 방해되는 것이 없더라도 모두 고신(告身)을 회수(回收)한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재호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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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3월 7일 壬申 4번째기사 1467년 명 성화(成化) 3년제사의 인신 문적을 위조한 무리 중 자수한 자의 죄를 용서하다
서리(書吏) 장치(張致)가 호조(戶曹)와 여러 전곡(錢穀)을 관장하는 제사(諸司)의 인신 문적(印信文籍)을 위조(僞造)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그 무리의 오망(吾亡)과 이말생(李末生) 등은 자수(自首)를 하여, 오망과 이말생 등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노영수 (역) | 1979
○書吏張致, 僞造戶曹及諸掌錢穀、諸司印信文籍, 得利甚多。 其黨吾亡、末生等自首, 原吾亡、末生等罪。
X이씨성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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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즉위년 무자(1468) 11월 7일(계해)
00-11-07[02] 한계희ㆍ임원준ㆍ유자광ㆍ홍응ㆍ홍상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한계희(韓繼禧)를 서평군(西平君)으로, 임원준(任元濬)을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로, 유자광(柳子光)을 무령군(武靈君)으로, 홍응(洪應)을 겸 경연 지사(兼經筵知事) 춘추관 동지사(春秋館同知事)로, 홍상(洪常)을 당양군(唐陽君)으로, 안중경(安仲敬)을 원성군(原城君)으로, 이연(李衍)을 금산군(金山君)으로,
이말생(李末生)을 도평군(桃平君)으로, 이청(李倩)을 천읍군(川邑君)으로, 이선생(李善生)을 무림군(茂林君)으로, 이창(李昌)을 수성군(壽城君)으로 삼았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유승주 채희순 (공역) | 1979
○以韓繼禧爲西平君,
任元濬兼義禁府判事,
柳子光 武靈君,
洪應兼經筵知事春秋館同知事,
洪常 唐陽君,
安仲敬 原城君,
衍 金山君,
末生 桃平君,
倩 川邑君,
善生 茂林君,
昌 壽城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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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월 1일 丙辰 1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영창전에 나아가 삭제를 행하다
임금이 영창전(永昌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이날 2엄(二嚴)001) 이 지난 뒤에도 사복(司僕)이 오히려 연(輦)의 차비(差備)를 올리지 아니하고, 겸사복(兼司僕)과 내금위(內禁衛)도 뜰에 열립(列立)해 있는 자가 적었으므로, 명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 손차면(孫次綿)과 좌랑(佐郞) 최팔준(崔八俊)·내승(內乘)002) 우신(禹晨)을 가두게 하고, 또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내금위 장(內禁衛將)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과 겸 사복장(兼司僕將)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을 문죄(問罪)케 하였다가, 곧 명하여 논죄(論罪)하지 말게 하였다.
[註 001]2엄(二嚴) : 궁중의 의식(儀式)이나 군대의 행군(行軍)에서 대오(隊伍)를 정제(整齊)하게 하기 위하여 북을 쳐서 알리는 신호. 초엄(初嚴)에 대오를 정돈하고, 2엄에 무기와 의장(儀仗)을 갖추고, 3엄에 모든 채비를 완료함.
