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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여럿
1. 그리스 존재론
*하나와 여럿을 둘러싼 철학적 전개
1) 헤라클레이토스
-그가 남긴 말 중 “hen kai pan"
: 영어로 번역하면 “one & all", kai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직역하면
“하나와 여럿”, 그의 사상 전체 맥락에서 보면 “하나 즉 여럿”
① 우주는 무한한 가능성과 모순의 대립, 운동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은 다 로고스에 꿰어지고 있다는 뜻.
②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아도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면 잡다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뜻
③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한 통찰일 수도 있다.
2) 피타고라스 학파
-일(monas), 신(theos), 선(agathon), 일자(hen)를 모두 동일시
-하나 ①근원적 존재로서의 일자
②단위로서의 일자, 즉 수학적 단위1:모든 수는 1에서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
-하나로부터 여럿이 만들어지는 방법
①하나가 전체로 주어진 후에 그것이 쪼개지는 경우
②하나가 계속 더해지는 경우
이런 조작이 정확히 성립하는 경우는 부분들의 합이 정확히 전체와 합치하는 경우 이고, 그 경우는 바로 기하학적 공간의 경우 이다. 이 경우 언제나 여럿은 그 상위의 하나에 복속되어 있다. 이런 사고는 현대에 들어와 여러 각도에서 비판을 받았다.
3) 파르메니데스
-the one : 바로 일자라는 것으로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유래하는 개념.
여기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多와 운동을 배제한 일자로서의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세계가 “하나”인 것.
-파르메니데스는 절대적 일자를 이야기한다.
절대적 일자란 유일한 것이고, 절대란 대를 끊는 것, 자신이외의 어떤 타자도 허용하지 않는 존재이다. 이는 자기 바깥이 없다는 것을 뜻하고 그 유일한 전체는 완전히 연속적이며 완벽한 구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여럿은 부정되며 오직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차이점
실재란 자기 동일적인 것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논의를 따라가지만 플라톤은 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형상들이 있다고 본다. 더 이상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들의 다를 인정하는 것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
① 하나는 연속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기하학적인 개념이라고 본다.
ex>직선에 자연수를 표시한다면 자연수만 듬성듬성 있고 그 사이가 비고 다음에 유리수 정수를 표시하면 그 사이들이 차지만 그래도 비는 곳이 무리수에 해당한다.
②철학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통일성으로서의 하나다.
③단위로서의 하나, 수로서의 하나가 있다.
④하나는 존재와 더불어 모든 종류의 집합들에 대해 비유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있는” 것이고, “존재한다.”라는 술어가 어디에나 붙을 수 있듯이 하나라는 것도 어디에나 붙을 수 있다.
5) 플로티노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유출설” 이라고 한다.
강성계와 가지계를 분명히 나누면서도 거기에 사다리를 설치해 딴 차원이지만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위의 일자로부터 조금씩 “타락”해서 아래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기독교 사상에서 신이 완전한 존재라면 왜 세계를 창조했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가지고 들어오면 신의 사랑이 너무나 넘치다 보니까 그것을 나눠주고 싶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세계를 창조했고 그 사랑을 기독교에서는 “은총”이라하고 기독교적 정서를 담고 있는 표현이 “amazing grace"이다.
-플로티노스를 받아들였을 때의 문제점
그의 철학은 연속성의 철학이므로 피조물들이 사다리를 타고 신에게 오르게 될 문제에 대해 기독교는 단절시키면 신과 피조물의 관계설정에 어려움이 있고, 이어놓으면 범접할 수 없는 거리를 축소해버리는 딜레마가 생긴다.
2.성리학
그리스 존재론이 대체로 순수 존재론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면 동북아 사상에서는 주로 철학적 논의와 정치적 논의가 섞인 채 다루어져 왔다.
* 왕필의 노자주 ‘도덕경’ 42장
도가 하나를 낳는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는다
그리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존재론적인 언표들은 대개 추상적이고 존재론적이라는 학문은 다른 모든 구체적인 지식들을 이미 전제하고 전개되는 담론이다. 인간이 하는 사유들 중 가장 수준 높은 사유이고 그것을 펼치려면 존재론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동북아 사상에는 존재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왕필이 주석한 ‘도덕경’이 동북아 사유에서는 보기 드물게 추상적이고 존재론적인 구절이다. 어떤 담론이 추상적이라는 것은 그 안에 구체적인 것들은 잠재적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물은 음을 이고 양을 안고 있으니
충기 로서 조화를 이룬다.’
음기와 양기를 위의 둘로 보고 충기까지 합한 것을 삼으로 볼 수 있을 경우 일은 양기와 음기가 나누어지기 전의 기 자체라고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석 될 경우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 있다.
