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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전
2025년 1월 12일 / 고전 3:16-17
교회의 정의 / 교회는 헬라 원어로 ‘에클레시아’이니, ‘부르심을 받은 무리(会衆)’라는 뜻이다. 즉 애굽에서 구출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 함과 같이(행 7:38)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어, 죄악세상과 분리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속받은 성도들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엡 1:23),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례전을 거행하는 성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여 모든 영혼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며(딤전 3:15), 모든 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을 갖추고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거룩한 공회이다.
교회의 구분 / 교회는 유형적 교회와 무형적 교회 두 가지로 나눠진다. ❶ 유형적 교회는 성경에 따라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받아 입회한 사람들로서 조직되고, 이러한 교회들이 모여 교파를 구성하는 것이다. ❷ 무형적 교회는 각 교파 각 교회 중에서 신생(新生)하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로서 조직되는 오직 하나의 교회로 신령한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하나의 교회는 이러한 교회이니(요 17:11, 21-23), 이러한 무형적 교회는 어떤 교파 어떤 교회에 속하였든지 현재도 하나이며, 주님 재림하실 때에는 구체적으로 완전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인은 모름지기 이러한 영적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힘쓸 것이며, 유형적 교회는 이러한 영적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즉(눅 2:49, 딤전 3:15), 삼가서 세속적 행사나 거룩하지 않은 일을 행하지 말고, 성별되게 보전하여야 한다(고전 3:16-17).
죤 하브릭(John Havlik)은 [인간 지향적 전도]라는 글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다. ‘교회는 결코 장소가 아니라 항상 사람이며, 결코 양의 우리가 아니라 양 자체이고 또 결코 거룩한 건물이 아니라 언제나 믿음의 모임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기도하는 사람 바로 당신이 교회이지 당신이 기도하는 그 장소가 교회가 아니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감이나 몸의 때가 당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벽돌로 쌓아 올린 구조물이 교회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거룩한 곳이란 인간을 제외하고는 없으며, 혼을 제외하고는 인간 내부에 지성소란 없다.’
교회를 묘사하는 흥미로운 표상 중에 또 하나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전하면 교인들은 흔히 교회 공동체가 모이는 장소인 ‘예배당’ 또는 ‘교회 건물’을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 그 성전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모임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다. 그리고 ‘내 이름을 장막에 두겠다’라고 하셨다. 그것을 가리켜서 거룩한 장막이라는 뜻으로 ‘성막’이라고 라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회막’이라고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장막에 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장막에 거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주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이 만드신 초라한 장막에 거하신 것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은 피를 너무 흘렸기 때문에 합당치 않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허락하셨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막과 똑같은 개념을 가진 성전을 지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곳이다. 이처럼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성전이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리면 그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니다. 그 실상을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왔다. 그런데 성전에는 온통 양과 소의 울음소리로 가득하였다. 돈을 바꾸는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향해 분노하셨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양이나 소를 다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셨다. 비둘기파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책망까지 하셨다.
이처럼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구약의 이 장막과 성전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진 곳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성전이 되신 것이다. 외형적인 성전에도 나름대로의 깊은 뜻이 있었다.
❶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창 22:1-4)
❷ 모리아산의 다윗의 타작마당(삼하 24:1. 17-21)
❸ 아라우나 타작마당의 다윗의 제단(삼하 24:21-25)
❹ 모리아산 타작마당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대하 3:1-2, 15-17)
❺ 스룹바벨의 성전(학 1:4-6) - BC 587년에 느부갓네살 왕의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❻ 헤롯의 성전(요 2:20) - 헤롯이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지었다.
▶ 유대인들의 성전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 예수님의 성전 사랑도 저 유대인들 못지않게 대단했다. 그런데 성전을 사랑했던 사랑이라는 말은 같은데 유대인들의 성전 사랑과 예수님의 성전 사랑은 그 내용과 질에서 같지가 않았다. 유대인들의 성전 사랑과 예수님의 성전 사랑이 그렇게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성전을 어떻게 이해를 하느냐에 따라서 이해하는 만큼 달랐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성전의 이해는 주로 건물적인 성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전 사랑은 건물만의 사랑이 아니었다. 성전을 헐라면서 성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저들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랑이었다.
