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수. 윤운해
최초로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한 앙반 부부
정광수 : ?~1801, 세례명 바르나바. 여주에서 참수
윤운혜 : 7-1801. 세례명 마르타, 서소문 밖에서 참수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가마실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1791년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세례를 받고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정광수는 이웃 마을에사는 천주교 신자 윤운혜(尹雲惠, 마르타)와 혼서(婚誓) 없이 결혼하였는데, 이는 천주교 신자가 아닌 그의 부모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윤운혜는 윤유일의 사촌 동생으로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아버지 윤선과 어머니 이 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후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한강개로 이사한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언니 윤점혜와 함께 1797년에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밤마다 묵주깎고 교리서 베껴
정광수의 고향 가마실과 윤운혜의 고향 점들은 조그만 산을 가운데 둔 이웃 마을로 마을 사람들끼리 왕래가 잦았다. 정광수와 결혼한 윤운혜는 처음에는 시가(嫂家)에서 살았는데, 시부모가 신자가 아니어서 계명을 지키며 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운혜는 교회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다. 이 때문에 그녀는 시집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더욱이 시부모는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다.
제삿날이 다가오자 윤운혜는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로, 교회에서 엄하게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할 수 없다. 그리고 외교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계명을 지키며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어렵겠다' 고 생각하고 1799년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이에 앞서 1797년 7월경 서울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웠던 정광수는. 주 신부의 요청에 따라 여주에 사는 김건순에게 신부의 편지를 전달하는 등. 여주에 있으면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었다. 그러다가 1799년 서울 벽동으로 이사한 정광수 부부는 홍시호, 홍문갑, 최해두, 조섭, 이용겸, 김계완, 홍익만, 강완숙, 윤점혜, 정복혜 등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인 교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마당 빈터에 따로 기도하는 집을 짓고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자주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또 이웃에 사는 최해두, 조섭 등과는 서로 담장을 허물고 한집안같이 지냈으며, 성화, 성물, 교회 서적 등을 신자들에게 보급함으로써 신심 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조선에는 성물이 매우 부족하였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상본도 없고,묵주도 없고,교리서도 부족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이들 부부는 밤이면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고, 나무를 깎아서 묵주를 만들고, 붓으로 교리서를 베껴 써, 낮이면 몰래 신자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보급하였다.
윤운혜와 정광수 부부의 교리서 및 성물 보급은 조선 초기 교회사에서 처음 있은 일이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이들 부부는 자신들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을 예감하였다. 더구나 정광수는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체포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1801년 2월 포졸들의 급습을 받아 먼저 체포된 윤운혜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천주교 신자로서 주님을 위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신앙을 고백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4월 2일(양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한편 포졸들의 수사망이 조여 오자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잠시 몸을 피했던 정광수는, 더 이상 법망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9월에 자수하였다. 정광수는 포도청에서 수없이 곤장을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신앙을 고백한 뒤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여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현재 이들 부부는 수원교구에서 시복이 청원된 상태이며. 1987년 9월 15일 축복식이 거행된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이들의 가묘가 모셔져 있다.
▲ 문초와 형벌이 끝난 순교자들을 옥에 가둘 때에는 대부분 ’칼‘을 씌웠다. 중죄인인 경우에는 이 칼과 함께 손에는 수갑인 ’축‘을, 그리고 발에는 ’차꼬‘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