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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화가 난다. 배불러도 화가 난다. 극도의 배고픔과 극도의 배부름을 동시에 느낄 때 나는 가장 화가 난다. 그럴 때마다 샐러드를 먹는다. 촉촉한 식이섬유들로 만족할 만큼 속이 씻궈지면 다시금 자극들을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바깥음식과 더불어 바깥 자체에 질리면 나는 날 것을 먹길 원한다. 꾸며진 것들이 온갖 혼합되며 부벼지는 요리의 장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부서지고, 변색되고, 최선을 다해 향을 내고, 꾸덕하게 몸을 감싸고, 열기를 견디는 일이 기괴하게 여겨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개같은 욕망을 이기지 못해 조리된 그것들을 입에 쑤셔 넣고 배를 빵빵하게 채우고 난 뒤의 뒤틀린 기분이 내 아침과 낮과 밤을 갉아먹었음을 눈치 챘을 때, 나는 샐러드를 먹는다.
양파가 없다. 아까 샐러드를 만들 때, 양파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있었지만 가져올 수 없었다. 나는 양파 없이도 만족하는 법을 학습해왔으며, 계속 학습해가야만 한다. 그래서 양파 없는 샐러드를 먹기로 한다. 원래는 서너가지 재료로만 간단하게 만들어 먹으려고 했지만, 양파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아주 푸짐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 종류의 채소를 넣고, 세 종류의 새싹을 넣고, 토마토와 사과를 넣고, 참치를 넣고, 바질 가루를 뿌리고, 바질페스토를 넣고, 오리엔탈 소스와 발사믹 액을 섞어 뿌린다. 샐러드를 먹는 내내 양파 생각을 한다. 식도에 머무른 것들을 꿀꺽 삼켜대며, 다른 한 입을 밀어넣는다. 뱃속이 거의 다 채워져간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샐러드를 밀어넣으며 나는 양파 생각을 한다. 접시가 거의 비워져 갈 때까지 나는 양파 생각만 한다. 다 먹었다. 몸뚱아리는 잔뜩 불러있지만, 허기는 그 깊이를 더해 간다. 양파 넣은 샐러드를 먹기 전까지 허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배는 부른데 몸은 이전보다 더 긴장상태이다. 노력은 가상했다만, 오늘 밤에도 나는 부족하게 잠들 것이다.
매일 허기가 진다. 문제는 먹어도 허기가 진다. 허기는 어떤 결핍으로부터 출발하여 돌연 강박의 길을 걷는다. 나를 허기지게 한 것은 양파가 아니다. 나에게 부재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 부재에 대한 강박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 애꿎은 양파의 머리채를 잡고 물 만난 듯 발현된 것이다. 허기가 지면 무뎌져 있던 강박들이 고개를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극단적이고 날선 그들은 제 주인과 그 밖의 것들을 해치곤 한다. 결핍을 채우려는 몸부림이 강박으로 끝날 때마다 몸과 정신은 타격을 입는다. 양파가 그 몇 번째 과정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어느새 약골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치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한동안 분명 꽤 행복했는데, 아주 본질적인 곳에서 악취가 나고 있었음을 알았다. 나의 방은 나날이 더러워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라고 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방 안에는 실시간으로 내가 남기는 것들이 즐비해져가고, 그 위로 먼지가 쌓여갔다. 인간 하나가 하루를 살게 하는 데는 거추장스러운 과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나를 옥죄는 그 과정들로부터 피난해 온 방 안에서마저 내가 남기는 것들로 인해 내 동선은 제한되어간다. 나는 점점 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시간을 감지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 지경의 나는 침대에 갇히게 되었다.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시체에 대한 생각을 한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시체와 시체 같은 사람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묻는다. 나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얼마전의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시체를 더 선호한다. 시체는 안으로 썩어들어갈지라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껍데기를 생성하고, 벗어버리기를 반복한다. 무섭거나 더러워서 보호하려다가, 자유로우려다가, 다시 보호하려다가, 자유로우려다가 생을 마감한다. 시체는 그 최종의 껍데기인 것이다. 침대 밑, 바닥 가득 껍데기가 쌓여 있다. 내가 벗어 던진 껍데기들의 우악스런 잔해들이 나를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내가 뱉은 숨들이 내 숨을 점점 막는다. 당장 환기를 시켜야겠다 싶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내 몸은 약골을 넘어 녹아내려서 창을 열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껍데기들을 해치고 가 창을 열었다. 