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인간 최규하와 홍기 여사
최대통령의 고향인 원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최대통령의 추모 글을 탈고하고 나니, 다시 뵙고 싶어진다. 그만큼 그는 인간으로서 향기를 지녔던 분이다. 여북하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이라던 박 대통령이 그를 끝까지 아꼈을까! 생각해보면 아무 말씀도 없이 가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는 커다란 바위와도 같았다. 아니 집채만한 파도였다. 시골뜨기 외교관 초년병이 만난 대한민국 외교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에게는 그분이 각인되었었다. 내가 처음 뵈운 외무부에서 외교관으로서는 “나라가 어려울 때 몸을 던져 헤쳐 나가라”는 헌신부난 (獻身赴難)을 部訓(부훈)으로 남겨놓고 훌쩍 외무부를 떠나시었다. 강인한 인내와 자존심을 길러 주었던 우리의 지도자는 2006년 아무 말씀도 없이 가신 것이다. 정말로 나라사랑이 무엇이며 국민을 애지중지하는 것이 무엇이란 것을 보여주고자 정열과 에너지가 넘쳤으나, 이를 자제하는 어려움이 또한 무엇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시고 아무 말씀도 없이 떠났다.
이것만이 우리나라가 살길이라고 그렇게 바라고 열망하였지만, “외교란 이런 것이다”라는 말씀도 없이 어느 새벽 훌쩍 영원히 떠나시었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각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지금도 이 나라는 어려운데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가란 말입니까?”
“증언거부”라는 부정적 인상 때문에 눈부신 그분의 업적과 청렴성이 매몰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신생 한국의 가난했던 외교관으로서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영원히 사표로 삼아야 할 인물이다. 청렴결백의 실천 모델로서 그 분은 공직자라면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실례였다.
당시 80년에는 그리고 지금, 세간의 평이야 어떻든 간에 내가 가까이서 보아온 최규하 대통령 내외분은 향기로운 분들이었다. 이분들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개인적으로 커다란 영광이요. 기쁨이었다. “날마다 같이 지내는 종자에게는 영웅이란 없다” (No man is a hero to his valet) 던 나폴레옹의 격언을 깬 분이 나에겐 바로 최규하 전대통령이었다. 그만큼 그를 따랐다.
나는 69년8월부터 외무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고 의전실에 근무한 인연으로 인하여 70년 12월부터 최규하 외무부장관과 홍기 여사의 일을 직접 돕기 시작하였다. 선임장관으로서 박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양지 회 일을 간사로 도우실 때였다. 이것이 운명이 되었던지 79년 12월 국무총리에 이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Bonn 에서 영사로 근무하던 나를 부르시어 부속실에 배치 함으로서 청와대에 있는 동안, 최대통령의 선행을 조용히 수행하게 되었다.
본인은 그렇게도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철저히 몸을 낮추어, 자기의 선행이 외부에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하였다. 그것은 부끄러움보다는 천성이었다. 이렇듯 고매한 인품을 갖추신 대통령인데 끝내 국민들에겐 그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부정적인 인식만 남긴 채, 아무 말씀도 없이 가셨다. 그런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동안 최대통령의 가르침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외교관직을 수행, 주 독일 대사를 끝으로 07년 2월말 외교부에서 은퇴하였다. 만38년만이었다. 그 사이 외교란 어떤 것이란 것도 어렴풋이 나마 최대통령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것 같다.
지금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다 보고 계실 최규하 대통령 내외분께서 그 큰 그릇에 비해 얼마 되지도 않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저 녀석이 “괜한 짓을 한다”고 꾸지람을 하실 것만 같다. 아무 말씀도 없이 가신 분인데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변명을 직접 대통령께 드릴만큼 높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하여 다시 한번 용서를 빌고 있다, 끝.
2011년 3월
권 영 민 재 배
첫댓글 감명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한번도 최규하 대통령한테 꾸지람을 받지 않아습니다. 거들짝 님, 꾸지람하고 향기 있는 분들과는 다르니까요.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됐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