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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수상했다.
직감적으로 어린시절 이불에 그렸던 세계지도처럼 축축한 무기력함이거나,
한숨 자고 일어난 지금이 아침인지 해거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수상한 기류였다.
그것이 적어도 지금은 누워있을 때가 아니라는 뜻만 전하고 있었다.
8시 6분.
군인정신으로 각개전투를 실시해야 맞춰진 시간 안에 겨우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어인 느긋함인지, 시간을 확인하고도 빠르게 안도하고 있다.
'9시 6분은 아니구나....'
카톡 속에선 비가 내리고 있다는 상황파악을 감정처럼 교환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내가 축축하게 세계지도를 느꼈던 것도, 도무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던 것도
저 빗방울 때문이었구나.
빗소리 차렴한 덕을 본 것이랄까?
머릿속에선 해야 할 것들이 우당탕탕 뛰어다니지만 두서없이 서두르진 않는다는 연륜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굳이 나의 소식을 전하였다.
"헐~ 이제 이러났다."
이런, 오타였다. 그럼에도 생생하다는 생각이 지나갔다.
그렇게 상황을 우선 하나 날리니 동시에 머릿속에서 정리된 동작들이 각개전투를 시작한다.
생각보다 여유있는 것이 시간의 여유인지 사람의 연륜인지 잘 모르겠지만,
문학산행을 가는 날은 그렇게 가지 사이에서 봄이 얼만큼 오나, 알아보라고 빗방울이 매달리는 날이었다.
부랴부랴 도시락에 도롱이 모양 판초우의까지 챙겨 나갔더니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약속장소는 내 뒷집인 초등학교 앞이었다. 약속시간보다 10분 늦었으니 코리안타임인데다
가장 가까운 아이가 지각하더라는 옛말 틀리지 않다는 것도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고맙게도 변명할 시간을 주신다. 가장 흔한 핑계인 늦잠이라는 궁색함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어젯밤 12시 반에 잠이 들어 2시 반에 얼결에 깨었는데 그 길로 5시가 넘도록 잠을 못잔 것이 이유였다.
이게 다 봄날 봄비 탓으로 돌리기 썩 좋은 핑곗거리 아닌가.
그럴싸한 사유가 생긴 것이 나쁘진 않았지만 슬몃, 조용한 빗길에 회원들을 태우고 나들이를 간다는 것이 긴장도 되었다.
나에게 맡겨진 담보물은 이광두 회원과 조진희 회원.
인간이란 극한에서 본성이 드러난다 하던가.
초보 실력에 빗길 운전이라는 제나름의 셈법에서 가장 느긋한 품종은 이 두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길안내를 해주고프나 생명을 담보 잡히지 않겠다며 도망가던 정영길 회원을 나의 뇌리에 고발하니
함께 동승해준 두 분이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 마음 안다는듯 조심조심 느릿느릿 운행을 해준 앞차를 따라 나도 편안하게 그들을 따랐다.
어린시절 오빠들 따라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것처럼 졸~졸~졸~.
착한 동생을 어찌 알고 빙글빙글 돌아갔지만, 알면서도 순순히.. 그렇게 고성으로 향했다.
문학산행을 떠나기로 한 사람은 모두 8명.
아니, 고성에서 현직 기자생활을 하고 계신 양창호 회장님이 바쁜 일정으로 인해 산행은 못해도
직접 현지까지 친히 동행하셨으므로 9명이라 해야겠다.
사탕에서부터 술과 안주류에 이르기까지 마음만은 친히 산행을 한다는 듯 봉지봉지 준비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곳에서 고성까지 늘 출퇴근하는 길 오가듯 함께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3.1절 태극기 게양보다 의미있는 만세 행위이며 아우내장터보다 역사적인 공간의 부채 같은 것이라 하겠다.