창 밖에서 바람이 들어오면서 껍데기들이 바스락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큰 일을 해내고 다시 침대에 눕자, 껍데기를 만들거나 벗을 힘조차 없어져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숨 붙은 시체가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앗아진 숨 같은 것이 과연 무엇이길래 숨이 있는데도 이리 힘이 없는지, 나를 시체로 만든 그것의 부재에 대해 추론하기 시작했다. 시작하자, 금세 결론이 났다. 나는 내가 아무에게도 잘해주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남 중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남도, 그리고 나도 사랑하지 않아서 나는 결론적으로 정말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만물 중에 단 하나도, 비물질조차도 내 마음에 침투하지 못했던 걸까. 언젠가부터 나는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사랑이 많은 게 더 고생스러운 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 줄 사랑까지 끌어 모아 나 자신에게 물을 준다는 그 좋은 핑계도 어쩐지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원경의 나는 나의 또 다른 부재를 찾았는데, 그건 바로 나의 지반이 없다는 것이었다. 있긴 있었지만 아주 좁고, 위태롭고, 없는 것만 못하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남은 고사하고, 날 위한 나의 사랑이 아예 거짓이었다기보단 작물에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불안정한 지반 위에 선 것에 과하게 물을 준 것이다. 그러니 그게 잘 살 리가 없지, 금방 시체가 되지. 그런 시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나 자신이더라도, 뿌리 뽑히고 축축하게 파열된 갓 시체를 어떻게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한동안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나의 잘못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전의 나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돌파하기를 즐겨보려 했겠지만 나는 지금 즐길 수가 없는 상태다. 즐김이라는 그 드높은 도약에 뛰어들기엔 나는 지극히 약골 상태다. 만약 그랬다가는 아마 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새처럼 고꾸라져 죽거나, 몸이나 정신이 오랜 시간 잠든 불구가 되거나, 어리석은 다이버가 될 확률이 다반사다. 그럼 결국 다시 시체인데, 시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끝이 다시 시체인 건 절망밖에 안 되니까 내겐 재활치료밖에 답이 없다. 그러니까 난 다시 걸음마를 떼야 하는 상황이다. 재활은 선택이 아니다. 시기를 놓쳐서도 안 된다. 본격적인 치료를 앞두고 나는 오늘부터라도 한 발, 아니 한 뼘, 아니 하루에 한 마디씩으로 쪼개서 도전을 갈아 마셔야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싶은 생각이 든다. 헌데 원래 사고에는 이유가 없다. 이유가 없으니까 사고가 되었겠지. 계속 시간을 깔아뭉개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좀비처럼 방을 치웠다. 일어선 내 자신에게 사랑은 아닌 찬사를 보냈다.
재활을 하며 우연히, 진정으로 나의 허기를 달래기 위한 두 가지 레시피를 찾았다. 처음엔 참을 수 없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도 그냥 지친 하루였다. 그 이전까지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고, 그 날의 핵심은 내가 그녀의 전시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냥, 방명록에 내 이름을 남기고 짧은 전시를 보고, 집에 가는 길에 찍었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며 내가 오늘 간접적으로 당신을 보았음을 알렸다. 오랜만에 나의 지난 마음이 생각났다. 벌써 6개월 쯤 전이었다. 한창 그녀와 교류할 적에 나의 일기에 그녀를 아주 진하게 담았던 날이 있다. 그녀와 이 다음에 만날 때, 혹은 이 다음의 다음에 다시 만날 때, 어쩌면 몇 년 정도 후에 전해주리라 생각했다. 그 때 나는 그저 당신을 이렇게 표현했었다고, 이런 당신은 실제였더라고 덧붙이며.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나의 일기에 들어있는 마찬가지로 진한 다른 문장들을 모아, 그 문장의 주인을 찾아주는 일을 했다. 얼마나 낯간지럽든, 터무니없든 상관 없이 그걸 쓸 때에 온전했던 진실을 믿고 그 해 겨울에 몽땅 냅다 부쳐버렸다. 예고 없이 주는 일은 서랍속에 고요히 죽어있던 성냥에 불을 붙이는 일과 같았다. 오래된 장작을 비로소 일하게 했을 때, 그것에 불이 붙어 열기가 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꼈고 그 겨울이 지나도록 그 불길은 오래도록 나를 데워주었다. 날씨가 더워지는 마당에 그 불길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녀에게 지금, 주고 싶었다. 주었다. 그날 알았다. 주는 것은 나에게 응급처치와 같다. 타인에게 주사기를 꽂아넣는 순간 나의 존재가 잠시나마 실제로 가동된다. 내가 잉태하고 품었던 어떤 것이 낳아지고, 타인에게 가 닿아 그것이 두려움 속에 꽃피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지그시 안심이 된다.