‘ 도가 기를 낳고,
기는 양기와 음기를 낳고,
음기와 양기는 충기를 낳고,
세 기가 합하여 만물을 낳는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1)도가 가의 상위의 개념인가 2)낳다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 도가 기를 초월해 그 위에 있는 것은 아니고 더불어 있다. 생은 인적 인과로 결과가 원인의 바깥에 존재하는 경우와 내적 인과를 형성 한다. 기가 양기와 음기를 낳은 것 또한 기 바깥으로 양기와 음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가 때로는 양기로 때로는 음기로 표현된다.
양기라는 기와 음기라는 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적 인과와 표현 개념을 전제할 때 ‘하나’의 철학이 도래 할 수 있다. ‘일원론’의 철학으로 ‘하나’가 만물을 포괄하는 보편성으로서의 하나일수도 있고, 어떤 중심을 놓고서 사유하는 철학으로 만물들 중 하나 이지만 만물이 그에 귀의하는 하나 일 수도 있다.
왕필은 도덕경 42장을 주역하면서 일의 가능 근거는 무로써 이해되고 무로부터 일이 유래되며 만물은 일로 귀일한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태극인 영게 주돈이는 전형적인 하나의 논리를 구사한다.
‘ 하나의 근본에서 만물이 갈라져 나온다.’
하나의 근본이 만물로 나뉘어 화생한다는 것을 뜻하고 근본적으로 하나인 우주가 무수히 많은 존재들을 나눠는 것을 말한다.
정이천은
‘ 하나의 리가 나뉘어져 특수한 리 들이 된다.’
리는 세계의 물질적인 바탕인 기에 대비해서 그 조직화의 원리 그리스적으로 말하면 형상을 뜻하고 그 형상이 전체와 부분들의 일사분란 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성리학적 사유는 존재론적으로는 원융의 사유요, 가치론적으로는 본연의 사유이다.
왕부지는
‘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과 더불어 일을 일으키니 오로지 하나로다.’
이상의 흐름을 보면 전통 철학 특히 성리학은 다와 운동을 어떻게 궁극적으로 하나로 모아서 정돈하고 위게화 하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고 원융의 세계관이다. 그 경험적 토대는 생명계가 보여주는 위계이고 원융한 하나의 붕과 연속성으로 하나에서 여럿으로의 이행은 근대성 토대의 중요한 계기들이라 할 수 있다.
3. 근대 존재론과 정치 철학
<스피노자>
스피노자 철학의 일자는 변양되는 일자이다. 운동 변화가 긍정 된다. 실체의 변양태들인 한에서의 다가 긍정된다. 신=자연은 무한하다, 여기서는 속성들 사이의 불연속성이 중요한 측면이다. 신=자연은 유일실체이지만 표현 될 때는 무한한 속성들로 동시에 표현되고 그 속성들은 불연속을 이룬다.
실체의 일자 성과 다가 함께 공존한다.
*서구 전통 철학 - 존재와 사유의 일치 -
우리가 어떤 대상을 A라고 규정할 경우 그리고 그 규정이 참일 경우 그 규정은 A에 내포되어 있는 객관적인 규정이라는 것이다.
대상의 A임과 대상을 A이다 라고 규정하는 명제들은 일치해야 한다.
진리개념도 사물과 사유의 일치 이여야 한다.
인과 관계에서도 비가 내리면 땅이 젖는다. 비가 온 것은 원인이고 땅이 젖은 것은 경과이다. 인과 관계는 바로 세계 내에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
<흄>
그러나 흄은 오로지 우리가 오로지 경험한 것만 인정한다면 그건 관계가 세계 자체에 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오랜 경험 속에서 그런 관계를 계속 보아 왔고 그래서 그런 인과가 객관적으로 세계에 내재한다고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뜰지 100%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으레 그러려니 하고 믿을 뿐이다.
<칸트>
칸트는 인간의 인식은 분면 주관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주관 자체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틀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갖추고 있는 인식의 틀을 현상에 투영함으로써 현상을 일정하게 구성해낸다는 결론에 이른다.
칸트에게서 하나는 더 이상 세계에서 존재론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무엇이 아니라 종합하는 주체에게서 인식론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의 하나는 존재/세계의 하나가 아니라 주체의 하나이다.
<헤겔>
헤겔의 철학은 내부화의 철학이다. 서로 불연속을 이루는 나아가 모순을 이루는 두 존재 A와B가 그것들을 포함하면서 더 고양된 존재인 C로 내부 화 된다.
헤겔은 시민 사회를 욕망과 복수성의 사회로 본다. 국가야말로 시민, 시민 사회의 다원성과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통일된 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로 본다.
결국 시민 사회의 다를 국가의 내부로 귀속시키는 철학이다.
<막스>
막스는 시민 사회를 국가에 포함시키기 보다는 시민 사회 자체의 성격을 문제화 삼는다. 막스의 시대가 되면 산업 혁명이 발생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귀족 계급을 밀어 내고 지배 계급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막스는 부르주아 시민 계급을 물리치고 노동자 계급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추구 했던 것이다.
