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여인들의 머리 모양
* 얹은머리 *
(1) 대수(大首)
궁중에서 왕비의 의식용으로 대례복과 병용하던 수발양식이기 때문에
그 모양은 과대하고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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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의 양식은 앞에서 보면 머리 정상은 고계를 만들고 그 밑으로는
좌우 어깨까지 내려오면서 A자형으로 펼쳐진다. 뒤도 앞과 같으나 중간에
종(縱)으로 머리를 땋고 그 위에 댕기를 묶고 있는 것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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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큰머리 (떠구지머리. 巨頭美)
떠구지머리는 명부(命婦)들이 늘 착용하던 의식용 수발양식으로,
어여머리 위에 '떠구지'라는 나무로 만든 큰 머리를 얹어 놓은 것인데, 정조 3년(1779)에 생겨났다.
정조는 다리 대신 나무를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 나무로 된 대용물이 '떠구지'였으므로
큰머리를 떠구지머리, 거두미(巨頭美)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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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머리로 만들면 무겁고 가격도 비싸므로 싸고 가벼운 나무로 대체.
떠구지머리는 국혼 때는 물론 헌종대만 하더라도 제대로 대궐법도가 엄격하던 때는
朝日, 正朝, 冬至의 삼색절 문안 때에도 썼고, 진연進宴같은 큰 잔치에는
왕비를 위시하여 내인들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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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여머리 (於由美, 어염머리, 또야머리)
조선 시대 예장할 때 머리에 얹은 다리로 된 커다란 머리를 말하며, 머리에 솜으로 만든
어염족두리를 쓰고 그 위에 다리로 된 커다란 머리를 얹어 옥판玉板과 화잠花簪으로 장식하였다.
이 어여머리는 떠구지머리에 버금가는 예장용으로 궁중에서나 반가의 부녀들이 하였고
상궁으로는 지밀상궁至密尙宮만이 하였는데, 또야머리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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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머리는 가체 일곱 개를 같이 묶어 두 갈래로 땋아 어염족두리 위에 얹고
비녀와 매개댕기로 고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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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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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트레머리(얹은머리)
머리를 뒷머리에서 앞머리로 감아돌려서 끝을 앞머리 가운데서 감아 꽂은 머리 모양으로
기혼 여성의 일반 머리 모양이며 땋아서 얹은 것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조선 중기부터는 가체(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덧들이는 다른 머리)를 더하여 높고 크게 만드는 사치가
심하였으므로 영조英祖 대에 체계금지령이 내려지고 쪽머리를 하도록 권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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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타래처럼 틀어 올려 머리에 단단히 고정시킨 트레머리는 조선시대 기녀들의 전유물이었다.
18세기 조선 민중들의 삶을 화폭에 담은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녀들의 머리가 바로 이 모양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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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홍의<기방>: 개인 소장
유운홍의 <기방>을 보면 미리 준비한 큰 달비를 머리에 고정시키고 휘감아 올리려는 듯한
모습의 기녀를 볼 수 있다. 그것을 사방으로 두르듯이 얹어 놓고 단단히 고정시키면
조선시대 기녀들의 상징인 트레머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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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단오풍정>의 부분 : 간송미술관 소장
특히 기녀와 한량의 여유작작한 삶을 모티프로 많은 풍속화를 남겼던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
트레머리가 얼마나 농염한 매력을 풍기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신윤복 <미인도>: 간송미술관 소장 해남 윤씨(윤선도 집안) 소장<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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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 <큰머리 여인>: 개인 소장
조선 후기 근검절약 정신을 강조한 정조대왕의 명령에 따라 전국적으로 가체 금치령이 내려졌지만
기생들의 트레머리는 더욱 더 화려해지고 풍성해졌다. 그 이유는 트레머리가 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매력적인
스타일이었기에 고수하려는 그들의 의지와 제재를 가하는 쪽에서도 이에 대해 관대함과 묵인을 보였기 때문이다.
18세기 풍속화 속에서 농염한 자태로만 남아있던 기녀들의 모습은 현재 다양한 사극 드라마와
기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5) 코머리
부녀자들의 자기 본래 머리를 한 갈래 또는 두 갈래로 땋아 머리 끝에 빨강댕기를 들여
머리둘레를 감아 돌려 끝이 옆으로 되게 하여 고정시킨 머리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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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쌍계 (雙鷄. 쌍상투)
머리 좌우의 정수리 주변 가까이에 두 개의 상투 머리를 솟게 한 것으로, 머리 양쪽 귓가에서
모발을 묶어서 내리는 쌍수계식도 이에 포함된다. 장년과 노년을 가리지 않고
머리숱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였으며, 고구려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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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거의 같은 형태의 머리 모양을 하였고, 특히
백제의 미혼녀는 땋은 머리를 하여 뒤에 길게 늘어뜨렸으며, 출가한 여자는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이것을 머리 위에 구부려서 얹어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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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 벽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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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신선도> 감신총 벽화(부분)
고구려 고분 벽화의 여인과 감신총 벽화에 나타난 형태는 상부에 2개의 게두를
솟게 한 형태인데 상투가 커 보인다. 쌍계는 신선도에서 자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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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벽화 '시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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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12년(1788) 10월 신묘조에 비변사에서 올린 '가체신금절목'에
쌍계는 시집가기 전 낭자들이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귀밑에서 양쪽으로 묶어
아래로 늘어뜨린 형태라고 생각한다.
인조 때의 '예조의계'에서는 "왕세손 책례 때는 쌍동계, 쌍옥도, 공정책을 한다"고 하여
책례 대 남자가 쌍계를 틀었음을 알 수 있다.
* 쪽진머리 *
(1) 쪽머리 (쪽머리, 쪽찐머리, 낭자머리)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결혼한 여자의 일반적인 머리 모양이다. 이마 중심에서 가리마를 타
양쪽으로 곱게 빗어 뒤로 넘겨 한데 모아 검정댕기로 묶고 한가닥으로 땋아 끝에 자주색
조림댕기를 드리고 쪽을 찐 후 비녀로 고정시키는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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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진머리는 체계의 사치에서 오는 폐단을 없애고자 시도한 것이었으나, 영조의 생각과는 달리
쪽진머리에 족두리 및 화관이 병행되고 그것에 다시 보석 등으로 장식을 하게 되니 가체와 맞먹는
비용이 과다하여져서 또 다시 체계를 실행하도록 하되 어디까지나 가체는 금하고
본인의 머리로만 하게 하였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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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선까지 내려온 쪽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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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머리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순조 중엽 즉 1800년 이후라고 한다.
그 때는 쪽이 뒤통수에 달려 있던 것이 점차 내려와 말엽에는 저고리 위에 있게 되었으며
그 후 개화기에 다시 올라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쪽머리가 순조 중엽 이후 보편화된 이유는 실학사상이 국민들의 사고를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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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 민비녀(珉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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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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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비녀
(2) 첩지머리 (疊紙)
예장할 때의 머리로서, 첩지疊紙라 함은 왕비는 도금鍍金으로 만든 봉鳳모양을, 내명부. 외명부는
도금이나 은銀 또는 흑각黑角으로 개구리를 만들어 좌우로 긴 머리털을 단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가리마 가운데에 중심을 두고 느슷느슷 양쪽으로 땋아
뒤에서 머리와 한데 묶어 쪽을 찐 머리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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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첩지의 장식은 화관이나 족두리 같은 것을 쓸 때에 이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궁중에서는 평상시에도 첩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분의 상하구별과 궁중 법도에 따라
어느 때 족두리나 화관을 쓰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