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 16. 백담사 아미타불상
조선후기 불상 가운데 최초로 보물 지정
보월사 폐사 후 이운 ‘추정’ 화월당 성눌스님 조성 주도체정, 원오 스님 조성 증명18세기 불교조각 연구 기준
▲백담사 아미타불(왼쪽)과 복장물. 아래사진은 백담사 무문관 관음전과 만해 한용운 스님 흉상.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위치한 백담사는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 말사이다. 일제강점기 31본산 체제에서는 건봉사 말사였으나 6·25전쟁으로 건봉사가 불타고 민간인통제선 안에 있어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자 본사가 신흥사로 변경되었다.
설악산을 조선 선비들에게 알린 인물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과 삼연 김창흡(1653~1722)이 있는데 매월당은 오세암에 머물렀고 삼연은 영시암을 창건해 그곳에 머물렀다. 두 암자는 모두 백담사 산내 암자이다.
백담사는 독립운동을 했던 만해 한용운(1879~1944)스님의 출가지이며 1926년에는 이곳에서 <님의 침묵>을 쓰고 1928년에는 백담사 역사를 정리한 <백담사사적>을 썼다. 백담사 경내에는 만해기념관이 있으며 절에서 가까운 곳에는 2003년에 설립되어 동국대학교에 기부한 만해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설악산 유람을 할 때 가장 일반적인 행로는 백담사 - 오세암 - 신흥사 코스였다. 현재의 백담분소에서 시작해 수렴동과 백담사를 지나 영시암, 오세암, 마등령을 오르고, 아래쪽으로 비선대와 와선대로 내려와서 신흥사를 거쳐 토왕성 폭포까지 이르는 코스이다. 필자도 대학을 졸업하던 해 이 코스대로 설악산 나들이에 나선 적이 있다.
설악산은 산 속에 절이 많지 않아 조선시대에도 금강산이나 지리산에 비해 유람객이 적었다. 유람객들은 내설악의 경우 출발할 때는 지금의 용대리에 있던 민가에서 머물기도 했으며, 본격적인 산행을 할 때는 백담사의 전신인 선구사와 심원사에서 짐을 풀었다.
백담사가 창건되기 전에는 백담사 건너편에 있던 민가에서 신세를 졌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영시암과 오세암 그리고 봉정암에서 반드시 묵어야 했다. 이들에게 길을 안내했던 이들은 당연히 스님들이었고, 때로는 스님들이 가마를 메었기 때문에 이들을 ‘남여승(藍輿僧)’이라고 불렀다.
2000년 대 초 무산스님을 찾아 뵙고 백담사에서 1박을 했는데, 올 여름 끝자락인 9월 초 여러 스님들과 강원 불적 순례 코스의 하나로 이곳을 찾았다. 하안거가 끝난 백담사는 평일이어서 한산한 편이었고 조계종 기초선원과 무문관은 안거 후 만행을 떠나 비어 있어 잠시 수행처를 살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계곡을 가로질러 신축된 다리는 필자가 가졌던 예전의 백담사 이미지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더운 여름 산행 중에 물이 흐르는 계곡을 가로질러 백담사 경내로 들어갈 수 있었던 기억은 그야말로 추억이 되었다. 옛 출입구였던 낮은 다리가 있는 계곡 주변에는 쌓아 둔 돌탑들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백담사 이미지가 물과 연관된 것은 절의 이름에도 담겨 있다. ‘백담사(百潭寺)’는 화재를 피하기 위해 절 이름을 바꾸려는 주지 스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를 세어보라고 해서 다음 날 세어보니 100개여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러한 연유로 1455년에 백담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1755년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잠시 심원사로 개칭했다가 1783년(정조 7) 다시 백담사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담사는 용대리 주차장에서 작은 버스로 갈아타고 이동해야 했다. 계곡을 따라 10여 분 올라가는데 계곡의 물빛은 푸른 하늘을 그대로 담아 신비한 색을 발하고 있었다. 백담사에 도착하니 종무실장이 준비해 준 이 지역 명물 오미자 차를 너와지붕으로 된 찻집에서 순례에 참석한 스님들과 함께 마시며 잠시 숨을 골랐다.