회장님은 그렇게 우리를 배웅하며 여기가 바로 공룡발자국이 있는 곳이라며 중요한 정보 또한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며 기자정신을 발휘하셨다.출발 후 어수선하게 오르막 오르는데 저만치 멀어진 주차장에서 힘껏 박현철 부회장님을 부르는 것이었다.
모두의 차량이 잠겼는지 점검해보니 부회장님 차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
간편하게 스마트키로 문을 잠그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 허술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보다
저렇게 마무리를 할 줄 아는 한 사람이 뒤에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공룡화석지 ~ 연화2봉 ~ 연화1봉 ~ 느재고개 ~ 신유봉 ~ 옥녀봉 ~ 옥천사 코스를
봄비 맞으며 거닐기 시작했다.
촉촉히 머릿결 쓰다듬는 안개 같은 비를 맞으니 괜히 나뭇가지 끝 쳐다보며 빗방울 말고 무엇이 달렸나, 살피기도 하였다.
옥구슬 속에 분명 실팍한 연둣빛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싸래기만한 씨눈을 달고....
연화산 입구에서 우리와 합류한 박현철 부회장님은 늘 비 갠 듯 해사한 얼굴이시다.
얇은 빗방울이 씻어준 공간에서 만나기 적합한 얼굴빛이라 하겠다.
그는 늘 친절하고 선량하게 웃었으며 활기찬 일상의 언어보다는 아껴 시적으로 말하셨다.
그 옛날 연화산 자락 아래에서 시작된 용의 불꽃놀이를 경험하신 것과 옥천사로 향하던 불꽃이
절묘한 순간에 머리를 돌려 절을 태우지 않았다 하실 때는 마치 제갈공명의 적벽대전처럼 수사가 비장하였다.
하늘의 바람을 바꾸고 물 위에 불을 일으켰던 것처럼, 옥천사를 불기둥으로부터 지킨 것이 바람의 방향이었다는 듯이 들렸다.
소나무를 예찬하실 때와 적벽대전을 말씀하실 때가 다르면서도 같듯이, 그의 세월 속에는 소년이 자유로이 사는 듯했다.
하얗게 산안개가 봄비 속에 피고 있었기에 조망권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하지만 대강을 걸어도 이 산은 보통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빼어난 가시권을 보유한 산도 아니지만 천년고찰 옥천사를 품었기에 산행의 매력은 절집을 포함할 때에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옥천사를 가본 적 없었지만 사람들은 벌써 몇 번씩 그곳을 다녀온 듯했다.
이 산을 언덕이라고 말해 아주 쉬운 산으로 여겼던 나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적절하게 이어가는 솜씨에 놀라야 했다.
전날 무리수를 둔 피로한 몸이 그리 느낀 것인지 온몸이 나른하여 등산길이 힘에 부치기만 했다.
물론 진정한 것이야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지만, 아직 그것만은.. 숨기고 싶었다.
연화1봉을 거쳐 도로를 하나 지나자마자 펼쳐진 편백림에서야 점심상을 차렸다.
아침을 굶었기에 조금 일찍 도시락을 먹자는 탄식을 잠재운 한 마디는 공무원 타임이란 것이었다.
12시에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정확함 이면에 이광두 회원을 뺀 모든 남자회원들께서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는 불편한 진실 또한 들통났다.
술과 물로만 찬 배낭이 있는가 하면, 마누라에게 말도 못하고 몰래 나온 처지도 있었다.
전날 잘 놀다가 급기야 사소한 끝에 토라진 마누라 눈치에 김밥 한 줄 얻어오지 못한 이도 있었다.
그는 숫제 배낭까지 가져오지 않았다며 가는 기억을 더듬거리기도 하였다. 정영길 회원이었다.
그는 이왕 이리 된 것, 문학토론을 하듯 부부싸움의 경과와 그 속에 야릇하게 숨은 여자들의 속내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것이 강 건너 불구경이라 했던가. 본인은 심각하였다지만 듣는 이는 재밌기만 한 남의 집 부부싸움.
