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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Víctor Jara 1932-1973)】 "민중이 일으키는 바람>(Vientos del pueblo)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불멸케 하는 모범을 보여준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우리는 죽음에 맞서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파시즘의 비극을 이겨내리라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학생, 노동자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이룩할 것이다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 노래는 세르히오 오르테가(Sergio Ortega)가 작곡하고 클라우디우스 이투라(Claudius Iturra)가 가사를 붙인 <벤세레모스>(Venceremos, 우리 승리하리라)다. 1970년 칠레는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Guillermo Allende Gossens, 1908-1973)를 대통령으로 내세운 인민연합(Unidad Popular)이 승리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이때 불린 노래가 인민연합 찬가인 <벤세레모스>이다. 인민연합은 칠레의 모든 진보세력이 집결해 선거를 치렀으며, 자원민족주의에 기초해 칠레의 모든 천연자원과 은행을 국유화 했고, 무상의료, 무상교육, 자주외교를 펼쳤다. 인민연합의 지지세력은 농민과 노동자, 지식인과 청년 등 말 그대로 ‘민중’이었다.
그러나 1973년 9월 11일, 우익 기득권 세력과 미국이 사주한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로 ‘천일 만에’ 무너졌다. 이 쿠데타의 작전명이 영화처럼 슬픈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Il Pleut Sur Santiago)였다. 쿠데타 군에게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번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큰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산티아고 국립공과대학에서 체포되어 학살당한 ‘혁명가수’ 빅토르 하라가 마지막 순간에 처절하게 부른 노래 역시 <벤세레모스>였다. 아내 조안(Joan Jara)이 시체공시소에 갔을 때 그는 얼굴에 피멍이 가득했고, 가슴은 총탄 자국으로 난도질당한 것 같았고, 손목은 부러져 있었다. 그가 칠레 스타디움에 끌려가 죽기 직전에 남긴 메모에는 “신이시여! 이곳이 당신이 만든 세상이란 말입니까?”라는 질문이 던져 있었다.
인디오 어머니에게 물려받음 음악성, 그리고 종교
빅토르 하라(Víctor Lidio Jara Martínez, 1932/35-1973)는 칠레 산티아고의 변두리 롱켄의 빈민지역 포블라시온 노갈레스에서 태어났다. 롱켄은 반동적 지주인 타글레 일가의 소유지였다. 그들은 중세 영주처럼 토지뿐 아니라 농민도 지배했다. 소작인들은 장시간 노동에 연명만 하며 살았다. 하라는 4형제 중 막내였고, 아버지 마누엘(Manual Jara)은 소작농이었고, 어머니 아만다(Amanda)는 칠레 남부 마푸체족 혈통을 이어 받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민요를 배운 탓에 마을의 제사의식 등에 불려가 노래를 하곤 했다. 하라는 어머니에게 기타와 칠레 민요를 배웠다.
빅토르 하라
하라의 가족들은 꼬박꼬박 미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종교 의식은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라 할 수 없으나, 불운을 쫒기 위해 성모 마리아에게 치성을 드렸다. 삶이 정말 고단할 때는 음식과 옷을 사는 것보다 이런 믿음이 더 절실해진다. <달은 너무 밝기만 합니다>라는 노래에선 이렇게 표현했다.
“촛불은 언제나 타고 있다.
사람은 무엇이든 피난처가 있어야 하는 법
신앙을 위해 바칠 돈은 어디서 생길까?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해서
모든 고통을 홀로 삼키게 하네
성자들의 초상을 가지고
비참함을 덮어 버리게 만드네.”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생활이 더 곤궁해진 가족들은 산티아고 중앙역 부근의 빈민굴로 이사했고, 어머니 아만다는 허름한 식당을 차려 홀로 자식들을 키웠다. 하라는 어머니를 도와 가계를 꾸려나갈 요량으로 경리 사무원을 양성하는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1950년 어머니마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하라는 상업학교를 그만두고 ‘혼자만의 꿈’이었던 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블랑코 엔칼라다 교회의 로드리게스 신부의 추천으로 1950년 겨울 하라는 산티아고 남쪽의 작은 도시 산베르나르도에 있는 속신수도회 소속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빅토르 하라는 1973년에 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아주 심각하게 내린 결단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확고하다 믿었던 가정과 어머니의 사랑이 사라졌다는 점과 그런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내 고독감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전에 이미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었고, 그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피난처가 나로 하여금 다른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인간적인 사랑의 결핍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다른 더 심오한 사랑을 발견하게 해 주리라 기대했다. 나는 그런 사랑을, 몸소 성직자로 헌신하면서 종교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상주의와 신비주의에 젖어서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은 경직된 위계질서의 틀 속에서 엄격한 규칙생활을 강요하는 폐쇄된 종교기관이었다. 다만 여기서 가장 긍정적으로 체험한 것은 종교음악이었다. 특히 그레고리안 성가와 미사 자체가 지닌 연극적 요소이다. 그러나 하라는 자신의 육체를 부정하는 금욕적 의무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육체적 사랑을 느낄 때마다 하라는 샤워기 아래서 발가벗은 몸을 때리며 형벌을 주어야 했다. 결국 2년 만에 자퇴를 하고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 산 베르나르도 보병학교 일등 상사로 제대했다. 영적 압박보다 육체적 고통이 더 견딜만 했고,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다.