[註 002]내승(內乘) : 궁내에 따로 둔 사복시(司僕寺), 곧 내사복(內司僕)의 한 벼슬.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노영수 (역) | 1979
○丙辰朔/上詣永昌殿, 行朔祭。 是日二嚴後, 司僕猶未進輦, 兼司僕、內禁衛列庭者少, 命囚兵曹正郞孫次綿、佐郞崔八俊、內乘禹晨,
又令承政院, 問內禁衛將桃平君 末生、兼司僕將新孝伯, 尋命勿論。
신종군 효백은, 정종(定宗)의 별자(別子)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아들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조참판 혹은 판서라 하였다. 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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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년 경인(1470) 9월 19일(갑오)
01-09-19[03] 선정전에 나아가서 연을 베풀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주연(酒宴)을 베풀고, 일본 국왕(日本國王)의 사신 상관인(上官人) 중 심원동당(心苑東堂)과 부관인(副官人) 중 종소 서기(宗紹書記)ㆍ중 수린 서기(壽藺書記) 등 94인을 인견하였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ㆍ함양군(咸陽君) 이포(李𧦞)ㆍ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ㆍ진남군(鎭南君) 이종생(李終生)ㆍ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ㆍ강양군(江陽君) 이융(李瀜)ㆍ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ㆍ하동 부원군(河凍府院君) 정인지(鄭麟趾)ㆍ고령 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ㆍ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ㆍ인산 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ㆍ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조석문(曹錫文)ㆍ남양 부원군(南陽府院君) 홍달손(洪達孫)ㆍ영의정(領議政) 윤자운(尹子雲)ㆍ우의정(右議政) 한백륜(韓伯倫)ㆍ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변(李邊)ㆍ어효첨(魚孝瞻),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수온(金守溫)ㆍ좌찬성(左贊成) 노사신(盧思愼)ㆍ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ㆍ우찬성(右贊成) 윤필상(尹弼商)ㆍ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이
입시(入侍)하였다. 술이 세 번 돌아가자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객인(客人)이 이미 나가니, 다시 명하여 인정전(仁政殿) 문 밖 남쪽 행랑에서 식사 대접을 하게 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전헌식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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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5년 신해(1791) 2월 21일(병인)
15-02-21[02] 장릉 배식단에 배향할 사람의 명단