▶ 예수님께서 어떻게 진정한 장막이 되셨을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았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淨化)하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이때 예수님께서 의아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께서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셨을 때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헤롯 성전)은 40년 이상 걸렸다. 그런데 그런 성전을 사흘 만에 일으킨다고 하니 이해할 수 없었다. 제자들도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요 2:21에 보면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라.’ 즉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헤롯왕이 세운 그 건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의 뜻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성전으로만 생각했다.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이 성전이 아니고 내가 성전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참된 성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참된 성전(교회)이 되신 것이다.
마 16:16-19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18)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성전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히 알 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성전은 그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해주신 표현들을 빌리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그곳에 두신다’라고 했다. 곧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희 중에 행동하고, 가르치고,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잘 구현해 주신 분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심을 보이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마누엘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더 이상 그것을(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다른 건물로 보여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의미하고 말하던 바를 다 구현(어떤 사실을 구체적으로 나타냄)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면 그것은 사실상 사람들이 성전을 허는 것이 되는 것이다. 헤롯 성전을 허는 것이 성전을 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성전을 허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전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세우셨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회복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전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승천하신 다음에 하늘나라로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그러나 그가 이 땅 위에 당신의 몸을 세우셨다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체인 우리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 위에 예수님께서 계실 때 그의 몸이 성전이었다면, 우리가 곧 그리스도의 공동체 그것이 바로 성전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이 세상에는 어떤 건물도 성전이 아니다. 예루살렘에 가도 성전은 없다. 또 이 세상에 어떤 아름다운 건물을 세워놓아도 그것은 성전이 아니다. 성전은 오직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이다. 곧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성전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통해 성전됨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 곧 정말 성전다운 모습이 우리 가운데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뚜렷이 구별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가운데 계시겠다고 한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 각자나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함께 사심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 공동체는 이미 교회로서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곧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멸하실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잘 드러낼 때 우리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전이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당 가운데서 함께 계신다는 그런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 모여 있을 때나 각자 집에 흩어져 있을 때나 모두 교회이어야 한다.
우리 각자가 집에 가서 활동할 때나 직장에 가서 활동할 때도 교회로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이 예배당(건물)에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임 가운데, 우리가 흩어져 활동하는 가운데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교인들로서 서로가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그것이 교회인데,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 것이 드러나야 한다. 성전의 참 의미 -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 잘 드러나야 한다. 그럴 때 성전으로서 곧 교회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이 하나님을 우리의 관계 가운데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분들이 우리를 보면서 ‘아! 하나님이 당신들 가운데 계시군요, 정말 그렇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더 구체적인 적용을 하나 더하고 있다.
고전 6:19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했다. 우리 몸을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이라고 한다. 곧 우리 각자의 몸도 성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내가 성전됨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냉철하게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하게 우리를 성전답게 하나님 앞에와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공동체를 향하여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성전건축이라고 하면 안 된다. 예배당 건축, 교회당 건축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성전건축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답게 잘 세워져 가는 것 곧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잘 나타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전건축이다. 우리는 이 일에 진력해야 한다. 이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분명히 자신이 성전됨을 기억하고, 성전답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 잘 드러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에베소서 2:20-22에 보면 이 성전은 자라간다고 했다.
엡 2:20-22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은 성전을 사랑하셨고, 그 성전이 본래의 뜻을 잘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이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동일한 뜻을 두고 계시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며, 우리의 공동체가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성전으로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 각자 개인과 우리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도록 힘써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되심을 드러내길 바란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로 온전히 세워져 가기를 바란다.