비올레타 파라를 만나다
제대후 실업자였던 하라에게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rana) 공연을 위한 합창단원 모집광고가 눈에 띄었다. 여기에 테너 가수로 합격했는데, 이게 장차 음악과 연극 활동의 발판이 된다. 1954년 롱켄의 민속음악(포클라레, forklore)에 관심을 갖고, 민요를 채보하기 위해 친구들과 칠레 북부 여행을 다니면서 인디오 문화와 접한다. 1956년 판토마임극단에 입단했고, 그해 칠레대학 부설 연극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연극을 전공하면서 연출과 제작에도 참여했다. 나중에 그의 부인이자 동료가 된 영국인 조안 터너(Joan Tumer)가 이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던 때였다. 다음해 산티아고 중심지에 있는 카페 상파울루에서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 1917–1967)를 운명적으로 만나 그녀에게 영향을 받았다.
비올레타는 외모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완전히 파격적인 여성이었다. 농부처럼 소탈한 차림새로 빗질조차 않은 채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녔다. 그녀는 전통적인 창법으로 전혀 꾸미지 않고 단선율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라에게 그녀의 기타와 목소리는 땅 속에서 움터 나오는 것만 같았다. 10년 뒤에 비올레타는 누에바 칸시온의 명곡 <삶에 감사드리며>(Gracias a la vida)를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민중저항가요의 원형이 된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 새로운 노래)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비올레타 파라는 쉬고 메마른 목소리로 민요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노래를 불렀다. 농민의 삶과 애환, 그리고 칠레의 자연을 노래했으며, 점차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는 노래로 발전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하라는 이렇게 말했다.
“비올레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녀가 민중을 위한 예술가라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오히려 그녀를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시대와 민중들 스스로 그녀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한창 좋은 시기를 그들 가운데서 지냈다. 농부, 광부, 어부, 공예가, 북부 안데스의 토착민들, 남부 칠로에 섬의 주민들과 더불어 살았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피부와 근육, 피를 함께 나누었다. 그녀의 노래는 칠레 역사에 새로운 형식의 노래를 탄생시킨 증거물로 남게 될 것이다.”
같은 해에 하라는 칠레 남부 인디오인 마푸체족 말로 ‘속삭이는 물’이라는 뜻의 ‘쿤쿠맨(Cuncumen)에 들어가 민요를 채록하고 민중과 지식인을 향해 노래를 불렀고, 민속춤도 배웠다. 한편 아옌데가 처음 좌파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1958년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네루다의 서사시 <모든 이를 위한 노래>(Canto GGeneral)가 널리 알려지면서 민중의식을 고양하던 누에바 칸시온 등 민중문화운동이 활발해졌다.
<인디오의 길>(Camino del Indio)을 부른 아르헨티나 민중가수 아타우알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 1908-1992)의 곡을 접한 것도 이때였다. 1959년 첫번째 연극 <행복과 닮은 그 무엇>(Parecido ala Felicidad)을 연출하여 콜롬비아, 쿠바 등지를 순회공연하면서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도 만났다. 게바라는 10년 후 콜롬비아 산중에서 게릴라 활동 중에 죽었는데, 하라는 그를 위해 노래를 두 곡이나 만들었다.
<‘체’를 위한 삼바>(Zamba del 'Che')의 마지막 소절에는 “쿠바에게 해방된 나라의/영광을 주었고/볼리비아 역시 그의 희생적인/삶을 울어주네 농부들은/‘무화과나무의 성 네르네스토’/라고 그를 부르네/셀바, 팜파, 산맥 속에서 조국이 아니면/죽음을! 이것이 그의 운명이었네”라고 적었다.
