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비련(悲戀)
김치양의 음모는 가장 은밀히 진행되었으나
워낙 치밀한 점이 부족했던 탓으로 어느새 누설되어 왕의 귀에 들어갔다.
"김우복야가 제 자식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왕은 진노하였다.
그러나 그 노여움은 이내 수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모후께서 그 자를 총애하시니..."
왕은 머리를 싸안고 번민했다.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정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왕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김치양을 벌하자면
태후와의 사이를 백일하에 드러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누를 태후에게까지 끼치게 된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 왕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김치양이 자기 자식을 세우려고 거사하기 전에 선수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왕위를 대량원군에게 물려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치양도 제 자식을 세우려는 뜻을 단념할는지도 모른다.)
☞ 대량원군 순(大良院君 詢)은
태조의 여덟 째 아들 욱의 아들이며
모친은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后皇甫氏)다.
황보씨는 바로 천추태후의 여동생이었는데 형과 함께 경종의 비가 되었으나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한탄하고 있었다.
헌정왕후의 사제(私第)는 마침 욱(郁)의 집과 가까웠다.
지금은 몰락한 왕족에 속하지만 어쨌든 욱은 죽은 남편인 경종의 숙부 뻘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왕래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접촉하면 정이 통하는 것이 남녀간의 상례이다.
욱과 헌정왕후 사이에도 접촉이 자주 있는 동안에
어느덧 정이 통하게 되었고 왕후는 마침내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태기가 있음을 알게 되자 왕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 나라의 임금을 모시던 몸으로서 홀로 되었다하여 다른 남자와 정을 맺는다는 것만도
그 당시로서는 큰 망신인데 그 상대가 또한 왕족이고 보니
일이 드러나면 이중 삼중의 추문이 되는 셈이었다.
☆☆☆
헌정왕후는 형 천추태후와는 달라서 마음이 약한 여인이었다.
"어찌하면 좋아요? 차라리 죽고만 싶어요."
왕후는 욱의 가슴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울었다.
그러나 욱 으로서도 무슨 신통한 대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글세, 이 일이 모두 내 잘못에서 일어난 일이니
내가 모든 허물을 쓰기로 하겠소. 좀 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
그라는 동안에도 죄의 씨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만삭이 다 되었다.
번민이 극도에 달한 왕후는 거의 미친 사람같이 되었다.
"애를 낳으면 어떡하나?
내가 애를 낳으면 어떡하나?"라는 말만 헛소리처럼 외우고 있었다.
그러기에 순산할 때가 다 되어 진통이 엄습하자
다른 사람과는 정 반대인 힘을 쓰고 있었다.
"애를 낳으면 안돼! 애를 낳으면 안돼!"
주문처럼 외우면서 안간힘을 썼다.
그러한 모습을 곁에서 보며 아기 아버지 되는 욱은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자연한 노력이 자연의 섭리를 이겨낼 까닭이 없었다.
왕후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리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하더니
"이젠 더 참을 수 없구료!"
한마디하고는 야릇한 비명을 지르자
"으아!"소리와 함께 해산을 하고야 말았다.
아이는 남아였다. 바라지도 않던 옥동자였다.
그 아기가 바로 대량원군이었던 것이었다.
해산을 하자 왕후는 그 자리에 실신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소생하지 못하였다.
아이를 낳지 낳으려고 한 부자연한 노력이 모체를 극도로 상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여보, 마마!"
욱은 슬피 죽어간 헌정왕후를 얼싸 안고 더운 눈물을 뿌릴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비밀은 백일하에 드러났고 그 당시의 임금 성종도 사태를 방임할 수 없게 되었다.
"왕실의 풍기가 문란해지면 곧 나라 강기를 어지럽히는 법이라,
숙(叔)을 사수현(泗水縣)으로 귀양 보내니 과히 섭섭히 여기지 마오."
왕은 욱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였다.
노염(老炎)이 아직도 맹위를 숙이지 낳는 칠월 일일,
정배의 길을 가는 비련의 공자 욱의 감회는 자못 착잡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은 영영 사별하고
자기 몸은 낯선 고장으로 떠나게 되니 다감한 그의 가슴속은 눈물뿐이었다.
與君同日出皇畿 그대와 더불어 황성을 떠났건만
君己先歸我未歸 그대 이미 먼저 가고 나는 아직 못 가누나
旅檻自嗟猿似 나그네 외로운 몸 우리에 갇힌 잔나비 같아
離亭還羨馬如飛 떠나간 그대만 나는 말처럼 부러워라 떠나
帝城春色魂交夢 황성의 봄빛은 꿈속에나 보려나
海國風光淚滿衣 바다를 바라보니 눈물만 옷깃을 적시도다.
聖主一言應不改 상감의 한 말씀 고칠 길 없으니
可能終使老漁磯 고기잡이 신세로나 몸을 마치리라.
이것은 욱이 그때의 자기 심정을 읊은 시다.
☆☆☆
그 후 성종은 욱의 소생을 궁중에 데려다
유모로 하여금 기르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다시 부친의 곁으로 내려보냈다.
타향에서 외로운 세월을 보내는 욱의 심사를 딱하게 여긴 때문인지,
또는 혈친을 찾는 아기의 처지를 불쌍히 생각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근엄한 성종으로서는 관대한 처사라 하겠다.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대량원군이었지만
차차 성장하여 목종 때에 이르자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물망에 오르게 되었다.
