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의 문턱에서 만난 약사사 그리고 문학의 길]
8월 23일 오후 2시 30분, 강서문인협회 작가들의 모임인 ‘글감탐방’ 8월 행사가 개화산 약사사에서 열렸다. 이날 함께한 문인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처서가 지나면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고 했다. 처서(處暑)는 말 그대로 ‘더위가 그친다’는 뜻을 지닌 24절기의 열네 번째 절기다. 그러나 계절의 이름과 현실의 날씨는 꼭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날 서울의 기온은 34도까지 치솟았고, 햇살은 여전히 한여름의 기세를 놓지 않았다. 처서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뜨겁고 따가운 오후였다.
그런데 개화산 자락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까지 피부를 뜨겁게 달구던 세상의 열기가 한 겹씩 벗겨지는 듯했다. 아담한 산자락을 품고 고요히 자리한 약사사는 마치 속세의 번잡함을 등지고 찾아온 중생들을 말없이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 같았다. 산의 푸름과 오래된 절집의 고즈넉함이 어우러진 경내를 걷노라니, 문득 오래된 고향집에 돌아온 듯한 포근함이 가슴 한쪽에 스며들었다.
약사사는 개화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 오랜 역사와 문화적 흔적을 간직한 전통사찰이다. 경내에는 고려 후기의 삼층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어 이곳의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 성종 때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을 주룡산에 있는 사찰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개화사’로 불리기도 했다.
개화산에는 주룡산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라 때 주룡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 머물렀다는 이야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신비로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나 사람들이 이 산을 개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역사와 전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의 깊이를 더한다. 조선 초기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올라온 봉화를 받아 남산의 제5봉수로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월은 그렇게 산과 절에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1737년에는 송인명이 개화사에서 공부한 인연으로 절을 중수했고, 순조 이후에는 약사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 역시 ‘개화사’라는 이름으로 이곳의 사찰과 주변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산을 바라보고 절을 바라보는 일이 곧 한 시대의 삶과 풍경을 읽는 일이었던 셈이다.
그 오래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문화유적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산사의 고요한 풍경을 마음에 담는 동안 문인들의 표정에도 조금씩 여유가 묻어났다. 글감탐방은 단순히 좋은 장소를 찾아가는 나들이가 아니었다. 자연을 바라보고, 사람을 만나고, 그곳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다시 글로 풀어내는 문학적 산책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이다. 좋은 선생님들과 한자리에 앉아 자연을 이야기하고 문학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오래전 학창 시절의 동창들을 만난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속에서 문학이란 결국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약사사를 둘러본 뒤 일행은 하산길에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발끝을 차가운 물에 맡기자 온몸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우리는 다가오는 문화예술제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강서문인협회의 발전적인 운영 방향과 여러 현안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약사사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도 이어졌다.
계곡물은 말없이 흘렀다. 그러나 그 물소리 속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글도 저 계곡물과 닮았으면 좋겠다고.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 곳곳을 흐르면서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감동을 함께 실어 나르는 글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인지 이번 글감탐방을 마치며 작은 아쉬움 하나가 남았다. 지금까지 강서구 곳곳을 중심으로 이어온 글감탐방이 앞으로는 강서라는 울타리를 넘어 전국의 명소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문학기행으로 한 걸음 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름난 관광지만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가 있고, 역사와 자연이 숨 쉬며, 시인의 눈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피어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우리의 좋은 글감이 될 것이다.
문인은 특별한 곳에서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풍경 속에서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를 찾아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 계절을 읽고, 오래된 돌탑에서 세월을 읽으며, 흐르는 물소리에서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사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찾은 약사사는 이미 훌륭한 한 편의 글이었다.
뜨거운 햇살은 여전히 산길을 비추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어느새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서의 문턱에서 만난 약사사의 고요, 아홉 문인이 나눈 웃음과 이야기, 계곡물에 담갔던 발끝의 시원함,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건넨 문학의 온기.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문장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아직 여름은 물러서지 않았지만 계절은 이미 가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우리도 그 계절의 흐름을 따라 걸으며 더 많은 풍경을 만나고, 더 깊은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고, 더 좋은 글을 써야 하리라.
산은 말없이 그 자리에 있고, 계곡물은 쉼 없이 흐른다. 계절은 또 다음 계절로 넘어간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글을 찾는다. 그리고 언젠가 오늘의 이 시간이 한 편의 시가 되고, 한 편의 수필이 되어 다시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닿기를 바라며, 약사사를 뒤로하고 개화산을 내려왔다.
월랑 신낙형(강서문인협회 이사)
첫댓글 참 부지런도 하셔요.
그 더위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을 담으셨기에
이렇듯 짧은 시간에 조곤조곤 읖조리듯 한 편의 탐방 역사를
뜩딱 채워 놓았네요.
매번 만원의 행복으로 회비만 내시고 식사도 안 하고 가셔서
미안했어요.
다음엔 여유를 가지고 민원 짜리 식사를 하며 함께하는 맛과 여유를 가져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