그가 한 소절을 뱉을 때마다 깐족거리며 끼어드는 여자 회원들의 부인 편들기가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도 했으리라.
한편으론 그들의 사랑이자 생활인데다 아직도 부부싸움을 하는 그네들은 젊은 부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젊어서 치러야 하는 이기적인 모습의 열정들이 그렇게 아직도 다소곳하지 못하고 치열하므로
그 저변에 깔린 심리를 궁리하기도 한다고...
우아하게 쭉쭉 뻗은 편백나무 아래에서 제대로 쪼그려뜨리고 앉아 밥을 먹은 덕분에
일어나면 점심상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이 일었지만, 불편한 앉음새를 정겨운 인정으로 대신한 밥상이었다.
모두가 사력을 다해 서로의 밥을 덜어주려 애쓰다보니 점심상은 오히려 넉넉했던 것이다.
오이, 당근, 상추에 계란말이, 김치, 돼지고기 수육까지.
적은 밥에 비해 반찬 풍년으로 모두의 허기를 나눈 정다운 소풍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빗방울 머금은 땅은 급경사에 이르러 본색을 드러냈다.
등 뒤에 누가 미끄러져도 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는 가파른 곳에서 주향숙 회원의 야릇한 신음이 안개를 갈랐던 것이다.
큰 낙마는 아니었지만 넘어진다는 것이 아픔이기 이전에 부끄러움으로 얼른 수습해야 하는 것이듯,
그녀는 다행 우아하게 미끄러졌다는 후문이 있었다.
누구는 남들 다 보는 데에서 그것도 시내 복잡한 버스 앞에서 무릎부터 사정없이 넘어지는가 하면,
누구는 미끄러지는 것이 어쩜 당연한 곳에서도 우아하게 착지,라는 단어까지 주우며 넘어질 수 있는지...
순간적으로 나의 넘어짐과 비교해 보며 웃었다.
내 옆에서 조잘거리기 잘할 것 같은 조진희 회원은 사랑받고 있는 걸 아는지,
사진 찍는 포즈도 이젠 누구 못지 않다.
까불기도 참새나 다람쥐 같아 산속에 가면 제 집에 온 듯 째깍거리는데, 그 모습들이 자못 귀엽다.
내 눈에도 그런데 오라버니들 사랑이야 오죽할까.
그녀는 늘 지고 사는 걸 편하게 여기는데 거기에서 더 양보하고 더 지려 한다.
거의 숙명이라 여겨진다.
가끔씩 아이에게 헌신하는 모습이나 가족에게 희생하는 모습에서 손톱 끝 거스러미를 보듯 마음이 쓰일 때가 있다.
그런 말에도 힘들이지 않고 몸을 도르르 마는 것이 그녀 말마따나 글래머의 비결만은 아닐 것이지만, 나의 뻣뻣함이 마른장작 같아 궁금해서 물어본다.
설왕설래 방향을 어디로 꺾을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많을 때 신동환 회원은 모든 것에 시큰퉁해 있었다.
어떡하든 최단거리를 걸어가려 고군분투 하였다.
아침 비소식에 산행을 할 것인지를 물을 때부터 그의 산행이 우리의 외출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었지만
그는 나왔고, 힘든 싸움을 이어가듯 산에 올랐지만, 산이 높은 것만이 아니고 깊어서 빠져 든다는 것은 여전히 모르는 듯했다.
그가 힘이 빠져 지쳐 있다는 것이 누나 같은 마음으로 부축을 하고 싶어
내 도시락의 2/3를 그에게 선뜻 내밀었지만 그의 계속된 피로감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삶의 즐거움을 어딘가에 빼앗긴 것이 분명했지만, 인생이란 결국 홀로의 터득에 달린 것 아니던가.
스스로는 알지만 남들에겐 굳이 말하기 힘든 것이 우리 안엔 또 얼마나 많던가.