빅토르 하라, 사회주의를 선택하다
1961년에 동유럽 순회공연을 다녀오면서 민중현실을 바꾸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확신을 굳히게 된 빅토르 하라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를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내 주변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점점 마음이 이끌렸다. 내 조국의 빈곤, 라틴아메리카와 세계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빈곤 ... 나는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추모비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핵폭탄이 가져다 준 공포와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인류에게 어떤 후유증과 고통을 남겼는지 보았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행복한 인간의 힘이 어떤 것을 이룩할 수 있는지도 보았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평화를 바라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나 행복의 감정에 돌파구를 만들어 줄 내 기타의 나무통과 줄이 필요했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열어 줄 노래들이 필요했으며, 우리들 모두를 자신의 내부로부터 끌어내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줄 시들이 필요했다.”
1964년부터 빅토르 하라는 유럽에서 귀국한 앙헬 파라와 더불어 아옌데를 지지하는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 참가한다. 선거 결과 기독교민주당의 프레리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이어서 얼마간 기대가 있었지만 극우 보수세력과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개혁정책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하라는 개인적인 서정을 노래하는 데에서 자유와 평화, 정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보편적이고 형제애가 담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급기야 하라가 첫 솔로앨범 <빅토르 하라>(Víctor Jara)를 제작했다. 그리고 빅토르 하라가 연극연출가뿐 아니라 가수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69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1회 칠레 누에바 칸시온 페스티벌’에서였다.
이 축제는 산티아고 가톨릭대학의 섭외담당 부총장의 재정지원으로 열렸는데, 하라의 자작곡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Plegaria a un laborador)>가 대상을 받았다. ‘주님의 기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노래는 자기 손으로 땅을 갈아 곡식을 생산하는 농민들에게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자고 선동한다.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어 두는 주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의와 평등의 왕궁이 임하옵시며
높은 산길에서 들꽃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 우리에게 불어오시며
불처럼 내 총의 총구를 깨끗이 해 주시며
당신이 이 땅에서 마침내 뜻을 이루시듯
우리에게 힘과 투쟁할 용기를 주소서
일어서라
너의 두 손을 보아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라
지금도, 우리가 죽는 그 시간에도
아멘”
https://youtu.be/U5PFx6DgwWs
당시는 칠레의 진보적 가톨릭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칠레의 ‘젊은 교회’운동이 일어난 것이 메데인주교회의에서 해방신학을 승인한 1968년이었다. 7명의 사제와 함께 하는 가톨릭평신도 그룹은 “성직자는 정의에 대한 관심을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하며, 가난한 이들을 굶주림으로 내모는 제도화된 폭력을 해결하는데 사회주의가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1971년 산티아고의 실바 추기경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에 보다 복음적인 가치들이 있다”고 선언하였고, 이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80인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빅토르 하라 역시 신학교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이 그룹에 속해 있었을지 모른다.
빅토르 하라는 우루과이 작곡가 다니엘 비글리에티(Daniel Viglietti)가 지은 <카밀로 토레스>(Camilo Torres)도 즐겨 불렀다. 게릴라 전투에 참가했다 1966년에 죽은 콜롬비아 혁명가 카밀로 토레스 신부를 추모하는 노래였다.
“카밀로가 쓰러진 곳에 나무가 아닌 빛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하나가 태어났네
그가 총을 들고 나아갔을 때 그들은 그를 죽였어
카밀로 토레스는 살기 위해 죽네
총성 뒤로 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혁명’이라고 외치던
하느님의 목소리였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내 장군은 전투 중에 한 사제를 숨겨주었던 지하실 뒤졌네
그들은 총알로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도적이라고 불렀지
그들이 그를 쏘기 위해 내려갔을 때 그들은 깨달았네
민중은 수천의, 수천 명의 싸우는 카밀로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카밀로 토레스는 살기 위해 죽네”
카밀로 토레스 신부는 자신이 총을 들게 된 이유를 이렇게 전했다.
“혁명은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헐벗은 사람들에게는 입을 옷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교육을 제공하며 자비를 실천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형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형태로 이웃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므로 그리스도인은 혁명에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혁명가요의 승리, 그리고 혁명가수의 죽음
빅토르 하라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노조축제, 파업현장, 순수 음악모임 등 그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노래를 불렀다. 한편 하라는 <베트록>(Viet-rock)을 연출했는데, 전쟁과 무관한 이들의 희생과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이 때 작곡한 노래들이 1970년에 발표된 앨범 <평화 속에 살 권리>(El derecho de vivir en paz)에 담겼다. 당시 하라는 미국에서 밥 딜런(Bob Dylan) 등이 부른 저항가요조차 상업화 되는 걸 보면서, “저항가요란 말은 더 이상 믿을만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모호할 뿐 아니라, 그동안 오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혁명가요’라 부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혁명을 위한 투쟁의 무기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그 본질 자체로부터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 위대한 소통능력 때문에 게릴라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존재가 바로 예술가이다.”
