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5 연중6주간 화 – 133위 061° 황 요한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133위 061° ‘하느님의 종’ 황 요한
이름 : 황 요한
출생 : 1839년, 수원
순교 : 1866년 12월 16일, 수원
황 요한은 수원 초평리(현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부모 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에게 성사를 받고[0.1] 1867년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한 황 빈첸시오는 그의 형이다.[1]
황 요한의 가족은 수차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주하면서 가난해져 궁핍하게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황 요한은 모든 가난을 감수하며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것은 황 요한이 혼인하여 양지 은다라니(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의 응달안리)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상황이 점점 급박해지자 황 요한은 잠시 한 비신자에게 아내와 재산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뒤 다른 지역으로 피신처를 물색하러 떠났다. 그러나 그 비신자는 다른 마음을 먹고 그의 아내와 재산을 갈취하려고 포교에게 황 요한을 밀고하였다.
피신처를 구한 황 요한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포교는 곧바로 그를 체포하였고, 황 요한은 그 자리에서 많은 매를 맞아 팔 하나가 부러지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런 다음 포교에게 이끌려 같은 마을에서 체포된 신자들과 함께 수원 관아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 16일(음력 11월 10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2]
[註]__________
[0.1] 한수(한강) 이남을 관할하던 다블뤼 주교는 내포에서 활동하다가 1864년 늦여름부터 수원 샘골 등 경기도 일원에서도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때 황 요한이 다블뤼 주교한테 성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 후 다블뤼 주교는 내포 신리로 돌아오고 오메트르 신부가 수원 샘골 등 경기도 서남부 일대를 사목하였다.
그 뒤 조선 천주교회는 대박해에 휘말리게 된다. 1866년 1월 남종삼 요한은 ‘방아책’을 가지고 대원군과의 만남 후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이에 따라 김계호 토마스는 황해도 일원을 사목 방문 중인 베르뇌 주교에게, 이유일 안토니오는 내포 신리에 거처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를 찾아가 남종삼의 방아책 제안과 대원군의 면담 요청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다블뤼 주교는 내포에서 1월 25일에, 베르뇌 주교는 황해도에서 1월 29일에 각각 한성부에 도착해 서울 모처에서 대원군과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종삼 요한은 대원군을 만난지 한 달이 지나서 1866년 1월 31일(음 12월 15일) 주교들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대원군을 찾아갔지만, 그 사이에 정세가 변하자 대원군의 태도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가 1866년 정월에 급박하게 단행된다.[0.2] 병인박해(1866-1872)로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필두로 신자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0.2] 고종실록 3권 1866년 1월 기록
1) 1월 5일(양 2월 19일)
- 형조에서 사학을 믿은 전장운과 최형에게 대명률을 적용하라 주청
2) 1월 11일(양 2월 25일)
- 우포도청에서 사교를 전파한 서양인을 체포하였다고 보고
- 대신들이 차자를 올려 사교를 믿은 죄인을 벌하도록 주청
- 사교를 믿은 죄인 남종삼을 잡아들이라는 주청
- 죄인 남종삼과 같은 집안인 남이윤 등이 죄인을 잡아 벌하도록 상소
3) 1월 15일(양 3월 1일)
- 남종삼 등을 소환에 대한 주청을 윤헌
4) 1월 16일, 양력 3월 2일
- 죄인을 추국할 위관으로 영의정을 임명
- 좌우포도청에서 옥에 갇혀있는 죄인[0.3]을 의금부로 압송하였다고 보고
- 사교를 배반할 것을 맹세한 이선이를 석방
5) 1월 18일(양 3월 4일)
- 사교 죄인 최형이 출판한 책을 모두 거두어 불태움
6) 1월 20일, 양력 3월 6일)
- 사교 죄인 남종삼과 홍봉주 및 서양인 4명을 효수
7) 1월 21일(양 3월 7일)
- 양사에서 남종삼 등의 처자까지 형벌을 적용하도록 주청하였으나 불허
- 사학의 책과 판각을 수색하여 불태워 버리라는 의정부 주청
8) 1월 23일(양 3월 9일)
- 사학죄인 전장운과 최형을 효수
9) 1월 24일(양 3월 10일)
- 대사헌 임긍수가 남종삼의 가족들도 벌하도록 주청하였으나 묘당이 품처토록 비답
- 대왕대비가 사교를 금하는 교서를 반포하도록 하명