결론으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경 두 곳을 예로 삼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 야곱을 처음으로 만나주신 곳
창 28:10-22 /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11) 해질 무렵 야곱은 어떤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낼 채비를 하고 그곳에 있던 돌 하나를 주워다가 베개 삼아 잠자리에 들었다. 12) 그가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땅바닥에서 하늘까지 맞닿는 큰 사다리가 보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닌가? 13) 또 그 위에는 여호와께서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여호와이다.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네게 그리고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땅의 먼지만큼 많아지리라.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지 네 후손들이 그곳에서 가득하게 살리라. 또한 너와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뭇 나라들이 복을 받으리라. 15) 나는 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지켜 주리라. 분명히 말한다만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 전까지는 내가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여호와께서 바로 이곳에 계시는구나. 그분이 바로 여기에 계신데도 내가 그걸 몰랐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17) 무서워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집 아닌가? 이곳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문이로구나.’ 18)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베개로 베고 잤던 그 돌로 비석을 세우고는 그 위에다 기름을 붓고 19)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 이름지었다. 본디 그 성읍의 이름은 루스였다. 20) 그러고나서 야곱은 여호와께 이렇게 맹세하였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가는 길마다 나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내게 주신다면 21_ 또한 무사히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여호와께서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22) 또한 이곳에 이렇게 세운 비석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주께서 내게 주신 것 중 10분의 1을 주께 드리겠습니다.’
2.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 형 에서와 화해도 하고,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듣고 비로소 약속한 대로 성전을 세웠고(창 28장) 이에 하나님께서도 야곱을 축복하셨다.
창 35:1-14 / [다시 벧엘로 가는 야곱]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셨다. ‘지금 벧엘로 가거라. 거기서 내게 제물을 바칠 제단을 쌓아 올려라. 네가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 나 하나님이 그곳에서 네게 나타나지 않았느냐?’ 2) 그래서 야곱은 자기 가족들뿐 아니라 또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지니고 있는 이방신상을 모두 없애 버려라. 또 몸을 깨끗이 하여라. 부정탈까봐 그러니, 모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라. 3) 이제 이곳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나를 도와주시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간에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려야겠다.’ 4) 그러자 그들은 가지고 있던 이방신상과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까지 빼어 야곱에게 건네주었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다 묻었다. 5) 야곱 일행은 길을 떠났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야곱 일행을 무척 두려워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야곱 일행을 추격하는 사람이 없었다. 6) 야곱 일행은 가나안 땅에 있는 루스에 이르렀다. 이 루스를 오늘날에는 벧엘이라 부른다. 7) 야곱은 거기서 제단을 쌓아 올리고는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그곳을 엘 벧엘이라 이름 붙였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칠 때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세상을 떠나자 벧엘 남쪽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그를 묻었다. 그러고는 그 나무 이름을 `애통의 신목'이라는 뜻으로 알론바굿이라 불렀다. 9) 야곱이 이렇게 메소보다미아에서 되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또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내리셨다. 10)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네 이름이 지금은 야곱이지만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다. 11) 그러고 나서는 또 이렇게 이르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자식을 많이 낳아 번성하거라. 수많은 나라가 너로 말미암아 비롯되리라. 네 후손이 엄청난 무리를 이루리라. 또한, 너는 수많은 임금의 조상이 되리라. 12) 내가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네 아버지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도 주리라. 또한, 네 뒤에 태어날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물려받게 하리라.) 그리고 13)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가셨다. 14)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던 곳에 돌로 기념비를 세우고는 그 위에 술과 기름을 부었다. 15) 그러고 나서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눈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건물이 화려하고 웅장해도 거기 예수님께서 거하지 않으면 성전이 아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신령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속에 예수님께서 거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전이 아니다. 성전은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거하는 곳이면 거기가 성전이다. 그 거하는 곳이 건물이면 거기가 성전이다. 그 거하는 곳이 사람이면 거기가 성전이다. 성전의 기준은 세상의 그 어떤 조건도 사람의 그 어떤 형태도 아니다. 성전의 조건은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느냐 아니 계시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가 성전이기를 원한다면 오늘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 예수를 영접했다면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몸을 항상 깨끗이 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목욕한 자는 발을 씻으면 된다고 하셨다. 목욕한 자라도 발은 씻으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의인이라고 하는 공자도 하루에 3번은 자기를 돌아보라고 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정결케 하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 자신이 생각해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전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의 끝머리인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요즈음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무섭게 책망하시면서 ‘화있을진저’라는 말을 7번이나 하셨다. 아울러 우리에게도 아니 나에게 마음을 정켤게 할 것을 요구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마태복음 23장을 설교한다는 것은 부담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이에 도전하여 정말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까지 올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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