본격적인 순례가 시작되었다. 먼저 백담사 주 불전인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 5칸의 불전 안에는 높은 불단에 1748년에 조성된 아미타불상이 있고, 그 좌우로 새로 모신 두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스님들께 아미타불상에 관한 설명을 하려다 법당 밖을 보니 조선시대에 세워진 3층의 작은 탑이 햇빛 속에 덩그러니 서 있다.
18세기에 조성된 백담사 극락보전의 아미타불상은 크기가 87cm로 17세기에 만들어진 3~5m에 이르는 불상과 비교하면 작다. 18세기의 시대 상황은 사찰의 경제력이 더욱더 위축되었기 때문에 작은 크기의 불상 만을 간신히 만들 수 있었다. 인제 백담사 아미타불상은 1992년 문명대 교수에 의해 조사된 후 1993년에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 조선후기 불상 가운데 최초로 보물로 지정된 불상이다.
백담사 아미타불상에서는 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한문과 한글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삼회장 저고리 안쪽면에도 한글로 시주자의 이름이 쓰여 있어 당시 한글 연구와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복장물로는 불상 조성기, 노랑 삼회장 저고리, 유리와 수정 등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백담사 아미타불상은 1748년에 강원도 평강 운마산 보월사에서 성눌스님께서 조성한 것으로 어떤 이유로 백담사로 이안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평강 지역은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하며 철원군과 인접해 있는 곳이다. 보월사는 1666년에 중창되었는데 후삼국시대 궁예의 태봉 때 건립된 절로 알려져 있다.
보월사가 위치한 운마산은 동쪽으로는 금강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보개산이 있다. 절이 오래되어 퇴락되고 단지 4개의 방만 남아있다가 1666년에 중건한 것이다. 1666년에 대지(大智)스님이 여러 스님들과 의논해 사찰을 중건하고 서산, 사명, 편양, 동산, 풍담, 명진, 무영, 춘파, 우화 등 서산 이하 편양문파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해 문파 의식을 강조했으며, 1681년에는 <보월사 중수비>를 건립했다.
백담사 아미타불상을 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화월당 성눌스님(1689~1762)은 누구인가? 그는 14세에 보월사로 출가해 옥심(玉心) 스님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백담사 아미타불상을 조성할 때 공덕주로 활동했고 환성스님의 문인(門人)이다. 보개산·운마산·오성산 등을 왕래하면서 30년 가까이 강의를 계속하다가 보월사로 돌아왔다고 한다.
불상을 조성한 장인은 누구인가? 바로 18세기에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인성(印性)스님이 치준·긍유·재징·영원·취작·민오·의상·홍신·최숙·최백·탈영·신현·사옥·개혜 등 총 15명의 스님들과 함께 불상을 조성했다.
1m가 되지 않은 작은 불상 조성에 많은 분들이 동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불상 발원문에 의하면 1748년에 보월사에서 여러 구의 불보살상과 탱화를 조성해 보월사와 보월사의 백련사, 삼각산 태고사, 보개산 안양암 등에 봉안했다. 이처럼 한 절에서 조성하여 여러 절에 봉안한 예는 1740년에 도봉산 원통암에서 아미타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조성해 삼각산 진관암에 봉안했다가, 현재는 북한산 도선사로 옮겨 모셔진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도선사 아미타불상과 대세지보살상 역시 조각승 인성이 조성한 것이어서 그는 한 곳에 머물며 인근 사찰의 불상을 조성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정면에서 백담사 아미타불상을 보는 순간 네모난 상호와 유난히 돌출된 코, 두 눈썹 사이의 큰 백호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얼굴에 비해 넓은 어깨,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 설법 수인을 짓고 있는 손 역시 눈에 띈다. 두 무릎 앞에 좌우로 펼쳐진 율동적인 옷주름, 가슴의 U자형 주름이나 가슴 내의의 위쪽 주름의 곡선 처리는 이 불상이 가진 특징이다.
불상 발원문에는 영조와 그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1693~1757) 그리고 세자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당시 강원도 관찰사였던 홍봉조와 평강 태수였던 유언술 등의 관직이 오르고 살아서 정토를 맞기를 기원하고 있다. 만(卍)자가 새겨진 노랑 삼회장 저고리는 궁중에서 사용했거나 왕실과 관계된 사람의 것으로 추측된다. 18세기 불상이 많지 않은 시대 상황에서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백담사 아미타불상은 당시 불상 가운데 빼어난 작품으로 18세기 불교조각 연구에 기준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