- 사교 무리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안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주청
- 남종삼과 홍봉주의 아들들을 잡아들이라고 주청하자 조건부 윤허
10) 1월 25일(양 3월 11일)
- 천주교 죄인 정의배, 우세영과 서양인 2명[0.4]을 효수하여 경중토록 하게 하라 주청하자 윤허
[0.3]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월 16일(양력 3월 2일) : 좌우포도청에서, ‘옥에 갇혀있는 죄인 張 베르뇌, 白 유시도마릐아(유스토), 徐 볼뤼(볼리외), 金 백다록(도리)이다. 이상의 4명은 프랑스(法國) 사람이다. 홍봉주(洪鳳周)·이선이(李先伊)·정의배(丁義培)·최형(崔炯)·전장운(全長雲) 등을 모두 의금부에 압송하여 넘겼습니다.’라고 아뢰었다.
[0.4]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이다. 두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측의 요청으로 시복재판 과정에서 제외되었다.
1) ‘가톨릭평화신문’ 2016.3.20. [1356호] 기사 : 푸르티에 신부 시복 위한 역사 조사 더 필요 - ‘부산교회사연구소 학술연구발표회에서 제기돼’
부산교회사연구소는 12일 ‘병인박해 순교자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의 시복재판’을 주제로 학술연구발표회를 개최했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는 1866년 3월 11일 군문효수형을 받고 정의배·우세영 성인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시복재판 과정에서 제외된 인물이다. 주제 발표자 조현범(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두 신부는 1964년 시복재판 과정 중 ‘역사적 조사가 더 보완돼야 한다’는 이유로 제외됐다”며 “인간적 과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보다 그 나약함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순교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자 했던 처절한 과정을 조명해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두 신부는 여러 추문으로 시복 과정에서 제외됐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여전히 의문스러운 부분이 남아있다”면서 “순교자의 성덕이 오로지 시복재판의 결과에만 좌우될 성질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덧붙여 “두 신부와 관련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한 연구를 통해 한국 교회의 순교 영성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프티니콜라 신부에 대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는 두통이 어떻게나 심해졌던지 광증과 비슷한 정신착란 발작을 자주 일으키기에까지 이르렀다.…베르뇌 주교는 신학교를 보살피고 언어를 연구하는데 푸르티에 신부를 도와주라고 그를 보냈다. 그들은 거의 5년을 같이 지내며 같은 일을 하고 둘이 다 자주 앓을 때에 서로 정답게 간호를 하였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같은 날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함께 천국의 길에 들어서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의 우정을 확립하여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2) ‘평화가톨릭신문’ 2018.9.9. [1481호] 기사 : ‘시복시성 추진 이유’
시복시성(諡福諡聖)의 시(諡)는 ‘죽은 이에게 드리는 이름이나 호칭’으로 시호(諡號)를 뜻한다. 임금이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사후에 시호를 내리듯 가톨릭교회도 순교자나 생전에 거룩하게 살고 교회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사후에 공적으로 칭호를 준다. 그것이 복자(福者)와 성인(聖人)이다. 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이유는 그 대상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 사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성인 공경을 통해 그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 전구하기 위해서다. 시복시성 대상자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증거자’들이다. 하지만 순교했다는 이유만으로 시복시성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순교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삶이다. 순교했으나 생전에 잘못된 표양으로 병인박해 시복재판 과정에서 제외된 프티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1] 『병인치명사적』, 24권, 103면.
[2] 『병인치명사적』, 24권, 102-103면. 이 내용은 서울 삼호정(현 서울시 용산구 산천동)에 살던 황 요한의 아들 안드레아가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