하라는 앙헬 파라와 이사벨 파라, 인티 이이마니, 킬라파윤 등 진보적인 가수들과 더불어 사회주의를 지지하기로 하고, 인민연합의 문화사절로 공식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1970년 9월 4일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옌데 정부아래서 하라는 1973년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텔레비전 방송의 음악작업을 맡았다. 1971년에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공연을 하였는데, 여기서 칠레의 현실을 알리고, 민중연합의 정책과 누에바 칸시온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73년 3월 총선거 이후로 쿠데타와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우익테러가 난무하면서 하라는 늘 위협에 시달렸다. 하라는 이런 파시즘의 난동에 맞서서 노래 하나를 지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프랑코 장군의 감옥에서 죽은 농민시인 미겔 에르난데스(Miguel Hernández, 1910-1942)가 지은 <민중이 일으키는 바람>(Vientos del pueblo)에 곡을 붙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들은 내 조국을
노동자 민중의 피로 얼룩지게 하려 하네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나
두 손은 죄의 흔적이 새겨진 자들
우리들의 자녀와 그 어머니들을
갈라놓으려 하네
예수가 졌던 십자가를
다시 지우려 하네 ...
민중의 바람이 나를 부르고 있다
민중의 바람이 나를 실어 간다
그 바람은 내 가슴을 열어 젖히고
내 목을 통과해서 불어 간다
그래서 시인의 음성은 들리게 되리라
죽음이 나를 앗아갈 때까지
민중이 가는 길을 따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결국 9월 11일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대통령이 사망하고, 9월 15일 빅토르 하라 역시 칠레 스타디움에서 강제구금과 혹독한 고문 끝에 기관총에 난사된 채 살해되었다. 영국인 아내였던 조안 하라는 하라의 비극적 죽음 이후에 비밀리에 하라의 노래가 담긴 마스터 테이프를 가지고 출국했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하라의 <병사의 노래>(Cancion del soldado)가 예언처럼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병사여, 날 쏘지 마라/날 쏘지 마라, 병사여!/너희 가슴에 훈장을 달아 준 자가 누구인가?/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됐는가?/너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나는 알고 있다/나를 죽이지 마라/나는 너의 형제가 아닌가”
이 쿠데타를 “또 다른 9.11사태”라고 부른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항공기 자살테러 공격으로 무너져 약 2,996명이 사망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로 국립경기장에서 5천여 명이 모진 고문과 기관총 난사로 사망했다.
빅토르 하라의 평전을 기록한 그의 아내 조안 하라는 “칠레 민중은 이때 다시 한 번 증오를 배웠다”고 썼다.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이미 민주주의가 상당히 발전했던 칠레를 죽음의 늪으로 다시 끌고 들어갔다. 당연히 빅토르 하라의 곡은 금지곡이 되었으며, 민요에 기반한 새 노래, 누에바 칸시온 운동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하라가 죽기 직전에 서둘러 작곡한 <선언>(Manifesto)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불려졌다. 헌사처럼 그 노래를 덧붙인다.
“내가 노래하는 건 노래를 좋아하거나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지
기타도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기에
난 노래 부르네
내 기타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갖고 있지
마치 성수(聖水)와 같아
기쁨과 슬픔을 축복하지
여기서 내 노래는 고귀해지네
비올레타가 말한 것처럼
봄의 향기를 품고
열심히 노동하는 기타
내 기타는 부자들을 위한 게 아니지
그것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어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어
의미를 지닌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
노래 부르며 죽기로 한 사람의
참된 진실들
내 노래에는 덧없는 칭찬이나
세계적인 명성은 필요 없어
내 노래는 한 마리 종달새의 노래
이 땅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지
여기 모든 것이 스러지고
모든 것들이 시작되네
용감했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노래일 것이네”
첫댓글 그가 살해당하기 직전에 지은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파시즘의 얼굴들이 자아내는 공포를 보라!/저들은 계획을 칼날같이 수행해 나간다/저들에게는 피가 훈장이다/도살이 영웅적인 행동이다/오, 신이여, 이것이 당신이 만든 세상입니까?/7일 동안 기적과 권능으로 일하신 결과입니까?/ (중략) /노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공포를 노래해야 할 때에는/내가 살아 있다는 공포/내가 죽어간다는 공포/내가 이 많은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그처럼 무한대의 순간 속에/침묵과 비명만이 담겨 있는 것이/내 노래의 끝이다/내가 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내가 느꼈고, 지금 느끼고 있는 것들이/그 순간의 탄생이리라..." 이 시는 그가 군인들에게 끌려가기 직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옆 사람에게 종이를 맡기면서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고 한다.