정단(正壇)에 배식한 사람은 32인 【안평 대군(安平大君) 장소공 이용(章昭公李瑢), 금성 대군(錦城大君) 정민공 이유(貞愍公李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 이영(忠景公李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 이어(貞悼公李𤥽), 영풍군(永豊君) 정렬공 이전(貞烈公李瑔), 판중추원사 이양(李穰),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충민공(忠愍公) 송현수(宋玹壽), 예조 판서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영양위(寧陽尉) 헌민공(獻愍公) 정종(鄭悰), 돈령부 판관 권완(權完), 의정부 영의정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의정부 좌의정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이조 판서 충정공(忠貞公) 민신(閔伸), 병조 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 판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도총부 도총관 충숙공(忠肅公) 성승(成勝), 증 병조 판서 행 별운검(行別雲劒) 충강공(忠强公) 박쟁(朴崝), 형조 판서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 증 이조 판서 행 승정원 우승지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 증 이조 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증 이조 판서 행 집현전 직제학 충간공(忠簡公) 이개(李塏), 증 이조 판서 행 예조 참판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 증 이조 판서 행 성균관 사예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 증 병조 판서 행 도총부 부총관 충목공(忠穆公) 유응부(兪應孚), 증 사헌부 지평 하백(河珀), 좌참찬 정간공(貞簡公) 허후(許詡), 집현전 수찬 허조(許慥), 증 이조 참판 박계우(朴季愚), 순흥 부사(順興府使)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도진무 정효전(鄭孝全), 증 공조 참판 영월부 호장 엄흥도(嚴興道).】 별단(別壇)에는 1백 인인데 사적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이 8인, 【평안 감사 조수량(趙遂良), 충청 감사 안완경(安完慶), 선공 감 부정 이명민(李命敏), 산릉 장무(山陵掌務) 이현로(李賢老), 형조 정랑 윤영손(尹鈴孫), 이조 좌랑 심신(沈愼), 안악 군사(安岳郡事) 황의헌(黃義軒), 고양 현감(高陽縣監) 고덕칭(高德稱).】 연좌되어 죽은 사람은 1백 90인이었다. 【지부(知部) 김승규(金承珪), 의춘군 이우직(宜春君李友直), 덕양군 이우량(德陽君李友諒), 참판 황보석(皇甫錫), 병사(兵使) 조숭문(趙崇文), 첨지중추원사 이석정(李石貞), 사간원 헌납 이승윤(李承胤), 진무(鎭撫) 원구(元矩),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경유(李耕㽥), 성균관 사예 조충손(趙衷孫), 군기 판사(軍器判事) 윤처공(尹處恭), 직장(直長) 김승벽(金承璧), 직장 황보흠(皇甫欽), 고양 현감 박하(朴夏), 군기 녹사(軍器錄事) 조번(趙藩)ㆍ이승효(李承孝)ㆍ민보창(閔甫昌)ㆍ민보해(閔甫諧)ㆍ민보석(閔甫釋)ㆍ윤경(尹涇)ㆍ윤위(尹渭)ㆍ윤탁(尹濯)ㆍ윤식(尹湜)ㆍ이건금(李乾金)ㆍ이건옥(李乾玉)ㆍ이건철(李乾鐵)ㆍ이백금(李白金)ㆍ이수동(李秀同)ㆍ조향동(趙香同)ㆍ조귀동(趙貴同)ㆍ김정(金晶)ㆍ하석(河石)ㆍ이보인(李保仁)ㆍ이차(李差)ㆍ김말생(金末生)ㆍ안막동(安莫同)ㆍ양옥(梁玉)ㆍ최노(崔老)ㆍ김상지(金尙志)ㆍ고염석(高廉石)ㆍ조석강(趙石岡)ㆍ박이녕(朴以寧)ㆍ황보가마(皇甫加麿)ㆍ황보경근(皇甫京斤)ㆍ김금목일(金金木壹)ㆍ김조동(金祖同)ㆍ김수동(金壽同)ㆍ이계조(李繼祖)ㆍ이소조(李紹祖)ㆍ이장군(李將軍)ㆍ이승로(李承老)ㆍ민석이(閔石伊)ㆍ윤개동(尹介同)ㆍ윤효동(尹孝同)ㆍ조계동(趙季同)ㆍ이해(李諧)ㆍ이심(李諶)ㆍ이사문(李沙門)ㆍ이주령(李住令)ㆍ이모(李謨)ㆍ이우경(李友敬)ㆍ김산호(金珊瑚)ㆍ김갯동(金㖋同)ㆍ김득천(金得千)ㆍ김복천(金卜千)ㆍ황경손(黃敬孫)ㆍ황장손(黃長孫)ㆍ황석동(黃石同)ㆍ이한산(李漢山)ㆍ최면(崔沔)ㆍ이수정(李守禎)ㆍ박수량(朴遂良)ㆍ임진성(任進誠)ㆍ김겸(金謙)ㆍ허축(許逐)ㆍ홍적(洪適)ㆍ홍구성(洪九成)ㆍ홍옥봉(洪玉峯)ㆍ최영손(崔泳孫)ㆍ최자척(崔自滌)ㆍ진유번(陳有蕃)ㆍ조유례(趙由禮)ㆍ성문치(成文治)ㆍ이문(李聞)ㆍ이숭례(李崇禮)ㆍ신경지(申敬之)ㆍ신맹지(申孟之)ㆍ신중지(申仲之)ㆍ신근지(申謹之)ㆍ김옥겸(金玉謙)ㆍ김광은(金匡殷), 