목종에겐 원래 소생이 없는데 가까운 혈족을 찾아보니
결국 대량원군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
이러한 경쟁자를 야심만만한 김치양이 그대로 둘 까닭이 없었다.
"태후! 우리 아이에게 대통을 계승케 하려면 눈의 가시가 바로 대량원군이구료."
치양은 천추태후를 꼬였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에겐 곧 이모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자기 소생보다 더 살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
"중을 만들어 산 속으로 쫓아버리든지 아주 없애버리든지 하는 길밖에 없겠죠."
"죽여버리기는 불쌍하고 하니 절로 보내어 중이나 만듭시다."
이리하여 대량원군은 마침내 숭교사(崇敎寺)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숭교사는 김치양 일파가 장악하고 있는 절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왕위를 물려 줄 생각이 있는 목종으로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 그러던 참에 대량원군이 사람을 시켜
밀서(密書)를 바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치양이 별식이라하여 음식을 보냈다.
<산중에서 기름진 음식을 드실 기회가 없으실터이니
이것을 자시고 몸을 보하시오.>라는 전달이었다.
원래 자기가 중이 된 것도 김치양의 농간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대량원군이었다.
(그런 자가 무슨 정성이 뻗쳤다고 이제 와서 보할 음식을 보내겠는가?
필시 이것도 어떤 무서운 흉계일 게다.)
이렇게 생각하고 수저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마당에서 임자 없는 개 두어 마리가 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대량원군은 음식 한술을 떠서 개들에게 던져 주어 보았다.
그랬더니
개들은 그 음식을 받아먹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대량원군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 자가 이젠 나를 죽이러 드는구나.)
그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임금께 밀서를 써서 그 사실을 알린 것이었다.
밀서를 읽어보고 임금은 크게 놀랐다.
즉시 사람을 보내어 대량원군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기게 했다.
☆☆☆
목종 9년의 일이었다.
나중에 이 일을 안 김치양은 더욱 대량원군을 해칠 마음을 굳게 했다.
(임금이 이렇게 두둔하는 걸 보니
어디까지나 그 자에게 왕위를 물려 줄 생각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 자를 더욱 살려 둘 수는 없어.)
치양은 이번에는 신혈사로 자객을 보냈다.
그때 대량원군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절의 늙은 중이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그 노승은 왕의 밀지를 받고 대량원군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급히 이곳을 피하시오."
노승은 숨가쁘게 말했다.
"왜 그러오? 무슨 일이 일어났소?"
"지금 보니 산문에 험상궂은 무사들이 들어섰는데 필시 김치양이 보낸 자객일 거요."
그 말을 듣자 대량원군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렇지만 이제 와서 어디 가서 숨는단 말이요."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소승만 따라오시오."
노승은 대량원군을 인도하여 앞장 서 가더니 절 한 구석 마루 밑창을 들었다.
대량원군이 이것에 몸을 의탁하게 될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미리 파둔 비밀 장소였다.
대량원군은 곧 그 지하실 속에 몸을 숨겼다.
과연 잠시 후, 무사들이 들이 닥쳤다.
그리고 대량원군의 거처를 묻는다. "지금 이절엔 계시지 않소."
노승은 시침 뚝 떼고 말했다.
"허튼 수작 말어! 이 절에 계시다는 걸 자세히 듣고 왔는데
우리를 속이려 든다면 네 신상에도 좋지 않단 말야."
한 무사가 눈을 부라리며 얼러댔다.
그러나 노승은 태연했다.
"부처를 모시는 몸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소?
그분은 원래 산수를 좋아하시는 터라, 때를 가리지 않고 산야를 배회하신 다오.
그러니 지금쯤 어디 계신지 내가 어찌 안단 말이요?"
"그래? 그럼 우리가 이 절을 샅샅이 뒤져도 군소리는 없겠다?"
"마음대로 하구료."
무사들은 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 지하실에 숨은 대량원군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대량원군은 절에도 마음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밤낮 지하실 속에 숨어 있기도 괴롭고 해서 낮이면 이른 새벽부터 근처 산골을 배회했다.
그러나 그렇게 불안한 속에서도 등극할 날의 꿈만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 그날도 대량원군은 맑은 계곡을 지나다가 시 한 수를 얻었다.
一條流出白雲峯 한 줄기 물이 백운봉에서 흘러 나와
萬里滄溟去路通 만리 푸른 바다로 길을 잡아 통하도다.
英道潺(?)岩下在 길 잃고 바위 밑에 잔잔하게 감돌아도
不多時日到龍宮 멀지 않은 날에 용궁에 이르리라.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자기의 처지를 한 줄기 시냇물에 비긴 것으로서
용궁에 도달할 날이 있으리라는 것은 곧 등극할 날이 있으리란 뜻일 것이다.
☞ 또 이런 시를 읊은 적도 있었다.
小小蛇兒 藥欄 조그만 뱀 한 마리 난간에 도사리니
滿身紅銀自斑 온 몸에 붉은 무늬 비단처럼 곱도다.
莫言長在花林下 오래도록 꽃 숲 아래 있음을 말하지 말라.
一旦成龍也不難 하루아침에 용이 됨도 어지럽지 않으리라.
이 시 역시 자기를 조그만 뱀에 비겨
용이 될 날, 즉 등극할 날을 꿈꾸고 있는 것이었으니
대량원군은 과연
김치양이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