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삽티성지
주소:충남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491
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 살던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는데, 양자인 황천일 요한과 조카인 황기원 안드레아가 이 교우촌에서 살았다.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부터 가끔 삽티에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병인박해로 인해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1866년 말 황천일과 황기원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홍산현에 체포되고 서울에 이수되어 무참히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이 안장된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1922년 시복조사 재판에서 72세의 나이로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는 “병인년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증언하였다. 황 마르타의 증언 이후 이곳 삽티의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묘를 찾아 돌보거나 옮긴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1962년 삽티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스러진 묘터에 묻혀 있는 항아리 속에서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 등 성물을 발굴했다. 그 발굴지점을 교회사학자들은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라 신빙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장 신빙 지점은 1990년대에 타지인들의 문중묘역으로 바뀌었다. 당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012년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고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2016년 성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2018년 부여군은 성물 발굴지점으로부터 100미터 거리의 봉우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황석두 성인의 안장기념 자리로 표시했다. 십자가를 향하여 순례자들이 기도하는 이 자리를 ‘황석원(黃錫園)’이라 칭하고 황석두 성인 안장 묘원을 꾸몄다. 또한 묘원 안에 대전교구의 역사를 함께하는 제대를 안치하여 ‘황석정(黃錫亭)’을 건립했고, 제대 뒤 비석에는 성인의 신앙 고백인 “나는 천당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를 새겨 놓았다. 현재 삽티 성지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성지’를 잇는 도보 순례길이 마련되어 있어, 숨죽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출처 : 202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대전주보 4면]
1) 성 황석두 “지상의 과거 대신 천상(天上)의 과거에 급제하겠다”
출생 1813년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
순교 1866년(53세) 갈매못 / 군문효수
신분 회장
1866년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
주님 수난 성금요일은 주님 부활 대축일 직전의 금요일이다.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다. 이날은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주님의 십자가 무게를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박해 중의 교회는 어쩌면 매일이 수난절이고 일상이 골고타였다. 신앙 선조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살기도 죽기도 했다. 그들은 기왕에 따라나선 십자가의 길에서 죽음마저 예수님을 닮고자 했다.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우리 주님처럼 순교하게 해달라는 그들의 염원이 이루어졌다. 십자가 위 주님께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신 초대의 말씀이 장엄한 순교로 화답된 것이다.
다블뤼 주교 순교길에 끝까지 동행
성 황석두 루카는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남짓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지상의 과거 대신 천상(天上)의 과거에 급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대노한 부친이 작두까지 들이대며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성인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벙어리처럼 지내며 모진 핍박을 견디어 냈다.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처럼 성인의 침묵은 소리 없는 외침이자 복음 선포였다. 결국 부친과 가족들까지 모두 입교하였기 때문이다.
시련을 영광으로 바꾼 황 루카는 전교 회장이 되어 전국을 다니며 선교 사제들을 도왔다. 사제들의 손과 발이 되고, 얼굴과 입이 되어 그들의 선포가 빛을 발휘할 수 있도록 소명을 다하였다. 1866년 사순 시기, 이미 체포된 다블뤼 주교는 황 루카에게 피신을 권하였다. 하지만 ‘황 루카는 떠나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스승인 동시에 아버지인 분을 따라가겠노라’(달레, 「한국천주교회사」下, 429쪽) 선언하며 주교님의 순교길에 끝까지 동행했다. 하느님 나라까지 회장의 소명을 다한 것이다.
하느님 사랑을 향한 황소 같은 열정
눈 덮인 겨울, 성인의 고향인 충북 괴산의 연풍성지에 도착하였다. 너른 대지에 산을 병풍처럼 두른 연풍은 재 너머 펼쳐지는 일출과 일몰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었다. 올 때마다 정갈하고 좋은 분위기인데 눈 쌓인 연풍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성인의 묘소를 참배하고 갈매못에서 함께 순교하신 성인들의 성상도 만났다. 성모님 앞에서는 초에 불을 켜면서 간절한 기도를 담았다. 그리고 미사 중에 가족과 이웃을 기억했다. 그리스도와 그를 닮은 순교자와 우리 자신을 떠올리며,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어느 사제의 말씀처럼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뉘우쳤다.
미사를 마치고 성전을 나서니 황석두 루카 성인이 오로지 하느님 사랑을 향한 황소 같은 고집과 열정으로 우뚝 서 계신다. “아 성인이시여 올바른 일(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당신만큼 온전히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주옵소서.”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3월 10일, 윤영선 비비안나(강동대 건축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