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 고양 기관(高陽記官) 황중은(黃仲銀), 고양 기관 황식배(黃植培), 집현전 교리 박인년(朴引年), 집현전 수찬 박기년(朴耆年), 도진무(都鎭撫) 이유기(李裕基), 부사(府使) 성삼고(成三顧), 정랑 성삼성(成三省), 성균관 학유 하기지(河紀地), 박사(博士) 박대년(朴大年), 별시위(別侍衛) 이의영(李義英)ㆍ이정상(李禎祥), 중추원 녹사 이지영(李智英), 성균 생원 박헌(朴憲), 성균 생원 하소지(河紹地)ㆍ성맹첨(成孟瞻)ㆍ성맹평(成孟平)ㆍ성맹종(成孟終)ㆍ박순(朴珣)ㆍ박분(朴奮)ㆍ이공회(李公澮)ㆍ하호(河琥)ㆍ하연(河璉)ㆍ하반(河班)ㆍ유귀련(柳貴連)ㆍ유송련(柳松連)ㆍ유사수(兪思守)ㆍ박숭문(朴崇文)ㆍ송석동(宋石仝)ㆍ송창(宋昌)ㆍ송녕(宋寧)ㆍ최득지(崔得地)ㆍ최치지(崔致地)ㆍ김구지(金九知)ㆍ성삼빙(成三聘)ㆍ권서(權暑)ㆍ권저(權著)ㆍ최사우(崔斯友)ㆍ정관(鄭冠)ㆍ봉여해(奉汝諧)ㆍ김감(金堪)ㆍ김한지(金漢之)ㆍ김선지(金善之)ㆍ이호(李昊)ㆍ장귀남(張貴男)ㆍ이오(李午)ㆍ
이말생(李末生)ㆍ심상좌(沈上佐)ㆍ박영년(朴永年)ㆍ황선보(黃善寶)ㆍ권구지(權九之)ㆍ김현석(金玄錫)ㆍ허연령(許延齡)ㆍ허구령(許九齡)ㆍ조청로(趙淸老)ㆍ이상손(李祥孫)ㆍ박양함(朴良諴), 관찰사 유귀산(庾龜山)ㆍ유오산(庾鰲山), 학생(學生) 심희철(沈希哲), 학생 박수명(朴守明), 순흥 품관(順興品官) 안순손(安順孫)ㆍ김유성(金由性)ㆍ안처강(安處强)ㆍ안효우(安孝友), 순흥 기관(順興記官) 중재(仲才), 환관 김연(金衍)ㆍ김대정(金大丁)ㆍ한숭(韓崧)ㆍ지정(池淨)ㆍ이귀(李貴)ㆍ인평(印平)ㆍ유대(柳臺)ㆍ윤기(尹奇)ㆍ박윤(朴閏)ㆍ길유선(吉由善)ㆍ최찬(崔粲)ㆍ조희(曺熙)ㆍ서성대(徐盛代)ㆍ엄자치(嚴自治)ㆍ김득성(金得誠)ㆍ김득상(金得祥)ㆍ맹인 지화(池和)ㆍ나갈두(羅乫豆), 별감(別監) 돌중(乭中), 전농시(典農寺) 노비 목효지(睦孝智), 순흥(順興) 관노(官奴) 정유재(鄭有才)ㆍ범삼(凡三)ㆍ석정(石丁)ㆍ석구지(石仇知)ㆍ범윤(凡尹), 풍산(豊山) 관노 이동(李同), 순흥 군사 황치(黃緻)ㆍ신극장(辛克長), 여인으로는 궁녀 양씨(楊氏)ㆍ자개(者介), 이오(李午)의 아내 아가지(阿加之), 무녀(巫女) 용안(龍眼)ㆍ불덕(佛德)ㆍ내은덕(內隱德)ㆍ덕비(德非).】
【원전】 46 집 207 면
ⓒ 한국고전번역원 | 권정안 (역) | 1993
첫댓글 신역 태종실록 > 태종 13년 계사 > 6월 22일 > 최종정보
태종 13년 계사(1413) 6월 22일(기사) 양력 1413-07-19
13-06-22[02] 상산부원군 강계권이 졸하다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계권(康繼權)이 졸하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영평(靈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공신(功臣)의 하등(下等) 규례로 장례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강계권은 바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오빠이다.
[주-D001] 공신(功臣)의 하등(下等) 규례 : 태종 12년(1412)에 종친과 대신(大臣)의 국장(國葬)에 대한 격례(格例)를 정하였는데,
재내 대군(在內大君)ㆍ정1품ㆍ1등 공신은 상등(上等)으로,
재내 제군(在內諸君)ㆍ종1품ㆍ2등 공신은 중등(中等)으로,
원윤(元尹)ㆍ정윤(正尹)ㆍ실직(實職)을 맡은 정2품ㆍ검교 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자ㆍ3등 공신은 하등으로
구분하여 그에 맞게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太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