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를 기르는 방법 중 하나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자신과 자기 결점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을 하면 불쾌하고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기분 나빠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화를 낸 뒤 화를 냈다는 사실 때문에 화를 내며, 속상해 한 뒤 그때문에 또 슬퍼하고 언짢은 말을 한 뒤에 공연히 그런 말을 했다고 자책하는데, 이는 큰 잘못입니다. |
이런 식으로 하면 마음이 끊임없이 불안해지고 늘 분노에 젖어 있게 됩니다. 비록 두 번째 분노로 처음 분노가 사그라진다 해도 다음에 새로운 분노를 일으키는 구실이 됩니다. 그 외에도, 자신에 대한 분노와 짜증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자손심에서 생긴 것이며, 그 자존심은 우리를 교만으로 이끕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조용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멀리해야 합니다. 법관은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죄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만일 분노에 이끌려 판결하면, 그 판결은 법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법관의 사사로운 감정에 따른 것이 되고 맙니다. |
우리가 죄를 뉘우칠 때에도 조급하게 굴 것이 아니라 차분하고 확실하게 통회해야 합니다. 감정적인 통회는 우리 죄의 경중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성향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정덕을 쌓는 데 힘쓰는 사람은 이것을 거스르는 사소한 잘못에도 질색하며 자책하지만, 타인을 모함한 죄나 비방한 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
이와는 반대로 비방을 큰 죄로 여기는 사람은 남을 비난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정덕을 거스르는 잘못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자기 양심을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
필로테아 님, 아버지가 자식을 꾸짖을 때 화를 내기보다 점잖고 사리에 맞게 훈계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가 있듯이, 어떤 죄를 범했을 때에도 자신을 너무 심하게 자책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잘못을 보속하겟다는 결심을 세워햐 합니다. 이때 생기는 통회의 심정은 과격한 후회나 자책보다 마음속에 더 깊게 스며들 것입니다. |
예를 들면, 그대가 허영에 빠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으면서도 허영에 빠졌을 때, '그렇게 곧게 결심하고도 또 허영에 빠지다니 내 자신이 정말 한심하고 부끄러워 죽겠다. 나는 정말 구제 불능이라구나. 하느님께 불충했으니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본단 말인가!' 하며 그대를 들볶는 대신,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고 '가련한 내 영혼아, 허영에 빠지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빠져 버렸구나. |
어서 용기를 내어 일어나 다시는 이 구렁에 삐지지 않도록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자! 하느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니 이제부터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하며 부드럽게 그대 자신을 타이르십시오. 또한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고해 사제의 지도에 따라 이를 실천에 옮길 방법을 모색하십시오. |
이처럼 부드럽게 타이르는 방법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자신을 엄하게 질택하고 훈계하는 방법을 쓰십시오. 그러나 엄한 질책 뒤에는 자비롭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신뢰함으로써 그대 마음을 달래십시오. |
자기 영혼이 시들고 타락해 가는 것을 깨달은 시편 저자가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하느님을."(시편 43.5) 하고 노래하며 자신을 달랬던 것처럼 하십시오. |
만일 불행하게도 죄를 범해 넘어진다면 고요히 그대 마음을 달래어 다시 일으키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무력함을 깊이 깨닫고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나 좌절한 일에 대해 당황하지 마십시오. 병이 들면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저 다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말씀을 저버린 죄를 깊이 뉘우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부족한 덕을 기르고자 다시금 노력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