막스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절대로 통일 될 수 없는 둘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본격적인 다의 철학을 연다.
4. 복수성의 사유
베르그송은 양적/수적 복수성과 질적/내적 복수 성을 구분한다. 수적으로 여럿을 뜻하는 양적 여럿과 수적으로 하나이면서도 여럿을 내포하는 질적 여럿을 구분 한다.
양적 복수성은 공간적으로 불연속을 형성하는 사물들에 근거하는 여럿이다. 에컨대 방안에 60명이 있다고 할 때의 여럿이다. 이 경우 공간적으로 떨어져있는 각 사람들 불연속을 이루는 각 사람들이 형성하는 것이 수적 여럿이다. 그리고 이 수적 여럿에서 각 객체들은 하나의 단위로서 등질 화 된다. 즉 질적 차이가 제거된 체 세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질적 여럿을 공간적 불연속과 사물들의 등질 화를 토대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철수는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철수는 무수히 많은 질ㅈ거 차이들은 가지고 있다. 머리카락 색깔, 얼굴 모양, 눈이 풍기는 분위기, 성격, 어투 등 이런 복수성은 질적 복수성이다. 그래서 질적 복수성은 내적 복수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질적 복수 성을 띄고 있는 존재를 다양체라고도 부른다.
베르그송은 세계의 근본 성격을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 이라고 표현한다. 파르메니데스와 반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다와 운동을 배제하는 일자. 베르그송은 이 우주가 무한한 질적 풍요로움, 출렁이는 창조의 장이라고 말한다. 플라톤 주의에 입각 할 때 실재는 영원하고 자기 동일적인 것 이여야 하며, 그 실재가 타락해서 현실세계의 이런 질적 복잡함과 운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역으로 법칙이니 형상이니 구조니 하는 것들은 세계의 질적 풍요로움을 추상해서 공간적 뼈대만 잡아낸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베르그송은 플라톤과 극을 이루는 존재론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과 베르그송이 서구 철학의 두 극을 이루는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는 모든 것을 어떤 하나로 환원하려는 사고를 위험한 것으로 봅니다. 국가든 종요든 형이상학이든 무엇이든 간에 하나에만 집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개별성, 다원성, 질적 다양성, 차이 등을 억압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또 차이와 다양성만 강조하다 보면 가짜 통일성, 빗나간 하나가 다시 도래한다는 것이다. 부분들을 부분들로서 진정 가만 놔두면 좋겠지만 엉뚱한 전체가 부분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철학은 여럿을 추구한다.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는 사물의 구체적인 차이나 운동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하나는 그것이 제국주의적 맥락이든 국가라는 맥락이든 아니면 달느 맥락이든 여럿을 통합해서 억압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여럿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여럿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인데 인간 사회란 모든 점에서 힘의 위계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럿이 있을 때 그 여럿 중에 하나가 중심에 서면 자연히 다른 것은 그것의 타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럿만이 아니라 평등이 문제가 된다.
현대 철학은 한편으로는 다원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다운성 사이의 소통을 사유하고 있다. 그리고 다원적이면서도 지켜야할 윤리 도덕을 사유하고 있다. 다른 한편 현대 철학은 사물들 사이의 차이 그러나 평등한 차이가 과연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있다.
모두가 하나와 여럿에 관련된 문제이다.
외연 - 외연은 일정한 크기를 가진 공간 또는 물질 공간이다. 공간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 기하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곧 외연에 입각해 파악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길이, 넓이, 부피, 같은 것.
도가사상에서의 무와 유는 그리스 사상에서의 유/무 개념과 용법이 다르다. 서구에서의 유는 있다는 것을 뜻하지만, 도가에서의 유는 차라리 어떤 사물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형을 띄고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기 자체, 즉 아직 특정한 방식으로 형을 띄지 않은 기는 무이다. 그러나 서구적 개념으로 하면 이것도 유이다. 그리스에서의 무는 정말 없는 것 또는 ...이 아닌 것이다. 플라톤은 무가 없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님을 뜻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운동을 설명한다. A가 B가 되는 것은 무에서 유가 나오거나 유에서 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A가 A가 아닌 것이 되고 B가 아닌 것이 B가 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무를 없음이 아니라 아님으로 읽음으로써 운동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유는 채움, 보다 완전함이라는 뜻을 함축하지만, 동북아의 무는 무한한 잠재력인 동시에 한없이 비워질 수 있는 것, 텅 비어 있는 것이라는 성격을 띤다.
동북아의 기도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모든 것을 포괄하거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무로써의 하나, 비움으로써의 하나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는 그런 하나인 것이다. 많기 때문이 아니라 없기 때문에 만물이 될 수 있는 무, 그것이 바로 무로서의 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