마지막 고갯길에서 산이 너무 가팔라, 나는 자꾸만 처지는 신동환 회원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리소리 지르며 뒤에 처진 사람들 대변하는 정의의 짓이었다.
약한 마음일 때 누군가 건네는 좋은 말보다 나의 상처를 닮은 사람을 만났을 때 진짜 위로가 되던 나의 경험에서 한 행위였다.
앞서 가는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은 미안했지만, 난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는 알기나 했을까.
누구나 그 시절 지나면 낫다던 인생의 선배들처럼 못난 그 말만은 하지 않으련다만,
그래도 취미생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착하고 깊다는 것, 겨우 그것 하나 내밀어본다.
산은 그럼에 교과서이다. 정답은 문제집에 있지만
궁리하다보면 교과서 속에 답이 숨겨져 있듯, 이렇게 오붓한 오솔길이 마지막에 짜잔, 나타나므로...
그야말로 아름다운 소나무 동네였다.
굽어진 큰키나무 아래를 지날 때, 거북이 등딱지 같은 나무를 멀찌감치서 지켜봐야 할 때,
높은 곳에다 초록의 우듬지를 안개 속에 피워 올릴 때,
소나무는 예리하고도 따스해 보였다.
계절마다 피고지는 활엽목들 속에서 시들지 않는 꼬장꼬장한 비늘 촉을 어떻게 유지하였을까.
죽어서도 황금으로 떨어지는 그 꼿꼿한 자존심이 이렇게도 아름다웠나.
나의 몹쓸 소심함이 소나무 올려다 보느라, 오솔길에서 제법 비척걸음 거닐었다.
사람의 장애는 아름다워 하지 않으면서 나무의 장애는 아름답게 본다고 누군가 말하였지만,
그건 장애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의 처사적 삶이라 부르고 싶었다.
옹이에서 꽃이 피었다.
부잣집 양반댁에 가난한 부엌데기가 훔쳐 감춘다는 것이 다급했던 듯 구겨진 서툰 몸짓들이 얽히고 설켰다.
박현철 부회장님은 저들도 생명이라 내장을 보이고 있다고 하셨다.
가끔은 처절함이 단순한 아름다움을 이기기도 하는 법.
소나무 오솔길에서 피로했던 오르막의 경험을 충분히 내려놓는다.
4시간 20여분의 산행을 마치고 드디어 옥천사에 다다랐다.
좌측의 천왕문을 지나노라니 아담한 돌계단길이 숲으로 났는데, 그 입구의 누각 앞에 '하마비(下馬碑)'라 쓰인 비석이 있었다.
하마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앞을 지날 때는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이란다.
무엇이 그토록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였을까.
작은 돌계단을 지나 절집에 이르니, 웅장하게 잘 늙은 누각이 마중나오는데, 큼직한 '자방루'였다.
표지석 또한 흑백처럼 낡았지만 찬찬히 읽어보니, 이 사찰은 종교적인 기능 뿐만이 아니라 호국의 역할로서 중요한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직후 조정에서는 전략 요충지에 비상시를 대비한 사찰 건물을 지었는데, 이 옥천사는 그 역할에 부합하는 절이었다.
당항포 해전을 겪었던 이 지역에 옥천사는 군사용 전략을 세우기 적당한 장소였던 것이다.
또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웅전을 가리게 하고 군사훈련을 위하여는 앞마당을 넓게 했던 것이다.
대웅전을 위시한 모든 건물이 오밀조밀한 데에는 이 자방루가 성채처럼 빙 둘러친 데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불교적 유래보다 우리 역사의 획을 그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는 또하나의 통제영이란 생각이 들어 자못 숙연해진다.
'하마비'란 그 호국선열에 대한 마음가짐이었을까.
마치 '자방루'의 뒷마당처럼 자그마한 마당을 차지한 대웅전이 나타난다.
절집의 주인이 대웅전임에도 이렇게 작은 대웅전을 본 적이 없을만큼 마당 또한 자그마했다.