며칠 전에는 라면을 먹으면서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밖에 나가면 20명에 1명 꼴로 자연스러운 사람을 목격한다. 그럼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내가 엿본 몇몇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노선의 깊이가 달랐다. 그들이 담겨있는 공간은 공기의 질이 달랐다. 더 이상 일방향이 아니기를 온 몸으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연을 만나보았거나 만난다는 것이었다. 올 여름에 문명으로부터의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경비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연과 짧은 인사 말고 진득하게 만나러 가고 싶었다. 문명 속의 끊이지 않는 약속, 기브앤 테이크는 소모적이다. 아무리 배부른 여행도 허기가 진다. 배가 채워질수록 다른 것을 더 채우지 못해 허기가 진다. 주고 받고 주고 받고를 거듭하며 호흡은 점점 짧아진다. 주사기의 효과는 일시적이고 약물의 양에도 한계가 있다. 약물이 동나기 전에 나는 왕창 받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장 문명화되지 않은 곳으로 가서 지구로부터 흘러 넘쳐 터져버리게 받으러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곳은 가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문명이 내 시야 안에 걸리지 않는 장소에 발자국을 찍고 싶다. 문명이 다른 무언가를 압도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 익히 보이지 않는 곳, 역사대로 흐르지 않고 저대로 흐르는 과격하고 평정한 자연이 있는 곳, 지구의 민낯같은 곳, 가장 이 행성다운 곳을 다닐 것이다. 내 허기가 나를 그리로 이끌 것이다. 따라가면 든든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버닝의 해미는 대한민국의 평균 청년이자, 그레이트 헝거이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곤 자신이 그곳에서 목격한 리틀헝거와 그레이트헝거에 대해 설명하다가 이내 극중에서 사라진다. 리틀 헝거는 배를 채울 음식을 욕망하지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려 있다. 저번주 방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씨는 그레이트 헝거임이 분명한 미정에게 말한다. "웬만하면 서울 들어가 살아, 평범하게. 평범은 같은 욕망을 가질 때 그럴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추앙, 해방 같은 거 말고 남들 다 갖는 욕망. 니네 오빠 말대로 끌어야 될 유모차를 갖고 있는 여자들처럼." 그에 미정은 답한다. "애는 업을 거야. 한 살 짜리, 당신을 업고 싶어." 구씨가 답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지." 미정이 답한다. "나는 이렇게 살거야. 그냥 이렇게 살거야." 두 작품은 굶주림에 대해 끊임없이 명시하고 묘사한다. 그들이 벼슬로 여겨지는 평범함을 쫓는 감각에 가려져 의뭉스러워지기 일쑤인 허기짐에 대한 감각을 꺼내준 것은 고맙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못한 욕망을 지닌 그레이트헝거는 결국 잘 산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버닝 속 또 다른 인물인 벤은, 해미와 다르게 풍족한 그레이트 헝거의 삶을 누리지만 소시오패스로 그려진다. 그레이트 헝거는 영영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배부를 수 없는 건가? 배고픈 자들을 향한 뉘앙스는 왜 그렇게 늘 불안한걸까. 허기짐이 처절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극적일 수는 없을까. 이 사회에서 허기를 품고 있는 건 기형을 예고하고 비정상적인 일이며, 자연스럽지 못한 일일까. 허기진다면, 결국 그만큼이나 많이 담을 수 있다는 것이기에 그것을 더 이상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커다란 허기의 파도풀 아래 자유로운 헝거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왕창 주고, 왕창 받으며 생명력으로 흘러넘치는 헝거들을 보고 싶다. 각각 다른 욕망들이 풍요롭게 흐르기에, 더 다양한 레시피가 존재할 수 있었으면 한다. 깔짝 깔짝 나를 속이며, 깔짝 깔짝 나를 만족시키며 살고 싶지 않다. 일 평생 반복되고 강조되는 그 소리는 각각 다른 욕망과 배고픔을 지닌 헝거들을 몹시 불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