대웅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후 여러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자방루에 가려져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그 또한 이 절이 종교적인 역할보다 호국의 역할을 더 크게 내세운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는데,
안내문구가 또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 절에 들어와 대웅전을 바라보는 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게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모든 이들이 충분히 들어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작지만 당당한 권위 아니겠는가.
옥천사는 소꼽집처럼 작은 전각들에 이르러 오히려 독특한 매력을 뽐내며 커다래졌다.
산영각, 독성각, 칠성각은 성냥갑처럼 생겼는데 모두가 우렁차게 높은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모두 뒷줄 나란히(조사전에 이르기까지) 아래의 전각들을 거느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작은 집에 어울리는 그들만의 마당에서 나는 한껏 조아려 그들을 담으려 해봤지만
그 좁은 마당은 작은 전각들 하나하나를 온전히 담을 수 없었다.
한발 더 뒤로 물러나 찍으려다 아래로 떨어진 사람은 없었을까, 라고 말하니 혼자만 그런 생각 한다고 대뜸 마무리한다.
쩝~.~
내가 조심조심 뒤로 물러나다 상사화 돋아나는 입매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 그들의 작은 마당은 손바닥만한 꽃밭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알고보니 하루종일 비가 따라 다녔고 산은 하얀 안개 그림자를 입고 있었다.
봄신령이 그렇게 샘물을 마신 것처럼 빗방울 산행은 촉촉하게 봄을 당기는 걸음이 되었다.
산행을 마친 8명은 남은 오후를 어떻게 달랠지 잠시 궁리하기도 하였으나,
무릇 거창한 계획일수록 평범하게 스르륵 주저앉기도 잘 하듯 조용히 우리 지역으로 돌아왔다.
그때서야 점심이 부실했다며, 격렬한 식욕이 하루를 격려해 주었다.
메뉴는 홍어 삼합이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복국 한 대접씩 먹어치웠다.
잘 먹고 나서 모두 아내가 기다린다며 미안한 몸가짐으로 총총히 떠나가는데,
그것으로 문학산행 하루도 촉촉히 저무는 것이라 여겼다.
빗방울 촉촉해 있긴, 이곳이나 그곳이나,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모두가 같았으리라.
하루를 산행하고 하룻동안 행장을 정리하니 비로소 빗방울도 소리를 닫는다.
촉촉한 봄이 이렇게 3월을 열었나니....
첫댓글 늙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 것!
나이 많은 사람보다 언제나 덜 늙었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언제나 더 늙은 나도 살아가고 있는데!
참 맑은 날 다시 찾으면 좋겠다는 생각.
안개에 가려 펼쳐지지 않았던 풍경들을 눈으로 가슴으로 온전하게 받아내고 싶은 생각???
내가 뭐 늙었남? 그냥 나이 들었다는 거지?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중얼중얼)
느낌이 수상한 봄날이 촉촉히 좋아 보이네. 우산 쓰고 비옷 입고 그렇게 3월을 열었으니
맨 처음과 맨 끝을 촉촉한 봄비가 이어주셨네?
다들 고생했어요 특히 동환 님, 향숙님 산행하느라...
언덕이 예사 언덕이 아니었지요...
봄비를 맞으며 떠난 산행이 보람이 있었기를...
즐감...
옛날에 참 좋은 계절(달)이 있었지요
그 계절이 이제는 없어졌습니다.
요새는 시월달이라고 하지요
옛날에는 시벌딸이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셨고셨고 싸안케 내가 노인네 같잖나, 오라비오라비 싸멘서..^^ 아무튼 낼로 조케 써줘 고맙소이다. 옥천사, 잃어버린 기억들을 줍던 무지개 다리밑 아~
아 이런, 다음부턴 였고였고 하겠습니다. 오라버니니니니~~
앞엣부분이 무슨 글자인가 한참을 봤다능....ㅋㅋ
좋았겠습니다. 진달래라도 피었으면 더 멋진 산행이 되었을 것 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